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클로딘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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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eroticism)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와 다르다. 사실 에로티시즘과 포르노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대체로 남성 작가가 묘사한 에로티시즘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감정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추구하는 에로티시즘을 긍정하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가 명백하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티시즘은 여성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 즉 육체적 ․ 정서적 기쁨을 표출하게 만든다. 하지만 포르노는 여성의 진실한 감정을 거부하고 억누른다. 그것은 감정이 없는 관능만을 강조한다. 포르노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에 한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에로티시즘에 묘사된 관능은 육체적 쾌락의 의미뿐만 아니라 정서적 쾌락도 포함한다.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황금기로 알려진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절정을 매력적으로 묘사했다. 주아 드 비브르(joie de vivre). ‘삶의 즐거움’을 뜻하는 이 프랑스어는 벨 에포크를 요약해주는 표현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는 게 그저 즐겁기만 했다. 콜레트의 글은 ‘즐거운 삶’에 대한 찬가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즐거운 관능’을 빼놓을 수 없다. 여성이 느끼고 싶은 ‘즐거운 관능’을 표현한 콜레트의 글쓰기는 여성들만의 문화와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던 벨 에포크의 사회적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콜레트는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남편과 함께 사교계가 주목하는 셀러브리티 커플이었다. 1900년에 그녀는 남편의 필명(윌리, Willy)으로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 《학교의 클로딘》을 써서 발표한다. 소설의 여주인공 클로딘(Claudine)은 여성의 삶을 속박하는 낭만적 사랑과 결혼 제도를 거부하고 자유를 만끽하는 소녀이다. 그 이후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로 알려진 《파리의 클로딘》, 《가정의 클로딘》을 연달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클로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파리의 클로딘》은 목가적인 분위기의 고향인 몽티니를 떠나 파리로 오게 된 클로딘이 사치와 향락이 녹아든 도시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낭만적 사랑의 확산으로 남녀 간 사랑이 결혼의 중요한 요소가 됐고, 이성애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정상 가족’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낭만적 사랑은 성별 역할 분리, 여성의 경제적 의존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콜레트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은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근대적 시민사회에서 벗어난 여성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기호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남성은 거부한다. 남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고,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가부장제 권력은 콜레트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대방을 쾌락의 대상으로 즐기는 존재는 여성이다. 클로딘은 고향에서 살았을 때 만난 여학교 동급생 뤼스를 ‘살결이 부드러운 친구’라고 묘사한다. 뤼스 역시 클로딘과의 관능적인 포옹과 애무를 잊지 못한다.

 

 

 ‘클로딘, 네가 나의 제일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준다면 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거야. 우린 우리 언니 에메와 마드무아젤(클로딘과 뤼스가 다닌 여학교 교장이자 담임 교사-cyrus 주)만큼 행복할 거고, 난 평생 동안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그 정도로 널 사랑해. 넌 너무 예쁘고, 네 살결은 백합 꽃잎 속 노란 꽃가루보다 더 보드라워. 너한테 따귀를 맞아도 좋아. 네 차가운 손톱도 좋아.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88쪽)

 

 

서로 떨어져 있는 클로딘과 뤼스는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유지한다. 두 소녀는 서로가 몸의 내밀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떠한 애무를 선호하는지도 잘 알고 있기에 서로에게 만족을 준다. 동성애를 떠올리게 하는 두 소녀의 우정과 그녀들이 공유하는 관능은 남녀 간의 사랑이 부여하는 통속적인 의미의 관능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처럼 콜레트는 남성의 욕구에 초점이 맞춰진 쾌락에 대한 한정된 개념을 거부하고, 관능적 쾌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콜레트의 작품에 구현된 관능은 여성이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마음껏 즐기는 에로티시즘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콜레트의 관능은 육체적 쾌락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식물, 그리고 동물과의 교감도 여성을 만족시켜주는 즐거운 에로티시즘으로 볼 수 있는 경험이다. 클로딘은 몽티니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감정 상태는 단순하게 향수병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녀는 자연과의 교감이 주는 정서적 쾌락을 그리워한다.

 

 

 아! 다시 몽티니로 돌아갔으면…‥ 그곳에서는 키 큰 싱그러운 풀들을 한 아름 껴안았고, 피곤하면 햇볕으로 따뜻해진 벽에 기대 앉아 잠들었고, 빗방울이 수은처럼 굴러다니는 연꽃잎에 담긴 빗물을 마셨고, 강가에 핀 물망초를 따서 테이블에 놓고 시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버드나무가지 껍질을 벗겨 진액을 핥았고, 풀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깨새의 알을 훔쳤고, 야생 까치밥나무의 향내 나는 이파리들을 마구 비벼 댔는데…‥ 아,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에 입 맞추고 싶었다!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입 맞추고, 또 그 나무가 건네는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파리의 클로딘》 중에서, 221~222쪽)

 

 

콜레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양성적인 존재이다. 클로딘은 ‘여성의 남성성’을, 그녀가 장난스럽게 유혹하는 대상인 자신의 조카 마르셀은 ‘남성의 여성성’을 지닌다. 이 소설에서 마르셀은 바느질하는 것을 좋아하며 클로딘을 그를 ‘예쁘게 생긴 계집애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과 양성성은 이 작품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콜레트의 소설은 여주인공의 성적 모험에 충실하며, 기계적으로 느껴지는 성행위 묘사가 많은 통속적인 포르노와는 상당히 다른 인상을 준다. 《파리의 클로딘》에서 볼 수 있듯이 콜레트는 사랑과 섹스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성적 경험 그 자체를 체험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렇듯 《파리의 클로딘》은 페미니즘 관점이 반영된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히 따지면 이성애와 결혼의 안정성을 부인하는 퀴어 소설(queer novel)로 봐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이성애 중심의 사회, 가부장적 결혼의 권위를 엿 먹인다. 《파리의 클로딘》은 여성주의적이라기보다 퀴어하다. 포르노적인 성 묘사가 나오지 않는 퀴어 소설이다. 동성애의 의미를 육체적인 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육체적 ․ 정서적 쾌락을 만끽할 수 있는 대항적인 삶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전복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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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음이 비슷해서일까요, cyrus님 글을 읽다보니 아만다 사이프리드 주연의 영화 「클로이」가 떠오르네요. 물론 내용은 별 관련은 없습니다만^^:)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1 | URL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분한 클로이가 도발적인 여성으로 나오지 않나요? 영화를 안 봐서 잘 모르겠어요... ^^;;

수이 2019-05-0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백만개!!

cyrus 2019-05-06 18: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2019-05-07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7 14:46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어서 완전히 사라지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