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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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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불평등한 사회의 '비참한 사람들'

 

지난해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장기 흥행하며 6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한국사람 열 명 중 한 명이 영화를 본 셈이다. 이 ‘감동의 물결’에 대해 저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많은 매체들이 대선 패배로 인해 ‘멘붕’에 빠진 야권 후보 지지자들이 그들의 좌절과 분노를 영화를 보며 ‘힐링’한다고 진단했다.

 

레미제라블의 ‘비참한 사람들’은 분명 이전에 혁명도 이룩했고 심지어 왕도 갈아치웠다. 그랬음에도 이들이 다시 실패할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역시 거리의 기억과 정권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개개인은 먹고살기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태백’ ‘88만원 세대’는 여전한 장기침체와 승자독식 경쟁체제로 인해 30대가 되어서도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해도 아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겉보기에는 번듯하지만 빚에 허덕이는 중산층 ‘하우스푸어’가 ‘서민’ 대다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두되었을 정도다.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한국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 안에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말했다. 이렇듯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향한 일종의 패배주의적 분노는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분노에 가까운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 비협동적 자아의 등장

 

불평등이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사회 대부분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협력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선점하지 않으면 상대가 가진다. 지고 나면 재기가 어렵다. 이 같은 사회 시스템은 경쟁만 더욱 강화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에 협력의 미덕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협력을 통해 문제점을 해결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협력에 참여하지 않은 사회 구성원의 등장이 문제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오늘날 사회에 ‘비협동적인 자아’를 가진 유형이 출현했다고 분석한다.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게 많은 복잡한 사회를 감당하지 못해 움츠러든다. 경쟁에서 자발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차이를 느낀다. 여기서 오는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해진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은 타인의 일일 뿐이다. 이런 상황인데 과연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

 

‘협력’은 공동체 최고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삶의 현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경쟁의 논리가 개입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문제는 승자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독식하는 현상이다. 패자가 다시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면 패자는 영원히 절망의 공간에서 시간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결국 패자는 패자끼리, 승자는 승자끼리 연대하는 갈등관계가 조성된다. 세넷은 그러한 ‘연대’가 오히려 협력을 방해했다고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연대’와 ‘협력’은 동등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연대’라는 말은 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일상적으로 쉽게 접하는 광고로 ‘연대’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상품을 홍보하는 광고에 유명한 연예인이 모델로 등장한다. 광고 속 연예인은 상품을 사용한다. 이 상품이 좋으니까 구입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지만 광고가 나간 이후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광고에서 사용한 방법이 바로 '연대'다. 광고의 진실은 ‘이 상품을 사용해야 유명 연예인의 팬이다’를 넘어서 ‘상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연예인의 팬은 아니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팬클럽이 지니고 있는 연대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 스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다른 스타에 대한 적대감을 동시에 내포한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존재하는 연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공동체가 연대를 한다는 것은 다른 공동체와의 경쟁이라는 전제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오히려 연대는 경쟁의 조건이 되면서 협력은 밀려난다. 더욱이 다른 공동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특히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쓴 부족주의가 만연된 사회일수록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회 구성원과 어울리지 않고 갈등을 야기한다. 그리고 승자 독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남을 짓밟아서라도 더 앞서 나가려는 경쟁을 유도한다.

 

 

“협력은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지만 판에 박힌 행위에 붙들려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개발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세넷은 인간에게 협력 유전자가 ‘본성’으로 각인돼 있지만 이를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기술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협력을 단순한 윤리적 가치로 간주하기보다 실생활에서 쓰는 실기(實技, craft)로 보는 것이다.

 

 

 

 ♣ '비협동적 자아'가 많은 아마추어 사회

 

그렇다면 우리는 협력을 기술을 어떻게 배워야하는가? 세넷은 물건을 만들거나 수리를 하는 장인들이 몸을 통해 기술을 ‘체화’하듯 사회적 관계의 기술 역시 그 리듬을 몸으로 익힐 수 있다고 말한다. 세넷이 기획중인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 1부작인 <장인>에 보면 장인은 그 어떤 보상과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기 일에서 스스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에게 도구는 작품을 창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과 이미 한 몸이다. 한 몸이 된 도구는 자신의 정신이요 신체다. 니체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 망치를 들었는데 협력의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에는 무엇을 쥐어야 하는가? 특별히 협력을 위해 도구를 들 필요는 없다. 장인 정신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헌신을 경험하면 된다.

 

세넷의 생각은 실질적인 협력의 본질을 잃은 채 ‘공감’, '연대‘만 강조했던 우리 사회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기술을 제대로 체득하기 위해서는 장기간동안 반복되어야 한다. 이미 <장인>에서도 밝혔지만 세넷은 장인적 지속성을 강조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정의한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액체 근대’ 사회 속에서 협력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생각은 실행하지 않으면 무용적인 담론으로만 남을 뿐이다. 헌신의 원리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반세기동안 좌우 이념 대립의 갈등 골이 깊어진 우리 사회에 장인적 협력의 토양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의구심이 생긴다. 특히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주종 관계로 따지는 갑과 을(甲乙)의 갈등은 지속적인 헌신의 체득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이 될 수 있다. 김홍중 <문학동네> 편집위원은 「함께 읽기: 연대를 넘어 협력으로 - ‘사회학적인 것’의 재구성」에서 세넷의 협력 정신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샹향식 변화 모델이라고 평가한다. 갑을 관계의 갈등이 지속되고 고착화된다면 상향식 변화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고, 장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비협동적 자아’를 가진 아마추어가 너무 많다. 아직 협력의 정신을 지닌 장인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연대’, ‘공감’이라는 본질 없는 공허한 단어만 있는 쓸모없는 연장을 손에 쥔 채 협력 부재의 원인을 그 연장 탓만 하고 있을지 모른다. ‘헌신’의 연장이 우리 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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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헐리우드 영화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들이 즐기는 문화로서 주로 TV와 영화, 인터넷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유포되고 생성되는 문화를 가리킨다. 현대생활에서 대중문화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대중들의 삶을 지배한다. 종래 문화의 향수는 지극히 한정된 일부 계급, 계층 사이에서 고급문화라 하였으나, 생활수준의 향상 및 교육보급의 확대에 따른 문화향수 능력의 향상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문화의 자연스러운 향수범위를 확대하여 대중문화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대중사회는 교육의 보급이나 매스 미디어의 발달에 의해 방대한 인구가 문화의 향수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문화의 발원지는 미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다른 국가들에 대해 우위를 확립한 국가적 지위를 가졌고 그를 통해 확립된 패권주의를 바탕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풍요는 영화나 TV 같은 대중매체를 통한 문화산업에서 극대화 되면서 대중문화를 양산한다. 특히 미국의 영화산업은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는 미국영화가 세계영화 생산의 85%를 차지했으며 미국 내에서 상영된 영화의 98%가 자국영화였다.

 

헐리우드 스타일로 불리는 미국영화는 일반 대중들까지 부르주아적 개성의 심리수준에 맞추기 위하여 리얼리즘, 심리주의, 낙관주의 등을 강화하면서 구조화된다. 이와 같은 영화적 상상력의 부르주아는 동일시로서의 투사로 특정 지을 수 있으며 이 심적인 과정에 의해 상상과 현실이 결합된다. 스크린의 흡인력은 바로 관객의 정신적 과정을 동원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제도란 영화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영화의 소비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정신적 기계’가 되는 것이다.

 

영화가 대중성을 누린다는 것은 영화와 관객 수용자 간의 호환적 관계를 의미한다. 영화는 관객을 자신의 세계 속으로 흡수하는 한편 관객 역시 관람상황 자체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에 의해 영화를 자신의 심리세계 내부로 흡수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의미작용을 통해 관객을 주체로 위치하게 만들고 그의 욕망이 끝나는 이미지들의 사슬을 환유적으로 미끄러지게 만들면서 특정한 쾌락을 생산한다. 바로 이러한 과정의 핵심적 구조가 ‘동일시’ 개념이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광고 등의 대중문화의 미세한 부분까지 장악하고 환영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대중문화

 

 

 

 

 

 

 

 

 

 

 

 

 

 

 

 

대중문화는 대중을 기반으로 하여 생산되고 소비되는 속성에 따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중매체를 매개로 한 문화산업의 형태로 수렴된다. 따라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분석은 대중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화 산업의 구조와 방식에 집중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오늘날과 같은 독점자본주의 시장체제에서 우리가 무지하게도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심오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파시즘과도 같은 현대의 독점 자본주의 하에 ‘문화’는 실제로는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정교하게 합리화시킨 대중조작 현상으로서 이것이 하나의 체계로 작용하는 방식에 관하여 비판한다. 문화산업과 이로 인해 양산되는 ‘긍정적 확신에 찬 문화’는 자본주의가 광고를 통해서 소비자의 욕구를 인위적으로 자극하고 생산성과 순종적 합의의 윤리를 주입시킨다. 개인이 무언가 다르거나 더 나은 것을 상상하는 능력을 가차 없이 약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상품의 다양성이 독점이라는 현실을 은폐하는 것처럼 외견상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은 표현을 양상하고 전달하는 체계의 획일성을 은폐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을 따르면 독점 하에서 모든 대중문화는 동일하며 유행하는 노래나 스타, 드라마들은 주기적으로 순환하고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유형일 뿐이고 오락 자체의 특정한 내용도 이러한 유형으로부터 비롯되며 변화하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문화의 중요한 개별 지점들은 분리하여 상호교환 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는 모든 연관된 실제적 의미로부터 소원화됨으로써 작업 외부에 존재하는 목적에 이바지하게 된다. 이러한 목적의 확장과 관련한 광고에는 자본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독점의 배타적 동력을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 전체를 강화시켜주는 고유의 특별한 정당화 양식을 지닌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제 하에서 생산되는 대중문화란 ‘검인되지 않은 것은 모두 수상한 것’이 된다.

 

 

 

 구경거리의 사회 속 대중문화

 

광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고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게끔 하는 치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광고에 노출된 사람은 자신을 모델과 동일시하며 광고가 꼬드기는 대로 소비에 동원된다. 광고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소비를 촉진시켜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지만 소비자는 사실이 아닌 광고의 환영적 이미지를 소비하며 자신을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대중문화의 한 속성으로서 기 드보르는 자본주의로 인해 ‘직접 체험하던 모든 것이 재현의 형태로 변모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이미지는 상품의 최종적 형태가 되며’ 그 결과 대중을 상대로 양산된 환영이 질서 유지에 점점 더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 ‘구경거리’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문화산업은 ‘폐물’과 같은 타락한 성격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 희생자들이 잠재의식 속에서 현상 유지 상태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사악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검인되지 않은 것 = 모두 수상한 것’으로 연결되는 일반화된 인식은 대중문화의 속성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매체의 배후에서 소비를 꼬드기는 자본권력의 체계적 작동방식은 소비에의 유혹을 안달이 난 우리 안의 욕망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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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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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섹시, 멸치, 오빠, 앙!

 

 

 

 

tvN SNL 코리아 시즌 4 13회 '진중건의 토론배틀' & '위캔업뎃'

 (SNL 크루 출연: 진중권)

 

 

진중권은 8년 전에 쓴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머리말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의 미래가 공산주의가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틀렸지만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이 말이 맞았고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다. 저술행위를 생계로 삼는 진중권에게 글쓰기는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니까. 최근 방송을 통해 연기 노동의 유희를 몸소 보여줬다. 남을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전공을 마음껏 펼쳤던 백분 토론은 아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 등급이 붙을 정도로 성인 코미디를 지향하는 라이브 쇼 ‘SNL(Saturday Night Live) 코리아’에 크루(crew, 게스트)로 출연하여 숨겨두었던 연기 실력(?)을 펼쳤다.

 

 

 

 

 

 

진중권처럼 행사하는 '가짜 진중권' 진중건(김원해 역)은 “뽀로로와 크롱은 친구”라는 7살짜리 어린이(김슬기 분)의 말에 “악어와 펭귄은 먹이사슬에서 상하관계다. 어떻게 둘이 친구가 될 수 있느냐”며 논리적으로 따져 물었다. 그러자 여기서 진짜 진중권이 등장한다. 그는 ‘짝퉁’ 진중권에게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내 흉내를 내고 다니냐”며 정색했다. 이어 그는 “지금 아이를 데리고 뭐하는 것이냐 이건 아이에게 지적 폭력이다. 아이에게는 눈높이를 맞춰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짝퉁을 나무라면서 쫓아냈다. 그러나 진중권도 “뽀로로와 크롱은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칸트와 데카르트를 인용해 7살 어린이를 울리고 만다. 또 다른 코너에서는 한 때 자신과 SNS에서 설전을 벌였던 낸시 랭 특유의 인사말(섹시, 큐티, 키티, 앙!)을 패러디해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섹시, 멸치, 오빠, 앙!’

 

생방송이 나간 이후 진중권은 무대 오르기 전부터 화장실을 열 번 갔다 올 정도로 많이 긴장했다고 밝혔다. 이 날 같이 크루로 출연했던 홍석천은 자신의 트위터에 진중권의 연기가 좋다고 칭찬했으며 '장난기 많은 소년' 같다면서 진중권과 같이 찍은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 어린이의 마음으로 상상력 발휘하기

 

오래 전부터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우리 사회는 강조했다. 현대 혹은 미래 사회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발상의 전환, 새로운 아이디어 등이 모두 상상력과 연관된다. 영화, 소설, 인터넷 등을 판타지가 점령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상상력에서 비롯된 ‘생산품’들이 사회 곳곳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우리가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처럼 어떤 과정을 통해, 혹은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그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제시한 쉬운 방법은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잠시 어린 아이였을 때로 돌아가 보자. 어린 아이였을 때 우리는 어땠는가. 아무런 구애 없이 온갖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마다 호기심이 생겼고 호기심에서 파생된 상상력이 두뇌의 날개가 되어 전혀 구속받지 않고 훨훨 날았다. 상상력 없이는 놀이도 불가능했다. 나 자신은 지구인도 되었다가 외계인도 되면서 목소리를 바꿔가며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틀에 박힌 교육을 받고 사유마저 일정한 방식에 길든 성인이 된 지금은 어린 시절의 활발했던 상상력을 단지 유치한 유희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성인 입장에서 어린 시절로의 회귀는 ‘퇴행’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생각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린이 되기’는 퇴행이 아니라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상상력으로의 복귀나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의 모습을 심각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이와 작품에서 하나하나 찾아가면 된다. 특히 아이들의 유쾌하고 천진난만함이 녹아 있는 놀이들에서 특히 그와 같은 상상력의 뿌리를 더듬어 간다. 가령 주사위 놀이에서 혼돈과 우연의 상상력을, 숨바꼭질 놀이에서 불연속인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창조해 낸다. 진중권은 '코디미 연기'라는 색다른 놀이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창조했다.

 

 

 

 '자기풍자'의 조커로 분한 논객

 

진중권은 변희재와의 '사망유희' 이후로 SNS 활동을 제외한 공개적 활동이 뜸할 정도로 그동안 '아웃사이더'로 지내왔다. 그러다가 마침 오랜만에 출연한 방송이 토론 프로그램이 아닌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를 선택했다. 'SNL 코리아'가 자신을 개그 소재로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프로그램 출연자와 방송 관계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선포한 변희재는 진중권의 출연이 자신 덕분이라고 트위터에 밝혔다. 그러자 진중권은 트위터로 변희재의 주장을 반박했다. SNL 출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오가던 얘기였으며 이번 SNL 출연이 유쾌했다고 소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유희를 즐길 줄 아는 경험자답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풍자는 마지막은 자기풍자죠. 그것이 풍자의 완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비웃는 여유…. 아무튼 오늘 기분 좋게 망가져 봤습니다"

 

오늘날 조커(joker)라고 하면 고담 시를 혼란에 빠뜨리는 영화 <배트맨>의 악당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유래를 되돌아보면 오늘날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전혀 딴 판이다. 중세에 조커는 '광우'(狂愚), 즉 한 마디로 말하면 미친 바보였다. 지혜로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히려 똑똑한 척 하는 현자보다 한 수 위 볼 줄 알며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진짜 어리석은 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말한다. '그대의 생각에 약간의 광기를 섞으라. 알맞게 헛소리를 함은 즐겁도다." (58쪽) 

 

 

 

 

 

앙투안 와토  「피에로 질」 1718~1719년

 

 

경외의 대상이었던 광우는 본격적으로 '이성'의 햇빛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는 합리주의의 근대에 들어서면서 '병원'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때부터 광우는 진짜 '미친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전락했지만 그들은 '이성'의 눈부신 햇빛이 지배하는 현실을 떠나지 않았다. 연극 무대에 볼 수 있는 '광대', 즉 피에로가 되어 이성의 현실에 재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가들로부터 다시 한 번 경외의 대상이 된다.

 

 

 

 

“피에로의 변신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피에로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에 피에로는 아둔하고 천박하고 상스러운 존재였다. 낭만주의 시대에 상황은 돌변한다. 피에로가 예술적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성의 독재에 맞섰던 낭만주의 이후 예술은 광기와 연결되어 외려 창조성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피에로의 웃음 뒤에 감추어진 저 멜랑콜리. 우울증은 예부터 창조적 천재의 기질이 아니었던가. 고전주의가 무너지고 모더니즘이 탄생하던 시기에 발자크, 보들레르, 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드뷔로의 팬터마임에 열광했다. (중략)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 광대에게서 사회 속에서 사회 밖으로 추방된 현대 예술가의 존재를 보았던 것이다.” (62쪽)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전시회에 출품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수고 요셉 보이스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기행(奇行)을 하나의 예술 행위로 선보였다. 이처럼 ‘현대미술’이라고 지칭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미친 바보’ 광대처럼 활동한다. 그리고 한 번씩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전달하는 예술적 조커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아이들이 광대에게서 느끼는 공감은 예술에서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어리석으면서도 문화적 충격을 선사하는 현대예술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어리석음’이 인정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에서 발연기를 한 진중권을 보라.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논객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어리석을 정도로 연기를 썩 잘 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숙적 논객과 그 밖의 안티 팬들은 연기를 한 진중권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자신이 강조했던 놀이 그리고 상상력의 미학적 가치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것도 ‘방송 연기’라는 색다른 노동을 함으로써. 심지어 자신의 논객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유발하게 만들어 자기풍자의 개그로 변용시켰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선보여서 관객 앞에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광대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논객으로서의 자신의 인지도를 단지 ‘개그 소재’로 희화, 변용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누구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현명하고 똑똑한 척하는 진짜 어리석은 자가 아닐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 전서> 3장 18절,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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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옛날 옛날에 가난한 젊은 화가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뒤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프란츠 나이스타인이었습니다. 두 화가는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궁핍한 삶을 연명하면서 살았어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무척 돈독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한 사람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이들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나이스타인이 일하게 되었고 뒤러는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이스타인은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드디어 뒤러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 후 뒤러는 친구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미술학교에 보내서 그림을 배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오랫동안 육체노동을 했기 때문에 손이 굳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나인스타인은 화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이죠. 친구를 위해서 일하다가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뒤러는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러는 자신의 친구가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도하는 그의 손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친구를 위해서 희생한 그 손으로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뒤러는 그 순간을 정성스럽게 스케치를 했습니다. 훗날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감동적인 그림입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잉크로 그린 이 스케치는 얼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손 마디마디마다 절절한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감동적인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삶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처럼 인간적 유대로 엮여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것이 진심일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진심이 없는 곳에서는 감동의 싹이 자라지 않습니다. 고귀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평탄한 곳에 피어나는 꽃이기보다는 역경의 가시밭길을 넘어선 곳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이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생과 감사와 신뢰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아마 ‘사랑’일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시 「가을의 나뭇잎」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동이 있는 삶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일생의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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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 빌 게이츠는 욕심이 많다. 일전에 미국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한 남학생이 물었다. “만약 당신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제일 먼저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책을 빨리 읽고 싶어요.”

어린 시절 책벌레로 통했던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동네 도서관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5월 11일에 시행되었던 제1회 한국독서능력검정 대상을 받은 책벌레가 미래의 빌 게이츠가 된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독서능력검정이었다.”  한국독서능력검정에 처음 응시하는 대학생과 취업준비생들은 빌 게이츠의 소원을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한국독서능력검정위원회가 선정한 도서를 다 읽어야지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다. 총 100권이다.

주최 측은 이번 독서능력검정을 “대학생들이 독서를 통해 오늘날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력을 함양하고 취업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처음 시행되는 독서능력검정을 두고 기업 채용 담당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어떤 책을 읽고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를 알면 구직자의 지적 수준과 창의력은 물론이고 인성까지도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러한 반응에 동의할 수 없다. 독서능력검정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참으로 의아스럽다.

독서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활자로 된 책을 읽는 행위지만, 좀 더 넓게 해석해 보면 지식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까지 포함되어야 한다. 독서를 통한 성장은 책을 무조건 많이 읽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활자 속에 갇힌 지식이 맞는지 틀렸는지 고르는 과정만으로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평가할 수 없다.

어릴 적 수영을 배울 때 누구나 기억하는 주의사항이 있다. ‘몸에 물을 묻힌 뒤 들어가라.’ 준비운동이 없으면 자칫 탈이 날 수 있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스펙을 위해 무턱대고 책 속으로 뛰어들면 머리에 쥐가 난다. 독서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기는커녕 엄청난 부담감만 가질 뿐이다.

 

 

 

 

 

 

 

 

 

 

 

 

 

 

 

 

어린 시절 책벌레 소리 들어 본 대학생들이라면 독서능력검정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해서 진짜 책벌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일본의 책벌레 다치바나 다카시는 왜 그렇게 열심히 책을 읽느냐는 물음에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고 했다. 100권의 책을 억지로 폭식하고 있는 전국의 책벌레들은 책을 제대로 먹을 줄 모른다. 자신이 ‘스펙’의 불빛에 향하다가 청춘의 시간이 타 죽어가는 나방인지 아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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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21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마지막 문장 명언이고!
더운데 잘 지내시죠? 사이러스님~ :)

cyrus 2013-05-21 17:03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죠. 여기 말고 다른 온라인에서도 자주 만나잖아요 :)

blanca 2013-05-2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백권이요? 게다가 문제까지. cyrus님 도전하시는 건가요? 건투를 빕니다.

cyrus 2013-05-21 17:05   좋아요 0 | URL
아니요, 책 읽고 나서 내용 물어보면 기억이 잘 안 나는 편이에요. 독서 능력으로 시험을 보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그냥 지금처럼 읽고 싶은 책 있으면 읽는 자유로운 독서가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