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명상에 관련된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가 있었다. 1990년대 국내 출판계에 크리슈나무르티, 칼릴 지브란 등의 책과 함께 많은 작품이 번역 소개되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1995~2000년)에 교실 학급문고 책장에 꼭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과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꽂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때만해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칼릴 지브란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크게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래도 지브란의 <예언자>는 분량이 얇아서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초딩이 심오한 명상의 세계를 제대로 알 리가 있나. 처음에는 지브란의 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긴 내용의 시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향하는 일종의 주문서 같은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문장은 무척 난해하게 느껴졌다.
지브란, 크리슈나무르티 이외에도 국내에 한창 이름을 알리고 있었던 명상철학자 한 명이 또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쇼 라즈니쉬다. 라즈니쉬는 1931년 인도의 자이나교 집안에서 태어나 22세 때 어느 날 공원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철학을 전공했다. 자발푸르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1964년에는 명상캠프를 열어 동서고금의 종교경전 등에 대해 설법했다. 그는 1990년 1월 ‘바다와 같이 무한하다’는 뜻을 지닌 오쇼라는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2백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라즈니쉬가 작고한지 일 년이 지난 이듬해 출판사마다 다투어 라즈니쉬의 명상서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라즈니쉬의 대표작으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우화모음집 <배꼽>(박상준 역, 장원, 1991년 중판)은 발간 4개월 만에 20쇄 50만부를 찍고, 교보문고 및 각종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배꼽>을 낸 출판사 입장에서는 라즈니쉬 열풍 덕분에 대박을 쳤다는 점이다. 장원출판사는 1988년 11월 24에 정식으로 법인 등록되었다. <배꼽>은 1990년 연말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문을 연지 2년 밖에 안 된 신진출판사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이 집계한 1991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당시 우리나라 독자 성향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1991년에 가장 잘 팔린 책들은 공통적으로 인도 명상철학가의 우화집, 사랑을 주제로 한 소녀취향의 시집과 수필집이었는데 그 중에서 라즈니쉬의 <배꼽>은 종교 분야가 아닌 수필/비소설 분야에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비소설 분야뿐만 아니라 <배꼽>은 1991년 올해의 최고 인기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출판사측 말에 의하면 1991년 11월까지 1백27만부를 팔았다고 한다.
라즈니쉬의 <배꼽>이 대박 난 이후에도 국내 출판사들은 앞 다투어 라즈니쉬의 글 모음집이나 저서를 출판했지만 역자와 출판사가 임의대로 편집한 책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한 라즈니쉬의 수십 권의 책들 중에 라즈니쉬가 직접 쓰고 출판한 공식적인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번역한 책이 있을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장원의 <배꼽> 같은 경우에도 ‘배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Tao: The Pathless Path>(전 2권)과 <Sufis: The People of the Path>(전 2권) 외에 10여 권의 텍스트에서 역자가 우화들을 골라서 한 권의 우화 모음집으로 만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장원 이외에도 타 출판사에서도 제목 그대로 따온 유사도서가 출간되거나 심지어 ‘배꼽’ 인기를 반영한 듯 <배꼽 2><배꼽 3> 같은 후속편도 나왔다. 이러한 출판사들의 과잉 출판은 ‘표절도서’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부 서점은 독자를 현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배꼽> 유사도서를 판매 중단하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구한 두 권짜리 <배꼽>은 같은 역자에, 같은 출판사에서 낸 것이 아니다. 1권은 ‘장원’에서, 2권은 ‘카나리아’라는 출판사에서 낸 것이다. 책 표지가 서로 비슷해서 같은 출판사에서 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나도 처음에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모르고 있었다가 뒤늦게야 출판사가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책 다 책 앞, 뒤표지가 너무 유사하다. 아무래도 먼저 나온 장원의 <배꼽> 제목과 표지를 카나리아 출판사가 그대로 따온 듯하다.
카나리아 출판사 말고도 <배꼽> 또는 <배꼽> 시리즈를 낸 출판사가 더 있을 것이다. 아니면 <배꼽>에 수록된 우화 일부 내용은 다른 제목과 표지로 바꿔서 출간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저자명이 라즈니쉬로 표기된 책들이 간간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적지 않은 책들을 일일이 찾아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확인하기 어려운 더 큰 이유가 그렇게도 많이 내던 라즈니쉬의 책들 절반은 이미 절판되었다는 사실이다. 20여 년 전 베스트셀러 종합 1위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지날수록 대중의 기억에 잊히는 법이다. 1991년 가장 많이 팔린 장원의 <배꼽>은 헌책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책이 되었고, 한 권의 책 덕분에 잘 나가던 출판사는 1997년 이후로 책을 내지 않았다. 장원 출판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름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지만, 출판사소식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장원 출판사가 1997년까지 낸 책들이 현재 절판인데다가 그 이후로 책이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IMF 외환위기로 부도가 났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1991년 라즈니쉬 열풍은 짧고 간결하면서도 교훈을 주는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인 공허감을 극복하려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명상이나 신비주의 철학을 고집하는 독서가 무조건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자칫 현실 문제를 외면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짧은 이야기로 구성된 우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방대하고 심오한 명상철학의 본질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 간단하고 보기 쉬운 이야기만 선호하는 독서는 가볍고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