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의 탄생 - 그림으로 보는 우주론, 한국어판 복간본
스기우라 고헤이 지음, 송태욱 옮김 / 안그라픽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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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우라 고헤이(杉浦康平)는 우리나라에도 개인전을 연 적이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책 디자이너다. 그는 아시아 문화권의 도상(圖像)을 주제로 한 수많은 전시 기획과 전시 활동을 해왔다. 올해 초에 재출간된 스기우라의 책 《형태의 탄생》은 그가 만든 디자인에 녹아들었던 아시아적 시각 문화와 시각 언어를 ‘형태’라는 주제로 설명한 책이다.

 

책의 부제는 ‘그림으로 보는 우주론’이다. 부제 때문인지 《형태의 탄생》이 우주과학 분야(…‥)의 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책의 부제에 있는 우주론은 천문학의 영역에 있는 학문의 하위 분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철학에 기반을 두어 우주 만물의 생성 원인과 구조를 설명하는 사상이다. 고대인들은 하늘과 땅(지구), 태양, 달 등 우주 만물이 인간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신령스러운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를테면 일상의 밤하늘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던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늘과 긴밀히 결속돼 있다 생각했다. 그들에게 하늘은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달은 모양에 따라 조류를 바꿨고, 태양은 별과 함께 계절을 바꿨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 계절을 따랐다. 계절에 따라 나타나는 비와 바람, 천둥과 같은 기상 현상에 고대인들은 울고 웃었다. 하늘이 인간의 영혼과 사회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던 고대인들은 하늘과의 긴밀한 관계를 자신들의 일상에 담았다. 달력, 별자리표와 책력, 신화, 의례, 춤, 무덤 등에 고대인들이 생각한 하늘이 담겼다.

 

책 제목에 있는 ‘형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형태’를 일본어로 하면 가타치(かたち)로 읽는다. 가타치는 사물의 외형을 결정하는 고정된 규범(틀)을 뜻하는 ‘가타(かた)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생명력)을 뜻하는 ‘치(ち)가 합쳐진 단어다. 스기우라는 사물의 고정된 틀에 생명력이 더해지면 ‘형태’가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도상에 숨어있는 ‘생명력이 넘치는 형태’를 발굴한다. 그가 도상에서 발견한 ‘형태’에는 고대인들의 우주론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고대인들은 ‘형태’를 통해 우주론과 세계관을 구축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형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반영했다. 고대인들은 문자에 자연의 이치를 새겨 넣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기우라도 고대 아시아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한 디자인을 만들었다.

 

《형태의 탄생》의 장점은 풍부한 도판이다. 동양 사상, 문화, 종교에 문외한이더라도 서양 도상에 볼 수 없는 동양 도상만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도판만 골라 보면 된다. 다만 흑백 도판의 수가 천연색 도판의 수보다 적다. 책의 판형은 크지 않은 편인데도 정가가 비싸다(4만 7000원). 완전 천연색 도판으로 채워졌으면 현재 정가보다 더 비싼 금액이 나왔을 것이다. 복간판에는 구판에 없는 내용이 새로 추가되었는데, 일본 최고의 독서가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가 쓴 서평이 수록되어 있다.

 

한 권의 책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는 말이 있듯이 《형태의 탄생》은 광범위한 고대인들의 우주가 들어 있다. 스기우라는 자신이 만든 책을 살아 숨 쉬는 ‘작은 존재’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살아 있는 책의 표지는 ‘인간의 얼굴’이다. 그는 책이라는 틀(가타)에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뿐만 아니라 생명력(치)까지도 불어넣는다. 직업적인 이유가 아니고선 밤하늘을 볼 일이 드문 오늘날 우리에겐 그만큼 우주의 원대함과 광활함을 느껴볼 기회가 적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밤하늘을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책도 보지 않는다. 우주가 들어 있는 책마저 보지 않는 현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생기 있는 호기심은 사라져 간다. 결국 우리 인생에 남아있는 형태는 세상을 딱딱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틀’이다. 국경 너머 바깥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관심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또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에)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혹시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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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흑인 여성 작가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다. 그녀가 쓴 소설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흑인 여성의 경험과 관념이 반영된 페미니즘 이론을 논의한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을 통해서 그녀의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 접했다.

    

 

 

 

 

 

 

 

 

 

 

 

 

 

 

* [2018년 레드스타킹 추천 도서]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 [절판] 앨리스 워커 더 컬러 퍼플(청년정신, 2007)

* [절판] 앨리스 워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이프, 2004)

* 앨리스 워커 사랑의 힘(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4)

    

 

 

토니 모리슨과 함께 현대 흑인문학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는 앨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있다. 그녀의 대표작 더 컬러 퍼플(작가정신)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워커는 이 소설에서 흑인이 미국 사회에서 소수민족이기 때문에 겪는 아픔, 특히 그중에서도 여성이 받는 상처와 경험을 이야기한다. 1980년대에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과 함께 페미니스트 저널 <미즈(Ms.)>의 편집인으로 활동했지만, 백인 중산계층 중심의 서구 페미니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3세계 페미니즘또는 흑인 페미니즘이 새롭게 대두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워커는 피부 색깔로 페미니스트를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는 의미로 흑인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대신에 우머니스트(womanist)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또 모든 종류의 차별에 저항하면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 성소수자 모두가 공존하는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워커를 포함한 흑인 여성주의자들은 인종과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등 다중적인 억압을 경험하는 흑인 여성의 문제에 저항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폭력과 착취를 받는 피해자로 머무르는 흑인 여성 담론에 치우쳐 있는 건 아니다. 혹자는 흑인 여성주의자들(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남성 인권 운동가들도 해당된다)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자신들의 경험만 줄기차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정말로 그녀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면 자신들이 추구해온 다양한 춤 장르와 음악(특히, 재즈)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고, 문화를 통한 저항 운동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워커는 가장 차별받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로 이어지면서 공유되는 흑인 여성의 정체성과 예술적 경험도 주목한다. 그녀는 산문집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이프)사랑의 힘(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할머니와 어머니를 회상한다. 그러면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예술가라고 부르면서 강인한 생명력의 중요성을 구전 민담이나 전통 노래로 표현하여 자신에게 전달해준 그녀들을 예찬한다(두 권의 책에 실린 워커의 산문과 시는 감동적이며 독자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좋은 글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의 번역은 썩 좋지 않다. 재출간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새 번역으로 다시 나오길 바란다).

    

 

 

 

 

 

 

 

 

 

 

 

 

 

 

*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문예출판사, 2014)

*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01)

 

    

 

1960년대 흑인민권 운동이 일어난 이후로 흑인 여성 작가와 역사가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진 흑인 여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적 능력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특히 워커는 흑인 문학계에서 완전히 잊혔던 흑인 여성 작가 조라 닐 허스턴(Zora Neale Hurston)을 재발견했다.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에 수록된 글 조라의 무덤을 찾아서는 묘비명조차 없는 조라 닐 허스턴의 무덤을 찾아다닌 워커의 여정을 보여준다.

 

 

 

필리스 위틀리에 관한 내용이 있는 책들

    

 

 

 

 

 

 

 

 

 

 

 

 

 

 

 

 

 

 

 

 

 

 

 

 

 

 

* 줄리아 피어폰트, 만지트 타프 그림 페미니스트 99(민음사, 2018)

* 재키 플래밍 여자라는 문제(책세상, 2017)

* 미셸 로엠 매칸, 아멜리 웰든 세상을 뒤흔든 10대들: 소녀 편(라의눈, 2014)

* 차리스 코터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이들(아카넷주니어, 2012)

* 정길화 편역 영미시의 이해 그리고 한국시(신아사, 2007)

* [절판]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백산서당, 2002)

 

    

 

미국 문학사뿐만 아니라 미국 흑인문학에서조차 많이 거론되지 않은 여성 작가가 있는데 최초로 시집을 발표한 흑인 시인 필리스 위틀리(Phillis Wheatley, ‘필리스 휘틀리라고도 표기한다)다. 그녀는 노예제도를 당연하게 여기던 18세기 중반에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1753년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하지 않다. 위틀리는 감비아 혹은 세네갈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노예 상인에게 납치되어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노예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다. ‘필리스 위틀리는 이 아프리카 소녀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된 이름이 아니다. 그녀의 성()은 자신을 사들인 재단사 존 위틀리(John Wheatley)에서 따온 것이고, 필리스는 아프리카인들이 타고 온 노예선의 이름이다[1].

 

다행히도 존 위틀리 가는 미국 북부에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 살고 있었다(예나 지금이나 보스턴은 진보적인 성향이 가장 강한 곳이다). 왜냐하면 노예제를 옹호하는 미국 남부에서는 노예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존 위틀리의 딸 메리(Mary)는 필리스가 영리한 소녀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녀에게 영어와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필리스는 열두 살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가 쓴 시 몇 편이 신문에 실리게 되면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

    

 

 

 

그러나 흑인의 지적 능력을 믿지 않았던 백인 남성 지식인들은 필리스의 재능을 의심했다. 필리스가 직접 시를 쓰는지 검증하기 위해 열여덟 명의 백인 남성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녀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북부의 백인 독자들은 필리스의 시를 호평했고,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흑인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남부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필리스의 시를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2].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흑인들은 그녀의 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흑인들은 노예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시를 쓰지 않은 필리스에 불편함을 느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필리스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고, 영어로 시를 썼다. 흑인들이 보기에는 필리스가 백인에 동화된 흑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필리스도 자신의 몸과 정신을 죄어오는 거대한 사슬과 같은 인종 차별의 위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스무 살인 1773년에 쓴 시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실려 옴에 대하여(Being Brought from Africa to America)[3]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부정적 편견과 부당한 차별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흑인들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흑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내 이교도 땅에서 날 데려와, 내 어두운 영혼에게

하느님이 있음과 구세주 또한 있음을

이해하도록 가르쳐준 것은 축복이었어요.

한때 나는 구원을 찾지도 알지도 못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 흑인을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지요.

저들의 피부색은 악마의 색이야.”

명심하세요. 기독교인들이여, 흑인들은 카인처럼 검지만

세련될 수 있어, 천사의 행렬에 합류할 수 있음을.

 

 

(정길화 옮김, 190)

 

 

노예제가 사라진 지 꽤 오래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시선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은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이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시키는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저임금 노동에 투입되고, 빈곤의 늪에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선입견은 착한 노예는 순종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노예제를 옹호하던 미국 남부인들의 사고방식과 겹쳐져 있다. 바뀐 게 없는데도 흑인을 차별하는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주류인 백인의 시선으로 흑인을 포함한 다른 인종을 한 단계 아래로 규정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

    

 

 

 

 

 

 

 

 

 

 

 

 

 

 

 

 

*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문학동네, 2014)

*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인간사랑, 2013)

* 프라모드 K. 네이어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앨피, 2015)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말했던 바로 그 하얀 가면을 우리도 쓰고 있다. 피부가 하얗지도 않은 이들이 스스로 하얘지고 싶어서 쓰는 그 가면을 말이다[4]. 누구나 하얀 가면을 쓸 수 있으며 그 사람은 우월한 주인또는 지배자()이 된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이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얀 가면은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는 동시에 우월한 주류처럼 행세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것은 인종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의 허무한 명품이다.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독립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흑인들의 문화적 유산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

 

 

      

 

[1] 차리스 코터, 세상을 놀라게 한 아이들, 아카넷주니어, 2012. 14~18.

 

[2] 벤자민 콸스, 미국 흑인사, 백산서당, 2002. 112.

 

[3] 우리말로 번역된 시는 영미시의 이해 그리고 한국시(신아사)에 수록되어 있다.

 

[4] 파농이 언급된 글 마지막 내용이 글의 주제(흑인 여성 작가)에 완전히 이탈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쓴 이유가 있다. 휘틀리의 시에 나오는 구절(저들의 피부색은 악마의 색이야.”)이 파농이 들었던 백인 아이의 말과 유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 나오는 일화에 따르면, 백인 아이는 파농을 보자마자 엄마, 저 검둥이 봐요. 무서워요!”(문학동네, 109)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백인 아이의 말을 듣게 된 파농은 흑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고, 이 사건은 의사인 파농을 탈식민주의 사상가로 변모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프라모드 K. 네이어,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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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을 통해 알게 된 분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채널 이름은 스몰토크입니다. 스몰토크? 어라?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죠? 제 글을 눈팅한 분들은 눈치 챘을 것입니다.

 

 

 

 

 

 

 

 

 

스몰토크는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공식 모임 장소인 카페 이름입니다. ‘스몰토크채널을 운영하는 분은 레드스타킹 멤버입니다. 427일에 수정이라는 예명으로 북튜버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책 리뷰 방송을 시작한 지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은 새내기 북튜버입니다. 작년에 제가 블로그를 통해 이분을 소개한 적이 있어요. 사실 소개라기보다는 홍보였어요. 수정씨를 지방선거 비례대표 후보자로 소개해서 홍보를 했었죠. 올해는 북튜버로서의 수정씨를 홍보하려고 합니다.

 

예전에는 북튜버라고 하면 나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작년부터 북튜버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보지 않았어요. 아주 가끔씩 봤어요. 그런데 수정씨가 북튜버로 활동한다고 하니까 이 분의 북튜브 방송만큼은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방송을 보고 난 후에 궁금한 점이 있어서 수정씨한테 여쭤봤어요. 북튜버로 활동하면서 다음에 소개하려는 책의 주제는 어떤 건지 궁금했거든요. 제 질문에 수정씨는 본인이 읽고 싶은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이미 찍어둔 영상이 있다고 하네요. 수정씨의 북튜브 방송이 좋게 느껴졌던 이유 중 하나는 소개할 책 선정 방식입니다. 수정씨는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거나 관심 있는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게 정말 좋았어요. 수정씨의 독서 취향이 어떤지 아직까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 분만의 책을 고르는 안목이 있을 것입니다.

    

 

 

 

 

 

 

 

 

 

 

 

 

 

 

* [품절]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천진난만한 탕녀(문학동네, 2000)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파리의 클로딘(민음사, 2019)

 

    

 

수정씨가 두 번째로 소개한 책인 콜레트(Colette)천진난만한 탕녀는 제가 추천했어요. 수정씨에게 책을 추천했던 날이 영화 <콜레트>가 국내에 개봉하기 전이었어요. 수정씨가 뜬금없이 제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질문했을 때, 저는 엄청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어요.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몇 시간 동안 생각한 끝에 카톡 메시지로 책 제목을 전달했어요. 그때 카톡 메시지로 적은 책 제목이 천진난만한 탕녀였어요.

 

 

 

 

 

 

 

 

 

 

 

 

 

 

 

 

 

*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 2018)

* 조선희 세 여자(한겨레출판, 2018)

 

 

 

 

 

 

 

 

 

 

 

 

 

 

 

 

 

 

 

* 프란츠 카프카 (워크룸프레스, 2014)

 

    

 

지금까지 등록된 동영상은 총 6편이고, 수정씨가 리뷰한 책은 총 세 권(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 콜레트의 천진난만한 탕녀, 조선희의 세 여자)입니다. 나머지 한 권(카프카의 )은 수정씨가 낭독한 책입니다.

 

앞으로 수정씨가 어떤 책을 리뷰할지 많이 기대됩니다. 제가 안 읽은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수정씨의 북튜브 방송 채널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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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9-05-06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공을 많이 들인 북튜브네요~^^

cyrus 2019-05-07 14:41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칭찬을 들으니 괜히 제가 기분 좋아지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kiddie 2019-05-06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정말 고맙습니다. 봐주시는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렇게 추천까지 해주시다니ㅠ 계속해서 재밌는 책 많이 리뷰할게요:)

짜라투스트라 2019-05-06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추천하셔서 구독 누르고 왔습니다^^

cyrus 2019-05-07 14: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블랙겟타 2019-05-07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cyrus님의 추천으로 살포시 구독했습니다.
또 챙겨봐야할 북튜버가 한분 늘어났네요. ^^

cyrus 2019-05-07 18: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유튜버는 아니지만 구독자 한 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
 
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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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eroticism)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와 다르다. 사실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남성 작가가 묘사한 에로티시즘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감정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을 긍정하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티시즘은 여성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 즉 육체적 ․ 정서적 기쁨을 표출하게 만든다. 하지만 포르노는 여성의 진실한 감정을 거부하고 억누른다. 그것은 감정이 없는 관능만을 강조한다. 포르노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에로티시즘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서적 쾌락도 포함한다.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황금기로 알려진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절정을 매력적으로 묘사했다.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삶의 즐거움’을 뜻하는 이 프랑스어는 벨 에포크를 요약해주는 표현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는 게 그저 즐겁기만 했다. 콜레트의 글은 ‘즐거운 삶’에 대한 찬가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즐거운 관능’을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이 느끼고 싶은 ‘즐거운 관능’을 표현한 콜레트의 글쓰기는 여성들만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던 벨 에포크의 사회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콜레트는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남편과 함께 사교계가 주목하는 셀러브리티 커플이었다. 1900년에 그녀는 남편의 필명(윌리, Willy)으로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학교의 클로딘》을 써서 발표한다. 소설의 여주인공 클로딘(Claudine)은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 제도를 거부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소녀이다. 그 이후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로 알려진 《파리의 클로딘》, 《가정의 클로딘》을 연달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클로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파리의 클로딘》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고향인 몽티니를 떠나 파리로 오게 된 클로딘이 사치와 향락이 녹아든 도시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낭만적 사랑의 확산으로 남녀 간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요소가 됐고,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정상 가족’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낭만적 사랑은 성별 역할 분리, 여성의 경제적 의존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콜레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근대적 시민사회에서 벗어난 여성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남성은 거부한다. 남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가부장제 권력은 콜레트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방을 쾌락의 대상으로 즐기는 존재는 여성이다. 클로딘은 고향에서 살았을 때 만난 여학교 동급생 뤼스를 ‘살결이 부드러운 친구’라고 묘사한다. 뤼스 역시 클로딘과의 관능적인 포옹과 애무를 잊지 못한다.

 

 

 ‘클로딘, 네가 나의 제일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준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야. 우린 우리 언니 에메와 마드무아젤(클로딘과 뤼스가 다닌 여학교 교장이자 담임 교사-cyrus 주)만큼 행복할 거고, 난 평생 동안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그 정도로 널 사랑해. 넌 너무 예쁘고, 네 살결은 백합 꽃잎 속 노란 꽃가루보다 더 보드라워. 너한테 따귀를 맞아도 좋아. 네 차가운 손톱도 좋아.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88쪽)

 

 

서로 떨어져 있는 클로딘과 뤼스는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유지한다. 두 소녀는 서로가 몸의 내밀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애무를 선호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에 서로에게 만족을 준다. 동성애를 떠올리게 하는 두 소녀의 우정과 그녀들이 공유하는 관능은 남녀 간의 사랑이 부여하는 통속적인 의미의 관능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콜레트는 남성의 욕구에 초점이 맞춰진 쾌락에 대한 한정된 개념을 거부하고, 관능적 쾌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콜레트의 작품에 구현된 관능은 여성이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마음껏 즐기는 에로티시즘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콜레트의 관능은 육체적 쾌락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식물, 그리고 동물과의 교감도 여성을 만족시켜주는 즐거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이다. 클로딘은 몽티니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감정 상태는 단순하게 향수병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정서적 쾌락을 그리워한다.

 

 

 아! 다시 몽티니로 돌아갔으면…‥ 그곳에서는 키 큰 싱그러운 풀들을 한 아름 껴안았고, 피곤하면 햇볕으로 따뜻해진 벽에 기대 앉아 잠들었고, 빗방울이 수은처럼 굴러다니는 연꽃잎에 담긴 빗물을 마셨고, 강가에 핀 물망초를 따서 테이블에 놓고 시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버드나무가지 껍질을 벗겨 진액을 핥았고, 풀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깨새의 알을 훔쳤고, 야생 까치밥나무의 향내 나는 이파리들을 마구 비벼 댔는데…‥ 아,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에 입 맞추고 싶었다!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입 맞추고, 또 그 나무가 건네는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221~222쪽)

 

 

콜레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양성적인 존재이다. 클로딘은 ‘여성의 남성성’을, 그녀가 장난스럽게 유혹하는 대상인 자신의 조카 마르셀은 ‘남성의 여성성’을 지닌다. 이 소설에서 마르셀은 바느질하는 것을 좋아하며 클로딘을 그를 ‘예쁘게 생긴 계집애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과 양성성은 이 작품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콜레트의 소설은 여주인공의 성적 모험에 충실하며,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성행위 묘사가 많은 통속적인 포르노와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준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볼 수 있듯이 콜레트는 사랑과 섹스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성적 경험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렇듯 《파리의 클로딘》은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면 이성애와 결혼의 안정성을 부인하는 퀴어 소설(queer novel)로 봐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성애 중심의 사회, 가부장적 결혼의 권위를 엿 먹인다. 《파리의 클로딘》은 여성주의적이라기보다 퀴어하다. 포르노적인 성 묘사가 나오지 않는 퀴어 소설이다. 동성애의 의미를 육체적인 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육체적 ․ 정서적 쾌락을 만끽할 수 있는 대항적인 삶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전복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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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음이 비슷해서일까요, cyrus님 글을 읽다보니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영화 「클로이」가 떠오르네요. 물론 내용은 별 관련은 없습니다만^^:)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1 | URL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분한 클로이가 도발적인 여성으로 나오지 않나요? 영화를 안 봐서 잘 모르겠어요... ^^;;

수이 2019-05-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2019-05-07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7 14:46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지 못할 것입니다.
 

 

 

 

1992429일 수요일, 배심원들은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도주한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한 네 명의 백인 경찰관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평결을 내린 총 열두 명의 배심원은 모두 백인이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결과는 흑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격분한 흑인들의 폭력과 방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 와중에 미국 언론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보다 두순자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두순자 사건은 로드니 킹이 구타당한 날과 비슷한 시기인 19913월에 일어났다. 흑인 밀집 지역에서 한인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두순자는 자신의 가게에 있는 주스를 사려던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해했다. 두순자는 흑인 소녀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 사건이 미국 주류 언론에 의해 부각되면서 흑인들의 분노어린 시선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인들에게로 향했다. 429일부터 54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폭동으로 한인업소 2천여 개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LA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인종 간의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달았다. 한흑(韓黑)갈등으로 불거진 LA 폭동은 당시 재미 한인사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인명과 물적 피해뿐 아니라 그동안 어렵사리 미국 사회에 정착해가던 한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 장태한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27년이나 지난 지금, 폭동이 일어난 도심 현장을 가까이선 본 재미 한인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폭동의 살벌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낀 한국 국민은 LA 폭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흑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LA 폭동을 흑인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집단적 일탈 행위로 인식한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폭동에 동참한 흑인을 비판하면서 흑인사회 전체를 범죄자 집단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LA 폭동은 가해자(폭동을 일으킨 흑인)피해자(재미 한인)로 구분하게 만드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LA 폭동이 일어나게 된 거시적인 원인을 되짚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으며 한흑 갈등과 재미 한인 역사 등을 연구했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LA 폭동은 흑백의 빈부 격차, 흑인 사회의 실업률, 경찰의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과 한인업소를 습격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로 인해 LA 폭동은 지역 상권을 둘러싼 흑인과 재미 한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인종 대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을 재미 한인을 공격하는 가해자로 보게 만드는 언론의 프레임(frame)은 흑인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았던 백인과 재미 한인들의 인종 차별 문제를 은폐한다. 1970~1980년대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인들은 단일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그들은 순수 혈통을 중요시했으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를 지향했다. 다른 인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재미 한인은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에게 매우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흑인과 소수 인종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흑인들의 불만을 커지게 했고,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흑인들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LA 폭동을 경험한 재미 한인들은 그 사건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LA 폭동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의 원인을 인종에 대한 무지와 차별이라고 지적한다. LA 폭동 이후로 재미 한인은 미국의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반성했으며 흑인을 포함한 여러 인종과 교류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열린책들, 2015)

* 하퍼 리 파수꾼(열린책들, 2015)

* [e-Book] 하퍼 리 외 하퍼 리 버즈북(열린책들, 2015)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보통 자신과 다른 인종과 민족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미국 흑인 못지않게 미국 남부인도 부정적인 편견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남부 노예제도의 인종 차별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억울한 누명이 씌워진 흑인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를 내세워 편견이 가져오는 인종 차별 및 갈등 문제를 개인의 정의와 양심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과 동명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애티커스 핀치는 정의로운 백인 남성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로 제목과 내용을 완전히 고치기 전에 쓰인 파수꾼(Go Set a Watchman)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전작과 완전히 180도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라고 강조하던 변호사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대부분 독자는 앵무새 죽이기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나이가 들면서 변절했다고 평가한다. 애티커스 핀치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과 해석은 자유다. 나는 앵무새 죽이기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노예제에 반대한 남부인의 모습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의 모습을 각각 대변하는 인물로 보고 싶다. 두 작품에 나오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은 단일한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남부인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품절] 이영효 미국사 낯설게 보기(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 손영호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살림, 2003)

* 김형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살림, 2003)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남북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남부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한계가 있다. 앵무새 죽이기에 묘사된 메이콤은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 붙여진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이다. 메이콤 주민들은 혈연으로 얽힌 폐쇄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하퍼 리는 남부에 위치한 이 마을을 외부인의 유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단절된 지역으로 묘사한다.

 

가난하고, 노예제 유지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남부인 이미지는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인과 북부인 간의 노선 갈등이 고조되던 1820년대에 만들어졌다. 북부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인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고, 성서 구절을 인용해 노예제의 허위를 증명하려고 했다. 북부인들의 공격에 의식한 남부인은 남부 연합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갔고, 남부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도 성서를 인용하여 노예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남부인은 노예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내세워 노예제의 결점을 지우려고 했다. 이로써 미국은 남과 북이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고,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하나님(노예제를 반대하는 하나님, 노예제를 옹호하는 하나님)을 내세워 남북전쟁을 일으킨다. 북군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미국 역사는 북부인 중심의 역사, 승리자 중심의 역사로 기록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역사가는 자유과 노예 해방을 외친 북부인을 찬양했고, 반대로 남부인을 고리타분한 패배자로 평가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부는 자유와 도덕과 담쌓은 사람들이 사는 폐쇄적이고 단절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일관된 남부 이미지는 남부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남부 이미지에 대한 반론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남부에 다수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보다 노예를 한 명도 소유하지 않은 자영농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가 있다. 그리고 북부인들도 남부인들과 다름없는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편견이 어느 정도 반영된 남부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북부의 역사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반쪽짜리 역사만 보는 것과 같다.

 

미국사 낯설게 보기(8, 9, 10)살림지식총서에 포함된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는 주류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미국 흑인과 미국 남부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또는 정의와 불의로만 보는 사람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검은색과 흰색만 볼 뿐, 그사이의 수많은 다른 색의 스펙트럼은 보지 못하게 된다. 인종, 민족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인종과 민족, 심지어 지역 주민을 고정관념만 가지고 정의 내리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정관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비슷한 사람, 같은 언어와 비슷한 억양을 가진 사람을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성향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다운 약점을 피하려면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가 자신의 딸 스카웃(Scout)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무나도 쉬운 일인데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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