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명상에 관련된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1990년대 국내 출판계에 크리슈나무르티, 칼릴 지브란 등의 책과 함께 많은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1995~2000년)에 교실 학급문고 책장에 꼭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꽂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만해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칼릴 지브란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크게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도 지브란의 <예언자>는 분량이 얇아서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초딩이 심오한 명상의 세계를 제대로 알 리가 있나. 처음에는 지브란의 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긴 내용의 시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향하는 일종의 주문서 같은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문장은 무척 난해하게 느껴졌다.

 

지브란, 크리슈나무르티 이외에도 국내에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명상철학자 한 명이 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쇼 라즈니쉬다. 라즈니쉬는 1931년 인도의 자이나교 집안에서 태어나 22세 때 어느 날 공원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철학을 전공했다. 자발푸르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1964년에는 명상캠프를 열어 동서고금의 종교경전 등에 대해 설법했다. 그는 1990년 1월 ‘바다와 같이 무한하다’는 뜻을 지닌 오쇼라는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2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라즈니쉬가 작고한지 일 년이 지난 이듬해 출판사마다 다투어 라즈니쉬의 명상서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라즈니쉬의 대표작으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우화모음집 <배꼽>(박상준 역, 장원, 1991년 중판)은 발간 4개월 만에 20쇄 50만부를 찍고, 교보문고 및 각종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배꼽>을 낸 출판사 입장에서는 라즈니쉬 열풍 덕분에 대박을 쳤다는 점이다. 장원출판사는 1988년 11월 24에 정식으로 법인 등록되었다. <배꼽>은 1990년 연말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문을 연지 2년 밖에 안 된 신진출판사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이 집계한 1991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독자 성향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1991년에 가장 잘 팔린 책들은 공통적으로 인도 명상철학가의 우화집, 사랑을 주제로 한 소녀취향의 시집과 수필집이었는데 그 중에서 라즈니쉬의 <배꼽>은 종교 분야가 아닌 수필/비소설 분야에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비소설 분야뿐만 아니라 <배꼽>은 1991년 올해의 최고 인기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출판사측 말에 의하면 1991년 11월까지 1백27만부를 팔았다고 한다.

 

라즈니쉬의 <배꼽>이 대박 난 이후에도 국내 출판사들은 앞 다투어 라즈니쉬의 글 모음집이나 저서를 출판했지만 역자와 출판사가 임의대로 편집한 책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한 라즈니쉬의 수십 권의 책들 중에 라즈니쉬가 직접 쓰고 출판한 공식적인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번역한 책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장원의 <배꼽> 같은 경우에도 ‘배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Tao: The Pathless Path>(전 2권)과 <Sufis: The People of the Path>(전 2권) 외에 10여 권의 텍스트에서 역자가 우화들을 골라서 한 권의 우화 모음집으로 만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장원 이외에도 타 출판사에서도 제목 그대로 따온 유사도서가 출간되거나 심지어 ‘배꼽’ 인기를 반영한 듯 <배꼽 2><배꼽 3> 같은 후속편도 나왔다. 이러한 출판사들의 과잉 출판은 ‘표절도서’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부 서점은 독자를 현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배꼽> 유사도서를 판매 중단하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구한 두 권짜리 <배꼽>은 같은 역자에, 같은 출판사에서 낸 것이 아니다. 1권은 ‘장원’에서, 2권은 ‘카나리아’라는 출판사에서 낸 것이다. 책 표지가 서로 비슷해서 같은 출판사에서 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나도 처음에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야 출판사가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책 다 책 앞, 뒤표지가 너무 유사하다. 아무래도 먼저 나온 장원의 <배꼽> 제목과 표지를 카나리아 출판사가 그대로 따온 듯하다.

 

카나리아 출판사 말고도 <배꼽> 또는 <배꼽> 시리즈를 낸 출판사가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배꼽>에 수록된 우화 일부 내용은 다른 제목과 표지로 바꿔서 출간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저자명이 라즈니쉬로 표기된 책들이 간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적지 않은 책들을 일일이 찾아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확인하기 어려운 더 큰 이유가 그렇게도 많이 내던 라즈니쉬의 책들 절반은 이미 절판되었다는 사실이다. 20여 년 전 베스트셀러 종합 1위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지날수록 대중의 기억에 잊히는 법이다. 1991년 가장 많이 팔린 장원의 <배꼽>은 헌책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되었고, 한 권의 책 덕분에 잘 나가던 출판사는 1997년 이후로 책을 내지 않았다. 장원 출판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지만, 출판사소식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장원 출판사가 1997년까지 낸 책들이 현재 절판인데다가 그 이후로 책이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IMF 외환위기로 부도가 났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1991년 라즈니쉬 열풍은 짧고 간결하면서도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인 공허감을 극복하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명상이나 신비주의 철학을 고집하는 독서가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자칫 현실 문제를 외면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우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방대하고 심오한 명상철학의 본질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 간단하고 보기 쉬운 이야기만 선호하는 독서는 가볍고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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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Scene #1  나는 오늘을 위해 피를 팔면서 산다  

 

피는 생명의 증거이자 죽음을 부르는 신호다. 피가 매매의 대상일 때 삶은 잔인하고 비루해진다. 피를 파는 것은 목숨을 파는 것이며 자신을 파는 것이다.

 

매혈(賣血)은 헌혈과 다르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피를 뽑는 것이다. 매혈을 통해 번 돈으로 재산을 축적하겠는가. 최악의 생존 조건에 내몰린 사람이 선택한 마지막 연명 수단일 뿐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슬프다. 그가 피를 팔고자 했을 때는 늘 가족이 우선이었다. 자신을 위해 피를 팔아본 적이 없다. 동네 미녀 허옥란과 결혼하기 위해, 첫아들 일락이가 자기 핏줄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사고 처리를 위해, 가뭄 때문에 온 가족이 굶주릴 때, 문화대혁명으로 농촌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손에 돈을 쥐어주기 위해, 갑작스런 병으로 신음하는 일락이를 살리기 위해, 허삼관은 기꺼이 자신의 피를 판다. 중국에서 한번의 헌혈에 뽑는 피의 양은 4백밀리, 우리의 헌혈량과 같다. 그에게 피란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자 돈줄이며 배를 곯는 가족들에게 국수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족들 앞에서 가장의 능력과 권위를 한껏 뽐내기 위한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병원에 피를 파는 허삼관은 나름대로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다. 피를 팔러가는 길 내내 오줌보가 터질 만큼 물을 마신다. 그래야 피가 묽어져 그 양이 곱절로 늘어날 것이란다. 피를 판 후에는 꼭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황주 두 냥을 챙겨 먹는다. 빠져나간 피를 보충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피를 팔며 연명하지만 허삼관의 삶이 고단하거나 비루하지는 않다. 큰 아들 일락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남의 집 아들을 9년 동안이나 키웠다며 동네 사람들이 ‘자라 대가리’라고 비웃었을 때도, 피 판 돈으로 아들의 상사에게 술을 따르고 담배를 권해야했을 때도 그는 당당하다. 일락이의 간염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사흘 단위로 피를 뽑을 때에도 행복하다. 피라도 팔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피를 뽑아도 괜찮은 자신의 건강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Scene #2  매혈의 웃음 뒤에 감춘 아버지의 눈물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맨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 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내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일락이 눈에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187쪽)

 

집 나간 의붓자식 일락이를 찾은 허삼관이 아이를 등에 업고 걸어가며 퍼부어대는 욕에 자신의 처지가 다 들어 있다. 허삼관은 의붓자식 일락이를 차마 어쩌지 못한다. 미울 때는 욕을 퍼붓다가도 애써 친자식들과 웃을 때 닮았다며 자위한다. 허삼관은 늘 피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라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 음식을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일락이만 빼고 국수를 먹으러 가기도 한다. 일락이도 국수가 먹고 싶다. 그래서 친부를 찾아가 보지만 어림도 없다. 결국 허삼관이 그를 다시 품는다. 아이는 국수 먹으러 가는 거냐고 천진하게 묻는다. 아비는 ‘그래’라고 짧게 답한다. 짤막한 아비의 대답에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독자들의 슬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다.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자린고비를 능가하는 기지로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나, 문화대혁명이라는 혹독한 시간에 비판의 대상에 오른 아내의 자기비판회를 여는 모습은 역사와 한 개인의 삶과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허옥란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장면과 소문이 진실이 되고 마는 혁명기의 인간 군상이 허허롭다.

 

허삼관의 피는 건강한 민중성이며 친근한 가부장성을 상징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던 그가 육십을 넘긴 인생의 황혼 길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오직 볶은 돼지 간과 황주를 먹고 싶어서 피를 팔고자 한다.

 

모두가 안정적인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어느 날 환갑이 다된 허삼관은 갑자기 피를 판 후에 먹는 고기와 술이 먹고 싶어서 피를 파는 병원에 간다. 하지만 피를 팔 수 있는 이를 고르는 혈두는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를 팔 수 없다고 우긴다. 평생 가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피를 팔다가 오직 자신의 욕구에 따른 의지로 피를 팔려 했을 때, 그것이 안 된다고 했을 때의 허무감.

 

하지만 늙은 피는 가구 칠에나 쓰일 뿐이라며 병원에서 쫓겨났을 때 그의 곁에는 아내 허옥란이 있었다. 쓸쓸해진 남편에게 돼지 간과 황주를 먹이기 위해 승리반점으로 데려가는 아내의 모습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진한 페이소스가 배어있다. 늘 그렇듯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일생을 살아온 남자, 어려웠던 시절에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던 우리의 아버지들, 집안에 닥쳐온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내다 팔고 허름한 장터 구석에서 돼지국밥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진다.

 

 

 

 Scene #3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

 

 

 

마크 퀸  「Self」 2001년

 

 

‘매혈’하면 허삼관 말고도 생각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지금도 활동 중인 영국 출신 컨템포러리 예술가 마크 퀸.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만든 그의 작품 중에 ‘Self’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미술 역사사상 가장 엽기적이다.

 

‘Self'는 5년마다 한 번씩 마크 퀸 자신의 혈액 4ℓ를 채혈해 만든 시뻘건 ‘피 두상’이다. 자신의 피로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다. 일단 대부분 사람들은 마크 퀸의 피로 만든 두상을 끔찍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은 두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4ℓ의 혈액은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전체 피의 양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Self'는 일회적인 작품이 아니다. 놀랍게도 연작작품이다. 1991년 첫 작품을 제작한 후, 조금씩 자신의 피를 뽑아 모았다가 5년마다 한 개씩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크 퀸의 작품은 간신히 혐오감을 누르고 보면 ‘인간 존재의 찰라성과 허무함’을 ‘핏속’까지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냉동장치를 통해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 주지 않으면 변색이 되거나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퀸은 왜 굳이 자신의 피를 뽑아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정기적으로 채혈 작품을 만들어도 퀸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허삼관처럼 퀸에게 피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인 것이다.

 

“설령 목숨을 파는 거라 해도 전 피를 팔아야 합니다.” (291쪽)

 

‘피’는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매혈은 목숨의 일부를 파는 일이다. 허삼관의 인생여정이 가장의 삶을 넘어 이타적 인간의 삶으로 비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삼관의 매혈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매혈은 ‘자라 대가리’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무식하고 어리석은 방법일 수 있으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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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4-12-30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 근사한 글을 읽고갑니다. 새삼 북플에 감사라도 전해야하나 싶어지네요.인터넷였다면
이리 들여다 보진 못했을 겁니다.
아버지..하면 참.엄마,라는 그 무게만큼
복잡다단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제 매혈기의 감상은 님처럼 진중하게 아버지를 똑바로 관통하지 못합니다.
대충 얼버무린 우스겟소리로 헤치워버리고
말았는데..덕분에 위로가 되서 따듯해졌어요.
실은 바라는 거죠..누군가는 책임있는 아버지가 좀 되어 이시대의 아버지를
보여줄 순 없는거냐고...무얼 원하는건지
알게 되서 기쁩니다.고맙습니다. 저는 님의
글로 선물을 받은 셈인데..cyrus님껜 딱히
드릴게 없어서 새해엔 그저 원하는 일들의 순탄함을 빌어 드리는 수밖에 없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cyrus 2014-12-30 18:26   좋아요 0 | URL
잡문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인 감상을 선물로 표현한 분은 장소님이 처음입니다. 칭찬보다 건설적 비판을 선호하는 성격이지만 장소님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필사를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에 컴퓨터 글씨체로 된 문장을 읽다가 필사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읽게 됩니다. 이것이 필사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장소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일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

[그장소] 2014-12-30 1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내내 그럴 것이지만 이 첨단을 달리는 기계는 편리함은 주지만 오래도록 기억을 붙잡아주는데엔 영 아닌 것 같아
반편이 같이 저는 손글씨를 쓰고 사진을 찍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소통의 도구임에는 확실하단걸 알겠네요.
비판은 쓰고 칭찬은 달터인데..약이 뭔지..
가려 드시는걸 보니..늘 조심하여 글추렴 해야겠다..싶어집니다.그러나 좋은 선생은
가까이..그렇지요..?
못난 글씨 봐주셔서 감사하고 잠깐의 환기
정도 되었다면..기쁘게 여기겠습니다.
좋은글..자주 부탁 드립니다.많이 배우겠습니다.따듯한 저녁 되세요..(^-^)v

루쉰P 2015-01-1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많은 책을 읽고 계시네요 ㅎ 하정우의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관심이 생겨 책은 어떤 건가 보러 왔는데 ㅋ 이렇게 잘 써주셨네요 ㅎ
대학은 졸업 하셨는지요? ㅎ 아직도 학생이신지 궁금합니다

cyrus 2015-01-18 14:52   좋아요 0 | URL
루쉰님!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저는 작년에 이미 졸업했고요, 취업 준비 중입니다. 루쉰님이 저를 학생으로 기억하시는 모습을 보니 물 흐르듯이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지고, 그 때 그 시간의 기억에 딱 멈춰진 듯한 기분이 듭니다.

루쉰P 2015-01-1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리 말씀하시니 지나간 시간이 그리워 지네요 ㅎ
전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살던 중 ㅎ 아예 모든 것을 접고 노무사가 되기 위해 대학동 고시촌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취업 준비 중 이시라니 여러가지 힘든 것과 싸우고 계시리라 여겨 지네요 전 제가 하고 싶기에 고시 중이지만 분명 원하시는 사회에서 자리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기 고시동네에는 20대의 수많은 청년들이 머물러 있습니다 바늘 구멍같은 합격을 위해 모든 걸 접고 들어와 있어요
어쩔 때는 강의를 듣기 위해 아침 7시부터 눈이 뻘건 채로 줄 서 있는 청년들을 보며 빨갛게 달궈진 쇠들 처럼 자신이 갈려고 하는 바에 대한 집중이 감탄 스럽더군요 ㅎㅎㅎ
남들은 왜 청춘을 고시에 바치냐는 비아냥을 할 수 있어도 뭐랄까 진지하게 시험에 도전하는 이 사람들을 보며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회에서 처절한 저항을 하는 자들 같아 경건해 집니다
저도 많이 느끼게 되구요 ㅎ
아무쪼록 진짜 힘든 취업의 시기 여태 읽으신 인문학적 재능으로 현명하게 뚫고 가시리라 여겨집니다
올 해는 우리의 승리의 한해로 만들어 가시자구요 ㅎ

cyrus 2015-01-18 19:14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우리 힘냅시다. 승자가 되어 서로 웃는 모습으로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실제 일어났던 정략결혼을 배경으로 한 비극의 주인공은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프란체스카는 라벤나의 귀족 귀도 다 폴렌타의 딸이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 말라테스타 가문의 차남 파올로를 연모하면서도 두 가문의 이익을 원하는 어른들의 속임수에 의해 리미니의 귀족 잔초토 말라텐스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잔초토는 불구의 몸(추남인데다가 절름발이)이었고, 그래서 결혼식장에 동생 파올로를 내보냈는데 신부 프란체스카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

 

 

 

 

앵그르 「파올로와 프란체스코」 1819년

 

 

형수와 시동생이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오랜 시간 애써 숨기고 있었다. 키스 장면이 묘사된 책을 우연히 함께 읽다 자석처럼 이끌린 단 한 번의 키스로 사랑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잔초토에게 발각되어 두 사람은 죽음을 당하였다. 그 이후 간음한 죄로 비참하게 살해되어 애욕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 형벌을 받는 지옥의 제2원(신곡 속의 지옥은 9층으로 나뉘어졌는데 각 층은 죄질에 따라 구별된다)의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떠돌게 된다.

 

 

 

 

 

아리 쉐퍼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앞에 나타난 파올로와 프란체스코의 영혼」 1855년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죽음으로 이끌었지요.

(단테 『신곡』 지옥편 5곡, 민음사, 55쪽)

 

 

망령들의 애절한 사연을 들은 단테는 이 지극한 사랑에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끼며 절절하고 비길 데 없는 시구절로 기구한 연인들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문학, 음악, 회화 등의 소재가 되었다.

 

 

 

 

 

오귀스트 로댕 「키스」 1889년경 

 

 

그중에서도 조각가 로댕의 작품 ‘키스’는 긴 시간 지켜만 보던 연인들이 첫 키스를 통해 서로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 순간을, 대담한 움직임과 표현적인 감각을 통해 주변 공간마저 빛이 넘치듯 묘사했다. ‘영혼과 영혼은 연인의 입술 위에서 만난다’는 말을 이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진실이라고 수없이 다짐하는 말보다도 더 많은 마음을 보여주는 감추어진 표정 같은 이 낭만적인 로댕의 작품 ‘키스’는 우리가 지나온 청춘의 신기루 같았던 시간의 흔적 속, 아찔한 현기증 같았던 첫사랑, 첫 키스. 그 기억의 실체화이다.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났다 커지고 괴롭히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 질병처럼 다루기 힘든 열병이었던 첫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때로는 지우지 못할 상흔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돌이켜 보면 청춘은 사랑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 우리는 세상과 부딪히면서 그 강렬한 사랑의 울림들은 잠잠해진다. 프란체스코와 파올로의 사랑이 절절히 마음에 와 닿았던 시절은 가고 사랑의 이야기들은 이제 마치 다른 세상을 엿보는 것처럼 낯설며 영화나 문학이라는 오래된 코드를 통해서만이 말할 수 있는 비실제적인 것이 되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시들하다.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고스란히 빈집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주받은 혼령이 되어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돌고 있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사랑은 슬픔이자 축복이며, 만나려는 갈망과 만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는 로댕의 ‘키스’는 되돌려 받을 수 없다면 훔쳐보기라도 하고 싶은 우리들의 잃어버린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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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박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5
박태원 지음, 천정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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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은 보폭을 가늠하기엔 너무 빠르고,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낯빛들. 어쩌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흘낏 내 눈을 의심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어폰을 귀에 꽂았거나 핸드폰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시의 방관자가 되어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탐색하는 것. 구보가 오늘의 도시를 걷고 있었더라면 관찰자의 시선을 일상의 또 다른 재미로 즐겼을 것이다. 소설가 구보는 아무런 목적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나날을 보낸다. 스물여섯 살인데 장가를 가지 않았으며 가족으로는 어머니와 조카, 형수뿐이다. 구보 씨가 부양해야하는 가족이다. 어머니는 아들이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아들이,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믿지 못하지만 별 타박은 하지 않는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따라 광교를 향하여 걸어간다. 한낮의 거리에서 격렬한 두통을 느낀 구보는 무조건 전차를 탔다가 1년 전 소개받았던 여성을 우연히 본다. 소개받은 후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지내는 자신을 자학하기도 하다, 조선은행 앞에서 내려 장곡천정으로 향한다.

 

다방에 들어가 가배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다 일어서서 골동품 가게를 경영하는 친구를 찾아간다. 친구는 방금 나갔다는 점원의 얘기를 듣는다. 할 수 없이 다시 걷는다. 그러다 금전적으로 출세한 친구를 만나 다방으로 끌려간다. 출세한 친구의 옆에는 예쁜 여자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를 보며 ‘분명 황금과 육체를 바꿨을 것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시 조선은행 앞에까지 간 구보는 친구를 만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논하는 등 담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급한 약속이 있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난 둘은 대창옥에서 식사를 하고, 과거 연애하였던 여성에 관하여 생각한다.

 

다시 친구와 술집에 간 구보는 술집 여종업원을 보면서 상념에 젖는다. 어느 날, 상복을 입은 여성이 ‘여급 대모집’이라고 적힌 광고를 보다가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며 돌아서던 장면이다. 구보는 생각한다. ‘여기 이 여자들과 그 아낙네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새벽 2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차와 술과 여자, 거리의 풍경을 실컷 구경하며 만감이 교차하던 구보는 ‘생활인으로서 좋은 소설을 쓰리라’ 다짐하면서 집으로 향한다.

 

어찌 보면 시시껄렁한 이야기다. 소설 쓰는 청년이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 술 마시고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무슨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싶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몇몇의 낯선 어휘를 제외하면 이 소설의 배경은 오늘이라고 해도 믿겠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가까운 과거의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근대의 풍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근대는 온갖 물질문명의 세례 속에서 마치 축복처럼 다가왔었다. 그러나 근대의 메커니즘이 언제나 밝은 면을 지녔던 것만은 아니다. 합리적이고 잘 구획된 인공적인 공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불행히도 근대인은 철저히 분할된 공간 속에,그리고 꽉 짜인 시간표 속에 종속된 채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었고 결국 불신과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근대의 기획은 분명히 신화와 미신이 지배하는 봉건사회로부터 인류를 한 차원 진보하게 만들었다. 무질서하고 지저분하며 음험한 자연세계를 규칙과 질서를 통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근대 도시로 만들어 낸 것이다.

 

문제는 합리와 효율을 높이고, 보편성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새 각자가 지닌 본래의 고유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비단 인간만이 아니다. 공간이나 시간도 모두 그 고유한 특수성을 잃고 보편적인 단위로 환산되고 만다. 근대의 보편적 기획은 자칫 획일화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고, 그 지점에서 주체와 타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눠 타자를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나'와 차이를 지닌 사람과는 소통하지 않으려는 편견은 결과적으로 현대인들을 소통 부재의 삶으로 내몰리게 한 것이다.

 

모더니즘은 원래 현실을 추상화한다는 개념에서 나왔다.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모더니즘 문학은 인간의 정서를 중시 여기면서 언어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모더니즘은 근대 산업 사회에서의 개인이 느끼는 상실감과 소외감을 드러낸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그 당시의 소설가 구보를 통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방관자적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개인의 소외 문제라는 것이다.

 

구보 씨는 ‘산책자’가 되어 서울의 거리를 걷고 있다. 전차와 재즈, 최신 유행의 모던 걸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하수구 시설이 되지 않아 똥냄새가 넘쳐나고, 골목 안에는 ‘문맹’의 어머니들이 돈 벌고 들어오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아무리 소설을 써도 돈이 되지 않는다. 한 가족을 벌어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원고료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신문사로, 총독부 청사로 구직활동을 벌여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무조건 거리로 나서 보는 것이다.

 

허나 어쩌란 말인가. 돈이 있어야 장가를 가고, 멋있는 여자를 들일 텐데. 이게 소설가 구보 씨의 한탄 섞인 독백이었다. ‘하지만 예쁜 여자는 못 얻어도 좋다. 생활인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리라’는 다짐을 잊지 않는다. 그에게 막장드라마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막장드라마는 자본 앞에 자존심을 던져버린 마스터베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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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쿵’ 하고 운석이 떨어진다. 직경 70m에 이르는 거대한 운석을 인간은 “우주의 배설물”이라고 했다. 큰 운석에서 나오는 지독한 냄새 때문이었다. 이것을 옮기거나 파괴하는 게 불가능하자 사람들은 콘크리트와 시멘트, 석고를 차례로 덮고 마침내 유리를 씌운다. 운석은 너무나 예쁜 축구공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예쁘게 만들어졌던 큰 운석이 갑자기 없어졌다. 외계인이 가져간 것이다. 그리고는 그 예쁜 것을 다른 외계인 손님에게 팔았다. 그리고는 이 외계인은 같은 방법으로 지구의 다른 곳에도 운석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인간들은 또 그 큰 운석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려고 같은 방법으로 예쁜 유리막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외계인들은 하나의 거대한 진주를 탄생시킨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집 『나무』에 수록된 단편 ‘냄새’의 내용이다.

 

데뷔작 『개미』에서 베르베르는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발밑에도 독립된 우주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인간의 손길은 이들에게 불가사의한, 또는 전지전능한 것으로 비쳤다. 한편 『나무』에서는 ‘개미’적 상상력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인간세계는 사람보다 더 우월한 존재의 관찰이나 놀림감이 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세계 밖으로 나온’ 작가는 그것이 어느 정도 ‘아이의 시선’ 과도 같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보았기에, 인간의 세계는 오히려 인류 문명의 미숙성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낯선 눈으로 본 우리 종(種)은 확실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다.

 

만약에 베르베르의 단편 ‘냄새’처럼 외계인이 별 부스러기를 찾으려는 지구인, 아니 한국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 튼튼한 유리막 안에 보관된 별 부스러기를 몰래 가져가거나 혹은 UFO를 타고 지구로 내려와 찾으러 올 수도 있는 상상도 해본다.

 

 

 

 

 

 

 

 

 

 

 

 

 

 

 

 

프랑스 작가이자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가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했을 때 "티끌 한 점 없는 보자기처럼 펼쳐진 사막" 위에 뿌려진 새까만 조약돌을 발견했다. 그는 『인간의 대지』에서 "사과나무 아래 보자기를 펴놓으면 사과가 떨어진다. 별 밑에 펴놓은 보자기에는 별 부스러기들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운석도 이만큼 확실하게 자기 출신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당시의 인상을 전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들은 지상의 돌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지구상의 암석보다 철 함유량이 높고 단단하며 뜨거운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표면이 녹아 떨어진 후 만들어진 검은 막(융용각)이 있으며, 대개 자석에 들러붙는다.

 

 

 

 

 

 

 

 

 

 

 

 

 

 

 

 

사실 운석이 지구인들한테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운석의 실체를 몰랐던 과거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신(神)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205년의 일이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로마 공화국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그때 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렸다. 로마 원로들은 신탁을 구했고, 그 결과 '어머니 돌'을 로마로 옮겨오면 한니발을 무찌를 수 있다는 예언이 나왔다. 그 돌은 당연히 운석이었다. 로마군은 돌을 옮긴 뒤 카르타고로 진격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 돌은 이후 500년 동안 로마에 모셔졌다."(『하늘의 불』 31쪽)

 

한니발이 로마를 침공할 때 퍼붓던 유성우는 로마가 카르타고를 막는 '어머니돌'로 사용했다. 1976년 중국 지린성에 전체 잔해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그중 한 개는 무게가 무려 1천800㎏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마오쩌둥이 하늘의 신임을 잃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운석 사냥꾼은 20g도 채 넘지 않은 부스러기라도 찾기 위해서 자석을 동원한다. 자석이 없다면 별 부스러기인지 그냥 돌 부스러기인지 눈으로 판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리고 운석 사냥꾼이 아닌 이상 이 별 부스러기의 경제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소속 과학자인 장 피에르 뤼미네의 경험담처럼 아무리 우주에서 온 돌이라고 해도 지구에 있는 다이아몬드 보석과 비교 당하고 무시받기도 한다.

 

"13g짜리 아옌데 구립운석 조각을 구입해 여자친구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그는 진주나 다이아몬드 같은 지구 보석을 더 원하는 듯했다. 얼마 뒤 그 운석을 돌려받았다. 여자친구는 아옌데 운석이 지구보다 훨씬 더 오래된 우주의 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하늘의 불』 73쪽)

 

천문학자다운 선물이다. 별 부스러기 하나 찾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여자친구에 선물로 주다니. 정말 특별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천문학자 남자친구가 준 운석 조각이 다이아몬드만큼 값비싼 가격으로 매겨질 수 있는 선물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한 번도 쓰지 않은 로또를 거절한 셈이다. 그걸 받았더라면 다이아몬드 몇 개는 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운석의 가치에 따라서 가격은 천차만별로 매겨지겠지만, 참고로 작년 초 러시아에 떨어진 운석우에서 나온 작은 운석 조각의 가격이 한화로 1천만원이다. 이번에 운석의 경제적 가치가 매스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운석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최고 일등 신랑감 순위 1위로 단숨에 급부상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에 진주에 발견된 운석 소식 이후로 해외 운석 사냥꾼부터 시작해서 운석의 가치를 알고 몰려드는 일명 초짜 운석 사냥꾼들까지 가세해 별 부스러기를 찾는데 혈안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 황금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 ‘골드러쉬’가 있다면 지금은 ‘운석러쉬’ 열풍이다.

 

그러나 탐사객들이 자주 오게 되면 그 곳에 사는 주민들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조용했던 시골 동네에서 운석 하나 때문에 외지인들이 몰려오면 거주민의 본업인 농사일이나 치안에 좋지 않은 민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석에 눈이 먼 사람들도 문제지만, 운석 소식 이후로 우주의 돌이 한순간에 ‘로또’, '보물'로 돈이 되는 물건으로 소개하는 언론도 ‘운석러쉬’ 열풍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만약에 베르베르의 단편처럼 운석에 고약한 냄새가 났더라면 지금의 ‘운석러쉬’가 있었을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돈이 될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손에 넣고 싶어 하는 탐욕을 가진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니까. 냄새를 막는 유리막에 담긴 운석 조각을 진주처럼 여기는 외계인처럼 지금도 진주에는 운석 사냥꾼들은 ‘돌이 아니라 돈’ 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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