남성의 시각으로 페미니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거라서 본의 아니게 내용의 의미가 잘못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제 글에서 ‘맨스플레인’ 느낌이 조금이라도 느끼셨다면 양해 바랍니다. 여성 멤버가 쓴 ‘공식 후기’가 조만간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공식 후기’를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에 공개된 강연 관련 사진들은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페미니스트 최고의 원투 펀치를 꼽으라면 저는 권김현영 님과 정희진 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제 원투 펀치 중 한 분인 권김현영 님의 ‘강력한 한 방’을 맞을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제 권김현영 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습니다. 아니, ‘한 방’이 아니라 연속으로 펀치 두세 방 맞았을 것입니다. 어제는 페미니즘 공부가 부족했다는 점을 여실히 깨닫는 하루였습니다. 몇 주 전에 이미 언급했듯이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강연을 주최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강연 준비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에 신청한 레드스타킹 멤버들도 수강료를 냈습니다.

 

멤버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꽤 많은 분이 강연에 오셨어요.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을 통해 강연 신청한 분 56명 중 53명이 참석했습니다(레드스타킹 멤버 포함). 현장 접수한 분 3명, 그리고 소우주성문화인권센터(대구 달서구에 있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관계자 4명, 고등학생 1명을 포함하면 어제 강연에 총 61명이 참석했습니다.

 

 

 

 

 

 

 

강연 제목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오래된 미래.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표현 속에 급진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의 긴 역사를 보여주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흔히 ‘제2 물결 페미니즘’이라고 말합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 제1 물결 페미니즘)이 방치한 가부장제의 뿌리를 완전히 캐내어 버릴 기세로 등장했습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강경한 투쟁 노선을 지향하여 뼛속까지 침투한 가부장제의 의식을 바깥으로 들추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 및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 등에 투항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1968년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신좌파 학생운동, 즉 ‘68혁명’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운동의 촉매제가 됐습니다. 그래서 급진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신좌파에 속합니다. 하지만 급진 페미니스트는 여성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신좌파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걷습니다.

 

 

 

 

 

 

 

 

 

 

 

 

 

 

 

 

 

 

*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

 

 

 

 

권김현영 님의 강연 참고도서인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입니다. ‘오래된 현재’라는 표현에 눈길이 갈 것입니다. 미국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만든 쳇바퀴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나쁜 여자’가 돼 목소리를 냈습니다. 《나쁜 여자 전성시대》는 미국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전성시대’부터 시작해서 분열, 쇠퇴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비록 그들의 행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현재’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로부터 무시당했지만, 오늘날 페미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급진 페미니즘은 과거, 즉 자유주의 페미니즘 이후부터 시작된 대중적이면서도 실천지향적인 사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시대적인 여성 문제를 즉발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이론입니다. 권김현영 님은 급진 페미니즘은 지금도 유효하며(‘오래된 현재’) 지금보다 더 나은 급진 페미니즘으로 발전하기 위해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오래된 미래’). 이 ‘고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되어 페미니즘 계보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이 급진 페미니스트가 된 이상, 이 ‘고민’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하면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여성’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여성의 위치’를 의심합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유리천장 허물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주장에 반문합니다. “만약 유리천장을 허무는 데 성공한다면 모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주류 기득권 여성들(백인 부르주아 여성)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런데 권김현영 님은 서로 다른 노선을 선택한 두 페미니즘은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도 간혹 자유주의 페미니즘 노선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합니다. 또,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였다가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급진 페미니즘 노선으로 변경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습니다.

 

 

 

 

 

 

 

 

 

 

 

 

 

 

 

 

 

 

* [절판]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이매진, 2005)

* [절판]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이후, 2009)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서 급진 페미니스트로 돌아선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케이트 밀렛입니다. 그녀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함께 급진 페미니즘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밀렛은 베티 프리단이 설립한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에 소속되어 여성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프리단은 여성 운동 역사의 흐름을 바꿀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프리단은 선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목적에 충실히 따랐으며 낙태와 피임 문제를 부각하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행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전미여성기구의 이름으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여성 운동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프리단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프리탄의 폭탄 발언 이후로 그동안 점점 축적되어온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 페미니즘의 갈등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밀렛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을 배제하는 프리단의 자유주의 여성 운동에 반발했고, 전미여성기구를 탈퇴했습니다. 전미여성기구를 탈퇴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연보라색 골칫거리’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프리단과 전미여성기구 소속 페미니스트들이 참석한 공식 행사에 불시에 등장하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이 가세한 급진 페미니스트의 첨예한 갈등은 ‘라벤더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라벤더 논쟁’이 촉발된 이후 급진 페미니즘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밀렛은 ‘라벤더 논쟁’에 휘말리면서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명성은 순식간에 떨어졌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인기도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주류가 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역공과 동성애자들의 냉담한 반응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압박하는 ‘샌드위치 공격’으로 작용했습니다.

 

 

 

 

 

 

 

 

 

 

 

 

 

 

 

 

 

 

* 수잔 팔루디 《백래시》(arte, 2017)

 

 

 

페미니스트들 간의 내부 분열로 인해 여성 운동은 이미 소강상태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을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백래시(backlash)’가 나타납니다. ‘백래시’의 의미를 쉽게 설명한다면 ‘반페미니즘’이라고 보면 됩니다. 백래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에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레이거노믹스’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대처리즘’을 내세워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조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회적 ·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백인 남성들, 친정부 우파 언론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들까지 나서서 페미니즘을 ‘해롭고 위험한 사상’으로 둔갑시켜 공격합니다. 백래시 세력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사용하는 레토릭(rhetoric)이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사랑받을 권리를 빼앗는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

 

 

 

 

뻔하고 뻔한 백래시 세력의 레토릭을 이미 간파한 급진 페미니스트가 있었습니다. 미국 급진 여성 운동단체 ‘레드스타킹’의 수장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입니다. 그녀는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에서 남성 중심으로 치우친 ‘이성애’를 거부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애는 여성이 남성에게 인정받는 형태의 불평등한 사랑입니다. 과거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버림 받거나(이혼) 혼자 살게 되면(독신, 과부)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되어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았었죠. 그리하여 파이어스톤은 이성애를 완강히 거부하는 도발적인 선언을 합니다. “남성들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 오랫동안 남성은 연애, 결혼, 가족 문제가 있을 때면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가부장적 주도권을 쥔 남성은 자신들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만약 남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는 처지가 되고, 사회는 그녀에게 ‘사랑에 실패한 여자’ 또는 ‘가족의 화목을 깨뜨리는 불량한 여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듣지 않고 싶은 과거 여성은 무조건 ‘사랑’을 해야 했고, ‘결혼’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 중심 사회에 익숙한 남자들은 연애와 결혼이 ‘남성이 사랑받아야 하는 일방적인 권리’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비혼주의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연애를 못 해본 못생긴 페미니스트들의 선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백래시’가 형성되면서 페미니스트는 ‘못 생기고 연애 한 번 안 해본 성격이 드센 여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 앤디 자이슬러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 2018)

*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

* 수잔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

 

 

 

 

백래시를 부담스러워 하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선배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한 투쟁 노선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봤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일단 외모가 예뻐야 남성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외친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잊히고, 오늘날의 페미니즘, 즉 (앤디 자이슬러가 말한) 시장 페미니즘은 ‘탈정치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성폭력, 즉 ‘강간 문화’를 조장하는 대중문화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강간 피해자를 비난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도 등장했습니다. 시장 페미니즘(저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권리만 챙기는 데 급급한 여성 운동을 ‘급진적’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합니다.

 

권김현영 님은 급진 페미니즘의 계보를 쭉 훑어보면서 과거 선배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구호의 의미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여성 개인이 겪고 있는 문제는 집단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면 ‘여성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여성의 힘은 사라집니다. 그 힘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되찾으려면 선배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흔적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뿌리’ 없는 페미니즘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저는 급진 페미니즘이 발전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여성 운동 집회에 동참할 생각입니다. 물론, 이게 ‘남성 페미니스트’인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은 권김현영님의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칭찬(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열심히 말합니다. 스트레이트 펀치와 같은 권김현영 님의 말씀을 듣고 녹다운(knock down)이 됐습니다. 너무 세게 맞은 나머지 강연이 끝나고 집에 와도 마음이 얼얼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한계’에 직면하지 않으려면 여전히 머리와 마음속에 남아있는 ‘남성적 특권’의 흔적을 끊임없이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서 신중하게 말할 땐 “I know”가 아니라 “I don’t know”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게 맞는지 검토해야 하고, 모르면 먼저 답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정 안 되면 여성 페미니스트에게 질문합니다. 다만 질문도 잘 해야 합니다. 결론 내리기 힘든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무턱대고 질문하는 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는 페미니즘 공부에도 ‘왕도가 없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학문입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우리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 남성 중심 문화 등에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하며 여기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단, 여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남성 연대를 고발하는 행위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부단히 자기 검열과 고민을 하고, ‘책 밖의 세상’에 뛰어들어 남성 중심 사회를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움직여야겠습니다.

 

아직은 서툴지만 저를 ‘책 밖의 세상’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 레드스타킹 멤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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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8-04-17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무엇이 쉬운 공부가 있을까 싶지만 페미니즘 만큼 어려운 공부가 있을까요..
제대로 해 본적도 없지만 얼핏 보기만 해도 갈 길이 참 멀구나 생각이 들어요~ 잘 따라가보겠습니다

cyrus 2018-04-18 11: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해요. ‘책에서 본 페미니즘’과 ‘책 밖의 페미니즘’은 확실히 다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 간에 첨예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을 독서모임 멤버들로부터 듣게 되는데, 듣는 것만으로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져요. 책만 봐서는 페미니즘의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psyche 2018-04-1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에 쏙 들어오게 정리를 너무 잘해주셨네요!

cyrus 2018-04-18 11:51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쓴 글의 내용이 긴데, 이것도 나름대로 강연 내용을 줄인 것입니다. 책과 관련 없는 내용도 쓰고 싶었지만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

AgalmA 2018-04-18 0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칭찬(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열심히 말합니다.˝

현장에 있지 않아서 이 말을 정확히 해석하기 어렵네요. cyrus님이 이 말에 스스로 찔려 하신 건 본인의 알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면서 이런 운동에서 남성으로서 선구적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말씀이시죠? 그런데요. 여성이라고 다를까요? 페미니즘 운동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 남성, 여성 다 마찬가지의 교집합인 점입니다. ˝진보˝도 비슷한 양상이죠.
‘문제 많은 남성‘이란 카테고리로 묶을 게 아닙니다. 그렇게 지정하고픈 권김현영님의 의향이 깊이 담겨 있죠. 이런 식의 배제, 규정의 틀을 만드는 페미니즘의 단어 선택이 저는 정말 못마땅합니다.
지금 저는 남성 입장도 이해하자거나 연대를 위해 넓은 포용이 필요하다 뭐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네, 남성의 뿌리깊은 차별의식, 이런 위계와 질서를 만든 폭력성과 착복 당연히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에 저런 말의 칼날을 ‘할(喝)‘로 쓰고자 하는 건 잘 알겠습니다.

이번엔 허를 찔러서 상대를 제압하고 이겼지요. 그러나 다음에 허점이 잡히면 소용없어요. 말을 무기로만 쓰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죠.

페미니즘이 쓰는 언어들이 제게는 금방 매력을 잃어요. 선도부장 같은 내지름 말고 스미게 만드는 그런 사유와 언어와 행동력을 만나길 바랍니다. 현실이 이러니까 이렇다? 글쎄요.
암튼 저도 참 고민이 많고 그렇습니다.


cyrus 2018-04-18 15:07   좋아요 1 | URL
AgalmA님이 인용한 제 문장을 이해한 것은 맞습니다. 저는 그동안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글을 쓰면서 표현한 생각들을 ‘독자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성 문제를 바라보면서 느낀 것들은 과거 페미니스트들이 먼저 생각했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알고 있어!”라는 식으로 글을 써왔던 거죠. 이게 권김현영 님이 지적한 남성 페미니스트의 한계입니다.

‘문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권김현영 님이 직접적으로 말한 표현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표현한 ‘문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권김현영 님은 그 날 강연에서 ‘문제 많은 남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또 남성을 배제하는 듯한 발언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해의 여지를 주는 ‘문제 많은’이라는 표현을 지워야겠습니다. 제가 강연을 정리하면서 단어를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선택하여 표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말을 ‘무기’로 삼아 행동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내지르는 듯한 발언을 하게 된 심정을 이해합니다. 과거 페미니스트들은 온건한 방식으로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했어요. 19세기~20세기 초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의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운동 효과는 미미했고, 여기에 반대한 진영이 급진 페미니스트입니다.

만약 미러링을 시도하는 메갈리아가 나오지 않았고,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 운동이 진행되었다면 페미니즘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요? 페미니즘 책을 쓰면 남자들이 읽어줄까요?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교육 기관을 통해 전국 순회 강연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찾으러 올까요? 지금과 마찬가지로 백래시가 있었을 것이고, 여성 운동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문제에 계속 외면하니까 결국 페미니스트들은 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말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가 주목받게 되자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했어요. 물론, 이 언어가 여성 문제와 무관한 사람 또는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위험한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제가 페미니스트들을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선도부장처럼 행동하면서 남자들에게 심하게 내지르는 건 아닙니다. 워마드를 반대하는 여성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그리고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는 여성 페미니스트들도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말만 내지를 줄 아는 감정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雨香 2018-04-1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운동을 보며 다시 한번 페미니즘 읽기를 생각하며 책들을 좀 고르고 있습니다.
오늘 Cyrus님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갑니다.(꾸벅)

두 해전인가 페미니즘 관련 몇 권의 책을 읽게 된 것이 말씀하신 바로 “I don’t know” 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I don’t know”하고 있어 독서목록을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SNS 등에서 몇몇 남성혐오분들과의 괴리, 그리고 사회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괴리
속에서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현 시점에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cyrus 2018-04-18 15:13   좋아요 1 | URL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라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제가 책에서 본 페미니즘과 현실에서 말하는 페미니즘과 거의 달라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몰랐던 페미니즘도 많고요.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고, 새로운 문제에 접근할 때가 좋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레삭매냐 2018-04-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공식 후기라니~ 열정들이 대단하십니다.

저희도 모임하고 나서 열심히 후기를 써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구요.

책 읽기와 책 밖으로 세상과의 조화 정말
멋집니다. 뜬금 없이 빠이팅 !!!

cyrus 2018-04-18 15:19   좋아요 0 | URL
먼 곳에서 저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과 말들이 서로 주고받고 부딪히는 순간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히 상대방의 의견을 내 언어로 다시 표현할 때가 어려워요. 상대방의 말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의 주관적 감정이 개입될 수 있고, 말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독서모임, 특히 페미니즘 독서모임 공식 후기를 다 쓰면 먼저 멤버들에게 보여줍니다. 글에 문제되는 표현이 있는지, 아니면 제가 누락한 내용이 있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리직톤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욕보인 죄로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시달리는 저주를 받았다. 그가 워낙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다 보니 나중엔 음식 구할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자 자신의 딸을 팔아 식탐을 채웠다. 그러고서도 배고픔을 억제하지 못해 자신의 몸을 뜯어먹었다.

 

에리직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 고민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들은 땀이 비 오듯 내릴 정도로 뛰기도 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굶기도 한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나 자신과의 전쟁. 아마도 여성들이 다이어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보통사람들이 동시대가 규정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특히 TV 브라운관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영상에 나만의 빛깔로 대항하기란 역부족이다. 개성에 주목하는 사회가 돼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외모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것이 변함없는 사실이다.

 

음식과 여성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여성들은 먹는 것 앞에서 환호하고 먹는 것 앞에서 절망한다. 음식과 여성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 허기진 듯이 먹었고, 그다음에는 많이 먹고 기운을 차려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먹었으나 이제는 먹고 싶어서 먹는다. 먹고 또 먹다가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만이 되었고, 비만이 되다가 보니까 끝없이 음식이 당겨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됐다. 한때 끊임없는 자기혐오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낸 록산 게이가 그러했다. 그녀는 과거 몸무게가 261kg까지 나간 적이 있다. 《헝거》(사이행성, 2018)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몸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저주받은 몸뚱이로 훑지 않는다. 그녀는 몸과 허기진 욕망을 덤덤하면서도 진지하게 고백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자신을 ‘당당한 여성’으로 보듬는다.

 

 

이 책을 쓰는 건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추하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헐벗은 부분을 드러내겠다는 말이다. 나에겐 이런 진실이 있다고 털어놓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 몸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내 몸과 같은 몸의 이야기들은 무시되거나 묵살되거나 조롱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몸과 같은 몸을 보고 쉽게 단정해버린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몸이 되었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들은 모른다. 나의 이야기는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말해야만 하고 더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다. [1]

 

 

그녀는 왜 뚱뚱해졌는가? 따지고 보면, 비만은 그녀의 잘못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두 살에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그 끔찍한 기억이 할퀴고 간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인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별로 깔끔하지 않지만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포’가 있고 ‘애프터’가 있다. 몸무게가 늘기 전. 몸무게가 늘어난 후. 강간을 당하기 이전. 강간을 당한 이후. [2]

 

 

‘애프터(after)’가 된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어린 게이는 홀로 상처를 감당해야 했다. 학교에서 거의 매일 놀림을 당했다. 결국, 친구보다 ‘적’이 더 많아졌고, 늘 혼자였다. 그녀는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른이 돼서도 치유의 시작도 못 한 영혼은 여전히 열두 살에 머물렀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절망과 공허감에 외로웠다. 그 허기를 자연스레 먹는 것으로 채웠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식탐과 폭식으로 메웠다.

 

식탐은 마음의 허기가 원인이다. 일부에선 살찐 사람을 단순히 절제력이 없다며 힐난한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억울함, 분노를 외부로 발산하지 못한 채 먹는 것으로 푸는 경우도 많다. 게이는 자신의 몸을 ‘감옥’ 또는 ‘성벽’으로 비유한다. 몸이 비대해지면 다른 사람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을 찌우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으며 인정받을 수 있는 진심 어린 애정을 포기한 적도 있다.

 

《헝거》는 비만을 혐오하거나 동정하는 시선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저자가 고통을 무릅쓰고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되는 경위를 독자에게 털어놓는다. 뚱뚱한 사람은 게으르며 덜 지적으로 여겨지는 반면 몸매 좋은 사람을 그 반대로 본다는 건 타인의 몸을 바라볼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고정관념이다. 그러고 보면 뚱뚱한 사람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무거운 체중만이 아니다. 사회적 편견과 냉대는 더 무서운 칼이 된다. 여성은 무수히 쏟아지는 음식 광고, ‘먹방’ 등 식탐을 조장하는 환경 속에 살면서 미디어로부터 날씬하기를 요구받는다. 끊임없이 자기 몸을 검열하며 다이어트에 몰두하고, 호시탐탐 몸을 찢고 보형물을 삽입할 궁리를 해야 하는 여성은 괴롭다. 록산 게이는 이런 모순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삶의 무게를 가중하는 우울증에 짓눌리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록산 게이의 꿈은 소박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대로 먹고, 옷을 입고, 글을 쓰면서 활동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그녀에게는 꼭 하고 싶은 꿈이다. 그러려면 자신의 몸을 자기만의 감옥이나 성벽에 가둘 필요가 없다. 나만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선 그것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남의 눈에 평생이 좌우되는 삶보다는 내 몸과 내 운명에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움으로써 열두 살 이후로 잊어버린 ‘목소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인간의 실체를 외모지상주의와 성적 대상으로서의 가치만 바라보는 세상 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너지지 않는 나’를 찾는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몸에 눈뜨는 일, 그리고 더 나아가선 나의 세계를 건강하게 짓는 일이다. 그 세계를 보게 만드는 거울이 바로 이 책, 《헝거》이다.

 

 

 

 

 

[1] 23쪽

[2]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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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7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7 18:49   좋아요 0 | URL
허기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지 고민해야겠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허기를 잊으려고 하는데요, 이 방법만으로는 안 되겠어요.. ㅎㅎㅎ
 

 

 

 

 

 

오늘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지 4년째 되는 날입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저녁 7시‘꽃보다 페미니즘’ 첫 번째 강연(권김현영)이 진행됩니다. 장소는 대구시민공익활동 지원센터 2층 상상홀입니다.

 

 

 

 

 

 

 

현장 접수도 가능합니다. 오늘 첫 번째 강연 참가비는 1만원입니다. 다음 주 토요일(4월 28일)에 진행될 두 번째 강연(나영) 참가비도 1만원인데, 두 강연 모두 신청하면 5천 원 할인된 1만 5천 원의 참가비를 내면 됩니다.

 

청소년은 무료입니다. 자녀를 동반하여 강연에 오셔도 됩니다.

 

강연이 진행되는 과정의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할 수 있습니다. 사진 촬영이 부담스러운 분은 레드스타킹에 촬영 거부 의사를 전달하면 참고하겠습니다.

 

잠정 합계이지만, 현재 첫 번째 강연 신청자는 총 50명입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레드스타킹이 생각한 목표 수치를 넘었습니다. 오늘 강연자가 더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에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분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꽃보다 페미니즘’ 강연은 레드스타킹이 단독으로 주최했으며 한 달 동안 강연 준비를 해왔습니다. 저도 그렇고, 대부분 멤버들은 이번에 생애 처음으로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부족한 면이 있겠지만, 고퀄리티 강연을 만들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강연에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대구에 페미니즘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레드스타킹’이 있다는 걸 기억해주시고, 많이 알려주십시오.

 

생생한 강연 현장을 실시간으로 사진 촬영해서 북플에 공개할 예정입니다. 오후 4시에 강연 장소에 가서 막바지 준비 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여력이 된다면 강연 시작 전 상황도 사진을 통해 공개하고 싶습니다.

 

사진은 ‘친구 공개’입니다. 사진 게시물이 얼마만큼 나올지 모르겠지만, 막 찍다 보면 사진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자정이 지나면 사진 게시물을 삭제할 테니 ‘좋아요’ 누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편안하게 사진만 보셔도 됩니다. 저랑 ‘친구’인 분은 북플 사진을 볼 수 있지만, ‘팔로워’에 속한 분은 사진을 볼 수 없어요. 사진을 보고 싶은 ‘팔로워’는 댓글로 알려주세요. ‘페미니즘’ 자체를 싫어하거나 사진 게시물을 연달아서 보는 게 부담스러운 분은 ‘친구’에서 '팔로워'로 변경 설정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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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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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히 아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1]

 

 

공자《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학문이란 배우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옛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사색을 많이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간절하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고 훨씬 즐겁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흥미와 열정을 쏟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흥미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 그 무언가에 이끌려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빌 헤이스 올리버 색스가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함께 했던 동성 연인이다(색스는 동성애자다). 빌 헤이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글쓰기에 집중한 연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2015년 8월, 어쩌면 그는 곧 죽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올리버는 갑자기 원기를 회복했다. 책상에 앉아 마지막 저서가 될 책의 목차를 불러줬다. 그 일은 ‘죽어간다는 것’의 ‘끔찍한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가운 기분전환거리였기 때문이리라. 올리버에게 지루함이란 그가 그동안 견뎌온 불편함보다 더 나쁜 것이었다. [2]

 

 

죽는 순간에 유난히 고운 소리로 운다는 백조. 색스의 마지막 책 《의식의 강》(알마, 2018)은 바로 그 아름다운 백조의 노래를 닮았다. 이 책은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언론에 발표한 열 편의 에세이를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색스는 자신에게 남겨진 길지 않은 삶을 가장 즐겁게 살기 위해 글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글쓰기는 흥미와 열정을 동반한 행위이다. 세상과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 시간에는 약간의 재미를 위한 시간도 있을 것이다.

 

색스의 글은 과학 에세이면서도 독자들에게 각별한 감동을 준다. 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다. 《의식의 강》에서는 인간과 과학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자연과 생명에 경외와 찬미를 바친 색스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진화, 시간, 의식, 인간의 한계 등 심오한 주제를 응시하는 저자의 고독한 성찰은 ‘딱딱한 과학’을 ‘부드러운 문학’으로 바꾸어놓았다(그런데 이 책의 번역에 문제가 많다고 한다. 간혹 매끄럽게 읽혀지지 않은 문장들이 보인다).

 

『의식의 강』은 ‘인간’을 만든 ‘의식’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간만이 시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현재에 몰두하기보다는 보통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 연연한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며 언젠가 닥쳐올 죽음 앞에서 불안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의 순간순간이 제공하는 삶의 풍요를 그냥 놓치고 만다. 색스가 『의식의 강』 도입부에 언급한 보르헤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간 의식’이라는 강에 몸을 맡기면서 살아가는 ‘시간적 존재’이다. 고독을 느끼는 외로운 인간이나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감을 느끼는 인간은 혼자, 따로, 분절되어 살면서 ‘잉여롭게’ 의식을 흘려보내면서 산다. 그러나 인간은 개인의 의식을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사상, 믿음, 관습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의식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달라진다.

 

죽은 영혼은 ‘망각의 강’ 레테(Lethe)의 물을 마시며 이전 삶을 잊어버리게 된다. 망각은 죽음과 연결되며, 기억은 삶과 동의어인 셈이다. 사실 인간은 기억함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축적하고, 시행착오를 줄이고, 해야 할 일을 해낸다. 색스는 인간이란 ‘뇌 마음대로’가 아닌 ‘내 마음대로’ 기억하는 오류투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억을 때로 망각의 강에 흘러 보내는 것도 창의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3]

 

 

유머는 단순한 웃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웃음의 대상에게 보내는 연민과 동정이 함께 들어 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반복되는 자기기만, 한 순간의 짧은 성찰 등이 뒤섞여 불안하고 부조리한 것이 인간의 천성이다. 그러나 건강한 유머에는 그것마저 여유롭게 관조하는 힘이 있다. 《의식의 강》 곳곳에는 건강한 유머가 배어 있다. 특히 『잘못 듣기』라는 글 후반부에 자신의 잘못 듣는 행위를 즐기는 색스의 긍정적인 태도가 눈길을 끈다. 저자의 낙관적인 모습은 좀 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 바로 그 유머 때문에 《의식의 강》은 독자에게도 낙관의 힘을 보태주고 있다.

 

 

 

 

 

[1] 김원중 역, 180쪽, 《논어》(휴머니스트, 2017)

[2] 《의식의 강》 뒤표지

[3]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억』,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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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 컬렉션 7화 첫 번째 에피소드

중고 레코드

 

 

 

 

 

나카야마는 친구 오가와가 들려준 레코드의 음악에 푹 빠진다. 레코드의 음악을 다시 듣고 싶은 나카야마는 오가와에게 레코드를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오가와는 부탁을 거절한다. 나카야마는 녹음이라도 할 수 있게 잠시만 빌려달라고 다시 한번 더 부탁한다. 두 번째 부탁마저 거절당하자 나카야마는 오가와를 살해하여 레코드를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레코드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나카야마에게 서서히 접근하는데…‥. 살인을 부추길 정도로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레코드. 놀랍게도 이 레코드에 취입된 노래는 가수가 죽은 뒤에 녹음되었다는 것.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4 : 허수아비》 (시공사, 2008)

 

 

 

소름끼칠 정도로 우울한 선율이 흐르는 레코드의 음악을 빼면 이야기는 평이하다. 설정은 다르지만, 자살을 유발하는 노래 ‘검은 일요일’이 생각나는 이야기다. 슬픈 선율의 ‘검은 일요일’을 듣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으나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검은 일요일’은 백여 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든 저주의 음악으로 알려지게 됐고, 원곡 악보가 완전히 소실되면서 죽음의 행렬이 멈췄다

 

 

 

 

 

…‥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세상에 신기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의 원 출처는 오직 ‘가짜 뉴스’만 보도하는 것으로 유명한 <위클리 월드 뉴스>이다.

 

 

 

 

 

 

이토 준지 컬렉션 7화 두 번째 에피소드

길 없는 거리

 

 

 

 

 

 

여고생 사에코는 가족의 스토킹을 견디지 못해 이모 집에 찾아간다. 그런데 이모 집으로 가는 길이 평소와 다르게 이상하다. 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제목이 ‘길 없는 거리’다. 길 없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도 이상하다. 주민들의 집이 길이 돼 버린 셈인데, 마을 주민들은 거리낌 없이 남의 집을 드나든다. 그곳에는 프라이버시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고 다닌다. 사에코는 ‘의문의 남자’의 도움을 받아 이모의 집에 도착하지만,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포기한 이모는 알몸으로 돌아다닌다. 이모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의 이상한 행동에 불안감을 느낀 사에코는 마을을 탈출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의문의 남자’가 칼을 쥔 채 사에코 앞에 다시 나타난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5 : 뒷골목》 (시공사, 2008)

 

 

 

길 없는 마을, 그곳에서 가면을 쓰면서 남의 집을 길처럼 다니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생명체들. 카프카적인(Kafkaesque) 분위기가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이토 준지 컬렉션 8화 첫 번째 에피소드

조상님

 

 

 

 

 

슈이치의 약혼녀 리사는 거대한 유충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슈이치 집안에 자손 대대로 내려오는 ‘끔찍한 풍습’이 있다. 슈이치는 가문의 풍습을 따르기 위해 리사와의 결혼을 재촉한다. 이 풍습의 정체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생략한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8 : 백사촌 혈담》 (시공사, 2008)

 

 

 

부조리하더라도 가부장적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는 남성(슈이치)가문을 지탱해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되는 여성(리사)의 억압 상황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되었다.

 

 

 

 

 

이토 준지 컬렉션 8화 두 번째 에피소드

괴기 서커스

 

 

 

 

 

 

원제는 『서커스가 왔다』. 소년은 자신의 마을에 찾아온 ‘파피루스 서커스단’ 공연을 관람한다. 서커스 단원들은 ‘줄타기’, ‘칼 던지기’ 등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곡예를 펼치는데, 공연 도중에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단원들이 죽는다. 서커스 공연을 진행하는 단장은 단원들이 죽어가는 모습도 공연 일부라고 생각한다. 단원들이 줄줄이 죽어 가는데도 위험한 곡예는 계속된다. 단원이 부족해지자 단장은 관중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서커스 단원이 되면 서커스단의 홍일점 렐리아와 결혼할 수 있다고. 렐리아는 줄타기를 하는 소녀이지만, 자신 때문에 남자 단원이 죽어가는 모습에 절망한다. 그녀는 위험한 곡예를 그만두고 싶어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도망치지 못한다.

 

 

 

 

 

 

 

 

 

 

 

 

 

 

 

 

 

 

* 이토 준지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 4 : 허수아비》 (시공사, 2008)

 

 

 

파피루스 서커스단은 ‘남성 연대’를 상징한다. ‘남성 연대’에 속한 남성은 자신의 특출한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남성성’을 과시한다. ‘남성 연대’ 안에 갇힌 렐리아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여성성’을 드러낸다. 렐리아의 여성성은 남성 단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 남성 단원들의 ‘남성성’이 반영된 곡예는 구애하는 렐리아 앞에서 뽐내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남성 단원들은 렐리아와의 결혼을 위해 위험천만한 곡예를 한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 에머 오툴 《여자다운 게 어딨어》 (창비, 2016)

 

 

 

파피루스 서커스단의 곡예는 관중을 즐겁게 해주는 공연(performance)이 아니다. 남성 단원이 여성 단원에게 ‘남자다운 용맹함’을 보여주기 위해 과시하는 수행(Performance)이다. 남성 단원들은 리허설 없이 곡예를 시도한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빌리자면 남성이라는 젠더 자체가 ‘리허설을 거친 연기’이기 때문이다. 남성 단원들은 단장이 주선하는 ‘결혼(버틀러의 표현에 따르면 ‘강제적 이성애’)’을 달성하기 위해 ‘남성’으로 지칭된 존재가 되려고 한다. 남성 단원들과 여성 단원 렐리아는 남성성과 (남성들의 보호에 기대려는) 여성성을 수행하는 곡예를 계속하며 살아간다. 악순환이 펼쳐지는 것이다.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 성의 이분법적 범주와 ‘강제적 이성애’ 관계 모두 전복하려면 서커스단에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탈출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단원이 줄어들면 단장은 새 단원을 모집할 거고, 렐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서커스단원이 되고 싶어 하는 관중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서커스 공연을 지켜보는 소년도 예외가 아니다. 소년이 서커스단원이 되는 순간 ‘남성’으로 만들어진다. 젠더, 즉 ‘남성’이라는 옷을 입어 위험한 곡예를 하도록 길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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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Gloomy Sunday인가요... 오래전 비슷한 주제의 음악을 들은 것 같네요. cyrus님께서도 공포/스릴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영화「곤지암」도 보셨을 것 같아요.^^:)

cyrus 2018-04-15 09:12   좋아요 1 | URL
‘글루미 선데이’도 ‘검은 일요일’ 도시전설과 조금 유사해요. 두 곡의 차이점은 ‘글루미 선데이’는 실제로 만들어진 곡이고, ‘검은 일요일’은 유명무실한 곡입니다.

영화 <곤지암>은 아직 안 봤어요. IPTV 마일리지로 구매해서 집에서 영화를 볼려고 합니다. 마일리지가 아깝지 않은 영화였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