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세계사 -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엠마 메리어트 지음, 윤덕노 옮김 / 탐나는책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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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점  ★★★  B





역사는 원래 색이 없다. 역사가와 정치가는 역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에 손을 갖다 댄다.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에 얼룩이 생긴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은 역사는 얼룩덜룩 더럽혀져 있. 지저분한 역사는 정치색을 띠고 있다짙은 정치색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정치색은 사실을 지워버린다.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낙서 쟁이다그들은 역사가 된 사람들의 얼굴에 끼적끼적 낙서한다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다.’, ‘5·18 민주화운동은 북한 특수 부대가 주도한 폭동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가 잘 살 수 있었다. 두 대통령을 독재자로 헐뜯는 사람들은 전부 빨갱이다!’ 낙서로 뒤덮인 역사는 누렇게 녹이 슬어 있다녹은 사실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낙서 내용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낙서 쟁이들은 자신이야말로 사실을 올바르게 기록하는 역사가라고 믿는다그들은 항상 오른손으로만 펜을 쥐면서 역사에 낙서한다오른손에서 나온 낙서는 역사에 거짓과 편견을 덧칠하는 오록(誤錄)이다낙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오른손에 있던 펜은 성난 칼이 된다. 날카로운 칼날로 변한 펜은 낙서를 열심히 지우는 역사가들을 공격한다낙서 쟁이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정치인을 좋아한다. 낙서는 정치색과 무척 잘 어울린다. 


역사는 연약하다. 그래서 역사 속에 있는 사실은 오랫동안 살아남기 힘들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물렁물렁해지고, 조그만 틈이 생긴다사실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 역사적 진실이 담긴 목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다. 역사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 있으면 다행이지만, 기록 또한 역사와 마찬가지로 항상 완벽한 상태로 유지되지 않는다의미 있는 사건은 수많은 역사가와 호사가를 만나면서 과장되고, 각색되고, 조작된다. ‘진실로 꾸며진 사건은 역사가 된다우리가 배운 역사 대부분은 만들어진 것이다.


만들어진 세계사 정치색과 편견, 오해와 거짓으로 물들인 역사를 모아놓은 책이다역사 속 정치인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선정을 베푼 위대한 정치인 대 최악의 독재자사람들은 역사책에서 훌륭한 정치인을 만나면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보려고 한다. 반면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독재자를 만나면 눈에 거슬리는 미운털만 보인다


독일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으로 건설한 비스마르크(Bismarck)의 별명은 철혈 재상이다. ‘(, )’은 비스마르크가 연설 중에 언급한 단어다. 철은 무기, 피는 군대를 뜻한다. 이러한 별명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무자비한 전쟁광으로 비난받는다. 하지만 실제로 비스마르크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적대국인 프랑스와 외교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Hitler)의 나치 정권은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 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제2의 비스마르크라고 선동했다한술 더 떠서 비스마르크가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분명히 자신의 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치 정권은 비스마르크를 왜곡했다. 비스마르크는 반유대주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경계한 정치인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방대하고 지루한 역사를 최대한 줄여서 재미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를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덧붙여지며 이 과정에서 진실이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에 총을 든 카우보이가 항상 등장한다. 서부극에 나오는 악당은 은행을 털거나 이주민을 습격하는 강도단이거나 백인을 잔혹하게 죽이는 호전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이다서부극의 서부 개척 시대는 재미있게 만들어진 역사. 총을 소유한 카우보이는 많지 않았다. 권총이 비쌌기 때문이다. 백인이 주인공인 서부극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악역을 맡는다서부극은 미지의 땅을 개척한 백인을 찬양한다서부 시대의 백인들만 주목하는 역사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참한 처지를 은폐한다. 백인들은 도시와 철도를 만들기 위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쫓아냈으며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짓밟았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역사를 냉소적으로 정의한다. 그의 말은 이 책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題詞)로 나온다.



역사란 당시 그곳에 없었던 사람들이 말하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에 대한 거짓말 모음이다.

 


역사가 거대한 모래밭이라면 진실은 진주다. 귀중한 진실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 문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렵다역사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시야를 넓혀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좁아진다. 여기에 진실을 차단하는 색안경까지 끼게 되면 역사의 얼룩진 부분만 도드라져 보인다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는 연약하고쉽게 변질되고거짓이 잘 섞인다. 진실 순도 100%인 완벽한 역사는 없다. 흠집이 생기기 쉬운 역사를 알아야 하는 우리 또한 완벽하지 않다그렇다고 해서 의문과 검토를 멈춘 채 역사를 그대로 지켜만 볼 수 없다역사를 방치하면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우리가 보는 역사는 요지경 속에 있다. 요지경 속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진실,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 두 개의 진실은 떼어내기 힘들 정도로 포개져 있다. 우리는 역사의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복잡한 역사를 단순하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역사 전체가 아닌 반쪽짜리 역사만 골라서 본다. 보기 좋은 진실만 무조건 찬양하는 역사관은 반쪽 역사를 미화하는 일이다. 유독 불편한 진실만 건드려서 무조건 비난하는 역사관은 반쪽 역사를 무시하는 일이다만들어진 역사의 원래 제목은 ‘Bad History’. 역사는 나쁘지 않다. 역사는 억울하다. 진짜로 나쁜 건 역사에 편견과 거짓이라는 불순물을 섞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색을 칠하여 제 입맛에 맞는 역사를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역사책인 척하는 그들의 책은 거짓말 모음집이다.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만들어진 세계사2013년에 나쁜 세계사: 제멋대로 조작된 역사의 숨겨진 진실(매일경제신문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두 책의 역자는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역자는 나쁜 세계사에 있는 오탈자와 오역을 고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세계사를 펴냈다.










(21) 이안 몰타이머(22) 이안 몰타이어 

→ 이언 모티머(Ian Mortimer)




* 24





종교 개혁과 종교 개혁가






* 86





 철 가면의 전설은 수많은 소설의 소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알렉산더 듀마1850년에 발표한 대하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내용[주1]이다.


[원문]


 The legend of the masked prisoner has spawned countless novels and films, most famously the third instalment of Alexandre Dumas’s 1850 saga The Three Musketeers.



[1] 알렉산더 듀마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삼총사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3부작의 원제는 <달타냥 로맨스>(d’Artagnan Romances). 1부는 국내에 많이 알려진 <삼총사>(Les Trois Mousquetaires). 2<20년 후>(Vingt ans après), 3<브라즐론 자작: 10년 후>(Le Vicomte de Bragelonne Dix ans plus tard)는 번역되지 않았다.


뒤마가 쓴 철 가면1부가 아닌 3부 <브라즐론 자작>에 있는 내용이다. 3부 분량이 많아서 영문판은 3부작으로 출간되었는데, <브라즐론 자작> 3부가 바로 철 가면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 88




 

 죄수가 철 가면을 썼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볼테르였다. 그는 1770년과 1772년 사이에 발행된 백과전서[2]에서 죄수는 턱 아랫부분이 용수철로 고정된 철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밝혔다.


[원문]


 It was the writer and philosopher Voltaire who first claimed that the prisoner wore an iron mask ‘a movable, hinged lower jaw held in place by springs in his Questions sur l’Encyclopédie, published some time between 1770 and 1772.



[2]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디드로(Denis Diderot), 달랑베르(d’Alembert), 볼테르(Voltaire),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편찬한 책이다. 1권은 1751년에 출간되었고, 1772년에 도판이 포함된 총 30권의 백과사전이 완성되었다. 볼테르가 철 가면을 언급한 저서는 백과전서가 아니다. 정확한 제목은 <백과사전의 질문>(Questions sur l’Encyclopédie)이다.






* 126




 

 1959년 마오쩌둥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주고 있다면 방법이 없다. 전체 인민의 절반이 죽으면 나머지 절반은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



굶어주고 굶어죽고






* 141





 정리하자면 최초의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의 발명품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최초의 증기기관은 고대 그리스인이 만든 수증기를 이용하는 원시 장비[주3]라고도 할 수 있다.



[3]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든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헤론(Hero of Alexandria)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헤론이 태어난 곳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으나 로마 제국에 속한 영토였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한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자신들을 그리스인이라고 여겼다.






* 146





로데지아 로디지아(Rhodesia)






* 159




 

포리피린 증상 포르피린 증상(porphyria)






* 177





 갈릴레오가 1613년에 출판했던 태양 흑점에 관한 서한교황 바오로 3에게 헌정된 책[4]이었다.



[4] 교황 바오로 3(Paulus III)1468년에 태어나서 1549년에 사망했다(재위 기간: 1534~1549). 태양 흑점에 관한 서한(Letters on Sunspots)이 발표된 시기에 활동한 교황은 바오로 5(Paulus V, 1550~1621, 재위 기간: 1605~1621).






* 181





매리를 여왕으로 인정했다. 메리를 여왕으로 인정했다.






* 200





패탱 원수 페탱(Pétain) 원수

구판에는 페탕으로 표기되어 있다.






* 203




 

프랑스와 미테랑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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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는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대표작이다. 이 책에 레비나스 철학의 코어(Core, 핵심)’가 들어 있다그래서 레비나스 철학을 공부하려면 반드시 전체성과 무한를 만나야 한다문제는 철학이 단순한 코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레비나스 철학은 하드코어(hardcore)’. 책을 펼치자마자 이해하기 어려운(hard) 문장들이 튀어나온다.  눈빛은 당혹스러워서 굳어진다(hard). 문장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페이지를 좀처럼 넘기지 못한다. 책을 잠깐 덮고 나는 자책한다. 내 머리는 철학과 친하게 지낼 수 없는 딱딱한(hard) 돌머리인가 봐.’









 








[레비나스 철학 읽기 모임]

* 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도형 · 문성원 · 손영창 함께 옮김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그린비, 2018)





전체성과 무한은 난해한 책이다. 하지만 이런 책을 못 읽는다고 해서 자신의 무지함을 꾸짖지 말자. 전체성과 무한독자에게 불친절한 책이다. 전체성과 무한을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는 세 명이다. 그들은 전체성과 무한철학 전공자도 힘겹게 읽는 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그러므로 번역자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좀 더 친절하게 글을 써야 한다.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된 용어가 어떤 뜻인지 알려줘야 한다. 레비나스가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도 주석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전체성과 무한1(‘동일자와 타자’, ~149)를 읽었는데, 주석이 있어야 할 단어와 인명이 있다서문에 레비나스는 프란츠 로렌츠바이크(Franz Rosenzweig)라는 학자가 쓴 책을 자주 참고하면서 전체성과 무한》을 썼다고 언급한다. 어떻게 보면 프란츠 로렌츠바이크는 이 책을 태어나도록 도움을 준 철학의 산파이며 레비나스는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는 프란츠 로젠츠바이크가 구원의 별에서 전체성 관념에 반대하는 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 저작은 이 책에 자주 인용되어 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빌린 발상들을 제시하고 발전시키는 데는 모두 현상학적 방법이 사용되었다. 지향적 분석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탐색이다. 자신을 정의하는 사유의 직접적 시선에 포획된 개념은, 그 순진한 사유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사유가 생각지도 못했던 지평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 지평들이 그 개념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후설(Edmund Husserl)의 본질적인 가르침이다.

 

(서문, 18)



독자는 로렌츠바이크가 누군지 모른다. 나도 모른다. 우리는 책을 읽다가 낯선 용어나 사람 이름이 만나면 스치듯이 보면서 지나간다. 그래도 된다. 하지만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을 눈앞에 보고도 놓칠 수 있다.















* [절판] 마리 안느 레스쿠레, 변광배 · 김모세 함께 옮김 레비나스 평전(살림, 2006)




로렌츠바이크는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다. 그는 헤겔(Hegel)을 전공했으며 첫 번째로 쓴 책이 <헤겔과 국가>. 로렌츠바이크는 1916년부터 <구원의 별>을 쓰기 시작한다. ‘구원의 별유대교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뜻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 , 세계의 관계성을 다윗의 별기호를 가지고 설명한다. 레비나스는 로렌츠바이크에 대한 글을 여러 편 썼다. 로렌츠바이크는 레비나스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철학자다. 레비나스는 <구원의 별>이 헤겔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서 반전체주의를 주장한 책으로 평가한다레비나스 철학은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비판한다. 따라서 레비나스 철학과 로렌츠바이크의 연관성을 아무런 설명 없이 지나간다는 것은 레비나스와 블랑쇼의 철학적 교감을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과 같다.


레비나스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헤겔 철학(존재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래서 전체성과 무한에 헤겔이 심심찮게 언급된다.



 결국 행복과 욕망을 분리하는 거리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 정치는 상호 인정을, 즉 동등성을 향한다. 정치는 행복을 약속한다. 그리고 정치적인 법은 인정 투쟁을 완성하고 신성화한다. 종교는 욕망이지 결코 인정 투쟁이 아니다. 종교는 동등한 자들이 이루는 사회에서의 가능한 잉여다. 즉 영광스러운 비참함의, 책임의, 희생의 잉여다. 이것은 동등성 자체의 조건이다.

 

(79~80)

 


인정 투쟁(Anerkennungskampf)은 헤겔 철학의 핵심 용어다헤겔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인정하는 행동을 철학적으로 접근했다. 헤겔이 바라보는 자아는 그 타자가 자기 자신을 자립적인 가치로 인정해 주길 원한다. 그것은 인정에 대한 욕구. 헤겔은 상호 인정 행위를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 헤겔,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한길사, 2005)


* 스티븐 홀게이트, 이종철 옮김 헤겔의 정신현상학입문(서광사, 2019)




주인은 노예에게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주인은 불안하다. 노예가 나를 제대로 주인으로 대접해 주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복종하는 노예의 태도는 과연 진심일까. 그래서 주인은 노예를 따뜻하게 대하면서 그에게 자유로운 생활을 하도록 허용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주인은 또 불안감을 느낀다. 자유민이나 다름없는 생활에 익숙한 노예가 나를 섬기지 않으면 어쩌지? 자유민이 된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자립적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자기의식을 발견한다. 노예는 예전처럼 주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노예가 아닌 내가 주인인나답게 살려고 한다. 그런데 과거에 노예로 살았던 그가 막상 주인이 돼서 살아보니, 자신을 인정해 주는 노예, 즉 타자가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타자를 만나면 내가 주인이요!’라고 외치면서 생사를 건 투쟁(Kampf auf Leben und Tod)’을 벌인다.

















* 악셀 호네트, 이현재 · 문성훈 옮김 인정 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사월의책, 2011)

 

* 악셀 호네트, 강병호 옮김 인정: 하나의 유럽 사상사(나남출판, 2021)

 

* 이현재 악셀 호네트(커뮤니케이션북스, 2019)





레비나스가 언급한 인정 투쟁은 헤겔 철학 용어다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헤겔의 용어를 좀 더 확장해서 논의한다.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면 생사를 건 인정 투쟁을 한다. 그들의 인정 투쟁은 자기 존엄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기득권층과 사회적 약자 간의 갈등 관계를 단순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가 해야만 하는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한 저항이며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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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8-22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비나스를 공공정책 개발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것이 제 주요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책만 들입다 읽는다고 세상이 나아지진 않으니까요. 오히려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지요.

cyrus 2024-08-26 06:48   좋아요 1 | URL
오장원님이 레비나스 독서 모임에 오시면 좋겠어요. 오장원님의 견해가 궁금해요. ^^

yamoo 2024-08-21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레비나스 책은 정신현상학보다 10배는 쉬워요~~ㅎㅎ 지젝 보다 훨씬 읽기 수월합니다. 읽어서 이해가 안되는 건 역자들이 깜양이 안되어도 마구 번역하여 한국어 문법규정을 초월한 문장을 사용해서 그래요. 전혀 자책할 필요가 없어요~~ 현상학을 이해하고 보면 좀더 수월합니다..

cyrus 2024-08-26 06:49   좋아요 0 | URL
시간이 지나니까 적응됐어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긴 하지만, 헤겔의 <정신현상학> 읽는 것보다 낫네요.. ㅎㅎㅎ
 




안녕하세요, 여러분. 갈매기를 읽고 계시나요? 아니면, 다 읽으셨는지요? 희곡이 소설과 달라서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저는 갈매기를 처음으로 읽었을 때 적지 않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단번에 파악하기 힘들었어요. 여러 번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대사들도 있었어요. 어렵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세요.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세 번째 선정 도서]

안톤 체호프강명수 옮김 갈매기》 (지만지드라마, 2019)




발제를 공개합니다. 아마도 조금은 낯설 거예요. 여러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첫 번째 발제]

희곡이나 연극을 좋아하세요? 좋아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갈매기전에 희곡을 읽었거나 연극 공연을 본 적이 있었나요? 인상 깊게 읽었던 희곡 또는 잊을 수 없는 연극이 있었으면 한 편 소개해 주세요.

 


[두 번째 발제]

체호프는 갈매기희극이라고 했어요. 희극에는 웃길 만한 사건이 나옵니다. 어째서 체호프는 불행한 사람들이 나오는 갈매기를 희극으로 여겼을까요? 갈매기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온 대사나 장면이 있었어요?

 


[세 번째 발제]

트레플료프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추구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예술관이 어떤지를 보여주기 위해 직접 대본을 쓰고, 공연 연출을 맡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아르카지나는 아들의 연극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굴욕을 느낀 트레플료프는 공연을 중단시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갈매기의 극중극은 어땠어요? 여러분이 트레플료프라면 대본을 어떻게 쓰고 싶으세요?


 

[네 번째 발제]

배우로서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강한 니나는 트리고린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결심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부부 생활은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게 되고, 니나는 트리고린에게 버림받습니다. 삶이 만신창이가 된 채 쓸쓸하게 소린 저택으로 돌아와서 트레플료프를 만납니다. 니나는 다시 그와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떠납니다. 여기서 니나는 유명한 대사를 남깁니다. 저는 갈매기예요... 아니, 그게 아니에요.” 니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다섯 번째 발제]

갈매기를 읽으면서 인상 깊은 인물의 대사가 있었나요? 그 인물의 감정 속으로 들어간 배우가 돼서 낭독해 봅시다. 무성의한 로봇 연기’, 국어책을 읽는 듯한 낭독은 금합니다







훌륭한 연기를 하신 분에게 연극쟁이인 제가 다음 독서 모임 혹은 <수르채그>에 방문하실 때 크림치즈 크래커와 음료 한 잔 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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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19 0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가 사주는 크림 치즈 크래커를 먹으려면 대구까지 가야하는 거구나. 에고, 언제고 가는 날 있겠지. ㅋㅋㅋ

cyrus 2024-08-20 23:28   좋아요 2 | URL
제가 서울에 가게 되면 꼭 만나요. 기다려보세요. 🤭

stella.K 2024-08-21 09: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모티콘 붙인 게 웃겨! ㅎㅎㅎㅎ

청아 2024-08-27 13:36   좋아요 2 | URL
저도 거기 끼고 싶어요! ^^

cyrus 2024-09-01 08:08   좋아요 1 | URL
모임 추진해 보겠습니다. 좋은 모임 장소는 찾았어요. ^^
 








셰익스피어(Shakespeare)1564에 태어났고, 체호프(Chekhov)1904에 숨을 거두었다. 우연하게도 올해는 두 극작가가 특별히 주목받는 해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지 460주년, 체호프가 세상을 떠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위대한 극작가를 말할 때 셰익스피어와 체호프는 당연히 빠지지 않는다. 대부분 독자는 ‘4대 비극‘5대 희극에 포함된 작품을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매력에 푹 빠진다. 연극인은 체호프의 ‘4대 장막극을 절대로 모를 수 없다. 배우를 꿈꾸는 학생들은 대학교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희곡을 읽으면서 작품을 분석하고, 연극 대본을 읽으면서 연기 연습을 한다. 학생들은 대학별 연극영화과 지정 희곡 목록에 포함된 작품 한 편을 선택해서 독백 연기를 준비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와 체호프의 극작품들은 연극영화과 지정 희곡으로 자주 나온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경식 옮김 햄릿(문학동네, 2016)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세 번째 선정 도서]

* 안톤 체호프, 강명수 옮김 갈매기(지만지드라마, 2019)





햄릿은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무대에 올랐고, 가장 많이 재창작된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이다. 갈매기는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 제일 먼저 발표된 작품이다. 갈매기는 초연 당시 반응이 매우 좋지 않았다


















* 안톤 체호프, 김규종 옮김 체호프 희곡 전집(시공사, 2010)

* [절판] 안톤 체호프, 전훈 옮김 숲 귀신(애플리즘, 2010)

* 안톤 체호프, 이주영 옮김 체호프 희곡 전집 3(연극과인간, 2002)





1889년에 체호프는 숲의 수호신(‘숲 귀신’, ‘숲의 정령)이라는 장막극을 선보였으나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이때 당시 겪은 실패는 체호프의 자존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체호프는 숲의 수호신재출간과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한동안 단막극과 단편소설 집필에 주력했다. 그러다가 1895년에 갈매기를 쓰기 시작했다. 체호프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상태로 갈매기를 쓰고 있다고 밝혔지만, 이 작품이 성공할 거라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갈매기무척 바보 같은 이야기라면서 경멸에 찬 표현을 썼다.


체호프는 지인들 앞에서 이전에 경험한 실패에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야심 차게 집필한 갈매기를 극장에 공개했다. 체호프는 갈매기실패한 작품이 될 거라면서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극장을 찾은 체호프는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갈매기를 눈앞에서 지켜봤고, 또 한 번 그의 자존심이 크게 다쳤다. 갈매기마저 실패하자 체호프는 희곡을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갈매기가 초연된 지 2년 후에 체호프와 친분이 있는 연출가는 대중과 연극인들이 알아보지 못한 갈매기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는 체호프에게 공연을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을 죽이는 일이라면서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제안했다. 다행히 갈매기재공연은 성공했다


















* 콘스딴찐 스타니슬랍스키, 강량원 옮김 나의 예술 인생: 현대 연기 시스템 완성을 향한 스타니슬랍스키의 창조의 길(책숲, 2015)

 



갈매기두 번째 공연 장소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이다이 극장을 설립한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y)는 체호프의 극작품들을 연출한 전설적인 연출가다. 그는 자서전 나의 예술 인생에서 체호프의 희곡이 없으면 모스크바 예술 극장 소속 극단에서만 생기는 고유의 향기가 잃어버렸다고 회상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있어서 런던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의 전성기가 빛날 수 있었던 것처럼 체호프의 희곡은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젊은 체호프는 단편소설을 엄청 많이 쓰면서도 희곡에 향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에 그가 열심히 공부한 극작가는 셰익스피어다. 1882년에 체호프는 모스크바의 푸시킨 극장에 공연된 셰익스피어 작품을 관람했다. 1887년에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라는 제목의 보드빌(vaudeville, 대사보다 춤과 노래가 많은 연극)을 쓰려고 준비한 적도 있다.


갈매기의 등장인물 트레플료프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배우로 활동하는 어머니 이리나는 트레플료프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트레플료프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낡은 과거의 문학을 비판하는데, 트레플료프는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리나를 과거에 벗어나지 못한 예술인으로 여긴다. 트레플료프는 소린 영지의 저택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직접 만든 연극을 공개한다. 이리나는 주류 문학에 완전히 벗어난 아들의 연극을 이해하지 못한다. 수치심을 느낀 트레플료프는 연극 공연을 중단시킨다.


이라나는 트리고린이라는 작가와 사귄다. 트레플료프는 과거의 문학에 졸졸 따라다니면서 성공한 작가이면서 어머니가 편애하는 트리고린을 싫어한다. 트레플료프는 자신의 실패한 연극에서 연기를 했던 니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니나도 트레플료프가 만들고 싶은 문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니나는 시골이나 다름없는 소린 저택에서 벗어나 도시에서 생활하는 연극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성공하고 싶은 열망이 강한 그녀의 눈빛은 가난한 백수 트레플료프가 아닌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는 유명한 작가 트리고린으로 향한다. 결국 트리고린으로 향한 니니의 동경은 사랑으로 변해버린다. 니나는 배우와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트리고린과 함께 소린 영지를 떠난다.


갈매기의 트레플료프는 햄릿과 비슷한 인물이다. 그는 애인과 같이 다니는 어머니를 질투한다. 트레플료프는 이리나와 트리고린이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한다. 햄릿은 친부를 독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숙부를 덴마크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숙부와 함께 침실을 쓰는 어머니를 증오한다.


햄릿갈매기극중극이 나온다. 햄릿은 숙부의 양심을 잡아낼 방법(22)’으로 극단과 함께 <곤자고의 살인>이라는 연극을 꾸민다. 햄릿은 <곤자고의 살인>에 숙부가 친부를 죽이는 과정과 똑같은 장면을 의도적으로 넣는다. 트레플료프는 이리나와 니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연극을 직접 써서 연출까지 맡는다. 만약 공연이 중단되지 않고 잘 마무리돼서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면 그는 두 여자에게 작가가 될 만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는 동시에 사랑받았을 것이다


햄릿은 친부의 영혼을 만난 이후로 복수의 비수를 가슴속에 품기 시작한다. 하지만 복수의 비수를 일찌감치 빼지 못한 바람에 어머니와 오필리아 등 여러 인물이 죽는다. 어정쩡한 복수극의 결말은 햄릿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햄릿의 복수 지연은 햄릿위대한 비극으로 유명하게 만든 주제다갈매기의 트레플료프도 복수를 과감히 실행하지 못해서 불행에 빠진 인물이다. 그는 트리고린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면서 복수를 위한 총을 가슴 속에 품고 다닌다. 하지만 트레블료프는 복수의 총을 트리고린의 심장을 향해 쏘려는 결단력이 부족했다. 결국 운 좋게(?) 살아남은 트리고린은 니나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두 여자를 모두 빼앗긴 트레블료프는 트리고린의 심장에 박혀 있어야 할 복수의 총알 한 발을 자신의 머리 쪽으로 돌린다.


갈매기에서 니나와 함께 불행한 여성으로 묘사되는 마샤 햄릿의 오필리아에 해당한다. 마샤는 소린 영지의 햄릿트레플료프를 좋아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포기한다. 그녀는 트레플료프에 대한 사랑을 잊기 위해 메드베덴코라는 가난한 교사와 결혼한다. 메드베덴코는 마샤를 좋아하지만, 마샤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이 된 메드베덴코를 따사로운 애정 한 점 느껴지지 않는 태도로 대한다. 햄릿은 미친 척하면서 오필리아를 무척 매정하게 대한다. 오필리아는 햄릿의 매정한 태도를 진심으로 느꼈고, 정신적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물에 빠져 자살한다. 마샤는 자살하지 않지만,  그녀의 첫 대사 한 줄에서 우리는 그녀가 현실적인 삶을 이미 포기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샤는 항상 입고 다니는 검은 옷을 인생의 상복이라고 말한다본인이 행복하지 않은 운명을 선택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한다


서평가 이현우햄릿갈매기를 함께 분석한 글에서 체호프의 희극(갈매기)’셰익스피어의 비극(햄릿)’보다 더 잔혹하다고 평한다.[트레플료프, 이리나, 니나, 트리고린, 이 네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갈매기를 읽는다면 트레플료프의 비극적 삶과 죽음이 유독 두드러져 보인다하지만 갈매기에 나오는 주변 인물들 또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영지와 큰 저택의 주인 소린은 도시로 가고 싶어 하지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조용히 숨을 거둔다. 메드베덴코는 마샤와 그녀의 식구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편한 동거를 끝내지 못한다


암울한 회색빛 현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더 짙어진다. 칙칙한 쇠퇴의 그림자가 덮친 영지에 사는 인물들은 분위기를 밝게 해보려고 함께 먹고, 마시고, 오락을 즐긴다. 하지만 희망의 밝기를 억지로 부풀리면 불행이 사라지기는커녕 일시적으로 가려질 뿐이다. 애써 행복한 척하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쓴웃음이 삐져나온다. 갈매기는 잔혹한 희극이라기보다는 비극의 농도가 짙은 희극이다.







[] <비극보다 더 잔혹한 희극>, 중앙선데이, 201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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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책을 샀다. 책의 이름은 간부 구두. 이상한 책을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러시아 단막 소설 선집이야.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하다. 


단막(單幕)은 하나의 막을 뜻하는 연극 용어이 책을 만든 출판사는 연극과 인간이다국내외 희곡과 연극 관련 도서를 주로 출판한다간부 구두》는 희곡집이 아니다. 이 책에 희곡이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인무학 · 염무웅 함께 옮김 간부 구두》 (연극과인간, 2014)

 




간부 구두의 진짜 정체는 러시아 단편 소설 선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푸시킨(Pushkin),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톨스토이(Tolstoy), 막심 고리키(Maxim Gorky), 솔제니친(Solzhenitsyn)의 단편소설이 들어 있다. 여기서 이 책의 이상한 점이 또 있다단편 소설이 아닌 글도 있다.

















이반 끄르일로프정막래 옮김 끄르일로프 우화집》 (문학과지성사, 2006)

 

이솝천병희 옮김 이솝 우화》 (도서출판 숲, 2013)

 

라퐁텐김명수 옮김 라퐁텐 우화상상력을 깨우는 새로운 고전 읽기》 (황금부엉이, 2020)





늑대와 양 새끼(욕이 아니다. 발음하면 욕설처럼 느껴지는 양 새끼보다는 새끼 양으로 쓰는 게 좋다), 원숭이와 안경코끼리와 모씨까는 러시아의 시인 이반 크릴로프(Ivan A. Krylov)의 작품이다이 세 작품 모두 우화(寓話)’


크릴로프는 러시아 최초의 우화집을 발표한 작가다그는 처음에 이솝(Aesop) 우화집과 라퐁텐(La Fontaine) 우화집을 모방해서 썼다. 여러 권 출간된 우화집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크릴로프는 러시아 민중의 삶이 묻어나 있고, 러시아 당대 사회를 풍자한 우화를 썼다크릴로프 우화집은 이솝라퐁텐과 함께 ‘3대 우화집으로 거론되지만두 사람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다그렇지만 이미 오래전에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개작한 크릴로프 우화집이 몇 권 출간되었다문제는 작가 이름표기가 책마다 제각각 다르다간부 구두에는 크릴롭으로 표기되어 있다그 밖에도 크뤼로프’, ‘끄로일로프’. 끄르일로프가 있다끄르일로프 우화집은 총 9권으로 출간된 크릴로프 우화집을 완역한 책이다.

















세르게이 예세닌김성일 옮김 예세닌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단편 소설 선집에 우화뿐만 아니라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의 시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예세닌은 미국의 전설적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을 미국에서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시인의 극심한 우울증과 두 사람의 성격 차이 등의 이유로 1년도 채 안 돼 이혼했다.


















금정연 한밤의 읽기금정연의 강연 에세이》 (스위밍꿀, 2024)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김현정 옮김 수용소교도관의 수기》 (지식을만드는지식, 2020)




간부 구두의 이상한 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저자명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Leonid Andreev)’그런데 책에 안드레예프의 단편소설이 없다표제작 간부 구두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Sergei Dovlatov)가 쓴 단편소설이다도블라토프는 서평가 금정연의 강연 에세이 한밤의 읽기에 언급된 작가금정연은 강연에서 국내에 번역된 도블라토프의 책이 네 권이라고 했다. 강연 이후에 나온 수용소교도관의 수기까지 포함하면 네 권이 아니라 다섯 권이다

















































※ 『반카가 수록된 단편 선집



체호프박현섭 옮김 상자 속의 사나이》 (문학동네, 2024)

 

체호프이상원 옮김 자고 싶다》 (스피리투스, 2021)

 

[개정판] 강명희 · 명정 함께 옮김 크리스마스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꼼지락, 2019)

 

[구판 절판] 강명희 · 명정 함께 옮김 크리스마스 이야기》 (자음과 모음, 2013)

 

체호프문석우 옮김 연극이 끝난 후청소년을 위한 체홉 단편문학선》 (써네스트, 2015)


체호프최선 옮김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체호프 단편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

 




체호프의 단편소설 바니카는 반카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번역된 작품이다반카는 고아가 된 아홉 살의 구두장이 수습공이다그는 구두장이 밑에서 힘겹게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소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은 시골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크리스마스 전날 밤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를 쓴다소년은 편지에 그동안 살아온 힘든 나날들을 언급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 달라고 호소한다. 반카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무사히 할아버지에게 잘 전달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여기서 체호프는 씁쓸한 여운이 감도는 결말을 선보인다직접 읽어보시길.


간부 구두는 시와 우화가 수록된, 이상한 러시아 단편소설 선집이다작품을 이렇게 고른 이유가 궁금하다그리고 안드레예프의 소설이 없는지도 알고 싶다간부 구두는 문학적 가치를 인정 받은 러시아 작가의 좋은 글을 모은 책이면서도 교정을 제대로 했나 싶을 정도로 의심이 드는 나쁜 책이다책을 펼치자마자 오탈자가 나타난다문장도 엉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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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8-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고 싶긴한데 구매욕은 확 떨어지네. 어디서 다시 나와주면 좋겠어.

cyrus 2024-08-19 06:34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 있으면 빌려 보시는 게 좋아요. 어제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중편소설 <여행 가방>이라는 책을 샀어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인데, ‘간부 구두’는 <여행 가방> 이야기의 일부였어요. 그러니까 ‘간부 구두’는 원래 중편소설의 일부였고, 단편소설이 아닌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