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책을 샀다. 책의 이름은 ‘간부 구두’다. 이상한 책을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러시아 단막 소설 선집이야.’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하다.
단막(單幕)은 하나의 막을 뜻하는 연극 용어다. 이 책을 만든 출판사는 ‘연극과 인간’이다. 국내외 희곡과 연극 관련 도서를 주로 출판한다. 《간부 구두》는 희곡집이 아니다. 이 책에 희곡이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 인무학 · 염무웅 함께 옮김 《간부 구두》 (연극과인간, 2014년)
《간부 구두》의 진짜 정체는 러시아 단편 소설 선집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푸시킨(Pushkin),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톨스토이(Tolstoy), 막심 고리키(Maxim Gorky), 솔제니친(Solzhenitsyn)의 단편소설이 들어 있다. 여기서 이 책의 이상한 점이 또 있다. 단편 소설이 아닌 글도 있다.
* 이반 끄르일로프, 정막래 옮김 《끄르일로프 우화집》 (문학과지성사, 2006년)
* 이솝, 천병희 옮김 《이솝 우화》 (도서출판 숲, 2013년)
* 라퐁텐, 김명수 옮김 《라퐁텐 우화: 상상력을 깨우는 새로운 고전 읽기》 (황금부엉이, 2020년)
『늑대와 양 새끼』(욕이 아니다. 발음하면 욕설처럼 느껴지는 ‘양 새끼’보다는 ‘새끼 양’으로 쓰는 게 좋다), 『원숭이와 안경』, 『코끼리와 모씨까』는 러시아의 시인 이반 크릴로프(Ivan A. Krylov)의 작품이다. 이 세 작품 모두 ‘우화(寓話)’다.
크릴로프는 러시아 최초의 우화집을 발표한 작가다. 그는 처음에 이솝(Aesop) 우화집과 라퐁텐(La Fontaine) 우화집을 모방해서 썼다. 여러 권 출간된 우화집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자 크릴로프는 러시아 민중의 삶이 묻어나 있고, 러시아 당대 사회를 풍자한 우화를 썼다. 크릴로프 우화집은 이솝, 라퐁텐과 함께 ‘3대 우화집’으로 거론되지만, 두 사람에 비하면 인지도가 낮다. 그렇지만 이미 오래전에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개작한 크릴로프 우화집이 몇 권 출간되었다. 문제는 작가 이름표기가 책마다 제각각 다르다. 《간부 구두》에는 ‘크릴롭’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밖에도 ‘크뤼로프’, ‘끄로일로프’. 끄르일로프‘가 있다. 《끄르일로프 우화집》은 총 9권으로 출간된 크릴로프 우화집을 완역한 책이다.
* 세르게이 예세닌, 김성일 옮김 《예세닌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단편 소설 선집에 우화뿐만 아니라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의 시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세닌은 미국의 전설적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을 미국에서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시인의 극심한 우울증과 두 사람의 성격 차이 등의 이유로 1년도 채 안 돼 이혼했다.
* 금정연 《한밤의 읽기: 금정연의 강연 에세이》 (스위밍꿀, 2024년)
*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김현정 옮김 《수용소: 교도관의 수기》 (지식을만드는지식, 2020년)
《간부 구두》의 이상한 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저자명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Leonid Andreev)’다. 그런데 책에 안드레예프의 단편소설이 없다. 표제작 『간부 구두』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Sergei Dovlatov)가 쓴 단편소설이다. 도블라토프는 서평가 금정연의 강연 에세이 《한밤의 읽기》에 언급된 작가다. 금정연은 강연에서 국내에 번역된 도블라토프의 책이 ‘네 권’이라고 했다. 강연 이후에 나온 《수용소: 교도관의 수기》까지 포함하면 네 권이 아니라 다섯 권이다.
※ 『반카』가 수록된 단편 선집
* 체호프, 박현섭 옮김 《상자 속의 사나이》 (문학동네, 2024년)
* 체호프, 이상원 옮김 《자고 싶다》 (스피리투스, 2021년)
* [개정판] 강명희 · 명정 함께 옮김 《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꼼지락, 2019년)
* [구판 절판] 강명희 · 명정 함께 옮김 《크리스마스 이야기》 (자음과 모음, 2013년)
* 체호프, 문석우 옮김 《연극이 끝난 후: 청소년을 위한 체홉 단편문학선》 (써네스트, 2015년)
* 체호프, 최선 옮김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귀부인: 체호프 단편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8년)
체호프의 단편소설 『바니카』는 ‘반카’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번역된 작품이다. 반카는 고아가 된 아홉 살의 구두장이 수습공이다. 그는 구두장이 밑에서 힘겹게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소년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은 시골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소년은 할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를 쓴다. 소년은 편지에 그동안 살아온 힘든 나날들을 언급하면서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 달라고 호소한다. 반카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무사히 할아버지에게 잘 전달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서 체호프는 ‘씁쓸한 여운이 감도는 결말’을 선보인다. 직접 읽어보시길.
《간부 구두》는 시와 우화가 수록된, 이상한 러시아 단편소설 선집이다. 작품을 이렇게 고른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안드레예프의 소설이 없는지도 알고 싶다. 《간부 구두》는 문학적 가치를 인정 받은 러시아 작가의 좋은 글을 모은 책이면서도 교정을 제대로 했나 싶을 정도로 의심이 드는 ‘나쁜 책’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오탈자가 나타난다. 문장도 엉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