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세계의 모든 현상은 일정한 인과 관계의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학으로 이 법칙을 알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라플라스(Laplace)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수많은 계산을 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계산력만 있다면 향후 전체 운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만사 별자리 운행하듯이 계산만 다 한다면 향후 어떻게 움직일지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필요한 계산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이루어진 인과율이 작용하므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단지 수많은 변수와 복잡하고 많은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미래란 인과율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믿었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1984, 2006)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가 등장하면서 비결정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입자의 속도가 정해지는 순간 위치가 달라지고, 반대로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속도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찰 장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확률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카를 포퍼(Karl Popper)《열린사회와 그 적들》(민음사)에서 인류의 운명과 역사가 결정되거나 닫혀 있지 않으며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반드시 무너지고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한 마르크스(Marx)의 결정론적 역사관을 비판했다. 포퍼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지가 존중되고 비판이 보장되며 자아실현의 길이 열려있는 ‘열린사회’를 인간과 사회 발전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의 입장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반영되어 있다.

 

결정론의 허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정론은 학문의 세계뿐만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한때 유전자가 외모는 물론 지능 · 기질과 질병까지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본성을 오랜 진화과정을 겪어 온 유전자의 관점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이런 주장은 요즘 과학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형편이다. 오히려 환경이 유전형질에 끼치는 영향이 밝혀지면서 유전자와 환경이 얼마나,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을유문화사, 2018)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으로 오해받곤 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머리카락, 피부색, 키 등 외모는 유전되지만, 사회적 행동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학습이나 경험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보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번식(생식)도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것이며, 생명체는 유전자를 보존시키기 위해 번식을 하게 된다. 그의 도발적인 책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촉진했다.

 

사실 이 열띤 논쟁은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기 일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사회생물학》(민음사)이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반향이 생겨난다. 이 책 역시 《이기적 유전자》처럼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을 위해 쓰인 책은 아니었고 대학 교재였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이 진화생물학자들 간의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문제작이 되었을까? 사회생물학은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행동이 종(種)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도킨스는 윌슨의 입장을 응용하여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클래식, 2011)

*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2014)

 

 

 

우리나라에 번역된 《사회생물학》은 절판된 상태라 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생물학》의 후속편 격이라 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분석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1978년에 나왔으니 올해가 출간 40주년이다. 진화론 논쟁을 주제로 다룬 책들에서 《사회생물학》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어서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화론 논쟁의 역사와 그 핵심을 잘 정리한 《센스 앤 넌센스》(동아시아)는 사회생물학의 주요 입장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 따르면 윌슨은 사회생물학으로 인간의 성적 차이, 공격성, 종교, 동성애 등을 설명하려고 했으며 “머지않아 사회과학은 생물학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비판이 거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윌슨의 도발적인 주장은 ‘사회생물학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함께 하버드대학교에서 활동했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윌슨을 ‘환원주의자’라고 비난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 (사이언스북스, 2016)

 

 

 

굴드는 평생 결정론의 함정에 빠진 과학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선 학자이다. 그는 윌슨뿐만 아니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비판했다. 《판다의 엄지》(사이언스북스)도킨스를 비판한 칼럼(8장 『이타적인 집단과 이기적인 유전자』)이 수록되어 있다. 굴드는 도킨스의 주장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얽매인 악습’, 즉 환원주의, 결정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 리처드 도킨스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 2015)

 

 

 

그렇다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기적 유전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나는 앞서 이 책이 ‘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결정론’을 옹호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유전자 관점(gene’s-eye view)을 옹호하는 책으로 봐야 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서 출현빈도가 증가할 형질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변질하는 것에 대해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이 책, 아니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만 보고 도킨스를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도킨스는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에 수록된 『유전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도깨비’로 비유하면서 매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인간을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유전자의 노예라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았다. ‘유전자 관점’과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아주 작은 차이가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왜곡돼는 바람에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 자유 의지에 기반한 비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환경 영향을 극복하고 주체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인간은 주변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우리를 조종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이기적 유전자》 11장에서 그 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서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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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6   좋아요 0 | URL
<센스 앤 넌센스>에서 본성과 양육을 확실하게 구분하거나 양자 중 한쪽만 옹호하는 자세를 ‘넌센스’라고 말해요. 북사랑님이 읽으려는 책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책의 저자는 본성과 양육을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하네요. 저 역시 저자의 주장에 공감해요.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

2018-10-29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7   좋아요 0 | URL
제가 ‘입자’를 양자로 착각해서 잘못 썼네요.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18-10-2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할 힘이 있다고 설파한 도킨스의 글에서
저는 오히려 그럴 힘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우리는 힘을 합치면 어떤 자연 재해가 일어날지라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자연재해의 위력이 크다는 걸 말하듯이, 도킨스의 말은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걸 말해 주고 있는 것 같거든요.
어쨌든 도킨스의 그 말은 우리 인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존재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10-30 17:0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연대하는 힘을 잘 이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