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와 정복 - 아스테카 신화, 콜럼버스와 베스푸치의 보고서, 필리핀 정복 문헌 라틴아메리카 고전 1
박병규.김선욱 지음 / 동명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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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희비가 엇갈리는 역사적인 해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를 보내 이 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에게는 국운이 도약하는 감격의 해로 여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에게는 비극과 고통을 예고하는 불행한 해였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 이후 원주민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의 한 부분이라 착각하여 ‘서인도’라고 명명했으며 원주민을 인도 사람들, 즉 ‘인디언(indian)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그 나름의 지도를 그리면서 나름의 공간에서 살다 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달랐다. 그는 콜럼버스가 착각한 그 땅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고 확신했다. 베스푸치가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은 1503년 『신세계』란 제목의 소책자로 출간돼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스푸치가 남긴 기록에는 그가 네 차례나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네 번이나 신대륙에 도착했는지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신대륙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베스푸치가 아니라 1507년 세계지도를 만든 독일의 지리학자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였다.

 

《항해와 정복》‘동명사’ 출판사가 펴낸 ‘라틴 아메리카 고전’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신대륙 원주민들의 세계관과 신대륙 항해의 경위를 알 수 있는 당대의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1부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고대 아스테카(azteca, 아즈텍) 문명의 태양 신화를 소개한다. 뜨고 지는 태양은 매일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태양을 ‘시간’, ‘날’, ‘세계’, ‘역사’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섯 개의 태양(세계)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중 네 개가 이미 멸망해 마지막 다섯 번째 태양(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태양들은 오실롯(Ocelot, 고양잇과 동물, 아스테카 신화를 번역한 유럽인들은 ‘호랑이’ 또는 ‘재규어’라고 썼다), 바람, 물, 불에 의해 차례로 멸망했고, 다섯 번째 태양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2부는 콜럼버스의 항해 목적과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갈 결심을 한 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 부부(Isabel I, Fernando II, 가톨릭 양왕)를 찾아갔다.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기에 가톨릭 양왕은 콜럼버스의 후원자로 나선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날 때 가톨릭 양왕의 이름이 있는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고, 이 친서는 동양의 군주를 만날 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렸을 적 위인전에 나온 콜럼버스만 보면, 이 사람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용기 있는 모험가였다. 그런데 과연 콜럼버스가 훌륭하기만 한 사람일까?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일까? 오늘날 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으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는 도전 정신이 강한 모험가라기보다는 사기꾼이며 구시대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항해와 정복》의 2부는 우리 머릿속에서 과대평가 된 콜럼버스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대륙 도착을 알리는 콜럼버스의 편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가톨릭 양왕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편지다. 이 편지에서 교활한 책략가의 면모를 지닌 콜럼버스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왕과 여왕의 후원을 많이 받기 위해 신대륙의 이점을 과장하여 보고했다. 흔히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한 항해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구가 둥글 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와 중국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3차 항해에서 가톨릭 양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서양 배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에 지상낙원이 있다고 믿었다.

 

3부는 이미 언급한 『신세계』를 포함한 베스푸치의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4부에 수록된 문헌들에는 동양 진출에 대한 스페인의 야심이 드러내 있다. 펠리페 2세(Philip Ⅱ)가 통치했던 시절(1556~1598년) 스페인은 필리핀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과의 교역을 시도하려고 했다. 정복욕이 넘칠 대로 넘친 스페인 군인들은 왕에게 중국 점령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565년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후 초대 총독 레가스피(Legaspi)의 지배를 받는다. 그가 펠리페 2세에게 보낸 서한에는 필리핀의 지리적 환경, 원주민에 대한 기록이 내용의 주종을 이루지만, 필리핀 원주민과 그들의 토속 문화를 ‘야만’의 범주에 집어넣으면서 관찰한다. 이처럼 유럽은 신대륙에서 강제 수탈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와 진보라는 용어로 호도하였다. 16세기 스페인의 아메리카 및 동양 정복 이후 그들이 내세운 보편적 가치는 기독교였다. 그들이 보기에 원주민들은 야만 상태에 빠져 우상숭배와 인신 공양의 관습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잔인한 지배자로부터 양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기독교 전파는 야만과 작별하기 위한 필연적인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군인과 선교사들은 무고한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리고 스페인 제국의 동양 정복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검토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는 신대륙을 위한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즉 미개한 원주민밖에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문명을 전해주고 원주민의 삶을 향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가장 발전한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신대륙 도착은 지금 라틴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대륙을 피로 물들게 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성공 소식과 베스푸치의 『신세계』 출간은 라틴 아메리카를 약탈과 살육의 무대로 만든 서막이었다.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보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식민지인이 되면서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었다. 서양 근대문명은 이러한 희생으로 발전했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은 원주민에게 구원이 아니라 침략과 희생의 역사인 것이다. 《항해와 정복》은 배와 정복을 정당화했던, 오래된 서구 중심주의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 Trivia

 

* 105쪽

확실한 사실은, 1500년부터 1501년까지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의 오자] 이주하여 포르투갈 왕실의 명의로 신대륙으로 항해했고,

 

* 163쪽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비교적 수월하게 필리핀[‘을’의 오자] 점령했다.

 

* 241쪽

중국 명나라[‘의’를 빼야 함]를 방문한 첫 번째 기독교 사제 중의 한 명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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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야말로 서구식
사고의 글로벌리즘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서구식 사고의 틀에 맞춰서
생각하는. 아메리카의 원래 살던 사람들
을 인디안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해
서 종교 문화 관습을 모두 야만으로 규
정하고 싹 뜯어 고쳤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컬럼버스 데이에 대한 반
성을 하자는 의견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cyrus 2018-11-01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핍박받고 차별당한 역사를 생각하면 ‘인디언’이라고 부르면 안 되니까요.

2018-10-3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01 12:32   좋아요 1 | URL
당연하죠. 돈벌이, 맞습니다. 콜럼버스라면 분명히 자신과 함께 항해할 사람들을 꼬셨을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대륙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싶은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지만, 사람을 죽일 정도로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니죠.

카스피 2018-10-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메리카가 신대륙은 아니었죠.그곳에 수 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신대륙발견이라나 정말 서구중심적인 사고죠.

cyrus 2018-11-01 12:34   좋아요 0 | URL
‘신대륙’이라는 말에 서구 중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어서 이를 대안하는 용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과학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세계의 모든 현상은 일정한 인과 관계의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학으로 이 법칙을 알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라플라스(Laplace)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수많은 계산을 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계산력만 있다면 향후 전체 운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만사 별자리 운행하듯이 계산만 다 한다면 향후 어떻게 움직일지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필요한 계산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이루어진 인과율이 작용하므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단지 수많은 변수와 복잡하고 많은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미래란 인과율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믿었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1984, 2006)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가 등장하면서 비결정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입자의 속도가 정해지는 순간 위치가 달라지고, 반대로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속도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찰 장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확률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카를 포퍼(Karl Popper)《열린사회와 그 적들》(민음사)에서 인류의 운명과 역사가 결정되거나 닫혀 있지 않으며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반드시 무너지고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한 마르크스(Marx)의 결정론적 역사관을 비판했다. 포퍼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지가 존중되고 비판이 보장되며 자아실현의 길이 열려있는 ‘열린사회’를 인간과 사회 발전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의 입장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반영되어 있다.

 

결정론의 허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정론은 학문의 세계뿐만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한때 유전자가 외모는 물론 지능 · 기질과 질병까지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본성을 오랜 진화과정을 겪어 온 유전자의 관점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이런 주장은 요즘 과학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형편이다. 오히려 환경이 유전형질에 끼치는 영향이 밝혀지면서 유전자와 환경이 얼마나,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을유문화사, 2018)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으로 오해받곤 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머리카락, 피부색, 키 등 외모는 유전되지만, 사회적 행동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학습이나 경험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보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번식(생식)도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것이며, 생명체는 유전자를 보존시키기 위해 번식을 하게 된다. 그의 도발적인 책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촉진했다.

 

사실 이 열띤 논쟁은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기 일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사회생물학》(민음사)이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반향이 생겨난다. 이 책 역시 《이기적 유전자》처럼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을 위해 쓰인 책은 아니었고 대학 교재였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이 진화생물학자들 간의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문제작이 되었을까? 사회생물학은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행동이 종(種)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도킨스는 윌슨의 입장을 응용하여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클래식, 2011)

*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2014)

 

 

 

우리나라에 번역된 《사회생물학》은 절판된 상태라 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생물학》의 후속편 격이라 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분석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1978년에 나왔으니 올해가 출간 40주년이다. 진화론 논쟁을 주제로 다룬 책들에서 《사회생물학》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어서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화론 논쟁의 역사와 그 핵심을 잘 정리한 《센스 앤 넌센스》(동아시아)는 사회생물학의 주요 입장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 따르면 윌슨은 사회생물학으로 인간의 성적 차이, 공격성, 종교, 동성애 등을 설명하려고 했으며 “머지않아 사회과학은 생물학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비판이 거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윌슨의 도발적인 주장은 ‘사회생물학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함께 하버드대학교에서 활동했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윌슨을 ‘환원주의자’라고 비난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 (사이언스북스, 2016)

 

 

 

굴드는 평생 결정론의 함정에 빠진 과학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선 학자이다. 그는 윌슨뿐만 아니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비판했다. 《판다의 엄지》(사이언스북스)도킨스를 비판한 칼럼(8장 『이타적인 집단과 이기적인 유전자』)이 수록되어 있다. 굴드는 도킨스의 주장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얽매인 악습’, 즉 환원주의, 결정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 리처드 도킨스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 2015)

 

 

 

그렇다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기적 유전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나는 앞서 이 책이 ‘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결정론’을 옹호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유전자 관점(gene’s-eye view)을 옹호하는 책으로 봐야 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서 출현빈도가 증가할 형질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변질하는 것에 대해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이 책, 아니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만 보고 도킨스를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도킨스는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에 수록된 『유전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도깨비’로 비유하면서 매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인간을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유전자의 노예라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았다. ‘유전자 관점’과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아주 작은 차이가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왜곡돼는 바람에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 자유 의지에 기반한 비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환경 영향을 극복하고 주체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인간은 주변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우리를 조종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이기적 유전자》 11장에서 그 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서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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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6   좋아요 0 | URL
<센스 앤 넌센스>에서 본성과 양육을 확실하게 구분하거나 양자 중 한쪽만 옹호하는 자세를 ‘넌센스’라고 말해요. 북사랑님이 읽으려는 책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책의 저자는 본성과 양육을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하네요. 저 역시 저자의 주장에 공감해요.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

2018-10-29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7   좋아요 0 | URL
제가 ‘입자’를 양자로 착각해서 잘못 썼네요.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18-10-2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할 힘이 있다고 설파한 도킨스의 글에서
저는 오히려 그럴 힘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우리는 힘을 합치면 어떤 자연 재해가 일어날지라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자연재해의 위력이 크다는 걸 말하듯이, 도킨스의 말은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걸 말해 주고 있는 것 같거든요.
어쨌든 도킨스의 그 말은 우리 인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존재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10-30 17:0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연대하는 힘을 잘 이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어요. ^^
 
여성의 진화 - 몸, 생애사 그리고 건강
웬다 트레바탄 지음, 박한선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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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채집 시대의 인류는 수명은 짧았지만, 체력은 좋았다. 윤택한 삶을 살며 장수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각종 알레르기 질환을 비롯한 암, 당뇨와 같은 생활습관병에 시달리고 있다. 진화 의학자들은 이 난제의 해법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찾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질병과 건강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분 분야를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이라고 부른다. 진화 의학은 1990년대에 진화생물학자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주1]조지 C. 윌리엄스(George C. Williams)가 연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의학이다. 진화 의학자들은 질병의 증상을 없애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현대 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질병에 걸리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을 인류의 진화 과정과 인체의 구조적 특성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진화 의학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의학계에 도입되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존 의학계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진화 의학은 인간의 몸을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산물로 본다. 예를 들어 음식을 비만의 원인은 게으른 생활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구석기 시대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채식, 어류와 해산물을 주로 먹었다. 풍요로운 음식을 즐기기 시작한 지는 겨우 1만 년밖에 되지 않았다. 농경 시대의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곡식, 감자 등 탄수화물 섭취가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되면서 섭취 열량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비만, 고혈압, 당뇨 등 ‘현대의 문명병’의 위험에 노출된 이유가 우리의 식생활이 너무 빠르게 진화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구석기 시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농업 혁명으로 우리의 식생활만 엄청나게 달라져 버린 것이다.

 

질병은 인류의 발전과 함께 그 탄생과 진화를 반복하고 있다. 과연, 실제 문명과 의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더 건강해지고 있는 걸까. 과거와 비교하면 질병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운 걸까. 진화론적 관점으로 여성의 몸과 건강을 살피는 《여성의 진화》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책의 저자인 생물 인류학자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은 초경, 임신, 출산, 완경[주2]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진화적 요인이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적 · 의학적 지식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여성의 건강과 연관 지어 논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여성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질환은 여성의 몸이 문명화에 따른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다. 예를 들어 유방암이 나날이 급증하는 원인을 해부학적 구조에서 찾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화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여성들은 초경이 늦었고 그 직후 임신을 했으며 완경을 빨리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여성들은 이들보다 초경이 일찍 시작하며 생리 횟수가 많다. 구석기시대 여성들이 평생 150번 정도 생리를 한 데 반해 현대 여성은 400번 정도 생리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호르몬이 유방암의 발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초경이 빠르고 완경이 늦으면 그만큼 여성의 몸은 호르몬에 노출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유방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즉 임신과 출산 횟수가 많으면 유방암 발병률이 낮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임신과 출산 경험이 적거나 없으면 발병 우려가 높아지는 것이다.

 

포유류의 성장에서 접촉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갓 태어난 동물이 살아남으려면 어미가 반드시 새끼를 핥아줘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어미가 핥아주지 않은 새끼 양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다. 접촉은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아기를 업고 다니고, 끼고 자고,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젖을 물리는 육아 방식은 아기와 산모 모두에게 너무나 적합하다. 옥시토신(oxytocin)은 출산 후 아기를 돌볼 때에도 그 분비량이 많이 늘어나는데, 아이와 산모 사이의 유대감을 크게 만들고 모유 수유를 돕는다. 코르티솔(cortisol)은 신체가 스트레스에 반응하고 감염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호르몬이다. 아기를 안아서 달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코르티솔 수치가 내려간다. 하지만 안아주지 않고 계속 울게 내버려 두는 일이 잦아지면 아기의 코르티솔 분비가 촉진되면서 아기의 성장과 정서, 뇌 발달까지 저해할 수 있다. 모유 수유의 장점은 아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옥시토신은 임신으로 이완된 산모의 자궁을 임신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며, 출산 후의 출혈을 멎게 한다.

 

이 책에서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의 몸이 번식(생식, 출산과 육아) 성공에 초점을 맞춰 진화해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저자는 “여성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번식이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348쪽). 《여성의 진화》는 ‘여성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다이어트를 위해 구석기 시대의 식단으로 바꾸자는 식의 실현 불가능한 건강 비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책이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남성이 이 책을 읽고 여성의 생리 · 임신 · 출산의 수고로움을 안다면 건강한 여성들이 정말 살만한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여성의 진화》 19쪽에 랜돌프 네스가 ‘랜디 네스’로 되어 있다. 랜디가 ‘랜돌프’의 애칭이라서 틀린 표기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확한 이름은 ‘랜돌프 네스’이다.

 

[주2] 책에서는 ‘폐경’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폐경은 ‘여성으로서 생명이 끝난다’는 부정적 어감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 리뷰에선 ‘폐경’ 대신 ‘완전한 성숙’이란 긍정적 의미를 담은 ‘완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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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28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 그래야 하는 것인데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또는 불행해진 여성들이 많은 게 현실이죠.

cyrus 2018-10-29 15:16   좋아요 1 | URL
임신과 출산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몰상식한 남성들은 임신을 ‘벼슬‘이라고 말하는데,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여성의 몸을 잘 모르니 여성의 건강권 보장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 없어요. 여성도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 국민이에요. 정부는 모든 연령의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먼저 만들어야하는데,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제가 봐도 지금 우리 사회는 여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에요.
 

 

 

이틀 전(1022)에 참석했던 독서 모임 후기입니다.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도 공개될 예정입니다.

    

 

 

 

캘리번과 마녀함께 읽기세 번째 시간에는 3(대 캘리번 : 반란자의 신체에 대한 투쟁)4(유럽의 대 마녀사냥, ~266) 절반을 읽었습니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는 여성의 신체를 통제의 대상, 재생산의 도구로 바라보는 국가의 권력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중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부상한 부르주아지(bourgeoisie, 지배 계급)는 농민들이 이용하던 공유지에 울타리를 세워 타인의 사용을 막음으로써 사유화했습니다. 인클로저(enclosure)는 자본주의가 자연을 본격적으로 상품화하는 첫 단계였습니다. 한순간에 생계 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빈농으로 전락했으며 이로 인해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됐습니다. 공유지를 통해 공적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임금을 받지 않으면서도 가정의 재생산 노동을 하게 됐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국가는 여성을 포함한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막기 위해 새로운 정치적 기획(4246)을 시도합니다. 국가는 여성을 남성보다 더 열등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마녀사냥을 일으킵니다. 국가가 주도한 정치적 기획’, 즉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의 확산과 국가의 대대적인 통제에 저항하는 여성을 공격한 집단적 폭력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성이 강조되던 17세기에 활동한 지식인들은 마녀에 대한 위험성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마녀 박해를 부추겼습니다. 과학적 · 철학적 합리주의가 발전했던 그 시절에 지식인들은 왜 마녀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 [안 읽은 책]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나남출판, 2008)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문예출판사, 1997)

 

    

 

페데리치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데카르트(Descartes)의 철학을 분석하면서 신체를 바라보는 두 철학자의 인식이 어떻게 국가와 지배 계급의 입맛에 맞는 통치술에 반영되었는지 보여줍니다. 홉스와 데카르트는 인간의 신체를 이성과 자유 의지에 무관한 물리적인 물질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신체는 자율적인 힘이 없는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신체에 대한 홉스와 데카르트의 입장은 기계론적 철학으로 발전했고, 이 철학은 개인의 신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게 됩니다. 따라서 국가는 기계론적 철학을 근거로 여성의 신체를 출산 기계로 만드는 규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공유지 박탈 이후로 농민들은 지배 계급 밑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했고,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무산계급)가 되었습니다. 농민들의 노동 거부는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정도였고, 지배 계급은 무산계급을 강제로 노동자로 만들기 위해 빈민이나 부랑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님은 이때부터 노동 거부를 나태한 행동으로 여겼으며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녀사냥을 부추긴 지배 계급은 마법을 노동을 거부하는 반항적 행위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자는 주류(임금을 받고 일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었고, 무임금 재생산 노동을 하면서 약초에 관심이 많은 여성은 일하지 않고 마법에 심취한 마녀로 낙인찍혔습니다.

    

 

 

 

 

 

 

 

 

 

 

 

 

 

 

* [안 읽은 책] 피터 싱어 동물 해방(연암서가, 2012)

 

    

 

몸과 영혼을 분리해서 보는 기계론적 철학은 허점이 많은 논리가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신체를 함부로 대하는 비정한 시선은 남아 있습니다. 시신 앞에서 고인을 모욕하는 행위를 한 해부학과 실습 학생들이 있었고, 경찰은 유가족의 동의 없이 백남기 씨의 시신을 부검하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인간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부정하기 위해 동물을 해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물은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생각이고, 데카르트의 동물 해부는 동물 학대에 가까운 일입니다. 님은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동물 학대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반대한다면서 여성 차별과 동물 차별은 별개의 문제가 아닌 동등한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과학이든 철학이든 학문은 국익을 앞세우는 논리나 지배 계급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갇혀선 안 됩니다. 국익과 지배 계급 권력 유지를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학문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란 이름 아래에 사람을 인격체로 보지 않으며 실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캘리번과 마녀를 읽으면 과연 학문은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성의 신체를 국가의 통제 속에 두려는 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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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실의 쾌락 - 세계고문형벌의 발자취
존 스웨인 지음, 조석현 옮김, 조재국 감수 / 자작나무(송학)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국내에 고문과 형벌을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책이 있다고 해도 절판된 상태라서 구하기 힘들다. 《고문실의 쾌락》(도서출판 자작)‘세계 고문형벌의 발자취’라는 부제가 달린 절판된 책이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 고문 행위를 소개하고 있다. 원제는 ‘Pleasures of the Torture Chamber London’이다. ‘torture’는 고문을 뜻하는 단어이며 ‘몸을 비틀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문실의 쾌락》은 영국인 존 스웨인(John Swain)이라는 사람이 1931년에 발표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는 저자를 ‘영국의 사학자’라고만 소개한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존 스웨인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 스웨인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이상의 저자가 만든 필명일 수도 있다.

 

출판사와 감수자는 이 책을 ‘역사서’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러나 고증의 정확성이라는 역사서의 기본 원칙에서 놓고 볼 때, ‘하더라’ 식의 야사(野史)도 다루는 《고문실의 쾌락》은 역사서라고 보기 어렵다. 《고문실의 쾌락》의 감수자는 이 책이 ‘실제로’ 행해졌던 고문에 대한 보고서라고 소개하면서, 저자가 인용한 각종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감수자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역사 비전공자가 역사서에 손을 대면 객관성과 고증의 정확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잔인한 고문 행위를 묘사하고 증언한 사료 대부분은 글쓴이의 상상력이 덧칠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책이 언급한 고대 및 중세의 고문 방식은 ‘기담(奇談)’ 형태로 전승되었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은 사람 모양의 틀 안에 못이 박힌 중세의 고문 기구로 알려져 있다. 아이언 메이든을 우리말로 옮기면 ‘철의 여인’인데 《고문실의 쾌락》에서는 ‘무쇠 소녀’로 번역되었다(189쪽). 그런데 이 고문 기구의 용도를 언급한 기록은 많으나 고문 기구가 실제로 사용된 사례를 언급한 사료는 없다. 역사가들은 아이언 메이든이 대중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도구로 보고 있다.

 

번역본에 고문 장면을 묘사한 도판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몇 몇 도판에 대한 설명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엉망이다. 루벤스(Rubens)가 그린 메두사(Medusa)의 얼굴 그림을 ‘뱀 고문’이라고 설명했고(166쪽), 사드 후작(Sade)을 ‘상트’라고 썼다(172쪽).

 

이 책을 읽으면서 불쾌한 점은 ‘처녀(virgin)’, ‘여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고문 기구의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여성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는 여성 혐오가 반영되어 있다. 남성 중심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여성이나 사회의 주류에 벗어난 무고한 사람들은 ‘마녀’라는 낙인이 찍힌 채 고문을 받으면서 죽어갔다. 고문의 역사를 살필 땐, 잔혹한 고문 방식이 아니라 대중이나 특정한 사회 집단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무자비한 통치술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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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0-23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속의 아이언 메이든은 실제로는 어디 있을까요.
흑백사진으로 보는데도 못이 무시무시합니다.
사진을 보면서 앗, 무서운 언니네, 하려다 마지막 문단을 보고,
그러고보니, 예전엔 진짜 더 무서운 게 많았지, 했습니다.
cyrus님,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10-23 20:56   좋아요 1 | URL
고문 기구는 독일의 뉘른베르크라는 지역에서 만들어졌어요. 사진 속 고문 도구는 박물관에 전시된 모조품이었는데 세계 대전 때 분실된 적이 있었대요. 아이언 메이든이 워낙 유명해서 전시용 모조품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조품을 중세 때 만들어진 실제 고문 도구라고 착각해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