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단한 독서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근본적 읽기의 기술
에밀 파게 지음, 최성웅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평점 :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밀란 쿤데라, 『느림』 중에서)
Scene #1 속독의 시대
바야흐로 속도의 시대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빨라졌고, 그에 걸맞게 간편해졌다. 그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도태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수십 가지 정보가 쏟아지는 요즘, 한 장 한 장 교감해야 하는 책은 낡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는 쓸 만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입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성공의 성패를 좌우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지 못한다면 뒤처질 것이 자명하다. 바쁜 직장인들에게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 가장 간편하고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한 공부이며, 독서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속독법이다. 속도의 시대는 곧 속독의 시대인 셈이다.
올해 초, 미국에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천천히 단어를 읽으면서 시선을 아래로 이동하게 된다. 애플리케이션은 이런 동작을 세분화시킨 것인데, 이용자들에게 단어를 한 번에 하나씩 빠르게 보여준다. 1분에 250단어에서부터 천 단어까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삼성의 갤럭시 기어가 이미 베타버전으로 선보였다. 만약 최고 속도인 1분당 1000개 단어의 속도로 읽을 수 있다면 해리포터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77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는 단 하루다. 우리나라도 전자북을 읽을 수 있는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나왔다.
그런데 속독을 하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예전에 속독으로 일주일에 다섯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수필이나 가벼운 소설 한 권 정도는 세 시간이면 볼 수 있었고, 어렵고 두꺼운 책이라도 넉넉잡아 너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별생각과 준비 없이 줄거리 위주로 속독했는데 며칠 지난 후에 그때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서평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책에 대해서 조금만 깊은 내용을 물었다면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Scene #2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기의 즐거움
그렇다면 속독의 시대 속에 효과적으로 책을 읽는 지름길이 없을까. 요즘처럼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속독과 다독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둘 다 일리가 있다. 마음의 양식인 책도 질과 양의 조화가 맞아야 '영혼의 보약'이 된다는 뜻에서 보자면 먼저 천천히 음미하면서 깊이 있게 책을 읽는 방식도 좋다.
프랑스 인문학자 에밀 파게(1847~1916)는 온전히 독서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느리게 읽을 것을 강조한다. 책을 느긋하게 꼼꼼히 읽어내는 ‘슬로 리더(slow reader)’가 되는 것이다.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는 『L'Art de Lire』를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어 원제를 우리말로 풀어내면 '독서술'이다. 1959년에 '독서술'이라는 제목으로 에밀 파게의 책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번역자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故 이휘영 선생(1919~1986)이다. 최근에 새로운 제목으로 『L'Art de Lire』 완역본이 처음 선보였다.
『단단한 독서』는 에밀 파게가 65세 때 쓴 책이다. 그러니까 1912년에 출간되었다. 세상에 나온 지 무려 100년이나 지난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인문학 열풍과 함께 '독서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지고 있는데, 속독의 시대 속에서 '슬로 리딩'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올바른 독서법으로 정립하고, 제시한 사람은 에밀 파게였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야 한다. (17쪽)
『단단한 독서』는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특별한 비법 몇 가지 나열한 자기계발 도서가 아니다. 속독의 시대 속에서 잊고 있던 독서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한다.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속독 콤플렉스' 때문에 점점 책을 꺼리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읽기'는 잊힌 책에 대한 애정을 되살려준다. 독서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친근한 행위로 만들 수 있다. 책과 좀 더 친해지려면 느리게 읽을수록 좋다. 수박 겉핥기식의 속독은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생각을 무턱대고 믿어버리고, 텍스트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린다. 오히려 이런 속독이 책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는 나태한 독서법이 된다.
천천히 책을 읽었다면, 이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듭 읽어야 한다. '생각을 담은 책' 즉 철학자가 쓴 책의 경우, 책 속 내용과 자기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철학자의 생각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책 속에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문체를 즐기는 데 좋다. 우리가 글을 쓰게 되면 교정을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이 좀 더 나은 글로 독자의 마음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문체와 언어를 교정해야 한다. 거듭 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맨 처음에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묵상해야 하는 책들을 급하게 읽어버리면 이건 좀 낭비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는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되는 그 기쁨을 놓쳐버린다니,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Scene #3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깨달음의 깊이는 읽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깊은 깨달음은 깊은 읽기에서 나온다. 천천히 깊이 읽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천천히 깊이 읽을 때 우리는 독서의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된다. 독서의 기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영혼의 양식인 책을 소중히 여기는 독서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 딱 한 권이라도 있다면, 처음의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라.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하라.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진정으로 속 깊은 정을 나누듯이.
그렇지만,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이 다 완벽하고 똑똑하다고 볼 수 없다. 파게는 책을 자신의 오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친구이면서도 그의 결점을 숨기는 것을 경계한다. 느린 속도로 거듭 읽는 것은 단지 책에 대한 감동의 즐거움을 느껴줄 뿐만 아니라, 독자가 책의 결점을 꼼꼼하게 검토하여 저자를 비판할 수 있도록 무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파게가 독자에게 강조하는 ‘단단한 독서’다.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이해하고자 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다시 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비판적 검토 아래, 작품이 지닌 진실과 아름다움에 애당초 토론이 불필요했음이 입증됐을 때 다시 자신의 갑옷을 내려놔야 한다. (189쪽)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저자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힘. 그것이 제대로 된 '단단한 독서'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에밀 파게의 독서술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어야 한다. Iterum quae digna legi sint. 『단단한 독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처럼 다시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