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램 스토커의 단편소설 《스쿼》(The Squaw)는 유명하지 않지만, 이 작품을 처음 보는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이야기에 가장 잔인한 고문도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혼부부는 독일 뉘른베르크 지방을 여행하다가 혼자 여행하는 미국인 허치슨을 만나게 된다. 이 세 사람은 ‘뉘른베르크의 처녀’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문도구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고문도구가 보관된 탑으로 향하는 도중에 미국인은 장난으로 새끼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인다. 자신의 새끼가 죽은 사실을 안 어미 고양이는 허치슨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허치슨은 자신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드디어 고문도구를 눈앞에 본 일행은 소름 끼치는 형태에 놀라게 되고, 그 충격으로 아내는 실신하기에 이른다.

 

 

 

 

 

 

‘뉘른베르크의 처녀’는 어른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에 철로 만들어진 관이다. 여성의 얼굴(성모 마리아로 알려졌음)이 그려져 있어서 ‘철의 여인(Iron Maiden)’이라고도 부른다. 관을 닫는 문안에 뾰족한 못이 박혀 있다. 팔과 다리가 포박한 상태가 된 죄수를 관 속에 집어넣어 문을 닫으면, 못이 죄수의 얼굴과 온몸을 찌르게 되어 있다. 자기과시가 넘치는 애치슨은 자신이 직접 고문도구 안으로 들어가 보겠다고 말한다. 애치슨은 죄수처럼 손발이 묶인 채 관으로 들어갔다. 못이 달린 문을 여닫는 데 사용하는 밧줄은 고문도구의 관리자 손에 쥐어져 있다. 만약 손이 밧줄을 놓는 순간, 문은 닫힌다. 애치슨이 관 속에서 아찔한 스릴을 만끽하는 사이에 어디선가 갑자기 고양이가 고문도구 쪽으로 튀어나오는데... (결말이 궁금하면, 《세계 호러 단편 100선》을 읽어보시길)

 

 

 

‘철의 여인’은 죄수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을 둔 가장 잔인한 고문도구이다. 죄수가 자신의 죄를 순순히 자백할 때까지 문에 달린 못이 죄수의 피부를 뚫는다. 죄수는 극심한 고통을 앓다가 과다 출혈로 서서히 죽게 된다. 이 고문도구가 정확하게 언제 만들어졌는지 불분명하지만, 고대 카르타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전쟁 중에 로마 장군 레굴루스가 카르타고군에 포로로 잡혀 ‘철의 여인’과 유사한 고문도구에 갇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철의 여인’은 중세 시대부터 마녀 재판 시 마녀임을 자백시키기 위한 고문 기구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스쿼》에 나오는 ‘뉘른베르크의의 처녀’는 실제로 뉘른베르크 성에서 사용된 오래된 고문도구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에 소실되었다.

 

 

 

 

 

 

 

 

 

 

 

 

 

 

 

 

 

 

 

‘철의 여인’은 악명 높은 고문도구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살인 도구로 많이 알려졌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는 밤이 되면 자신의 시종들과 마을 여인들을 잔인하게 죽인 연쇄 살인마다. 기록에 의하면, 백작 부인의 엽기 행각에 6백 명이 넘는 여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바토리는 희생자들을 쉽게 죽이지 않고 가위로 자르거나 핀으로 찌르는 등 지독한 고문을 일삼았다. ‘철의 여인’은 그녀가 희생자들을 괴롭힐 때 가장 선호한 고문 기구였다. 안에 긴 못이 박혀 있는 원통형 우리 안에 희생자를 집어넣고 그 우리를 천장으로 끌어 올린 다음 흔들어서 희생자 몸이 못에 찔려 피가 흐르도록 했다. 바토리는 그 아래에 서서 떨어지는 피로 샤워를 했다. 바토리는 피가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믿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점점 심해지면서 밤마다 여성 하녀들을 죽이고 이 피로 목욕을 하거나 마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이런 악행으로 수세기가 지난 후에 당대 최고의 악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15세기 루마니아의 영주 블라드 체페슈와 함께 흡혈귀 전설에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1897년,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는 흡혈귀의 삶에 영감을 얻어 한 편의 공포소설을 썼고, 크게 명성을 떨쳤다. 소설 제목은 ‘드라큘라’. 브램 스토커는 《스쿼》를 집필한 지 4년 후에 《드라큘라》를 세상에 공개했다.

 

 

 

 

 

 

 

 

 

 

 

 

 

 

 

 

※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흡혁귀 소설이다. 그러나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그를 흡혈귀 문학의 원조로 보는 오해가 종종 있다. 스토커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설, 민담 속 흡혈귀에 영감을 얻었을 뿐이다. 이미 18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사악한 흡혈귀가 등장하는 고딕 문학이 유행했다. 최초의 본격 흡혈귀 소설은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1819년)이다. 폴리도리의 원래 직업은 바이런의 주치의였다. 1816년에 폴리도리는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퍼시 셸리 그리고 셸리의 부인과 함께 괴담을 하나씩 짓는 놀이에 동참한다. 폴리도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준 무서운 이야기가 《뱀파이어》였다. 폴리도리의 작품은 당시 잘 나가던 바이런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로 인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는 한동안 바이런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모임에 나온 이야기 중에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은 괴담 창작 놀이 모임의 홍일점 셸리 부인이었다. 바이런의 명성에 살짝 기댄 폴리도리의 《뱀파이어》도 셸리 부인이 쓴 이야기의 엄청난 인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부인은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낸 괴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를 발표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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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8-05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대문 형무소에도 `철의 여인`과 유사한 고문도구가 쓰였죠. 일제 만행은 유명해서 없는 게 더 이상할 테지만 말이죠.
서대문 형무소 갔을 때 아이들이 장난 삼아 그 모형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는 지금이 참 기이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고문을 염두에 둔 그 구조부터 모든 게 끔찍했어요. 정말.

cyrus 2015-08-05 21:5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직사각형 형태의 박스 안에 못이 박혀 있었어요. 그리고 안에 들어가면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없는 관 형태의 고문도구도 있어요.

라스콜린 2015-08-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끊기신공 ㅎㄷㄷ 무섭네요; 저 책 이북으로 사놨는데 신속히 읽어야겠습니다. 뒤편이 몹시궁금;
 

 

 

 

 

 

 

 

 

어제 페이스북을 접속하다가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 분이 번역한 《자본론》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년에 교수님이 쓰신 《자본론 공부》를 읽었던 독자로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맑시즘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는 꿈을 가슴속에 간직했던 교수님의 학문 열정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생전에 교수님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르크스 경제학이 주류 경제학의 텃세 속에 밀리는 대학 강단을 걱정했었습니다. 맑시즘을 ‘북쪽 사상’, ‘실패한 이론’으로만 보는 싸늘한 시선이 점점 많아질수록 교수님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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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0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작년말에도 벙커1에서 교수님 강의 들었는데.. 고인 명복을 빕니다.

AgalmA 2015-08-02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벙커1 강의에서 김수행 교수님 쨍쨍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거 보고 정정하시다 생각했는데....후학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시려 한 점 배워야 할 점이죠...

책을사랑하는현맘 2015-08-03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한창 활동하실 수 있는 연세이신데 안타깝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891년, 폴 고갱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향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실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떠돌이 인간 고갱은 미지의 세계를 갈망했다. 작열하는 태양, 드넓은 쪽빛 바다, 물결 위로 부서져 내리는 은빛 햇살. 가장 오염되지 않은 섬이라고 생각했기에 원시와 야성을 화폭 안에 담아내고자 했던 소망이 실현될 것이라 여겼으리라. 하지만 타히티에 도착한 고갱은 얼마 동안 상상을 빗나간 광경에 실망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수도 파페에테는 조그만 식민지 항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히티에 정착한 지 2년 뒤인 1893년에 고갱은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섬에서 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많은 관람객을 몰렸으나 상업적으로는 대실패였다. 돈 한 푼 벌지 못했지만, 대중의 반응에 기운을 얻은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목판화 시리즈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목판화 시리즈물의 제목은 《노아 노아》 . ‘노아 노아’는 타히티 어로 ‘향기’를 뜻한다. 고갱의 친구이자 상징주의 시인인 샤를 모리스가 《노아 노아》의 원고를 일부 다듬었다.

 

 

 

 

 

 

 

 

 

 

 

 

 

 

 

 

 

 

 

 

 

 

 

 

 

 

 

 

 

 

 

《노아 노아》는 열화당(1979년)을 통해서 처음 나왔고, 20년 뒤인 1999년에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고갱의 타히티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이 두 권의 책이 절판되는 바람에 《노아 노아》 원본에 실린 목판화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어서 아쉽다. 고갱이 말년에 그린 대작 이름에서 따온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가람기획, 1999)《폴 고갱, 슬픈 열대》(예담, 2000)라는 책에서도 《노아 노아》에 있는 글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목판화 그림을 도판으로 수록하지 않았다. 고갱은 《노아 노아》 이외에도 자기 생각을 정리한 글을 많이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출간된 《전과 후》는 고갱과 반 고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반 고흐가 귀를 자르게 된 경위까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고갱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자해 사건의 내막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는 《전과 후》와 《노아 노아》를 같이 번역한 책인데 고갱의 책을 완역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를 비교해서 읽어본 결과, 서로 중복되는 내용이 있었으나 문장 일부가 누락된 것도 있었다. 고갱이 반 고흐보다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지 고갱의 글을 번역한 책들 전부 절판되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반 고흐의 편지가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오고 국내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상황이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대중에게 친숙한 유명 화가들을 소개하는 책은 잘 팔리고, 제아무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가 쓴 글이라고 해도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낮으면 외면받기 마련이다. 2013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고갱 전이 열렸을 때 고갱의 글 모음집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랐건만 오히려 반 고흐에 관한 책만 더 나왔다.

 

 

 

 

 

 

 

 

 

 

 

 

 

 

사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와 《폴 고갱, 슬픈 열대》를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는 글의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이 글이 《전과 후》에 있는 건지 아니면 《노아 노아》에 있는 것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글의 구성이 조악하다. 책 후반부에 고갱이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글이 나온다. 그나마 《폴 고갱, 슬픈 열대》가 읽을 만하다. 글 하나하나에 출처가 적혀 있고, 고갱의 글을 시대순으로 엮었다. 또한 이 책에 고갱이 아내 메테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실려 있다. 비록 반 고흐의 편지와 비교하면 문학성은 떨어지지만, 가난과 무명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예술가의 절박하고도 솔직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돈을 부쳐 달라고 조르기도 하며, 고갱의 그림을 판매한 화상이자 친구인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타히티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것들을 상세하게 보고한다. 고갱은 아내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동지인 에밀 쉬펜네케, 에밀 베르나르, 말라르메, 샤를 모리스, 알베르 오리에(고갱을 ‘상징주의 예술가’로 소개한 비평가) 등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희귀한 편지글들은 《야만인의 절규》(창해, 2000)라는 제목의 책에 있다.

 

고갱이 쓴 편지 중에서 스웨덴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에게 보낸 것이 지금도 널리 회자하고 있다. 1차 타히티 여행을 마친 뒤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이 편지에 스트린드베리에게 자신의 전시회 도록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극작가였다. 고갱 역시 루소의 책을 읽어서 원시를 향한 동경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요청을 거절하는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 고갱의 원시 예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 편지 때문에 고갱 관련 책에서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근시안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스트린드베리의 편지 전문을 읽어보면 그가 고갱의 재능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트린드베리가 고갱의 요청을 거절한 진짜 이유는 따로있었다.

 

 

“나 또한 선생을 분류하고, 사슬 속에 고리를 끼우듯이 선생을 끼워넣어 그 발전의 자취를 알아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중에서, 44쪽)

 

고갱의 예술은 당시에 유행하는 예술사조와 거리가 먼 독창적인 화풍이었다.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독창적인 예술이 언젠가는 제대로 인정받을 날이 오리라 확신했으나 자신의 수준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예술을 설명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트린드베리는 고갱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면서도 고갱을 ‘창조주를 시샘하고, 늘 도전하는 예술가’라고 칭찬했다. 또한, 두 번째로 타히티로 향하는 고갱이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까지 그의 예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배우겠다고 약속했다. 스트린드베리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끝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갱은 자유를 갈망하는 영원한 보헤미안이자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화가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등지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입해야 스스로 존재감을 느꼈던 고갱 인생은 너무나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이다. 고갱의 타히티행과 방종에 빠지기 쉬운 그의 성격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스트린드베리의 말대로 고갱은 그림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도전하는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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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5-08-0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에서 소개된 `뭉크` 그래픽 노블을 보면 스트린드베리가 등장해요. 뭉크만크이나 인상적인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cyrus님 글속에 그를 만나니 왠지 반갑네요. ^^

cyrus 2015-08-02 11:53   좋아요 0 | URL
`뭉크` 그래픽 노블을 읽어보고 싶군요. 뭉크와 스트린드베리의 관계가 궁금해요. ^^

지금행복하자 2015-08-0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린느베리 익숙한 이름인데.. 미스 줄리의 작가인가 싶기도 하고~ 최근에 본 이름인데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중에 알려주실거라 믿고 검색은 패스할께요~~
어디서 봤더라~~~ 만 반복하고 있어요~^^

cyrus 2015-08-02 11: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혹시 ‘미스 줄리’를 읽어보셨습니까? 저는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8-03 11:05   좋아요 0 | URL
아니요~ 읽어보진 못 했어요. 최근 마스 줄리 영화가 개봉해서 찾아봤었어요. 연극계의 고전이라고 하더군요~~
영화에서는 묘한 매력의 줄리아가씨였어요~~
 
조선시대사 1 - 국가와 세계 조선시대사 1
홍순민 외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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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역사서는 역사에 대한 지적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재발견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지나치게 가공하고,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과 유리시키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검증이 안 된 역사서는 독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그런 점에서 소장 역사학자들이 모인 ‘한국역사연구회’가 공들인 《조선시대사》 1, 2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대사에서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에 걸쳐 새로운 역사 서술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대사 편찬위원회’의 첫 결과물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명의 역사학자가 조선의 시대상을 주제별로 엮은 점이다. 1권에서는 사림파, 훈구파, 서인, 동인 등을 중심으로 조선 정치사를 개관하는 한편 재정, 신분제도, 시장의 발달, 국제관계 등 조선 시대가 형성돼가는 모습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2권에서는 농업을 기초로 한 경제체제 및 조선 시대 사상의 근간을 이룬 성리학 등을 소개하며 조선시대 생활문화의 특징도 놓치지 않고 살핀다.

 

검으면 희다 하고 희면 검다 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 할 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귀 막고 눈 감아 듣지도 보지도 말리라.

 

조선 경종 때 김수장이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벌인 당쟁을 개탄하며 읊은 글이다. 조선 시대 정치사는 짧게 한 단어로 요약해서 말하면, ‘당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쟁은 정치의 중심과제가 되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고 때로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세조는 기존 권력층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젊은 사림파를 정계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훈구파와의 대립에서 승리함으로써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다. 선조 때 이르러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권력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각각 나뉘어 치열한 당파 싸움을 벌였다.

 

흔히 조선의 역사를 당쟁으로 얼룩진 부패한 역사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역사관이다. 식민사관은 정치적 전통을 왜곡시켜 당파 싸움의 폐단을 과장해 민족의 역량을 부정한다. 비록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인 탓에 파벌이 형성되었지만, 공론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상호 견제가 이루어졌다. 붕당정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영조는 ‘환국’이라는 정치적 폐해를 극복하고자 탕평 정치를 내세웠다. 사실 붕당정치가 본래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상호 견제하는 장점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당쟁의 중심축인 노론과 소론 양대 세력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인재 기용으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시도였다. 당시로써는 일종의 고육지계 인사였다. 왕권을 이어받은 정조 또한 선왕의 숙원을 계승하고자 탕평 정치를 폈다. 하지만 탕평 정치는 ‘미완의 개혁’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비판 정치가 사라지게 되자 붕당을 넘어 몇몇 가문이 정권을 쥐락펴락하는 세도정치로 발전되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의 시기는 조선왕조의 변혁기이자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조선과는 전통적 존화주의 관계인 명의 국력이 쇠약해졌고, 17세기 전반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국제정세의 변화는 탄력적 외교정책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명 중심의 구질서에 안주하는 쪽을 택했다. 국익을 먼저 챙기는 실리 외교를 외면하고 명분만 고집하던 조선은 전혀 대비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두 차례에 걸친 청의 침략을 받고 치욕의 항복을 하고 말았다. 동양적 질서에 안주하던 조선 사회는 이제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가공할 군사력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의 도전을 받게 됐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며 서구 열강의 힘을 경험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에 대한 경험을 일본에 전해주겠다고 나설 만큼 주변국 정세에 무지했다. 서양에 대비해 더욱 굳건한 쇄국정책을 천명하면서 조선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변화를 읽는 일에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말았다.

 

조선 시대 정치사를 한 마디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붕당정치를 부정적인 당쟁으로만 볼 수 없다. 당쟁이 꼭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아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권력에 눈이 멀어 민심을 저버린 당쟁이다. 결국, 정치를 하는 사람의 문제다. 가치를 중심에 놓는 정파 간 경쟁이 되면 당파 간 대립이 정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명-청 교체기의 역사는 오늘날의 동아시아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는 지금 상황과 유사하다. 지정학적 조건상 한국이 감당해야 할 국제정치적 상황이 과거나 현재나 유사하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조선 시대 외교사에 지속적인 관심과 논의가 필요하다.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시대에 따라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냐는 사회적 요구가 변하기 때문이다. 날로 흐려져 가는 역사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환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

 

 

 

 

※  “그는 1650년 정계 진출과 낙향을 반복한 뒤 1958년 51세에 다시 조정에 나와 북벌 계획을 추친하고...” (1권 33쪽) → ‘1958년’을 ‘1658년’으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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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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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만들어 낸 동굴은 거대하고 음습하다. 깊숙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세월의 깊이와 두께를 실감해 보는 시간 여행이다. 물과 시간이 만나 수만 년을 사랑하며 다투며 빚어낸 형상들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다. 찰나의 즐거움과 힘겨움의 되풀이에 지친 몸과 마음은 잠시나마 경건해지고 서늘해지고 오싹해진다. 동굴은 ‘미지의 세계’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미지의 세계’는 ‘공포’다. 공포는 인간 심리의 원형 중 하나. 어쩌면 수정란 시절부터 유전자 속에 있던 그 무엇일지 모른다. 자궁을 떠나는 신생아의 울음이 첫 공포며 낳고 자라는 중에 우리는 수많은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다. 인류는 위협이 닥치면 맞서 싸우거나 도망치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대처하도록 진화해왔다. 우리 신체는 위협을 감지하는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혈관 구석구석 퍼져나가면서 심장박동과 호흡이 빨라지고 혈압이 치솟는다. 이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다. 싸우거나 도망치는 데 적합하게 근육 등 신체의 주요 기관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라고 부른다. 공포증(phobia)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매우 강력한 비합리적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인데 종류가 다양하다. 동굴 같은 어두컴컴한 공간을 견디지 못하거나 뱀, 거미 같은 특정 동물에 기겁하는 동물 공포증도 있다.

 

 

 

 

 

 

공포영화는 이런 인간의 심리를 자극하는 상술의 극치다. 공포가 결국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면서 늑대인간이나 흡혈귀, 프랑켄슈타인으로 대치시켰다. 신진오의 첫 장편 공포소설 《무녀굴》을 원작으로 한 영화 <퇴마: 무녀굴>(8월 20일 개봉 예정)은 적어도 형식면에서 꽤 새로운 작품이다. 기존 공포 영화의 법칙에 순응하면서 동굴, 뱀, 무당, 퇴마 등의 소재들로 공포를 유발한다. 소설은 시작부터 독자의 긴장감을 올려준다. 동굴은 알 수 없을 아늑함과 어떤 신비함까지 안겨주는 곳이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면 신비함의 요소인 그 어둠이 공포 요소로 돌변한다. 거기에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악귀까지 있다면! 산악자전거 동호회 팀이 김녕사굴에 들어갈 때부터 보는 독자의 신경은 곤두선다. 공포영화의 시작은 항상 이런 장면이다. 등장인물들은 김녕사굴과 관련된 무서운 설화와 소문을 무시한 채 겁 없이 어두운 굴 안으로 들어간다. ‘왜 굳이 저런 곳에 들어가려고 할까’라는 생각과 함께 말리고 싶어진다.

 

뱀은 인간의 생명, 가정, 마을, 그리고 나라의 수호신이다. 사람들이 뱀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뱀이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공포의 대상을 잘 섬겨야 그가 인간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인간을 잘 지켜줄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생각했다.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같은 원리다. 《무녀굴》의 배경이자 중심 소재인 제주 김녕사굴에 가면 뱀이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설화를 들을 수 있다. 옛날에 이 동굴에 커다란 뱀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 뱀에게 매년 처녀 한 명씩을 바치며 큰 굿을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질병이 돌고 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양반들은 처녀를 내놓지 않았기에 매년 서민 가정의 처녀만 희생되었다. 조선 중종 때 서련(徐憐)이라는 사람이 판관으로 부임해 왔다. 신임 판관이 굿하는 날 현장으로 갔다. 처녀를 바치고 굿을 하니 과연 큰 뱀이 나타났다. 판관은 뱀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심방(제주도 무당)은 판관에게 어서 빨리 관아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거의 관아에 이르렀을 때 한 군졸이 ‘핏빛 비가 옵니다.’라고 외쳤다. 판관은 군졸이 외치는 소리에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판관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주민들은 서련의 죽음이 죽은 뱀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사굴의 저주는 5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끔찍한 운명의 비밀을 간직한 금주의 목숨을 노린다. 정신과 의사이자 퇴마사 진명이 강력한 영력을 가진 악귀의 위협에 혼자서 맞선다. 깊은 원한이 맺힌 악귀의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진명과 금주 일행의 주변 사람들은 악귀의 공격을 받아 몸에 이상 증세가 나타나고, 결국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다. 악귀는 여러 사람의 몸에 빙의하여 극단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아주 영리하면서도, 아주 잔인하다. 악귀의 위협 범위에 벗어나는 안전지대마저도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진행되고, 이를 지켜보는 독자의 방심을 틈타 악귀는 천천히 다가오다가 갑자기 기습해 온다. 악귀의 등장은 독자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실 소설의 플롯은 날씬하지 않다. 뱀 신앙과 무녀 의식을 이해해야 이야기의 급박한 전개를 쫓아갈 수 있다. 진명과 금주가 악귀의 위협을 피하면서 사굴의 저주와 관련된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이 조금 느슨하게 보일 수 있다. 과연 이 전개 과정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독자에게 생소할 수 있는 뱀 신앙과 무녀 의식을 문자로 설명하는 것과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을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독자는 작가나 편집자의 주를 참고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에 이미지와 음성으로 이루어진 영상은 워낙에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관객들이 저주와 관련된 연결고리들(뱀 신앙, 무녀 의식 여기에 소설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제주 4.3 사건까지)을 놓칠 수 있다. 여러 가지 소재가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김휘 감독이 어떻게 재현했을지 무척 궁금하면서도 기대된다. 무엇보다도 원작을 본 독자가 제일 많이 기대하는 영화 속 장면이 진명의 퇴마 의식일 것이다. 여기서 진명이 악귀의 저항을 온몸으로 치열하게 막는 장면과 살점이 뜯겨나가고, 선혈에 뒤덮인 희생자들을 묘사한 장면이 압권이다.

 

원작에 진명의 조수가 여성으로 등장하는데, 영화에서는 남자로 등장한다. 이름도 ‘지선’에서 ‘지광’으로 바꿨다. 아마도 주인공들의 성비 불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인물 성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영화에서 지선이 지광으로 성전환(?)한 것에 환영한다. 원작에서 진명의 여자 조수는 샤워하는 도중에 악귀의 공격을 받아 빙의하게 되는데, 불필요한 클리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포영화에 꼭 한 번씩은 벌거벗은 상태의 여자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영화 속 벌거벗은 여성은 공포의 존재 앞에 두려워하고, 손쉽게 희생당하는 약자가 된다. 여성을 약한 존재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 투영된 장면을, 그것도 결말을 향해가고 있는 이야기 후반에 나온 것이 생뚱맞게 느껴진다. 작가는 원래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꿈이었기에 그의 소설을 읽으면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생생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공포영화의 진부한 기법을 너무 따르는 소설작법이 작가의 발전을 막는 걸림돌로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소설 하나만으로 될성부른 한국 공포문학 작가의 탄생을 확신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신진오 작가의 문학적 행보를 계속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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