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시각으로 페미니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거라서 본의 아니게 내용의 의미가 잘못 표현했을 수 있습니다. 제 글에서 ‘맨스플레인’ 느낌이 조금이라도 느끼셨다면 양해 바랍니다. 여성 멤버가 쓴 ‘공식 후기’가 조만간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공식 후기’를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에 공개된 강연 관련 사진들은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습니다.

 

 

 

 

 

 

 

 

 

우리나라 페미니스트 최고의 원투 펀치를 꼽으라면 저는 권김현영 님과 정희진 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어제 원투 펀치 중 한 분인 권김현영 님의 ‘강력한 한 방’을 맞을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어제 권김현영 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습니다. 아니, ‘한 방’이 아니라 연속으로 펀치 두세 방 맞았을 것입니다. 어제는 페미니즘 공부가 부족했다는 점을 여실히 깨닫는 하루였습니다. 몇 주 전에 이미 언급했듯이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강연을 주최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강연 준비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에 신청한 레드스타킹 멤버들도 수강료를 냈습니다.

 

멤버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꽤 많은 분이 강연에 오셨어요. 레드스타킹 인스타그램을 통해 강연 신청한 분 56명 중 53명이 참석했습니다(레드스타킹 멤버 포함). 현장 접수한 분 3명, 그리고 소우주성문화인권센터(대구 달서구에 있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관계자 4명, 고등학생 1명을 포함하면 어제 강연에 총 61명이 참석했습니다.

 

 

 

 

 

 

 

강연 제목은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오래된 미래.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표현 속에 급진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의 긴 역사를 보여주는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흔히 ‘제2 물결 페미니즘’이라고 말합니다. 급진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 제1 물결 페미니즘)이 방치한 가부장제의 뿌리를 완전히 캐내어 버릴 기세로 등장했습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강경한 투쟁 노선을 지향하여 뼛속까지 침투한 가부장제의 의식을 바깥으로 들추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 및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 등에 투항하여 여성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1968년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신좌파 학생운동, 즉 ‘68혁명’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운동의 촉매제가 됐습니다. 그래서 급진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신좌파에 속합니다. 하지만 급진 페미니스트는 여성 문제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신좌파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걷습니다.

 

 

 

 

 

 

 

 

 

 

 

 

 

 

 

 

 

 

*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

 

 

 

 

권김현영 님의 강연 참고도서인 《나쁜 여자 전성시대》(이매진, 2017)의 부제는 이렇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입니다. ‘오래된 현재’라는 표현에 눈길이 갈 것입니다. 미국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만든 쳇바퀴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나쁜 여자’가 돼 목소리를 냈습니다. 《나쁜 여자 전성시대》는 미국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전성시대’부터 시작해서 분열, 쇠퇴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비록 그들의 행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현재’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로부터 무시당했지만, 오늘날 페미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급진 페미니즘은 과거, 즉 자유주의 페미니즘 이후부터 시작된 대중적이면서도 실천지향적인 사상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시대적인 여성 문제를 즉발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이론입니다. 권김현영 님은 급진 페미니즘은 지금도 유효하며(‘오래된 현재’) 지금보다 더 나은 급진 페미니즘으로 발전하기 위해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오래된 미래’). 이 ‘고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되어 페미니즘 계보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당신이 급진 페미니스트가 된 이상, 이 ‘고민’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하면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그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여성’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여성의 위치’를 의심합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유리천장 허물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주장에 반문합니다. “만약 유리천장을 허무는 데 성공한다면 모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주류 기득권 여성들(백인 부르주아 여성)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런데 권김현영 님은 서로 다른 노선을 선택한 두 페미니즘은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도 간혹 자유주의 페미니즘 노선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합니다. 또,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였다가 입장 차이를 확인하고 급진 페미니즘 노선으로 변경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습니다.

 

 

 

 

 

 

 

 

 

 

 

 

 

 

 

 

 

 

* [절판]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이매진, 2005)

* [절판]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이후, 2009)

* 애너매리 야고스 《퀴어 이론 : 입문》(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2)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서 급진 페미니스트로 돌아선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케이트 밀렛입니다. 그녀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함께 급진 페미니즘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밀렛은 베티 프리단이 설립한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에 소속되어 여성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프리단은 여성 운동 역사의 흐름을 바꿀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프리단은 선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목적에 충실히 따랐으며 낙태와 피임 문제를 부각하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행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전미여성기구의 이름으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여성 운동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프리단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프리탄의 폭탄 발언 이후로 그동안 점점 축적되어온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 페미니즘의 갈등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밀렛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을 배제하는 프리단의 자유주의 여성 운동에 반발했고, 전미여성기구를 탈퇴했습니다. 전미여성기구를 탈퇴한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연보라색 골칫거리’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프리단과 전미여성기구 소속 페미니스트들이 참석한 공식 행사에 불시에 등장하여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이 가세한 급진 페미니스트의 첨예한 갈등은 ‘라벤더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라벤더 논쟁’이 촉발된 이후 급진 페미니즘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밀렛은 ‘라벤더 논쟁’에 휘말리면서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명성은 순식간에 떨어졌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인기도 급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주류가 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역공과 동성애자들의 냉담한 반응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압박하는 ‘샌드위치 공격’으로 작용했습니다.

 

 

 

 

 

 

 

 

 

 

 

 

 

 

 

 

 

 

* 수잔 팔루디 《백래시》(arte, 2017)

 

 

 

페미니스트들 간의 내부 분열로 인해 여성 운동은 이미 소강상태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페미니즘과 여성 운동을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백래시(backlash)’가 나타납니다. ‘백래시’의 의미를 쉽게 설명한다면 ‘반페미니즘’이라고 보면 됩니다. 백래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에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레이거노믹스’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대처리즘’을 내세워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조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사회적 · 경제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백인 남성들, 친정부 우파 언론들, 그리고 보수적인 기독교들까지 나서서 페미니즘을 ‘해롭고 위험한 사상’으로 둔갑시켜 공격합니다. 백래시 세력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할 때마다 항상 사용하는 레토릭(rhetoric)이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사랑받을 권리를 빼앗는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

 

 

 

 

뻔하고 뻔한 백래시 세력의 레토릭을 이미 간파한 급진 페미니스트가 있었습니다. 미국 급진 여성 운동단체 ‘레드스타킹’의 수장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입니다. 그녀는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에서 남성 중심으로 치우친 ‘이성애’를 거부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이성애는 여성이 남성에게 인정받는 형태의 불평등한 사랑입니다. 과거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버림 받거나(이혼) 혼자 살게 되면(독신, 과부)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되어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았었죠. 그리하여 파이어스톤은 이성애를 완강히 거부하는 도발적인 선언을 합니다. “남성들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 오랫동안 남성은 연애, 결혼, 가족 문제가 있을 때면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가부장적 주도권을 쥔 남성은 자신들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여성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의 명령에 복종했습니다. 만약 남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는 처지가 되고, 사회는 그녀에게 ‘사랑에 실패한 여자’ 또는 ‘가족의 화목을 깨뜨리는 불량한 여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듣지 않고 싶은 과거 여성은 무조건 ‘사랑’을 해야 했고, ‘결혼’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 중심 사회에 익숙한 남자들은 연애와 결혼이 ‘남성이 사랑받아야 하는 일방적인 권리’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비혼주의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결혼하지 못한 이유를 ‘연애를 못 해본 못생긴 페미니스트들의 선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백래시’가 형성되면서 페미니스트는 ‘못 생기고 연애 한 번 안 해본 성격이 드센 여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 앤디 자이슬러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 2018)

*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글항아리, 2016)

* 수잔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

 

 

 

 

백래시를 부담스러워 하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자아실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선배 페미니스트들의 과격한 투쟁 노선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봤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일단 외모가 예뻐야 남성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외친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점점 잊히고, 오늘날의 페미니즘, 즉 (앤디 자이슬러가 말한) 시장 페미니즘은 ‘탈정치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성폭력, 즉 ‘강간 문화’를 조장하는 대중문화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강간 피해자를 비난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도 등장했습니다. 시장 페미니즘(저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의 권리만 챙기는 데 급급한 여성 운동을 ‘급진적’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합니다.

 

권김현영 님은 급진 페미니즘의 계보를 쭉 훑어보면서 과거 선배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외쳤던 구호의 의미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여성 개인이 겪고 있는 문제는 집단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면 ‘여성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급진 페미니즘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여성의 힘은 사라집니다. 그 힘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되찾으려면 선배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흔적을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뿌리’ 없는 페미니즘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저는 급진 페미니즘이 발전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여성 운동 집회에 동참할 생각입니다. 물론, 이게 ‘남성 페미니스트’인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은 권김현영님의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칭찬(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열심히 말합니다. 스트레이트 펀치와 같은 권김현영 님의 말씀을 듣고 녹다운(knock down)이 됐습니다. 너무 세게 맞은 나머지 강연이 끝나고 집에 와도 마음이 얼얼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한계’에 직면하지 않으려면 여전히 머리와 마음속에 남아있는 ‘남성적 특권’의 흔적을 끊임없이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서 신중하게 말할 땐 “I know”가 아니라 “I don’t know”로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게 맞는지 검토해야 하고, 모르면 먼저 답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정 안 되면 여성 페미니스트에게 질문합니다. 다만 질문도 잘 해야 합니다. 결론 내리기 힘든 문제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무턱대고 질문하는 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는 페미니즘 공부에도 ‘왕도가 없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학문입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우리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 남성 중심 문화 등에 실질적으로 고민해야 하며 여기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단, 여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남성 연대를 고발하는 행위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부단히 자기 검열과 고민을 하고, ‘책 밖의 세상’에 뛰어들어 남성 중심 사회를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움직여야겠습니다.

 

아직은 서툴지만 저를 ‘책 밖의 세상’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 레드스타킹 멤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행복하자 2018-04-17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무엇이 쉬운 공부가 있을까 싶지만 페미니즘 만큼 어려운 공부가 있을까요..
제대로 해 본적도 없지만 얼핏 보기만 해도 갈 길이 참 멀구나 생각이 들어요~ 잘 따라가보겠습니다

cyrus 2018-04-18 11:4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해요. ‘책에서 본 페미니즘’과 ‘책 밖의 페미니즘’은 확실히 다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 간에 첨예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을 독서모임 멤버들로부터 듣게 되는데, 듣는 것만으로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져요. 책만 봐서는 페미니즘의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psyche 2018-04-1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에 쏙 들어오게 정리를 너무 잘해주셨네요!

cyrus 2018-04-18 11:51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쓴 글의 내용이 긴데, 이것도 나름대로 강연 내용을 줄인 것입니다. 책과 관련 없는 내용도 쓰고 싶었지만 글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

AgalmA 2018-04-18 0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칭찬(인정)받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가 아는 것을 열심히 말합니다.˝

현장에 있지 않아서 이 말을 정확히 해석하기 어렵네요. cyrus님이 이 말에 스스로 찔려 하신 건 본인의 알고자 하는 욕망을 채우면서 이런 운동에서 남성으로서 선구적 역할을 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말씀이시죠? 그런데요. 여성이라고 다를까요? 페미니즘 운동은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 남성, 여성 다 마찬가지의 교집합인 점입니다. ˝진보˝도 비슷한 양상이죠.
‘문제 많은 남성‘이란 카테고리로 묶을 게 아닙니다. 그렇게 지정하고픈 권김현영님의 의향이 깊이 담겨 있죠. 이런 식의 배제, 규정의 틀을 만드는 페미니즘의 단어 선택이 저는 정말 못마땅합니다.
지금 저는 남성 입장도 이해하자거나 연대를 위해 넓은 포용이 필요하다 뭐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네, 남성의 뿌리깊은 차별의식, 이런 위계와 질서를 만든 폭력성과 착복 당연히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에 저런 말의 칼날을 ‘할(喝)‘로 쓰고자 하는 건 잘 알겠습니다.

이번엔 허를 찔러서 상대를 제압하고 이겼지요. 그러나 다음에 허점이 잡히면 소용없어요. 말을 무기로만 쓰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죠.

페미니즘이 쓰는 언어들이 제게는 금방 매력을 잃어요. 선도부장 같은 내지름 말고 스미게 만드는 그런 사유와 언어와 행동력을 만나길 바랍니다. 현실이 이러니까 이렇다? 글쎄요.
암튼 저도 참 고민이 많고 그렇습니다.


cyrus 2018-04-18 15:07   좋아요 1 | URL
AgalmA님이 인용한 제 문장을 이해한 것은 맞습니다. 저는 그동안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글을 쓰면서 표현한 생각들을 ‘독자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성 문제를 바라보면서 느낀 것들은 과거 페미니스트들이 먼저 생각했고 직접적으로 표현했던 것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알고 있어!”라는 식으로 글을 써왔던 거죠. 이게 권김현영 님이 지적한 남성 페미니스트의 한계입니다.

‘문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권김현영 님이 직접적으로 말한 표현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표현한 ‘문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한계’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권김현영 님은 그 날 강연에서 ‘문제 많은 남성’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또 남성을 배제하는 듯한 발언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해의 여지를 주는 ‘문제 많은’이라는 표현을 지워야겠습니다. 제가 강연을 정리하면서 단어를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선택하여 표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저는 페미니스트들이 말을 ‘무기’로 삼아 행동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이 내지르는 듯한 발언을 하게 된 심정을 이해합니다. 과거 페미니스트들은 온건한 방식으로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했어요. 19세기~20세기 초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교화하기 위한 목적의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운동 효과는 미미했고, 여기에 반대한 진영이 급진 페미니스트입니다.

만약 미러링을 시도하는 메갈리아가 나오지 않았고,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 운동이 진행되었다면 페미니즘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요? 페미니즘 책을 쓰면 남자들이 읽어줄까요? 그리고 페미니스트가 교육 기관을 통해 전국 순회 강연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찾으러 올까요? 지금과 마찬가지로 백래시가 있었을 것이고, 여성 운동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문제에 계속 외면하니까 결국 페미니스트들은 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말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가 주목받게 되자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나서기 시작했어요. 물론, 이 언어가 여성 문제와 무관한 사람 또는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위험한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제가 페미니스트들을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선도부장처럼 행동하면서 남자들에게 심하게 내지르는 건 아닙니다. 워마드를 반대하는 여성 페미니스트도 있어요. 그리고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하고 고민하는 여성 페미니스트들도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말만 내지를 줄 아는 감정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雨香 2018-04-18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운동을 보며 다시 한번 페미니즘 읽기를 생각하며 책들을 좀 고르고 있습니다.
오늘 Cyrus님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갑니다.(꾸벅)

두 해전인가 페미니즘 관련 몇 권의 책을 읽게 된 것이 말씀하신 바로 “I don’t know” 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I don’t know”하고 있어 독서목록을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만, SNS 등에서 몇몇 남성혐오분들과의 괴리, 그리고 사회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괴리
속에서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현 시점에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cyrus 2018-04-18 15:13   좋아요 1 | URL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이라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제가 책에서 본 페미니즘과 현실에서 말하는 페미니즘과 거의 달라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몰랐던 페미니즘도 많고요.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고, 새로운 문제에 접근할 때가 좋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레삭매냐 2018-04-18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공식 후기라니~ 열정들이 대단하십니다.

저희도 모임하고 나서 열심히 후기를 써야
하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라구요.

책 읽기와 책 밖으로 세상과의 조화 정말
멋집니다. 뜬금 없이 빠이팅 !!!

cyrus 2018-04-18 15:19   좋아요 0 | URL
먼 곳에서 저를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말과 말들이 서로 주고받고 부딪히는 순간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히 상대방의 의견을 내 언어로 다시 표현할 때가 어려워요. 상대방의 말을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의 주관적 감정이 개입될 수 있고, 말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독서모임, 특히 페미니즘 독서모임 공식 후기를 다 쓰면 먼저 멤버들에게 보여줍니다. 글에 문제되는 표현이 있는지, 아니면 제가 누락한 내용이 있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