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년)이 나왔을 때 책 표지가 낯익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텅 빈 방.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바닥에는 시든 채 흩어진 꽃다발이나 각종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다. 사진의 제목은 ‘열아홉 번째 사랑의 방’. 프랑스의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랑의 방’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베르나르 포콩은 지나간 시간을 주제로 지적이고 회화적인 사진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장면을 구성해 찍는 ‘메이킹 포토’ 기법을 활용한다. 그의 사진 작품은 10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고, 전시회를 계기로 사진집 『사랑의 방』(마음산책, 2003년-품절)도 출간되었다. 2001년에 여행작가 앙토넹 포토스키가 쓴 문장을 함께 엮은 사진집 『청춘. 길』도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왔다.

 

 

 

 

 

몇 달 전부터, 거의 매일 밤, 사랑 꿈을 꾼다.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내가 늙었다고, 청춘을 둘러싼 마술 영사(映寫)의 원 밖으로 내던져지고, 시간의 온갖 협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낀다. (64쪽)

 

 

『사랑의 방』의 발문을 맡은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베르나르 포콩을 ‘가장 프랑스적인 사진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우리 삶에 상실되는 대상이다. 한편으로 그들의 부재는 추억을 쫓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순간 우리 삶에 가까이 빛나다가 언젠가는 추억의 재가 되어 사라진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시구처럼 사랑은 너무나 쉽게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다. 흐르는 물처럼. 그것을 다시 잡을 수도, 그때 그 시절로 되돌릴 수 없다. 세월은 가고 오직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내가 남을 뿐이다.

 

 

 

 

 

가장 찍고 싶은 것이 가장 찍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얼굴. (44쪽)

 

 

베르나르 포콩은 ‘사랑의 방’ 연작을 통해서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의 실체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사진과 단상은 다소 관념적이다. 일부 독자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단상은 여러 번 곱씹으면서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역시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기는 쉽지만 않다. 특히 나처럼 사랑을 하고 실연을 겪어보지 않은 ‘연애 고자’에게는. 전혀 사랑하는 않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고 실연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 알프레드 테니슨의 명언을 되새겨 본다. 아마도 이 책은 몇 십 년 지난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때쯤이면 사랑의 단맛, 쓴맛 다 맛봤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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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11-1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언가가 지나가고 남은 자리의 사진 같군요. 베르나르 포콩은 미처 몰랐는데 님 덕분에 좋은 사진 또 감상할 기회를 가지네요.

cyrus 2014-11-10 21:12   좋아요 0 | URL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보면 좋은 사진집입니다. 제목도 좋고요. 품절이 되어서 아쉽게 생각하는 책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 - 복잡한 세상, 넘쳐나는 기기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알렉스 수정 김 방 지음, 이경남 옮김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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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스마트폰에 푹 빠진 산만한 원숭이

 

우리 생활은 ‘스마트폰 라이프’라 해도 좋을 만큼 스마트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잊다. 아침에 눈을 떠서 화장실에 갈 때에도 이제는 신문 대신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간다. 먼저 이메일을 확인하고, 주요 일간지 헤드라인을 간단하게 읽는다. 집이나 밖에서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친구들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답글을 올린다.

 

최근 중독에 대한 개념은 약물중독 혹은 물질중독의 개념을 넘어 인터넷, 게임, 스마트폰에 이르는 '디지털 중독' 개념으로 확산하고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화장실에 갈 때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하거나 밥을 먹다가도 알람이 울리면 달려가는 등의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스마트폰 사용 빈도가 높다고 생각하면 한국과학기술개발원에서 만든 ‘스마트폰 중독 자가진단법’으로 중독의 심각성을 확인해보면 좋다. 이 중 ‘그렇다’가 8개 이상이면 중독, 5~7개는 의심, 3~4개는 위험군이다.

 

 

 

 

 

 

 

옛사람들은 마음을 원숭이 같다 했다. 원숭이를 보면 온종일 꺅꺅거리고 고함치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 돌아다니며 종일 설쳐대지만, 하루해가 지고 나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저 시간만 보낼 따름이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다. 스마트폰을 24시간 손에 쥐고 있는 우리는 원숭이처럼 무언가에 불안해하고 가만히 있지 못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하고,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 알람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 ‘호모 디지털쿠스’가 아니라 ‘스마트폰에 푹 빠진 산만한 원숭이’에 가깝다.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 생각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Scene #2  멀티태스킹에 대한 오해  

 

 

 

 

 

혹자는 스마트폰 중독의 심각성에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트윗을 날리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한꺼번에 여러 작업을 하면 능률이 높아지는데 그에 비해 언론과 전문가들은 너무 문제점만 부각한다고. 이를 우리는 ‘멀티태스킹’이라고 부른다. 즉,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진행한다.

 

그런데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한 퓨처리스트 알렉스 수정 김 방은 우리가 멀티태스킹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멀티태스킹의 의미를 착각하고,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에 당신이 작업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한 중요한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상상해보자. 막상 보고서를 시작하려니까 벌써 싫증이 난다. 이 지루하고 끔찍한 작업을 얼른 끝낼 방법이 없을까? 당신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을 들으면서 보고서를 쓰려고 한다. 음악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당신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 것이다. 이제 보고서를 반 정도 작성하는 와중에 마침 친구의 카톡이 왔다. 내일 만나는 장소에 대해서 친구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괜찮은 약속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 보고서를 쓰다 말고, 인터넷으로 지도 검색을 한다. 이런 산만한 상황 속에 보고서는 하루 안에 다 완성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을 우리는 분명 멀티태스킹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사실 멀티태스킹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두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능률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또 다른 의미는 이것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작업 진행 속도가 느릴 정도로 비생산적인 작업 과정이다. 우리는 전자의 멀티태스킹을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얼른 끝내고 싶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상황에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 하고, 중간에 딴 일로 빠진다면 보고서 작업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다. 결국, 보고서 작성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멀티태스킹이 아닌 ‘스위치태스킹’(Switchtasking)이라고 해야 맞다. 두 가지 이상을 한꺼번에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번갈아 하는 것뿐이다. 특정 작업에 대한 집중력과 주의력을 떨어뜨리고, 작업의 생산성이 떨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이상의 작업 진행 방식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인데, 사실 스위치태스킹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작업 진행 방식이 능률성을 보장해주는 멀리태스킹이라고 착각하는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스위치태스킹은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몰입을 방해한다. 특히 스마트폰은 우리가 흔하게 스위치태스킹으로 사용되는 물건이다. 길을 지나가면 두 눈은 스마트폰에 향한 채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나머지, 앞으로 다가오는 보행자나 통행차량을 보지 못한다. 집중력이 스마트폰으로만 향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동차 운전 중에 스마트폰이나 DMB를 보는 것도 위험하다.

 

 

 

 Scene #3 스마트폰과의 얽힌 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때 

 

그동안 '무어의 법칙'(Moore's Law)은 기술 시대의 진화를 안정적인 견인해 왔다. 메모리의 용량이나 CPU의 속도는 약 1.5년에 2배씩 증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 시대의 의미가 서서히 무색해진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 속도는 날이 갈수록 점점 향상되고 있고, 그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졌다. 저장 용량이 더욱 커지고, 인터넷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편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컴퓨팅 환경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반환경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와 IT 기기의 관계는 친밀한 연대성을 넘어서 이제는 구속에 가까운 ‘얽힘’(Entanglement)으로 형성되었다. 인간의 두뇌에서 탄생한 IT 기술이 역으로 인간의 두뇌역할을 대신하는 능력으로 발전되었다. 인간은 많은 양의 정보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고, 망각하기 쉬운 동물이다. 반면,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기계 부품이 망가지지 않는 이상, 정보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기억한다. 우리는 사소한 정보마저도 외울 필요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는 스마트폰에 입력만 하면 저장되고, 전화를 걸기 위해서 숫자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어졌다. 스마트폰을 분실하면 자주 연락하는 친구의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등장 이후로 우리는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일을 스마트폰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속도와 효율성이 중시되는 시대로 변할수록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디지털 중독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당신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인터넷에 질 수밖에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집중 상태를 지속시키는 데 실패한다. 매 순간 정신 팔기 딱 좋은 놀이공원 규모의 가상 세계가 있는 것을 아는데 어쩌겠는가. (81쪽)

 

스마트폰을 잠시 꺼두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산만하고 집중력이 저하된 우리 마음을 원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까. 익숙한 물건을 잠시 멀어지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마음을 산만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지 또는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즉, 나와 스마트폰과의 관계에 대해 재설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관조적 컴퓨팅’(Conterplative computing)이라고 한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 횟수를 줄이고, 정말 필요한 상황이거나 목적이 있을 때만 사용한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혼란한 마음을 잡기 위해서라면 명상과 산책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활동이 익숙해지면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우리 삶에 가족만큼 너무나 친숙해진 스마트폰과의 얽힌 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때다. 그 속에 갇힌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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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은데,
저 테스트에서는 3개 해당되네요.
확실히 요샌 폰으로 SNS 들여다보느라 책 읽는 시간도 많이 줄었어요.

cyrus 2014-11-10 00:0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은빛님. 요즘 저도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는 일을 자제하고, 아무 생각없이 페이스북에 접속하지 않으려고 아예 스마트폰 전원을 끄거나 매너모드로 쓰고 있답니다. 완전히 스마트폰 노예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비해 책 읽고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늘렸습니다.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일상도 썩 나쁘지 않고, 좋은 것 같습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1-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3개에 해당되네요ㅎㅎ 스스로도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여겨지는데, 과도하게 인터넷에 자주 접속할 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위기의식이 느껴지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좀 멀어질까 고민중이예요.
스위치태스킹도 상당히 공감되는 얘기구요.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스마트폰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터겠죠?) 한가지에 집중하는게 상당히 어려워요. 이러니...우리 아이들은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cyrus 2014-11-10 21:25   좋아요 0 | URL
전 아직 미혼인데 스마트폰에 너무 익숙해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걱정됩니다. 오늘 밖에서 우연히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여자아이를 봤어요. 아이를 맞이해주는 엄마가 앞에 서 있는데도 아이는 차에 내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더군요. 제가 어느 인터넷 기사에 본건데 스마트폰은 중학생 때 쓰기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하더군요. 유치원, 초등학생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이르고,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중독 증상을 고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6번째 시리즈 『허버트 조지 웰스』(현대문학, 2014년)는 총 33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비록 선집이지만, 웰스 본인이 단편 작품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웰스 단편 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단편 선집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웰스의 단편소설은 장편소설에 비해 덜 알려졌다. 유명 작가들의 대표 단편만 선별해서 수록한 선집에 한 두 작품만 소개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 『허버트 조지 웰스』(현대문학, 2014년)

 

- 아이피오르니스 섬 ※ Æpyornis Island (1894년)
- 기묘한 난초의 개화 ※ The Flowering of the Strange Orchid (1894년)
- 발전기의 왕 ※ The Lord of the Dynamos (1894년)
- 아부 천문대에서 ※ In the Avu Observatory (1894년)
- 퇴짜 맞은 제인 ※ The Jilting of Jane (1894년)
- 도둑맞은 세균 ※ The Stolen Bacillus (1894년)
- 숲 속의 보물 ※ The Treasure in the Forest (1894년)
- 원뿔 ※ The Cone (1895년)
- 나방 ※ The Moth (1895년)
- 데이비드슨의 눈과 관련된 놀라운 사건
※ The Remarkable Case of Davidson's Eyes (1895년)
- 지워진 남자
※ The Sad Story of a Dramatic Critic" (aka "The Obliterated Man", 1895년)
- 플래트너 이야기 ※ The Plattner Story (1896년)
- 보라색 버섯 ※ The Purple Pileus (1896년)
- 붉은 방 ※ The Red Room (1896년)
- 바다의 침입자 ※ The Sea Raiders (1896년)
- 현미경 아래의 슬라이드 ※ A Slip Under the Microscope (1896년)
- 고 앨브스햄 씨 이야기 ※ The Story of the Late Mr. Elvesham (1896년)
- 수술대에서 ※ Under the Knife (1896년)
- 수정알 ※ The Crystal Egg (1897년)
- 별 ※ The Star (1897년)
- 지미 고글 신 ※ Jimmy Goggles the God (1898년)
- 기적을 행하는 사나이 ※ The Man Who Could Work Miracles (1898년)
- 윈첼시 양의 사랑 ※ Miss Winchelsea's Heart (1898년)
- 최후의 심판의 광경 ※ A Vision of Judgment (1899년)
- 아마겟돈의 꿈 ※ A Dream of Armageddon (1901년)
- 새로운 촉진제 ※ The New Accelerator (1901년)
- 마술 가게 ※ The Magic Shop (1903년)
- 파이크래프트의 진실 ※ The Truth About Pyecraft (1903년)
- 거미 계곡 ※ The Valley of Spiders (1903년)
- 눈먼 자들의 나라 ※ The Country of the Blind (1904년)
- 개미 제국 ※ The Empire of the Ants (1905년)
- 담장에 난 문 ※ The Door in the Wall (1906년)
- 아름다운 양복 ※ The Beautiful Suit (1909년)

 

 

 

 

 

 

 

 

 

 

 

 

 

 

 

 

 


* 다가올 그날의 이야기 (초록달, 2014년)


- 기적을 일으켰던 한사람
- 마술 가게
- 별

 

 

 

 

 

 

 

 

 

 

 

 

 

 

 

 

* 타임머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64) / 열린책들 (2011년)

 

- 크로닉 아르고호 ※ The Chronic Argonauts (1888년)
- 수정알
- 맹인들의 나라

 

 

 

 

 

 

 

 

 

 

 

 

 

 

 

 

* 세계의 환상 소설 (이탈로 칼비노 엮음, 민음사, 2010년)

- 눈먼 자들의 나라

 

 

 

 

 

 

 

 

 

 

 

 

 

 

 

 

 

 

* 마술 가게 (바벨의 도서관 2, 바다출판사, 2010년)


- 벽 안의 문
- 플래트너 이야기
- 고 엘비스햄 씨 이야기
- 수정 계란
- 마술 가게

 

 

 

 

 

 

 

 

 

 

 

 

 

 

 

 

 

* 겨울 사자 : Winter (해럴드 블룸 클래식, 생각의나무, 2007년-품절)


- 데이비드슨의 눈과 관련된 놀라운 사건

 

 

 

 

 

 

 

 

 

 

 

 

 

 

 

 

 

*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년)


- 붉은 방

 

 

 

 

 

 

 

 

 

 

 

 

 

 

 

 

 

 

* 세계 공포 문학 걸작선 : 고전편 (환상문학전집 12, 황금가지, 2003년-품절)


- 바다의 침입자

 

 

 

 

 

 

 

 

 

 

 

 

 

 

 

 

 

*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4 : 환상과 기상 (살림, 2003년)


- 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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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용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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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런 공상을 빠지곤 해. 오늘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공상.”

(H.G. 웰스 「기묘한 난초의 개화」 중에서, 56쪽)

 

 

 

공상과학소설은 19세기에 태어난 21세기 장르이다. SF처럼 자기 시대와 불화하며 다른 시대를 앞서 선취하는 장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의 시대로부터 망명하여 새로운 세기를 예비하는 그 특유의 선취성은 때로 경박한 오락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주류문학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타임머신이라는 황당무계한 소재를 상상했을 때, 사람들은 터무니없다고 치부했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이 황당한 상상력은 가능성이 되었다.

 

웰스는 쥘 베른과 함께 과학소설의 원조로 평가받는다. 베른이 할아버지라면, 웰스는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웰스의 영향력은 21세기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작가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 웰스의 작품들을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그가 발표한 소설에 웰스가 연상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개미』에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저자로 나오는 천재 곤충학자의 이름이 에드몽 웰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웰스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웰스는 자신의 단편소설들이 신사의 서재보다 요양소 침대나 치과의 응접실, 기차 같은 곳에서 읽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이 단편선집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오락성 짙은 내용만 모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한 세기 앞선 웰스의 상상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담장에 난 문」은 웰스의 단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흔히 SF 단편 모음집에 ‘벽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벽 속에 현실을 뛰어넘은 미지의 세계를 아름답고 경이롭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어린아이가 우연히 집 근처 벽 안에 있는 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기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매우 아름답고 행복하며 어린이 눈으로 봐도 현실보다 달콤하다. 벽 속에 펼쳐진 정원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큰 흑표범 두 마리가 살고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행복한 산책을 경험한다. 벽 속의 신비로운 세계를 묘사한 이 장면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요정의 섬」이나 「이른하임의 영토」에 연출된 환상적인 풍경 분위기와 흡사하다. 웰스는 포처럼 환상의 세계를 구체적 묘사를 통해 영사기처럼 보여 준다.

 

정체를 알 수 없거나 기존의 생태 방식을 뛰어넘는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전혀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묘한 난초의 개화」는 존 윈덤의 1951년 작 소설 『트리피드의 날』에 인간을 살상한는 괴식물의 등장을 예고한다. 평범하게 보이는 난초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내용은 자연을 지배하면서 문명의 진보에 들뜬 인류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바다의 침입자」는 지나가는 배를 촉수로 공격하는 두족류(오징어, 낙지가 여기에 속함)가 등장한다.

 

영화에 나오는 괴물은 3D 기술의 등장 덕분에 한층 더 실감 나게 연출이 가능하다. 요즘에 나오는 괴물영화와 비교하면 「바다의 침입자」는 괴물의 형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을 공격하는 촉수 괴물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맞서는 인간의 대결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진다. 「개미 제국」은 웰스의 단편작품들 중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시리즈가 탄생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여기서 『개미』 줄거리가 형성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개미들은 ‘손가락들’이라고 불리는 인간을 정복하려고 한다. 웰스는 베르베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작은 생명체 개미가 인간의 수준이 돼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인간들이 책과 기록으로 지식을 모았듯이 개미들이 곧 지식을 모으기 시작하고 무기를 사용하고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 계획적이고 조직화된 전쟁을 치른다면? (「개미 제국」 중에서, 554쪽)

 

 

웰스는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낸 문명의 위대함을 예찬하면서도 그에 대한 인류의 맹목적인 믿음 또한 경고한다. 「발전기의 왕」은 기계가 작동되는 문명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상을 암시한다. 「도둑맞은 세균」은 생물학 무기와 세균전이 초래하게 될 위험성을 경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웰스의 작품은 비관주의 성향으로 짙어졌는데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발표된 단편에서도 언젠가 다가오게 될 과학 문명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웰스의 유명 장편 『타임머신』『투명 인간』을 재미있게 읽어 본 독자라면 단편소설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웰스의 SF 문학 세계에 입문하는 독자는 단편소설을 먼저 읽어보면 좋다. 작품을 읽고 나서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든 독자가 있다면 웰스 본인에게는 무척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단, 책에 아쉬운 점 하나가 있다면 독자에게 생소한 용어나 인명에 대한 주석이 없는 것이다. 간혹 글에 과학 관련 용어나 웰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 언급된다. ‘크레오소트’(「아르피니오스 섬」), ‘두족류’(「바다의 침입자」), ‘섭동’(「별」), ‘블라바츠키 부인’(「기적을 행하는 남자」)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상세한 주석은 독자가 백 년 전에 나온 글을 읽으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루한 이야기라도 독자가 전혀 거리감 없이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서는 주석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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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독서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근본적 읽기의 기술
에밀 파게 지음, 최성웅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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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밀란 쿤데라, 『느림』 중에서)

 

 


 Scene #1  속독의 시대 

 

바야흐로 속도의 시대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빨라졌고, 그에 걸맞게 간편해졌다. 그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도태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수십 가지 정보가 쏟아지는 요즘, 한 장 한 장 교감해야 하는 책은 낡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는 쓸 만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입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성공의 성패를 좌우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지 못한다면 뒤처질 것이 자명하다. 바쁜 직장인들에게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 가장 간편하고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한 공부이며, 독서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속독법이다. 속도의 시대는 곧 속독의 시대인 셈이다.

 

올해 초, 미국에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천천히 단어를 읽으면서 시선을 아래로 이동하게 된다. 애플리케이션은 이런 동작을 세분화시킨 것인데, 이용자들에게 단어를 한 번에 하나씩 빠르게 보여준다. 1분에 250단어에서부터 천 단어까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삼성의 갤럭시 기어가 이미 베타버전으로 선보였다. 만약 최고 속도인 1분당 1000개 단어의 속도로 읽을 수 있다면 해리포터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77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는 단 하루다. 우리나라도 전자북을 읽을 수 있는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나왔다.

 

그런데 속독을 하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예전에 속독으로 일주일에 다섯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수필이나 가벼운 소설 한 권 정도는 세 시간이면 볼 수 있었고, 어렵고 두꺼운 책이라도 넉넉잡아 너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별생각과 준비 없이 줄거리 위주로 속독했는데 며칠 지난 후에 그때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서평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책에 대해서 조금만 깊은 내용을 물었다면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Scene #2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기의 즐거움  

 

그렇다면 속독의 시대 속에 효과적으로 책을 읽는 지름길이 없을까. 요즘처럼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속독과 다독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둘 다 일리가 있다. 마음의 양식인 책도 질과 양의 조화가 맞아야 '영혼의 보약'이 된다는 뜻에서 보자면 먼저 천천히 음미하면서 깊이 있게 책을 읽는 방식도 좋다.

 

프랑스 인문학자 에밀 파게(1847~1916)는 온전히 독서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느리게 읽을 것을 강조한다. 책을 느긋하게 꼼꼼히 읽어내는 ‘슬로 리더(slow reader)’가 되는 것이다.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는 『L'Art de Lire』를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어 원제를 우리말로 풀어내면 '독서술'이다. 1959년에 '독서술'이라는 제목으로 에밀 파게의 책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번역자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故 이휘영 선생(1919~1986)이다. 최근에 새로운 제목으로 『L'Art de Lire』 완역본이 처음 선보였다.

 

『단단한 독서』는 에밀 파게가 65세 때 쓴 책이다. 그러니까 1912년에 출간되었다. 세상에 나온 지 무려 100년이나 지난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인문학 열풍과 함께 '독서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지고 있는데, 속독의 시대 속에서 '슬로 리딩'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올바른 독서법으로 정립하고, 제시한 사람은 에밀 파게였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야 한다. (17쪽)

 

『단단한 독서』는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특별한 비법 몇 가지 나열한 자기계발 도서가 아니다. 속독의 시대 속에서 잊고 있던 독서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한다.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속독 콤플렉스' 때문에 점점 책을 꺼리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읽기'는 잊힌 책에 대한 애정을 되살려준다. 독서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친근한 행위로 만들 수 있다. 책과 좀 더 친해지려면 느리게 읽을수록 좋다. 수박 겉핥기식의 속독은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생각을 무턱대고 믿어버리고, 텍스트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린다. 오히려 이런 속독이 책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는 나태한 독서법이 된다.

 

천천히 책을 읽었다면, 이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듭 읽어야 한다. '생각을 담은 책' 즉 철학자가 쓴 책의 경우, 책 속 내용과 자기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철학자의 생각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책 속에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문체를 즐기는 데 좋다. 우리가 글을 쓰게 되면 교정을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이 좀 더 나은 글로 독자의 마음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문체와 언어를 교정해야 한다. 거듭 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맨 처음에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묵상해야 하는 책들을 급하게 읽어버리면 이건 좀 낭비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는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되는 그 기쁨을 놓쳐버린다니,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Scene #3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깨달음의 깊이는 읽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깊은 깨달음은 깊은 읽기에서 나온다. 천천히 깊이 읽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천천히 깊이 읽을 때 우리는 독서의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된다. 독서의 기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영혼의 양식인 책을 소중히 여기는 독서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 딱 한 권이라도 있다면, 처음의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라.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하라.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진정으로 속 깊은 정을 나누듯이.

 

그렇지만,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이 다 완벽하고 똑똑하다고 볼 수 없다. 파게는 책을 자신의 오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친구이면서도 그의 결점을 숨기는 것을 경계한다. 느린 속도로 거듭 읽는 것은 단지 책에 대한 감동의 즐거움을 느껴줄 뿐만 아니라, 독자가 책의 결점을 꼼꼼하게 검토하여 저자를 비판할 수 있도록 무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파게가 독자에게 강조하는 ‘단단한 독서’다.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이해하고자 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다시 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비판적 검토 아래, 작품이 지닌 진실과 아름다움에 애당초 토론이 불필요했음이 입증됐을 때 다시 자신의 갑옷을 내려놔야 한다. (189쪽)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저자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힘. 그것이 제대로 된 '단단한 독서'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에밀 파게의 독서술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어야 한다. Iterum quae digna legi sint. 『단단한 독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처럼 다시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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