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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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TV로 즐겨 봤던 추억의 프로그램 중에 '경찰청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오프닝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형사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국어책 읽듯 어색한 멘트를 날리거나 구수한 사투리로 사건의 상황을 이야기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가 좀 더 리얼한 상황 재연을 위해 본인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사건 사고를 재구성하여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범죄 예방 효과를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단지 이런 의도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경찰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안방에서 지켜보면서 끝내 경찰에 의해 잡히고 마는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가 승리한 듯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경찰청 사람들'을 즐겨 본 세대라면 이때 장래희망을 경찰이라고 정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기서 그들이 말하던 경찰은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이 아닌 강력계 형사였다. 아이의 눈에는 범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형사의 모습이 무척 멋있으니까. 또래보다 힘 좀 쓰고 체력 좋은 친구들은 강력계 형사가 되고 싶어 했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체력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나도 '경찰청 사람들'을 보면서 강력계 형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는 형사들은 영화나 TV 속 잘생긴 형사와는 딴판이다. 우리는 범인을 체포하는 형사의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그건 TV 속 형사의 모습이다. 실제 형사는 그 범인 한 명을 쫓기 위해 거듭된 야근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탐문 수사를 한다. 이런 강행군 탓에 피로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되고, 쏟아지는 사건 때문에 밀려드는 짜증이 늘어난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범인들을 다루다 성격이 거칠어진다.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많은 직업이다. 형사가 경찰보다 업무 강도가 상당히 높다. 이렇다 보니 신입 경찰들이 형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긴다.

 

찡그린 미간에선 범죄자들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과 정의감을 읽을 수 있고, 흉악범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장면에선 뛰어난 신체능력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추리로 범죄의 전모를 밝혀내는 장면에선 지성미까지 느껴지는 잘 생긴 형사. 이런 형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말끔히 잊으시라.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 나오는 경찰들이야말로 경찰서에 만날 수 있는 진짜 경찰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 속 명구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것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장르를 따지면 추리가 맞다.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설정은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오는 형사와 탐정 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냥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거나 수사법과 추리력이 아닌 순전히 운으로 간신히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단편 「발자국」은 똑똑한 탐정과 형사 이미지의 환상을 깨뜨린다. 바르토세크 형사 반장은 눈 위에 달랑 몇 발자국만 남겨진 발자국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반장은 누군가가 일으킨 장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것을 형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르토세크 반장은 발자국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사람에게 자신이 형사라고 해서 미스터리한 현상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형사라는 직업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은 고약한 일을 맡는다.

 

"법과 질서는 손톱만큼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온갖 고약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발자국」 중에서, 21쪽)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과 애환에 공감할 것이다. 메이즈리크 형사는 금고털이범을 체포한 이후로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여러 가지 사건을 맡게 된다. 경찰과 언론은 메이즈리크 형사가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 사건을 해결했다고 떠들어댄다. 정작 형사 본인은 우연을 계기로 해결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해결하는 완벽한 만능형사 혹은 명탐정으로 인정받는다면 명예와 존경이 따라오겠지만, 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종 사건이 형사를 따라온다. 형사는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형사는 명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거부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방법론이 필요하죠. 저도 이번 사건 이전에는 온갖 방법론들을 믿었습니다. 신중한 관찰이나 전문 지식, 체계적인 조사 혹은 이와 유사한 ... 그러나 사실은 엉터리에 불과한 것들 말이죠. 저는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생각이 백팔십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이즈리크가 숨을 내쉬듯 불쑥 말했다. "모든 것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 중에서, 29~30쪽)

 

이처럼 차페크가 묘사하는 경찰과 탐정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용감한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건을 해결했어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이들은 숨겨지고 은폐된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홈즈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너무나 어설픈 엉터리 형사, 탐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차페크는 「실종된 편지」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제아무리 '가장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도 수사 기법과 추리력을 총동원해서 사라진 편지를 찾아보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들이 찾는 편지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조금 수상한 사람」의 경사는 사람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떠는 상대의 자세만 보고 수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신통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궁예의 미륵 관심법 뺨치는 수사 방법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형사 직함을 내밀면 부끄러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만 드러낸다.
 
미국의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임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작가는 미스터리를 푸는 게 아니라 깊게 만드는 것이라고. 차페크의 소설은 단지 미스터리를 푸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상황에 마주하는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깊이 내다본다. 그리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카페크의 형사는 우리처럼 평범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거나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약한 일을 맡고 해결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말을 우린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경찰청 사람들은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이야기에 있다. 이제 TV에서 보던 멋진 경찰청 사람들의 모습을 망각 주머니에 깊숙이 넣으시라. 더 이상 찾지 말라. 지금도 어디선가 추운 날씨 속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고약한 일을 해결하려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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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청 사람들을 보구 꿈을 키우신 세대시거나 토토가 를보고 들썩이셨다는걸보니 저와 비슷한 세대신거 같아요ㅋ 오늘 신문정리하다가 순직하신 분들 기사 봤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말씀처럼 우리 기억에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거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임무라는 말도 크게 공감합니다^^

cyrus 2015-01-12 19:31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된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고 기억하는 나름 젊은 세대입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