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zzle #1 『호밀밭의 파수꾼』, 전 세계 청춘들을 위한 문학의 치유제

 

 

 

 

 

 

 

 

 

 

 

 

 

 

 

 

인간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소년은 아무도 '무사히' 자라지 않는다. 무난하게 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누구에게도 말 못했던 은밀한 두려움과 불안이,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외로움과 좌절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움과 사랑이야기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 역시 심한 성장열병을 앓고 있다. 이미 세 번 퇴학 을 경험했고, 성적 불량이란 이유로 네 번째 퇴학을 앞두고 있는 홀든에게는 학교와 선생님들, 친구들, 아니 온 세상이 다 역겹고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네 번째 퇴학을 당한 소년은 홀가분한 맘으로 뉴욕 한복판으로 떠난다. 클럽과 바를 전전하며 술을 퍼마시고, 캑캑거리면서도 연신 담배를 피워댄다. 성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섹스를 통과하기 위해 늙은 매춘부와 고통스런 경험도 맛본다. 어른이 되기란 정 말 이토록 힘든 걸까. 홀든은 인생 자체를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거대한 수수께끼처럼 여긴다.  

 

1953년 헤르만 헤세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혐오스럽고 문제적인 동시대를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문학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황야의 늑대』를 읽은 미국 독자들의 편지로 샐린저의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홀든 콜필드의 일탈적 여정에 대한 헤세의 애정과 혜안적인 평가는 후에 1960년대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의 문화에 헤세의 작품과 함께 『호밀밭』이 끼친 막대한 영향을 통해 정당화 되었다.『호밀밭』에서 아버지 세대의 위선을 읽어내고 더 나아가 베트남전쟁의 부도덕성을 주창하던 68세대의 전염병과도 같은 젊은 열정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샐린저의 문학은 청춘의 방황을 치유하는 처방전이 되었다.

 

 

 

 Puzzle #2 『아홉가지 이야기』, 수수께끼 같은 작가가 쓴 수수께끼 같은 단편

 

 

 

 

 

 

 

 

 

 

 

 

 

 

 

 

샐린저가 많지 않은 분량의 장편인 『호밀밭』으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면, 생전에 발표한 단 한권의 단편집『아홉가지 이야기』는 샐린저를 미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매혹적인 작가로 만들었다.

 

9편 중 우선 권하고 싶은 작품은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소설을 쓰는 참전군인 X 하사가 우연히 만난 열세 살 소녀 에스메는 당돌한 소녀다. “아저씨는 미국인치고는 꽤 지적인 편인 것 같아요.” “아저씨도 날 지독하게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묻곤 한다. 그리고는 “아저씨의 모든 재능을 그대로 지닌 채 귀환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진다. 종전 직후, 환멸과 무기력에 빠진 X 하사에게 부친 지 1년 지난 에스메의 편지가 전달된다. “전쟁, 그리고 줄잡아 말해 우스꽝스러운 생존 방법의 조속한 근절을 가져다 주기를 바랄 뿐”이라는 글이 X 하사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X 하사는 전쟁 와중에 두 가지 부덕, 세계의 저속함과 환멸을 만나지만 어린 에스메의 순수를 통해 자신을 수습한다. 순수의 이 같은 힘을 드러내는 구도는 샐린저 소설의 한 원형을 이룬다.

 

에스메와 같은 당돌함과 영민함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를 다룬 ‘테디’나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웃는 남자’ ‘작은 보트에서’ 등의 작품을 권하고 싶다. 저속함이나 환멸을 읽어보고 싶다면 대학 동창인 두 여인의 술자리 이야기인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나 사랑이 낳는 집착을 다룬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가 있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도 샐린저는 시종 유머를 잃지 않는다.

 

 ‘유머를 모르는 자에게는 진정한 진지함도 없다’던 베르그송의 말이 떠오른다. 적절한 유머는 작품의 진정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독자들을 유인한다. 샐린저는 이에 대해 단연 최고랄 수 있다.

 

또 한 가지, 단편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빼놓을 수는 없으리라. 샐린저에게 유명세를 안겨 주었으며 팬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다. 한낮의 햇살만큼이나 강렬한 단편이다. 샐린저의 중편소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의 주인공 시모어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샐린저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글래스가(家)의 한 인물인 시모어는 여름 휴양지의 해변에서 알게 된 시빌이라는 여자 아이와 바다에 들어가 바나나피시라는 상상 속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시모어가 지어낸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며 시빌은 “방금 한 마리 봤어요”라고 말하고 시모어는 “그럴 리가”하면서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한다. 둘은 마치 어떤 공모자들처럼 혹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태연하게 바나나피시가 실재하는 것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수수께끼 같은 삶을 산 작가가 쓴 글답다.

 

‘바나나피시’는 먹이가 숨은 구멍에 고개를 들이밀고 탐식을 하다가 결국 몸이 빠져나올 수 없어서 죽는 물고기다. 왜 이 물고기가 제목으로 들어갔을까? 샐린저가 『호밀밭』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인 이 두 번째 수수께끼가 궁금한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단편이 주는 긴박감과 생략의 여운을 기대하는 독자들 역시.

 

 

 

 

 Puzzle #3 『프래니와 주이』, 허무한 일상을 넘어서 삶의 의미 찾기

 

 

 

 

 

 

 

 

 

 

 

 

 

 

『호밀밭』이 미국사회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과 미국중산층이 지닌 윤리관의 허위와 기만을 10대 소년 홀든 콜필드의 3박4일간의 방황을 통해서 질타하고 있다면, 『프래니와 주이』에서는 20대 남매 프래니와 주이의 허무적인 일상을 넘어서는 삶의 의미 찾기와정이 담담하게 묘사되어진다.

 

줄거리만 정리하면 너무나 단순하다. 여대생인 프래니는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에 실망하며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고, 오빠인 주이가 프래니 스스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전부. 이밖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간, 플롯 또한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인 프래니와 주이의 대화는 너무나 생생하여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읽게 되며, 군데군데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기 바쁠 것이다. 또한 『호밀밭』의 결말부에서 잠깐 엿보였던 ‘선(禪)’ 불교 사상이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져 깊은 성찰의 시간으로 잠기게 해준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프래니는 죄의식을 씻고자 자연스럽게 연극을 버리고 ‘순례자의 길’이라는 기도책을 소중히 간직하며 열심히 ‘예수의 기도’를 하게 된다. 그녀가 애인인 레인 코텔을 처음에는 아주 반갑게 만났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순식간에 의사소통 단절을 경험하게 될 때도 기도책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기도야말로 프래니에게는 유일한 현실 극복 방안인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오빠인 주이는 이러한 프래니에게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길을 가르쳐 준다. 주이는 프래니에게 글래스 집안의 맏이였던 죽은 시모어가 강조한 ‘팻 레이디(Fat Lady)’ 이야기를 해 준다. 여기서 패트 레이디란 일체의 중생이자 예수 그 자체를 뜻한다. 팻 레이디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은 곧 에고(ego)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남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대아의 세계, 대승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결국 『프래니와 주이』에서 샐린저는 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욕망을 접고 끊임없이 신에게 기도하는 대신,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면서 남을 섬기며 열심히 사는 데 삶의 진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프래니가 연극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TV 배우인 주이가 이를 되돌려 놓는 대목은 그래서 더욱 암시적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진리라는 것.

 

이처럼 샐린저의 초기 작품에서는 이런 애타적 사랑이 지배적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으며 후기 작품에서는 에고이즘이 만연한 현대사회 속에서 탁월한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지닌 인물들이 겪는 불안과 소외로 인한 갈등을 통해 애타적 사랑의 필요성을 더욱 증폭시킨다.

 

 

 

 Puzzle #4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 시모어는 정체는?

 

 

 

 

 

 

 

 

 

 

 

 

 

 

 

『호밀밭』 이외에 샐린저가 펴낸 나머지 소설집 세 권은 모두 ‘글래스’라는 성을 지닌 뉴욕의 일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일종의 ‘글래스 가족사’라 할 텐데, 그중 한 권이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이다. 『목수들아』는 동명의 포제작과 ‘시모어, 서문(序文)’, 두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글래스 집안의 맏아들인 천재 시인 시모어 글래스. ‘목수들아’는 그가 자신의 결혼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손님들을 골탕 먹이는 이야기를 동생 버디의 시점으로 그렸다면, ‘시모어, 서문’은 그로부터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이제 중년의 교수가 된 버디가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자살한 형 시모어의 천재적 면모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두 편의 소설에서 주인공인 시모어는 정작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는 셈이다. 대중들 앞에서 등장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은둔 본능(?)이 작품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주인공이 나오지 않는 이 기묘한 소설들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시모어의 초상은 ‘괴짜 천재 시인’이라 요약할 만하다. 그 자신 4개의 사어(死語)를 포함해 9개 국어를 완벽히 구사한다고 소개한 버디라는 인물은 시모어를 “그는 분명 우리에게 진짜인 모든 것을 의미했다”며 숭배한다.

 

도대체 이 ‘시모어’라는 사람은 누구인 걸까. 그의 독특한 이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셈-켈트족 동양인”은 평생 한시(漢詩)와 일본 하이쿠를 쓰고 즐겼으며 물론 영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로도 시를 썼다. 비범한 두뇌의 소유자인 그는 학위 과정을 어린 나이에 마치고 18살 무렵부터는 대학 교수로 봉직했다.

 

『호밀밭』은 읽은 독자라면 흥미로운 문장을 만나게 될 것이다. 화자 버디의 이런 진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출간한 유일한 장편의 젊은 주인공이 시모어를 많이 닮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시모어가 홀든 콜필드의 ‘성인 버전’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너무 행복해서”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던 이 인물은 아내와 함께 간 휴가지에서 홀연 자살하고 만다. 시모어는 갑자기 자살을 선택했는가? 궁금하면 방금 앞에서 소개한 단편집『아홉가지』에 수록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읽어볼 것.

 

 

 

 Epilogue  네 가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한 권의 해답, 『샐린저 평전』

 

 

 

 

 

 

 

 

 

 

 

 

 

 

 

샐린저가 호밀밭이 아닌, 하늘의 파수꾼이 된 지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오늘이 바로 그의 기일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4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지만 출판은 삶을 망치는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병적으로 외부 접촉을 싫어했으며, 작품을 영화로 만들려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문 앞에서 쫓아낸 적도 있다.

 

그리고 특유의 고집스런 은둔자답게 책표지와 구성에 대해서 세세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샐린저는 에이전트를 통해 자신의 책에 구성적인 삽화를 넣지 않고, 해설문은 붙이지 않으며, 작가 사진도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는 샐린저가 자신의 책을 출간할 때 전 세계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으로 2001년, 『호밀밭』출간 50주년을 맞아 민음사에서 낼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은 표지에 대한 세세한 조건을 요구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샐린저의 소설, 특히 그의 대표작인 『호밀밭』을 읽기 시작한 독자라면 무척 당황스러울 것이다. 작가의 약력도, 그리고 소설에 대한 어떠한 설명 없이 그저 ‘소설’ 자체만 남아 있으니까. 우리에게 샐린저는 소설로만 남은 미지의 작가였던 것이다. 소설 텍스트 자체가 샐린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텍스트로 무궁무진한 해석을 할 수 있어도 작가의 정체나 진짜 문학적 의도를 읽어내기가 힘들다. 작가가 쓴 작품 하나만 가지고도 그 작가의 문학을 단번에 이해하기도 힘든데, 처음으로 출간된 1951년부터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해설문을 넣지 않은『호밀밭』이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생전에 출간된 샐린저의 전 작품을 읽은 독자가 있더라도 샐린저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샐린저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서평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정체를 궁금해한 독자들의 생각을 몰래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세상 앞에서 드러내는 것 자체를 꺼려한 샐린저의 성격이라면 독자서평이나 자신에 대한 온갖 추측과 소문에 대해서 별 관심 없었을 것이다.『호밀밭』을 읽은 열렬한 독자, 심지어 그 소설을 읽고 존 레논을 암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마크 채프먼이 자신을 찾아온다고 해도 절대로 만나려고 하지 않을지도. 그야말로 샐린저는 문장의 흔적으로 남겨진 자신의 사소한 편지글마저 공개하기를 꺼려하는 은둔의 파수꾼처럼 생활했으니까.

 

샐린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샐린저 생전에 그의 평전이 공식적으로 출간되지 전에 법정 공방까지 갈 정도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샐린저는 저작권 및 사생활 보호 명목으로 자신의 평전에 인용된 개인적 편지, 신상 정보, 자신이 언급된 모든 인터뷰 기록을 삭제시킬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가 죽은 뒤인 2010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다.

 

이번에 나온 평전의 출간은 무척 반갑기만 하다. 샐린저의 미발표 소설이 처음으로 공개된다는 사실에 반가운 이유이기는 하지만, 드디어 그동안 수수께끼에 쌓인 샐린저라는 작가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샐린저의 열렬한 팬으로써 쌍수 들고 환영하고 싶다. 아, 물론 하늘에 있는 샐린저 입장에서는 기분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을 조망하면서 각각의 작품이 쓰인 맥락을 짚어내고, 동시에 연대순으로 샐린저의 전 작품을 살핌으로써 그의 인생을 심도 있게 관찰할 수 있다. 샐린저의 삶을 먼저 알고 난 뒤에 그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작품들을 먼저 읽은 뒤에 평전을 읽는 것이 흥미진진할 것이다. 네 개의 수수께끼, 즉 『호밀밭』『아홉가지 이야기』『프래니와 주이』『목수들아』에 도전하고 나서 그 다음에 ‘샐린저’라는 은둔의 파수꾼이 살고 있는 『샐린저 평전』에서 해답을 구해보자.

 

샐린저를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현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신화라고 말하고 싶다. 완성도 높은 문학성뿐만 아니라 은둔 생활로 그는 이미 전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신화’가 되었다. 완강한 기성 사회의 위선에 좌절하는 청춘의 고통,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꿈틀거리는 젊음의 열정, 섬세하면서도 치밀하게 펼쳐지는 일상적 언어의 축제. 그래서 샐린저의 신전은 늘 전 세계의 젊은 숭배자들로 북적거린다. 오늘도 인생의 수수께끼를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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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01-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글만 읽어도 샐린저에 대한 개략적인 것을 파악할 수 있겠어요. 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하나만 읽었는데 저자의 요청으로 사진이 표지에 없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어요. 생전에 노출되기 꺼려했던 것도요. cyrus님의 깊이 있는 글 잘 읽고 가요. 평전에 대해 더 듣고 싶군요^^

cyrus 2014-01-28 23:58   좋아요 0 | URL
요즘 샐린저 완독에 푹 빠져 있어요. 평전은 지금 읽고 있는 중입니다. 분량이 적지 않은데도 질리지가 않아요. 사실 그동안 샐린저의 소설을 읽고나면 작가의 정체가 너무너무 궁금했거든요. 다 읽고나면 샐린저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고 싶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1-2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셀린저 단편 소개해 놓은 것을 읽으니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특히 상처입은 군인 이야기...

cyrus 2014-01-29 00:02   좋아요 0 | URL
'에스메를 위하여'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아요. 그러다가 군인이 소녀를 만나면서부터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집니다.

낭만인생 2015-03-1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면서 이토록 완성도 높은 글이 가능한가요? 프린트해서 읽으니 화면보다 잘 읽혀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겹겹 -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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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마음 아프고 슬픈 단어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고 슬픈 단어들이 있다. ‘위안부’, 혹은 ‘위안부 할머니’는 그 중 슬픔의 강도가 아주 센 단어 중 하나다. 누군가를 위로해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말이 어떤 이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단어로 쓰인다. 일제 점령기, 전선으로 끌려가 일본 군인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부른다. 실은 일본인 입장에서의 '위안부'보다 '성노예'라는 강제성을 담은 용어가 맞다. 흔히 쓰이는 '종군 위안부' 역시 자발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어 맞지 않은 표현이다.

 

위안부 소녀상이 만들어졌을 때, 연로한 할머니들의 얼굴 주름 하나하나에 할머니들의 소녀 시절이 까마득하게 겹쳐졌던 기억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일 것이다. 소녀상으로는 달래질 수도, 위로받을 수도 없는.

 

 

 

 

어디에 있는 지도,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일본군의 총칼에 떨던 그녀들, 일본 제국주의 야욕에 꽃다운 청춘을 약탈당한 그녀들, 만주에서 윈난,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전장 최전선의 위안소로 내몰렸던 그녀들. 70여 년 전 중일전쟁 당시 가족과 조국을 뒤로 하고 중국으로 떠난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연이다.

 

여리고 순한 조선 소녀들을 전쟁터에 몰아넣었다. 대다수가 성인이 안 된 10대 소녀들이었고 총알이 빗발치는 험한 전쟁터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했다. 사람에게 속아 사람에게 유린당하는 삶은 비극적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현실 밖에 보지 않는다” 카이사르가 『내전기』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같은 의미로,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또한 우리 보통 사람들인 것 같다. 오늘 우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그런 것이 아닐까? 불행한 역사를 만나서 한 평생 피맺힌 절규와 한스러운 세월을 지나왔고 그러고도 배상받지 못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너무 아프고 처절해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 같다.

 

핏물어린 눈빛과 증오의 몸짓을 그대로 받아내야 했던 꽃 같던 청춘들.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중국으로 끌려간 청춘들은 전쟁이 끝났어도 나고 자란 땅으로 회귀하지 못했다. 모국어를 잊었고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잃었다. 두 나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던 이들은 지난했던 삶의 상처들을 홀로 쓰다듬으며, 마치 애초부터 윤기가 없었던 것처럼 메말라갔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낙인은 흠뻑 젖어도 썩지 않는 한(恨)이 되어 가슴 깊이 뿌리내렸다.

 

 

 

 Scene #2  할머니들에게 아직도 해방은 없었다 

 

 

 

 

 

 

고향마저 잃은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사진작가 안세홍씨가 발품을 팔며 온몸으로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아냈다. 깊게 파인 주름, 사방에 널브러진 손때 묻은 물건, 글썽이는 눈망울에서 할머니들의 분노와 회한, 슬픔이 그대로 느껴지는 흑백사진들.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분들의 얼굴과 육체를 담은 사진은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그것을 보는 일은 숨이 멎는 경험이다. 무겁고 그늘진 무표정, 그 굵고 깊게 패인 주름, 야윈 육신이 취한 헝클어진 자세, 그럼에도 어떤 결기가 느껴지는 얼굴. 뿌리 잃은 사람들의 헛헛함을 사진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정물화마냥 서늘하게 전하고 있다.

 

사진 속 10여명 할머니들은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6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낸 한 맺힌 절규를 소리 없이 쏟아낸다. 할머니들은 국적은 중국이나 북한으로 돼 있지만 남북한은 물론 중국으로부터 모두 외면당한 채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천황이 연합군에 패배를 선언하고 태극기 물결이 전국 곳곳에 넘실거리던 그 기쁨의 순간에도 중국 내 위안부 할머니들은 소련군을 피해, 중국인의 보복을 피해 숨어 다녀야 했다.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의지할 데도 없던 이들은 ‘그저 살기 위해’ 중국인과의 결혼을 택했지만 대부분은 불행으로 끝났다. ‘한 사람의 일생이 어쩌면 이리도 악운의 연속일 수 있을까’ 싶은데, 안세홍 씨의 사진은 이들의 고통을 현재의 단면으로 잘라 보여준다. 거울 안에 비친 한숨 섞인 얼굴, 누추한 문을 나서는 구부정한 뒷모습 등 일상의 틀 안에 잠겨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은 20대의 아픔이 70대, 80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둥닝(東寧)의 오지 마을 양로원에서 만난 이수단 할머니는 신문지에 담뱃잎을 말아 피운다. 연기 속에 시름이 한 가득이다. 평안남도 숙천의 열아홉 살 처녀는 1940년 선금 480원을 받고 만주 벌판으로 왔다. 허드렛일을 하는 줄만 알았는데 일본군 위안소였고 ‘히도리’로 불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족 남자와 결혼해 살았다. 성병 때문인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카메라 앞에서 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조선말 잊어버린 게 가장 가슴 아파.”

 

경남 하동군 화개면이 고향인 배삼엽 할머니는 열세 살, 월경도 하기 전에 네이멍구(內蒙古) 바오터우(包頭)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왔다. ‘5번 방의 게이코’가 됐다. 일주일 동안 거기서 피가 났다. 북한 국적을 가지고 살다 1999년 한국 방문을 위해 국적을 중국으로 옮겨 고향에 왔더니 오래전에 사망신고가 돼 있었다. 베이징에 사는 할머니는 한국말을 잊지 않으려고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오는 구슬픈 노랫말은 뿌리 뽑힌 생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한 마지막 사투이다.

 

 

 

 Scene #3  '할머니들의 기억'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많이 아는 듯하지만, 중·일전쟁 때 중국으로 끌려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심지어 일본군에 의해 고향에서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간 분도 있다. 그 분들은 일제에 의해 청춘을 짓밟혔고, 지금도 가난과 외로움에 타국에서 고통 받고 있다.

 

우리가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 할머니들 피해사례에도 관심을 가져야 될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피해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여성들의 삶의 존엄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양한 여성들의 삶에 주목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들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여성은 조선뿐 아니라 대만, 중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 거주하고 있다. 위안부 사죄는 한일 역사관계로만 치부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전쟁이 멈춘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의 추악한 기억과 고통은 지금도 생존한 할머니들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그 무거운 어깨가 언제쯤 가벼워질까? 과연 그렇게 될 수는 있겠는가? 잿더미 속에서 떨고 있는 인간 앞에서라면 자신의 가장 치욕적인 기억조차 잠시 내려놓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국내에 있는 할머니들은 신고만 하면 정부차원의 생활지원금이나 기타 시민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중국과 북한 당국 모두 아무런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존재에 대해 알면서도 지원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할머니들의 증언이 부정당할 때, 겨우 열어준 그들의 입을 다시 닫히게 만들지 않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그리고 피해여성들의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저자가 중국에서 만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는 모두 12명. 그 가운데 벌써 8명이 세상을 떠났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대부분 90살 전후이기 때문에 아마 몇 년 후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주인공들이 모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이 분들도 눈 감기 전에 진실한 배상, 아니 진실한 관심과 위로를 들을 수 있을까?

 

바로잡지 않은 역사는 책속에 글자 몇 줄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 그대로 사람들의 뇌리와 삶에 선명하게 남아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불치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역사가 상처와 흉터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선에서 지속적인 관심과 위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해방의 응달 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전 세계 곳곳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도 기억해야 한다. 거대한 역사의 상처가 아닌 그 분들의 한 맺힌 가슴을 이 한 권의 사진집으로나마 오랫동안 기억되고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렀으면 좋겠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겹겹이 모이면 겹겹이 쌓인 할머니들의 한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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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런 - 뉴욕 파슨스대 최고 명강의
에린 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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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린 시절만 해도, 필름을 끼워넣는 사진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 중에서도 필름은 '코닥'이라는 인식이 뇌리 속 깊게 박혀있었다. 그도 그럴 만했던 게 어른들이 필름을 사오라고 할 땐, "코닥 필름 한통 사오라"고 했으니, 코닥은 필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코닥은 '조지 이스트먼'이란 사람이 1888년에 세운 사진의 혁명을 이끈 회사다. 1976년 코닥은 필름 시장에서 90%, 카메라 시장에선 85%의 점유율을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 공룡 기업이었다. 그랬던 코닥이 2012년 맨하탄 법정에 파산신청을 낸다. 필름을 넘어 사진의 대명사로 불리우던 코닥이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파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 중 하나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만든 곳이 바로 코닥이라는 사실이다. 코닥의 수뇌부들은 카메라 산업에서 디지털 시장이 커질 것을 누구보다 먼저 예측해 1975년 세계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했다. 이는 소니보다 6년이나 빠른 시점이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 있었다. 코닥은 경쟁 회사들보다 소극적인 마인드로 스스로 처음 만든 디지털카메라가 기존의 자신들이 선점하고 있던 필름 시장을 잠식할 것을 우려했다. 코닥은 미래에도 사람들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현상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어쩌면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코닥은 오히려, 디지털카메라 기술은 꽁꽁 숨겨둔 채, 필름 카메라의 연구 개발에 더욱 몰두했다.

 

당시 코닥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일본 후지필름은 미국에 생산 라인을 구축하며 시장 파이를 늘려갔다. 코닥은 이런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그저 앞만 보고 달릴 뿐, 그 이상의 것들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까. 1980년대 후반부터 소비자들이 디지털 카메라로 움직이고 있다는 시장의 신호를 무시하다가 소니 등 새로운 경쟁자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오자 1990년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헐레벌떡 뛰어든다.

 

창고 속 깊숙이 숨겨뒀던 15년전 디지털 카메라 기술로는 이미 시장을 선점한 경쟁자들과 싸움이 되지 않았다. 필름 비즈니스에 대한 미련과 업계 최고라는 오만함이 코닥을 나락의 길로 인도한 셈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는 속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132년이나 고공 비행하던 코닥의 몰락은 이처럼,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 10년간 비즈니스 업계의 화두는 단연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혁신’이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유사 브랜드, 지나치게 다양한 대체 상품, 빠르게 싫증내는 소비자 등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맞게 비즈니스를 성장시키고 차별화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혁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소비자의 가치를 바꾸고 리드하려는 노력보다는 기존의 것에서 기능적으로 편하게, 디자인적으로 예쁘게 개선하는 정도로만 점진적으로 혁신을 진행해왔다. 이에 대해 뉴욕 파슨스대학교 에린 조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이 간과해왔던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관행적으로 해왔던 기존의 혁신 방향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린 조의 『아웃 런』은 우리가 지금까지의 시장, 브랜드, 소비자 심리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던 점들을 조목조목 예시하면서, 기존의 혁신 방향을 뒤집어 마켓 리더가 된 다양한 기업들의 ‘디자인적 사고’가 어떻게 변화된 세상을 만드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영원한 승자가 없는 세상에서 후발주자였던 기업이 어떻게 군림하던 선두주자 기업을 물리치는지, 한물갔다고 평가된 기업이 어떻게 잃어버린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지,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한 기업이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해나가는지 등을 다양한 아이디어와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 기업들이 제대로 된 혁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냉철하게 꼬집는다.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 판단하고 의존하는 방식, 과거 양적인 데이터에 근거해 미래를 내다보는 방식, 기존의 관념이나 체계를 그대로 따르며 가정하는 방식 등 오늘날 대다수의 기업들이 비즈니스 세계의 절대적 지침처럼 여겨왔던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울러 ‘성능의 향상’이라는 기술적인 관점에서만 혁신을 개발하고 진행하는 것이 얼마나 차별화 없는 경쟁력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기술의 발전이 일정 궤도에 오르고 나면 각 브랜드마다 성능이 어떻게 다른지 소비자들 스스로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의 해법은 ‘경험의 의미’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소비자에게 각인시키는 경험이 얼마나 새롭고 의미 있느냐에 따라 혁신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혁신 방향인 ‘급진적 혁신, 의미의 혁신’의 대안으로서 꼭 알아둬야 할 개념이 ‘디자인 경영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안하는 ‘디자인적 경영 전략’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주장하는 ‘디자인적 경영 전략’은 경영자가 경영 전략을 짜고 의사결정을 하는 데 디자인적 마인드와 프로세스를 적용해,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브랜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인지하고 추구하려는 노력, 즉 디자인적 사고 과정을 통해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주는 혁신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혁신을 디자인으로 승부해야 한다거나 디자이너가 경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관점의 디자인 경영과는 확연히 다른 차별화된 전략이다.

 

저자는 풍부한 글로벌 기업 사례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문제인식부터 접근, 수행에 이르기까지 뼛속까지 독자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확대할 수 있는 ‘디자인적 경영 전략’의 방법론을 공감대 있게 제시한다.

 

혼자서 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러닝’의 개념을 뒤집어 함께 뛰는 느낌을 공유하고(나이키플러스),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할인판매를 하지 않던 명품브랜드의 관점을 역으로 이용해 급매 처분하고(길트닷컴), 골치 아픈 러시아산 작은 다이아몬드를 처리하는 방안으로 결혼기념일 반지라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이터너티 링) 등,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상식과 경험을 뒤집는 것이 어떻게 차별화된 혁신 전략의 밑그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혁신이 세계적 화두지만, 거기엔 기술을 넘어 경험의 의미가 담겨져야 한다. 단지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끝났고 다시 오지도 않을 것이다. 혁신은 사람에 관계된 일이고, 삶의 질을 풍부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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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정치가이자 뛰어난 문인이었던 키케로는 ‘책 없는 방 안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르느와르의 그림 「책 읽는 여인」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책을 읽을 때 육체에 영혼이 깃든다’고. 독서를 하고 있는 여인의 빛나는 얼굴은 그녀의 삶 속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생기 있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같다. 이 여인의 모습을 보면 독서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세상을 넓히고 인격을 높인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모두가 예찬할 것 같은 독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특히 의외로 철학자들 모두가 독서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경우 책을 구성하는 문자 자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보면 문자의 고안에 대한 신화가 하나 나온다. 이집트의 신은 수, 기하학, 천문학에 이어 문자를 고안한 후 왕에게 보여준다. 왕이 문자의 용도를 묻자 신은 인간을 더 지혜롭게 만들며 인간의 기억력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인간은 문자와 글에 대한 믿음 때문에 외부의 기호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해 내거나 상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이 대화편에서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책이 아닌 상대방과 서로 적절히 논박하며 진행되는 살아있는 대화만이 진정한 지식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저작이 모두 대화편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서술 형태로 대화하는 방식을 취해 글로 씌어진 말의 약점을 조금이나마 보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글로써 서술된 것이 아니라 행위와 탐구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런 면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오는 언명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며 책을 읽는 자를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는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한 줄의 글을 읽을 때도 눈으로 훑고 지나쳐 갈 일이 아니라 글쓴이의 정수를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수박 겉핥기라는 속담처럼 독서를 할 때 행간의 뜻보다는 표면적 의미만 읽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책에 대해서 그렇게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는 “책은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세계의 재현이고 모방일 뿐이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재현에 필요한 거울이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하게 깨끗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라고 해 플라톤과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플라톤은 세상의 사물을 참 존재인 이데아를 모방한 불완전한 실재로 봤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책은 이데아에서 2단계나 떨어진 그림자 같은 것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책은 쇼펜하우어에게도 실재 자체가 아니라 흠 있는 모방이었다.책을 통한 지식의 습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은 동양에도 있었다.

 

 

 

 

 

 

 

 

 

 

 

 

 

 

 

 

명대의 철학자 진헌장의 경우 매일 독서에만 집중해 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고 도를 추구했으나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책을 통한 공부를 버리고 정좌한 후 사색만 죽어라고 해 마침내 ‘이르는 곳마다 천리를 체인한다’는 학설을 터득하게 됐다.

 

 

 

 

 

 

 

 

 

 

 

 

 

 

 

 

 

태워버려야할 책이라는 뜻의 『분서』라는 제목의 책을 지은 명대의 유학자 이지는 인간의 본성을 아이들의 마음인 ‘동심’으로 파악하면서 “학자들이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알아서 오히려 동심을 저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유가의 경전들을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 채로 적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상가로서 남녀평등론을 주장하고 틀에 박힌 해석만 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한 이지는 결국 정치적 박해로 투옥당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철학자들은 독서 자체를 거부하기보다는 책에 담긴 내용을 곱씹어 보는 일 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비판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뉴턴의 중력이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보완된 것처럼 전통만 신봉했다면 학문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대부분의 철학자가 독서를 중요시했고 책을 수집하는 일을 사랑했다.

 

책은 이렇게 사람들을 일깨우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탄압의 대상이기도 했다.대부분의 독재자들은 지배의 편의성 때문에 대중이 문맹이길 원하지만 피지배자들이 한번 익힌 읽기 능력은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검열을 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익히 알고 있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태부터 시작해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이 자유를 호소하고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로 『돈키호테』를 금서 목록에 올린 것까지 검열은 권력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 존재했다. 심지어 민주 군대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한국의 국방부도 금서 목록을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철학에서 책은 더 이상 해석 대상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철학에서 쓰고 있는 ‘텍스트’라는 말은 책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꿈, 문학 등도 포함된다. 해석학의 경우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이든 텍스트로 보기 때문에 넓게 생각한다면 이 세계 전체가 텍스트이며 발생하는 모든 일이 텍스트다. 모든 세계의 현상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해석학의 중점 사항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하나의 텍스트를 가지고 해석의 다양성이 어디까지 허용될지도 문제가 된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할 때 해석의 한계는 어디인지도 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해석에도 한계가 있어 너무 자의성 짙은 해석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움베르토 에코가 있는가 하면 오독조차 텍스트를 풍부하게 한다며 모든 해석의 지평을 열어놓는 철학자도 있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한 가지 길만 열어놓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을 읽고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책은 하나의 세상이며 세상도 하나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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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25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음악도 하나의 세상이며 세상도 하나의 음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쇼펜하우어와 니체도 책뿐 아니라 음악과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사실이 떠오르네요.

책을 마음껏 읽기 위해 아예 자신의 성에 틀어박혔던 몽테뉴조차 '책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일'을 늘 경계했던 인물이었지요.

* * *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책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우리에게 최선의 부분인 쾌활성과 건강을 잃고 만다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저버리자. 나는 책을 읽는 결과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몽테뉴)

cyrus 2014-01-25 23:02   좋아요 1 | URL
저도 나름 책을 엄청 좋아하는 성격인데 독서에 관심 높은 사람 아니면 책 이야기를 잘 안해요. 요즘은 책 밖으로 나와 주변에 접할 수 있는 문화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특히 전시회 관람은 책에 인쇄된 그림을 보면서 생기는 느낌과 전혀 다르더군요. 그리고 너무 책에만 푹 빠져 있으면 좋은 벗을 잃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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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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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화가 폴 고갱은 1987년 타이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표현하면서 위와 같은 문장으로 그림 제목을 대신했다. 눈 앞을 가득 채우는 사람과 풍경의 모습을 매일같이 지켜보면서, 그것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했을 터다.

 

『지구의 정복자』 저자 에드워드 윌슨도 같은 질문을 품었다. 그는 고갱과 똑같은 질문을 던진데 그치지 않고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유전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 사회심리학, 역사학을 모두 동원해 인류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설명했다.

 

이 책은 인류 진화를 다뤘다. 저자는 6천만년 전에 지구 정복을 완수한 개미와 같은 사회성 곤충과 인류의 삶을 비교하면서 지구가 어떻게 시작됐고, 이 과정에서 인류를 어떻게 문명을 만들어냈는지를 설명한다.

 

개미는 여왕개미와 그를 돕는 일개미, 병정개미가 모여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한다. 외부 적이 등장해 개미의 집터를 공격하려고 하면, 일개미는 집을 지키기 위해 떼를 지어 적을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일개미는 자손을 남기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저자는 개미를 예로 들며, 이기적인 행동만으로는 인류 문명을 만들 수 없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집단을 배려하는 마음과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 협력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인간 유전자의 ‘이기적 본능’이 아닌 ‘이타적 본능’이 인간 진화와 문명에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진화를 다룬 이와 비슷한 책은 과거에도 있었다. 과학자 리처드 도킨슨이 쓴 『이기적 유전자』다. 도킨슨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이 유전자가 만들어낸 기계라고 정의하며,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문명을 만들고, 진화를 하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자손을 퍼뜨리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됐다고 본 셈이다.

 

유전자는 자신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를 선택한다. 그래서 도킨스의 이론을 ‘혈연선택이론’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사촌, 다른 하나는 팔촌이라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사촌을 구한다. 사촌의 경우가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수가 훨씬 많을 테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혈연선택이론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 이론은 이미 진화론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유전자는 극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앞서 예처럼 유전자가 복제가 용이한 유전친화적 상황만을 선호한다면 유전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기적인 선택만을 할 수 있다. 유전자 개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면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닌 인간이 이타적인 선택을 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타적 행위조차도 유전자 복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이기적 선택의 발로인 것이다.

 

사실 윌슨 또한 혈연선택이론이 주류로 자리 잡는 데 많은 공을 세운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인 『지구의 정복자』에서 현대 진화 생물학계의 주류 이론이자 도킨슨이 주장한 ‘혈연선택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혈연선택 이론에 기반한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사회성 생물의 진화와 이타성의 진화, 헙력의 진화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개미와 꿀벌의 삶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혈연선택을 버리고 이타적 집단의 생존확률이 높다고 주장하는 ‘집단선택이론’으로 돌아선 것이다. 윌슨에게 있어 이타적 공동체와 이를 가능케 하는 ‘진사회성’의 유무야말로 인간 진화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진화를 이기적 기제로만 설명한다면 공동체를 설명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알다시피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반에는 이타적 행위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있어서 원로급으로 추앙받는 윌슨으로서는 인간이 지닌 ‘진정한 이타심’에 대한 믿음을 끝내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대안으로 집단 선택과 개체 선택이 상호 작용하는 ‘다수준 선택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이기적인 본능만 유전자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이타적 본능도 유전자 안에 함께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80세가 넘은 윌슨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전복시켰다. 적지 않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그는 연구와 대중을 위한 강연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오랜 학자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무리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지금도 윌슨은 연구논문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겠지만, 논란이 멈추고 있지 않은 이 책이 위대한 원로 진화론자의 유작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윌슨이 그동안 주장했던 이론과 관점을 버린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커리어를 감안한다면 대단한 용기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쌓아온 학문적 업적의 기반에는 혈연선택이론이 있었고 이를 버린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그의 학자로서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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