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식 사진과 팔 할은 허세로 이루어진 글을 볼 수 있고, 눈이 민망해지는 자극적인 사진이 공유된다. 그래도 페이스북은 무익한 내용만 가득하고 시간만 낭비하게 하는 소셜 네트워크는 아니다. 그 속에서도 유익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모임이 있다. 좋은 책을 서평으로 소개하고, 정기적으로 독서 토론 모임을 하는 그룹도 있다. 내가 가입된 독서 관련 모임 중에 ‘독사모’라는 비공개 그룹이다. ‘독하게 독서하는 모임’의 준말이다. 여기 독서 모임에 단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다. 거기에다가 독사모 회원들의 서평이나 독서 모임 소식들을 눈으로만 확인하는 유령 회원이다.

 

지난 주 금요일 밤에 독사모 그룹에 이런 글이 올려졌다. 잠깐! 글쓴이의 가명을 뭐로 하지? 그래, ‘그 녀석’이라고 하자. 절대로 글쓴이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 가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냥 생각하는 단어가 ‘그 녀석’뿐이다. 요즘 ‘무한도전’에서 출연하지 않는 ‘그 사람’을 의미하는 가장 핫한 별명 아닌가.

 

그 녀석은 독사모 모임이 이름만큼 전혀 독하지 않다면서 처음부터 도발적으로 글을 시작했다. 자신은 독사모에 한 달에 책 100권을 읽는(!) 회원이 있고, 좋은 책 추천과 서평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독사모의 정체가 뭐 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 녀석이 원하는 독하게 독서하는 모습은 이런 것이다. 자신이 읽은 책의 서평을 남기고, 독자 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읽고 독서 토론을 하는 것. 결국, 그 녀석은 독사모 자체가 뜬구름 잡는 모임이라고 자체 평가했다.

 

그러자 또 다른 독사모 회원 한 분이 이런 댓글을 남겼다. 그 녀석 당신이 원하는 좋은 책이 무엇이며 도대체 ‘controversial'한 책이 어떤 것인지 물었다. 나는 페이스북 그룹 안에 회원들끼리 댓글 논쟁을 주고받는 상황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분명히 이 문제의 글 하나가 불타는 금요일 겨울밤에 어울리는 화끈한 댓글 전쟁터로 변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어떤 답글을 남기는지 지켜봤다. 그런데 그 녀석은 답글을 남기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독사모를 은근히 까는 듯한 글을 남긴 채 스스로 그룹을 탈퇴한 것이다. 확실한 건 그 녀석은 독사모의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룹을 탈퇴했다. 그 녀석이 답글을 달면 나도 이 댓글 전쟁터에 참전하고 싶었는데 아무 일 없이 독사모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사실 나도 그 녀석이 생각하는 독하게 독서하는 기준이 무척 궁금했다. 특히 한 달에 책 100권 읽기에 관해서 묻고 싶었다. 그 녀석은 자신이 한 달 네이버 전자북 결제 이력이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한 달에 무려 1000권 정도의 전자북을 결제한다고 언급했다. 나는 그 녀석이 전자북을 결제한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그걸 다 읽기는 했었을까. 그리고 이왕이면 전자북 결제 이력을 공개하려면 책 제목도 화끈하게 보여줘야 했다. 그 녀석이 그토록 선호하는 ‘controversial'한 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북 가격이 100원, 900원인 걸로 봐서는 그 녀석이 결제한 전자북이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네이버 북스 앱스토어에서 100원, 900원으로 결제할 수 있는 분야는 장르소설이다. 전자북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무협 소설의 대여 가격 또는 구매 가격이 100원부터 300원까지 있다. 아니면 웹툰을 결제했는데 일부러 책을 샀다는 식으로 거짓말 했을 수도 있다.

 

그 녀석이 장르소설을 독하게 읽는 것을 잘못 읽었다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너무 장르소설에만 치중해서 읽는 편식 독서는 문제가 있지만, 그 녀석 본인이 이런 독서 자체를 즐기고 만족하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무턱대고 무시하거나 비난해선 안 된다. 본인이 어떤 분야든지 간에 독서 자체를 좋아하고 있다면 간섭하고 싶지 않다. 괜히 이런 책만 골라 읽느냐고 핀잔을 주면 상대는 그저 허세 덩어리가 잔뜩 낀 잔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그런데 내가 그 녀석에게 정말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 달에 책 100권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걸 자부심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전자북 결제 이력을 친절하게 인증샷으로 첨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리 인증샷을 올려봤자 그 녀석이 한 달에 책 100권을 읽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다. 일 년에 책 100권을 읽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한 달에 100권을 읽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근자감’, 즉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독서 토론을 위한 책이 꼭 양 극단의 평가가 엇갈리면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독서 토론은 책에 대한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해하는 것이다. 책에 대한 상대의 의견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해서 반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내 생각과 다르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너그럽게 받아들여도 될 일을 ‘내 생각과 다르니까 너는 틀렸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라는 전투적인 마음으로 독서 토론을 하고 싶다면 정치나 사회 관련 토론 모임에 가입하는 것이 낫다. 그곳에서도 독서 토론을 할 수 있다. 다만 마음 단디해야 한다. 전투력과 방어력을 상승시켜 줄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즐비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 녀석은 독서 토론에 직접 한 번도 참석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이라도 독서 모임에 가본 적이 있더라도 저런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은 상대 입장에서는 무척 피곤하다.

 

마지막으로 책 한 권 읽고 난 뒤에 서평을 써야만 완벽한 독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독선적인 생각이다. 한 달에 책 100권 읽고, 그 100권에 관한 서평을 썼다는 사실을 인증하는 사진을 올렸다고 해서 그것이 독하게 책 읽는 훌륭한 자세일까. 하루에 소셜 네트워크나 여기 알라딘을 포함한 온라인 서점에 수많은 서평이 등재된다. 공개된 상태에서 작성된 엄청난 수의 서평들 중에 분명 누군가는 타인이 쓴 서평 한 편을 읽는다, 자신이 예전에 읽었던 책 서평이라면 상대방의 평가가 궁금해서 읽을 수 있고, 언젠가 읽어보고 싶은 책 서평을 발견하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어서 읽을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타인의 서평을 읽는다. 다만 서평이 모든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타인이 내 서평을 읽는 것이 원하지 않는다면 비공개로 설정해도 된다. 또 서평을 작성할 시간이 부족하면 안 써도 되고, 그냥 서평을 쓰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으면 안 써도 그만이다. 올바른 독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서평 쓰기가 의무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선택이다. 앞에서도 내가 강조했지만, 책 읽는 행위 자체를 본인이 즐겁게 느끼고 있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를 하고 있다는 마음의 증거이다. 독서 후 서평 작성에만 신경을 쓰이면 오히려 독서의 재미를 반감할 수 있다. 특히 한창 책을 읽어야 할 청소년들이 그렇다. ‘독서+서평=올바른 독서’라는 단순한 인식을 책 안 읽는 아이들에게 알려준다면,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독서+서평=지루한 독서’라는 의도치 않은 답으로 유도할 수 있다.

 

나는 그 녀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페이스북 계정을 확인했다. 자신이 페이스북에 직접 올린 몇 편의 추리소설 서평을 봐서는 평소에 책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혼자서 여러 권 책을 즐겨 읽다 보니 남들과 함께 책 한 권을 깊이 있는 소중한 시간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스스로 '고독한 애서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혼자 독서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책 한 권을 읽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 독서하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 조용히 책 읽는 것도 좋지만, 되도록 광장에 나가서 여러 사람과 책을 읽는다면 책 속에 있는 지식만 얻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인연도 만날 수 있다.

 

그 녀석이 남긴 글 덕분에 지금까지 내 독서를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책 속에 지식만 찾으려다가 그만 거기에 갇혀버려 빠져나올 수 없는 위험한 독서를 경계할 것. 고정 관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책 밖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 어리석은 맹인이 된다. 독서 맹인이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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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1-1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그러더군. 페이스북은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 실패했다고.
나도 페이스북 계정이 있긴 한데 거긴 정말 왠지 도배글 올리는 곳이란
느낌이 있어.
얼마 전 북스토리지란 걸 선물 받았는데 이렇게 쓰라고
매뉴얼이 있긴 하더만 습관이 안 되서 그런지 아직도 좀 어색하고
읽기도 바쁜데 언제 이걸 정리하고 앉았나 싶기도 하더군.
그나마 리뷰 쓰는 거 하나 겨우 몸에 베었는데 말야.
뭔가 기록을 남기길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좋을 것 같긴 해.
영화나 책이나 한 가지의 작품 가지고 이렇게 생각과 의견이 다른 것에
놀라곤 하는데 그런 독서모임 꾸준히 나간다는 게
보통 독한 마음이 아니면 그도 쉽지 않더군.
그냥 마음에 맞는 서너명과 술을 벗삼아 한나절 책과 세상을
논할 수 있는 모임이면 좋겠는데 말야.ㅋㅋ

cyrus 2015-01-11 20:31   좋아요 0 | URL
도배글을 쉽게 올릴 수 있는 곳이 페이스북 그룹이죠. 왜냐하면 그룹에 글 하나 올리면 그룹에 가입된 회원들에게 글 등록 알림이 가거든요.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쉬워요. 저도 독서 모임 하나 정도 참석하는 게 적당하다고 봐요. 모임 시간이 겹칠 일도 없고,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정작 인연은 오래 가는 게 없더라고요. 독서모임 끝나고 뒷풀이가 제일 좋아요. 독서모임의 진짜 우정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1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수일 때 한달에 책 100권 읽은 적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획을 하고 실천한 것이기에 일부러 얇은 책만 읽게 되고 거의 발췌독으로 진행이 되더군요. 그래야 가까스로 100권 읽을 수 있더군요. 그런데 그런 책 읽기는 그냥 정독으로 느리게 1권 읽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독한 모임에서의 독`은 아마도 깊이 있게 읽기에 대한 기준이지 넓게 읽기에 대한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서는 아무래도 넓게 파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깊게 파기 위한 독서 행위가 더 값지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넓게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삽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5-01-11 20: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예전에 책 권수 목표를 설정해서 책을 읽어봤는데 예전에 읽었던 책 위주로 읽게 되는 꼼수(?)를 쓰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는 얇은 분량의 책만 고르게 되고요... ㅎㅎㅎ 깊게 파기 위한 독서에 제대로 몰입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년에 50권 이상은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일 년에 50권 읽기도 꽤 많은 횟수라고 생각해요. 목표 권수에만 신경 쓰다보면 독서의 즐거움이 사라질 겁니다.

해피북 2015-01-12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두 저 그녀석분 마음에 공감가는 부분이 있더라구요 어느 온라인 북카페에 가보면 책 리뷰 코너엔 사람들이 큰 관심을 안갖더라구요 자유토론방에 일상이야기가 주요하구요 그래서 저두 실망했던 기억이 ㅎ 그렇다구 그녀석분 말씀에 다 공감하는건 아닙니다 북플이 생긴 뒤론 책이야기 나누고 공유할수 있게되서 참 좋아하고 있어요 덕분에 멋진 이웃님들 글 동냥하며 배우고 생각하고 있답니다ㅋㅡㅋ,,

cyrus 2015-01-12 19:29   좋아요 0 | URL
페북에도 서평을 올려서 공개하는 분 계세요. 오래전부터 인터넷 서점 블로거로 활동하고, 출판사 관계자들 사이에서 알려진 분이에요. 그래도 저는 페북보다 북플이 더 좋아요. 접속하면 온통 책 이야기뿐이니까요. ^^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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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TV로 즐겨 봤던 추억의 프로그램 중에 '경찰청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오프닝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형사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국어책 읽듯 어색한 멘트를 날리거나 구수한 사투리로 사건의 상황을 이야기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가 좀 더 리얼한 상황 재연을 위해 본인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사건 사고를 재구성하여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범죄 예방 효과를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단지 이런 의도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경찰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안방에서 지켜보면서 끝내 경찰에 의해 잡히고 마는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가 승리한 듯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경찰청 사람들'을 즐겨 본 세대라면 이때 장래희망을 경찰이라고 정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기서 그들이 말하던 경찰은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이 아닌 강력계 형사였다. 아이의 눈에는 범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형사의 모습이 무척 멋있으니까. 또래보다 힘 좀 쓰고 체력 좋은 친구들은 강력계 형사가 되고 싶어 했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체력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나도 '경찰청 사람들'을 보면서 강력계 형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는 형사들은 영화나 TV 속 잘생긴 형사와는 딴판이다. 우리는 범인을 체포하는 형사의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그건 TV 속 형사의 모습이다. 실제 형사는 그 범인 한 명을 쫓기 위해 거듭된 야근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탐문 수사를 한다. 이런 강행군 탓에 피로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되고, 쏟아지는 사건 때문에 밀려드는 짜증이 늘어난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범인들을 다루다 성격이 거칠어진다.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많은 직업이다. 형사가 경찰보다 업무 강도가 상당히 높다. 이렇다 보니 신입 경찰들이 형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긴다.

 

찡그린 미간에선 범죄자들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과 정의감을 읽을 수 있고, 흉악범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장면에선 뛰어난 신체능력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추리로 범죄의 전모를 밝혀내는 장면에선 지성미까지 느껴지는 잘 생긴 형사. 이런 형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말끔히 잊으시라.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 나오는 경찰들이야말로 경찰서에 만날 수 있는 진짜 경찰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 속 명구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것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장르를 따지면 추리가 맞다.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설정은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오는 형사와 탐정 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냥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거나 수사법과 추리력이 아닌 순전히 운으로 간신히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단편 「발자국」은 똑똑한 탐정과 형사 이미지의 환상을 깨뜨린다. 바르토세크 형사 반장은 눈 위에 달랑 몇 발자국만 남겨진 발자국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반장은 누군가가 일으킨 장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것을 형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르토세크 반장은 발자국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사람에게 자신이 형사라고 해서 미스터리한 현상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형사라는 직업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은 고약한 일을 맡는다.

 

"법과 질서는 손톱만큼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온갖 고약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발자국」 중에서, 21쪽)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과 애환에 공감할 것이다. 메이즈리크 형사는 금고털이범을 체포한 이후로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여러 가지 사건을 맡게 된다. 경찰과 언론은 메이즈리크 형사가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 사건을 해결했다고 떠들어댄다. 정작 형사 본인은 우연을 계기로 해결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해결하는 완벽한 만능형사 혹은 명탐정으로 인정받는다면 명예와 존경이 따라오겠지만, 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종 사건이 형사를 따라온다. 형사는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형사는 명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거부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방법론이 필요하죠. 저도 이번 사건 이전에는 온갖 방법론들을 믿었습니다. 신중한 관찰이나 전문 지식, 체계적인 조사 혹은 이와 유사한 ... 그러나 사실은 엉터리에 불과한 것들 말이죠. 저는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생각이 백팔십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이즈리크가 숨을 내쉬듯 불쑥 말했다. "모든 것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 중에서, 29~30쪽)

 

이처럼 차페크가 묘사하는 경찰과 탐정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용감한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건을 해결했어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이들은 숨겨지고 은폐된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홈즈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너무나 어설픈 엉터리 형사, 탐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차페크는 「실종된 편지」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제아무리 '가장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도 수사 기법과 추리력을 총동원해서 사라진 편지를 찾아보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들이 찾는 편지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조금 수상한 사람」의 경사는 사람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떠는 상대의 자세만 보고 수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신통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궁예의 미륵 관심법 뺨치는 수사 방법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형사 직함을 내밀면 부끄러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만 드러낸다.
 
미국의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임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작가는 미스터리를 푸는 게 아니라 깊게 만드는 것이라고. 차페크의 소설은 단지 미스터리를 푸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상황에 마주하는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깊이 내다본다. 그리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카페크의 형사는 우리처럼 평범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거나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약한 일을 맡고 해결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말을 우린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경찰청 사람들은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이야기에 있다. 이제 TV에서 보던 멋진 경찰청 사람들의 모습을 망각 주머니에 깊숙이 넣으시라. 더 이상 찾지 말라. 지금도 어디선가 추운 날씨 속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고약한 일을 해결하려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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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청 사람들을 보구 꿈을 키우신 세대시거나 토토가 를보고 들썩이셨다는걸보니 저와 비슷한 세대신거 같아요ㅋ 오늘 신문정리하다가 순직하신 분들 기사 봤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말씀처럼 우리 기억에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거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임무라는 말도 크게 공감합니다^^

cyrus 2015-01-12 19:31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된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고 기억하는 나름 젊은 세대입니다... ㅋㅋㅋ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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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보다.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평범하고 익숙했던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느낀다. 그것은 추억과 공감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새롭게 태어난다. 흔히 그리움이란 두 손 두 발로 만져왔던 자신만의 추억들을 향하고 있기 마련이다. ‘토토가’가 우리에게 준 감동의 열기가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들려준 90년대 가수들의 목소리는 잊고 있었던 시절에 대한 환영들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시를 잘 읽지 않거나 시를 읽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보다. 이 짧은 시에서 우리가 살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날 읽은 시 한 편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학창시절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국어 시간에 배운 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의 문장으로 새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안도현의 발견』(한겨레출판, 2014)의 부제가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이다. 지나치게 길면서도 관념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로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 시를 읽음으로써 단순한 대상을 새로 보게 된다. 시인은 단어를 조합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간결한 직물을 짜낸다.

 

11년 전에 나온, 이제는 오래된 것이 되어버린 안도현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는 사람과 사물 혹은 자연과의 관계 속에 있는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을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이 시에서 나오는 대상은 대체로 우리가 소박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시인은 꽃, 나무, 새, 물고기 등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자연의 섭리나 기억되지 못하는 하찮은 사물에 세상사를 비유하여 직접 눈에 보이도록 만든다. 즉, 시인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삶의 방식, 즉 보조관념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으면 ‘루빈의 잔’이 생각난다. 눈과 마음이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면 그것만 보이고 그 나머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가치와 욕망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독자의 고정된 관습을 시인은 타파한다. 삶을 바라보는 눈길의 시야를 넓힌다.

 

이 시집은 언뜻 자연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를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시대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인물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인물이 바로 시인 백석이다. 안도현 시인은 작년에 『백석 평전』(다산북스, 2014)를 펴낼 정도로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백석을 흠모해왔다. 시집에 수록된 몇 편의 시에서 평소 백석을 사랑했던 시인의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떨어져 앉아 우는 여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여치소리가 내 귀에 와닿기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는 것
그 사이에 꽉 찬 고요 속에다 실금을 그어놓고
끊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밤낮으로 누가 건너오고 건너가는가 지켜보는 것
외롭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입밖에 꺼내지 않고
나는 여치한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한다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 16쪽)

 


이 시집이 안도현 시인이 펴낸 이전 시집과 다르게 자아와 외부 대상(자연)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무척 농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시의 전개가 가능한 이유를 백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명태 창란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백석 「북관」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104쪽)

 


시에서 북쪽 지역 방언과 고어를 사용했던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도현 시인은 여치 소리를 들으려고 무릎을 모은 뒤에 앉아 ‘끼밀고’ 있다. 여기서 ‘끼밀다’는 어떤 물건을 자세히 보고 느끼기 위해 얼굴 가까이 들이미는 자세를 뜻한다. 백석은 이미 자신의 시 ‘북관(北關)’에서 함경도 음식을 먹으면서 이 지역의 투박함을 자신 삶의 일부로 껴안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이러한 끼밀기를 통해 시인은 여진에서 나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화려했던 신라의 향수를 맛보는 데 성공한다.


 

 산기슭에 버려진 외딴집 한 채, 어느 날 가보니 저 혼자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어찌하여 그렇게 형편없이 납작해졌느냐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러나 귀가 뭉개진 집은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져 내린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을 내려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 집에 살던 주인이 다시 돌아오나 안 오나
 처마 끝으로 고독한 목을 빼고 기다리던 날들이 있었다.
 
 집 없이 떠도는 옛 주인이 돌아온다 해도 두 눈으로 바라볼 게 없도록
 도무지 그리울 것도 사무칠 것도 없도록
 단 한 번에 기둥은 무릎을 접고 서까래는 상의도 없이 고개를 꺾고 봉창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주저앉은 집」, 68쪽)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략)

 

헐리다 남은 성문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 「정주성」 중에서, 『백석문학전집 1』 84쪽)

 


「주저앉은 집」은 백석의 첫 작품 「정주성」의 분위기와 상당히 유사하다. 두 작품 다 더 이상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의 건물을 쓸쓸하게 묘사한다. 백석의 시선은 시끌벅적한 경성을 벗어나 고향의 옛 모습이 남아있는 북방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그곳 또한 세월의 변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백석이 가보고 싶은 북방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나는 고향이지만, 이제는 정착할 수 없는 추억의 공간으로 변했다. 시인이 본 ‘헐리다 남은 성문’은 근대화 바람에 풍화되어 무너져버린 전통사회이다. 「주저앉은 집」에서 무너져버린 폐가 상태에 감정을 이입하여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주인을 기다린다. 폐가가 기다리는 주인은 혹시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해 북방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백석이 아닐까. 그가 아니더라도 북방의 고향 전체를 마음속에 간직했던 백석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회귀 본능을 지닌 도시인이 돌아오기를 폐가는 말없이 기다린다. 그가 돌아와야 어렴풋이 남아있는 고향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 보이는
 저 갈대나무가 엄동설한에도 저렇게 엄하기만 하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처럼 서 있는 이유도
 그늘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빈한한 집안의 지붕 끝처럼 서 있는 저
 나무를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드물다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 중에서, 92쪽)

 

 

메마른 듯, 얼핏 죽은 듯 보이지만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로 숨결을 보낸다면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갈매나무는 삶의 고통을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결연하게 느껴지는 시인의 나무이다. 한편, 가족의 안부도 모른 채 저 북방 춥고 쓸쓸한 여관방에서 외로움에 떨었을 가장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유일한 희망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외로운 가장의 차디찬 가슴 한켠에 자란 갈매나무에서 안도현 시인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본다. 감정을 잘 드러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갈매나무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걸어갈 마음을 다잡게 한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시큰거릴 것이다.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순수한 사춘기 청년의 마음처럼. 이제는 남아있는 글만으로 만날 수 있는 시인에게 다가서고 싶고, 자꾸 잊혀가는 시간이 무서워서 그 사람의 일생을 복원했다. 참으로 대단한 문학적 사랑이다. 믿거나 말거나 짝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 1위가 노랫말에 사랑하는 상대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면서 ‘백석’이라는 두 글자의 이름을 넣는 대신, ‘백석의 시’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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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1-0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도 ˝시를 만들었다˝도 너무 멋진 제목인데요!

cyrus 2015-01-10 22:10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시를 만들 줄 아는 시인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오후즈음 2015-01-09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이 감각적인 제목이라니

수이 2015-01-10 0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가 있어야 합니다. 얼른. :)

cyrus 2015-01-10 22:11   좋아요 0 | URL
제대로 한 방 먹었어요. 맞아요. `너`가 있어야 하죠.. ㅠㅠ

해피북 2015-01-1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로스님 덕분에 안도현 저자 팬이 되어버릴것 같네요 ㅎㅎ 지난번에 안도현의 발견이란 책을 서점가에서 들춰봤는데 짧은 산문이 어찌나 재미나고 웃기던지, 마치 눈앞에 상황이 보여지고 상황상황에 위트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좋은 책이더군요 ㅎㅎ 전엔 다른 이웃님의 백석평전에 대한 리뷰글을 보며 안도현 저자의 마음도 느껴지고 그 책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엔 시집까지 소개해주셔서 마음이 바빠지네요 ㅋ

cyrus 2015-01-10 22:12   좋아요 0 | URL
조만간 `백석 평전`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요즘 안도현 시인 덕분에 다시 한 번 백석 시집을 읽게 되었어요. 정말 백석의 시는 다시 읽어도 새롭습니다. ^^
 

 

 

 

 

 

 

 

 

 

 

 

 

 

 

 

러브크래프트 전집 4권에 ‘새뮤얼 존슨 박사를 회상하며’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다. 장르문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러브크래프트가 어떤 주제의 소설을 썼는지 잘 알 것이다. 그의 소설은 음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괴물과 초자연 현상을 묘사하여 우주적 공포를 연출했다.

 

‘회상’은 러브크래프트가 초창기에 쓴 작품에 속한다. 1917년에 ‘Humphrey Littlewit’이라는 가명으로 잡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소설 제목이 긴 관계로 줄여서 ‘회상’이라고 쓰겠다) 그런데 이 소설은 생전에 러브크래프트가 주로 썼던 작품들과 다르다. 일단 무서운 느낌이 나는 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작품을 쓸 때 많이 설정하던 축축한 이끼와 냉기가 감도는 지하 무덤 속 비밀통로와 사람을 공격하는 잔인한 구울 같은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18세기 영국 문단을 주름잡았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새뮤얼 존슨과 그 주변 인물들의 관계를 일화 형식으로 썼다. 새뮤얼 존슨은 문학상 업적을 남긴 공로로 '박사'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독자는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의 나이가 228살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690년 8월 10일에 데번셔의 영지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인지 아니면 실존 인물만 그대로 따와 허구적인 장면을 썼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얼핏 보르헤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같은 느낌이 난다. 이 작품을 잘 모르는 독자가 많고, 이것에 대한 논의로 빠지면 시시콜콜한 잡문을 쓰고 있는 나나 이 잡문을 읽고 있을 분들에게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그냥 제쳐놓기로 한다. 아무튼 ‘회상’은 장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어서 전집 4권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을 설명하는 역자의 글이 실려 있지 않아 작품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다.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공포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회상’을 재미없게 느껴지거나 그렇게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상’은 러브크래프트의 해박한 지식수준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는 병약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각종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이러한 독서는 어둡고 음산한 상상의 날개를 펴주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회상’에서 눈여겨볼 점은 러브크래프트가 존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더 클럽’ 라는 문학 그룹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러브크래프트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썼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작품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면 18세기 영국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그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을 런던에서 보내면서 아이의 눈으로 윌리엄 통치 하의 저명인사들을 많이 보았는데, 많은 시간을 월스 커피 하우스에 앉아서 탄식에 젖어 있던 드라이든 씨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애디슨 씨와 스위프트 박사는 나중에 잘 아는 사이가 되었고, 포프 씨와는 절친한 사이로서 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55~56쪽)

 

‘윌리엄’은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왕 윌리엄 3세(빌렘 1세)를 말한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략을 저지시켰고 왕위에 올라 명예혁명을 이루었다. 1650년대는 런던에 커피점이 잇달아 생겨, 약 10년간에 그 수가 30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에는 '런던 커피 하우스'로 불렸다. 여기에 문인, 학자, 예술가를 비롯하여 각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일종의 아카데미 클럽이 형성되기도 했다. ‘드라이든’은 명예혁명 이전에 계관시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존 드라이든(1631~1700), ‘애디슨’은 수필가 겸 시인인 조지프 애디슨(1672~1719)일 가능성이 있다. 유명한 문학자 단체 Kit-Cat Club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죽마고우 리처드 스틸과 함께 <스펙테이터>)(Spectator) 지를 창간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1667~1745), ‘포프’는 영국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겸 비평가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으로 추정된다. 스위트프는 커피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커피 하우스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가 스물네 살이었을 때 런던의 커피 하우스에서 자신의 먼 친척뻘 되는 드라이든에게 습작시를 공개했다가 혹평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스위프트는 영국 사회를 움직이는 명사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스펙테이터>의 공동 발행인 애디슨과 스틸과도 한때 친했었다. 

 

 

 

 

 

 

 

 

 

 

 

 

 

 

 

 

스위프트와 포프, 이 두 사람은 ‘스크리블레루스 클럽’에 소속되어 서로 알게 되었다. 『마르티누스 스크리블레루스의 회고록』는 풍자소설을 썼다. 이 작품은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추천도서에 포함되었다. 1713년에 애버스넛 박사의 집에 ‘스크리블레루스 클럽’이 결성되었다. 스크리블레루스는 박식한 지식을 자랑하는 가공인물이다. 클럽 회원들은 스크리블레루스의 입이 되어 속물적이며 부패한 영국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가공인물은 호라티우스, 라블레, 에라스무스 등 고전 작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클럽 회원들이 쓴 책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스위프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될, 아직 초고에 불과했던 『걸리버 여행기』를, 포프는 『우인 열전』을 인용했다.

 

제임스 보스웰 씨가 나를 존슨 씨에게 소개해 준 1763년까지 나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없다. (56쪽)

 

작품 속 화자는 보스웰(1740~1795) 덕분에 존슨을 처음 만나게 된다. 보스웰은 존슨을 언급할 때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 인물이다. 1763년에 그동안 사숙하던 존슨 박사와 알게 되어, 적지 않은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박사가 죽을 때까지 가까이 사귀었다. 《존슨 전(傳)》은 전기 문학의 걸작이며, 그 밖에 박사를 수행했을 때의 여행기록을 남겼다.

 

내가 발행하는 주간지 《런더너》에 그의 사전을 좋게 알리고 싶으니 의향이 어떻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57쪽)

 

화자는 자신이 발행한 잡지에 존슨이 만든 사전을 알리고 싶어 한다. 존슨은 1747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자력으로 7년 만에 《영어사전》을 완성했다.

 

그 후로 존슨과 나는 주로 ‘문학 클럽’ 모임에서 자주 만났다. 이듬해 만들어진 문학 클럽의 창립 멤버로는 박사 본인을 비롯하여 정치 연설가인 버크 씨, 사교계의 멋쟁이 뷰클라크 씨, 신앙심이 돈독한 랭턴 씨, 시민군 대장인 J. 레이널스 경, 유명한 화가인 골드스미스 박사, 산문과 시를 쓰는 뉴전트 박사, 버크 씨의 장인인 존 호킨스 경, 그리고 앤서니 샤미에씨와 나였다. (57~58쪽)

 

1763년에는 존슨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명사들과의 친분 도모를 위해서 문학 그룹 ‘더 클럽’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은 훗날 ‘문학 클럽’으로 이름이 바뀐다.

 

 

 

 

 

 

 

 

 

 

 

 

 

 

 

 

‘정치 연설가인 버크’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이다. 영국 보수주의의 대표적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다. 더 클럽의 창설 회원이었으며 이때 당시 그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저술가로 활동했다. 골드스미스 박사가 화가라고 소개되는데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착각 혹은 역자의 번역 실수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보이다. 존슨과 알고 지냈던 골드스미스라는 실존 인물은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로 활동했던 올리버 골드스미스(1728~1774)로 봐야 한다. 1761년에 존슨을 사귀고 그의 문학 클럽 회원이 되었다. 존슨의 도움에 힘입어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를 발표해 단번에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 역시 피터 박스홀의 추천도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 밖에도 배우이자 존슨 박사의 죽마고우인 데이비드 게릭 씨, 소우와 조, 워튼, 애덤 스미스 박사, 『유적』의 저자인 퍼시 박사,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 씨, 음악가인 버니 박사, 비평가 맬런 씨, 보스웰 씨가 새로 가입했다. (58쪽)

 

데이비드 게릭은 실제로 존슨과 친분이 있었던 배우이다. 존슨의 문학 클럽에 명사들이 하나둘씩 가입하는데 여기서도 익숙한 이름 두 명이 있다.

 

 

 

 

 

 

 

 

 

 

 

 

 

 

 

 

애덤 스미스 박사와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쓴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기번은 1774년에 문학 클럽에 가입했고, 1776년에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을 출간했다. 보스웰과 스미스는 문학 클럽에 가입하기 전에 이미 대면한 적이 있었다. 보스웰은 1753~1758년에 에든버러대학에서 인문학 과정을 밟았다.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1758년 대학에 돌아왔으나 연극에 매료되었고 로마 가톨릭교도인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는 그를 글래스고 대학으로 보내 애덤 스미스의 강의를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스미스는 글래스고 대학 도덕철학 담당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10여 년 간 계속된 교수 생활을 스미스는 ‘가장 유익했고 행복했으며 명예로운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200살 넘은 화자가 등장하여 존슨 박사를 회상하는 황당무계한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이 그냥 러브크래프트의 장난기 섞인 위트 넘치는 이야기로 보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게다가 존슨 박사에서 이야기 곳곳에 언급되는 인물들을 잘 모른다면 이 작품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영국사에 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 존슨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알아야 이 작품 속에 재치가 있으면서도 뼈가 있는 날카로운 발언으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슨의 언변술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 역자는 영국사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한 주석을 단 한 개도 달지 않았다. 이 작품 하나 때문에 전공과 무관한 영국사 관련 책을 펼쳐보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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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서내공이 상당하시네요^^ 언급해주시는 이름들이 낯설진 않지만 한 작품도 읽어본적 없어 아쉽습니다 ㅎㅎ 영국사까지 호기심을 넓히시는 모습 참 멋지시네요!! 앞으로의 이야기도 기대할께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5-01-10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안 읽어봤어요. 저자 이름만 알고 관심이 있으면 검색해서 저자가 쓴 책을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즉시 그것과 관련된 것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좀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편도 있어요. 사소하지만 하나라도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해피북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올해 첫 올재 클래식스 4권이 출간된다. 출간횟수로는 13번째인데 이번에 나오는 책을 포함하면 벌써 50여 권에 이른다. 권당 2900원이라는 가격으로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는 올재 클래식스는 6개월 동안 한정 판매한다. 미판매된 책과 발행 수익의 20%는 저소득층, 각종 복지시설 등에 기증한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전을 살 수 있는 장점 덕분에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 출간 소식을 고대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올재 클래식스 공식 홈페이지(http://www.olje.or.kr/)에 가입하면 출간 소식을 문자 알림으로 받을 수 있다.  

 

 

 

 

 

이번에 나오는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는 『장자』, 『열자』, 『바가바드 기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내일 오전 11시부터 인터넷 교보문고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판매되기 시작하고, 토요일에 전국 교보문고 매장에서 살 수 있다.

 

 

 

 

 

 

 

 

 

 

 

 

 

 

 

 

『장자』는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이 번역한 것이다. 출판사는 내편, 외편, 잡편이 모두 수록되어 있고, 한중일 고금의 주석까지 소개한 번역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신동준 소장은 이미 인간사랑 출판사를 통해 『장자』 번역본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인간사랑 판본의 쪽수는 무려 1000쪽이 넘고, 정가도 5만 원 정도에 가깝다. 인간사랑 판본과 같은 내용을 올재에서 출간되는 과정이 무척 궁금해서 직접 올재 출판사로 문의를 해봤다. 이번 『장자』 번역본은 책 기부 취지에 공감한 역자의 도움으로 한정판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간사랑 출판사의 『장자』는 계속 판매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사랑 판본에 있는 오류를 수정했다고 하니 그동안 방대한 분량에 벌써 기가 죽고, 지갑을 활짝 열 자신이 없는 독자라면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장자』를 가방에 넣으며 언제 어디서든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가격을 책정했고, 휴대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책이라서 활자 크기가 작은 편이다. 눈의 피로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열자』,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 티베트, 중국 등 동양의 고전과 경전을 번역한 정창영 씨가 맡았다. 2001년, 두 책 다 시공사에서 출간되었으나 절판된 것을 올재가 복간했다. 『열자』는 『노자』와 『장자』와 더불어 도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작년에 이미 올재가 『노자』를 ‘도덕경’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바가바드 기타』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와 함께 인도 힌두교의 중요한 성전 하나로 꼽힌다. 인도인들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기독교인의 성경 같은 책이며 ‘거룩한 자의 노래’(산스크리트 어인 바가바드 기타의 뜻)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늘 이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며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거기서 용기와 지혜를 구했다.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 회의하던 고대 인도국 왕자 아르주나가 마부이자 스승인 크리슈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함축적 시어와 난해한 해설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 인도인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고전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국내 독자들이 즐겨 읽는 괴테의 작품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베르테르’를 독일어 현지 발음에 가까운 ‘베르터’의 일본식 오역이라는 지적도 있을 정도로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주목받는다. 역자는『파우스트』를 번역한 적이 있는 이인웅 한국외대 명예교수이다.

 

의외로 알라딘 서재에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에 관한 서평이나 페이퍼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래도 이 시리즈가 교보문고에서만 판매되기 때문에 알라딘에서 많이 언급되는 기회가 드물다. 올재 클래식스가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만 해도 알라딘에 판매된 적이 있다. 그때 당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라 책을 사기 위해 항상 알라딘에 접속하면 절판 소식을 확인만 했던 기억이 있다. 한정판이라서 간혹 알라딘 중고샵에서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 적도 있었다. 4권으로 구성된 세트를 정가보다 높게 책정한 판매자도 일부 있다. 알라딘에서 판매되지 않은 책을 중고샵에 살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 혹시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를 구하고 싶은 독자라면 되도록 중고샵에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비록 종이책으로 읽을 수 없지만, 올재 홈페이지에 가면 전자북을 정해진 기간 내에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 어제 교보문고 대구점에 비치된 『안도현의 발견』을 확인해본 결과, 작년 12월 2일에 나온 3쇄였다. 다행히 2쇄에 발견된 인쇄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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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8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늘 느끼는 거지만 책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계신거 같은데 혹시 책 관련 일을 하시나요?ㅎ 올재 클래식은 처음들어봤는데 역시 좋은 정보네요~^^

cyrus 2015-01-08 21:46   좋아요 0 | URL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아니고요, 그냥 출판사 신간 소식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독자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