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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Scene #1 나는 오늘을 위해 피를 팔면서 산다
피는 생명의 증거이자 죽음을 부르는 신호다. 피가 매매의 대상일 때 삶은 잔인하고 비루해진다. 피를 파는 것은 목숨을 파는 것이며 자신을 파는 것이다.
매혈(賣血)은 헌혈과 다르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피를 뽑는 것이다. 매혈을 통해 번 돈으로 재산을 축적하겠는가. 최악의 생존 조건에 내몰린 사람이 선택한 마지막 연명 수단일 뿐이다.
허삼관은, 그래서 슬프다. 그가 피를 팔고자 했을 때는 늘 가족이 우선이었다. 자신을 위해 피를 팔아본 적이 없다. 동네 미녀 허옥란과 결혼하기 위해, 첫아들 일락이가 자기 핏줄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의 사고 처리를 위해, 가뭄 때문에 온 가족이 굶주릴 때, 문화대혁명으로 농촌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손에 돈을 쥐어주기 위해, 갑작스런 병으로 신음하는 일락이를 살리기 위해, 허삼관은 기꺼이 자신의 피를 판다. 중국에서 한번의 헌혈에 뽑는 피의 양은 4백밀리, 우리의 헌혈량과 같다. 그에게 피란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자 돈줄이며 배를 곯는 가족들에게 국수를 먹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가족들 앞에서 가장의 능력과 권위를 한껏 뽐내기 위한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병원에 피를 파는 허삼관은 나름대로 몇 가지 규칙을 가지고 있다. 피를 팔러가는 길 내내 오줌보가 터질 만큼 물을 마신다. 그래야 피가 묽어져 그 양이 곱절로 늘어날 것이란다. 피를 판 후에는 꼭 볶은 돼지 간 한 접시와 황주 두 냥을 챙겨 먹는다. 빠져나간 피를 보충하는 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피를 팔며 연명하지만 허삼관의 삶이 고단하거나 비루하지는 않다. 큰 아들 일락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남의 집 아들을 9년 동안이나 키웠다며 동네 사람들이 ‘자라 대가리’라고 비웃었을 때도, 피 판 돈으로 아들의 상사에게 술을 따르고 담배를 권해야했을 때도 그는 당당하다. 일락이의 간염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사흘 단위로 피를 뽑을 때에도 행복하다. 피라도 팔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피를 뽑아도 괜찮은 자신의 건강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Scene #2 매혈의 웃음 뒤에 감춘 아버지의 눈물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맨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냐. 널 11년이나 키워 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는 안 되는 것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1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비인데 말이야.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세에는 내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할란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내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 테니….” 일락이 눈에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아주 조심스럽게 허삼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187쪽)
집 나간 의붓자식 일락이를 찾은 허삼관이 아이를 등에 업고 걸어가며 퍼부어대는 욕에 자신의 처지가 다 들어 있다. 허삼관은 의붓자식 일락이를 차마 어쩌지 못한다. 미울 때는 욕을 퍼붓다가도 애써 친자식들과 웃을 때 닮았다며 자위한다. 허삼관은 늘 피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라 가족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 음식을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일락이만 빼고 국수를 먹으러 가기도 한다. 일락이도 국수가 먹고 싶다. 그래서 친부를 찾아가 보지만 어림도 없다. 결국 허삼관이 그를 다시 품는다. 아이는 국수 먹으러 가는 거냐고 천진하게 묻는다. 아비는 ‘그래’라고 짧게 답한다. 짤막한 아비의 대답에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소설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독자들의 슬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이다. 홍수로 흉년이 들었을 때 자린고비를 능가하는 기지로 배고픔을 견디는 것이나, 문화대혁명이라는 혹독한 시간에 비판의 대상에 오른 아내의 자기비판회를 여는 모습은 역사와 한 개인의 삶과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허옥란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장면과 소문이 진실이 되고 마는 혁명기의 인간 군상이 허허롭다.
허삼관의 피는 건강한 민중성이며 친근한 가부장성을 상징한다. 평생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던 그가 육십을 넘긴 인생의 황혼 길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오직 볶은 돼지 간과 황주를 먹고 싶어서 피를 팔고자 한다.
모두가 안정적인 삶의 자세를 잡아가는 어느 날 환갑이 다된 허삼관은 갑자기 피를 판 후에 먹는 고기와 술이 먹고 싶어서 피를 파는 병원에 간다. 하지만 피를 팔 수 있는 이를 고르는 혈두는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를 팔 수 없다고 우긴다. 평생 가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피를 팔다가 오직 자신의 욕구에 따른 의지로 피를 팔려 했을 때, 그것이 안 된다고 했을 때의 허무감.
하지만 늙은 피는 가구 칠에나 쓰일 뿐이라며 병원에서 쫓겨났을 때 그의 곁에는 아내 허옥란이 있었다. 쓸쓸해진 남편에게 돼지 간과 황주를 먹이기 위해 승리반점으로 데려가는 아내의 모습에,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진한 페이소스가 배어있다. 늘 그렇듯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가정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일생을 살아온 남자, 어려웠던 시절에 자신을 희생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던 우리의 아버지들, 집안에 닥쳐온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내다 팔고 허름한 장터 구석에서 돼지국밥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진다.
Scene #3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

마크 퀸 「Self」 2001년
‘매혈’하면 허삼관 말고도 생각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지금도 활동 중인 영국 출신 컨템포러리 예술가 마크 퀸.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만든 그의 작품 중에 ‘Self’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미술 역사사상 가장 엽기적이다.
‘Self'는 5년마다 한 번씩 마크 퀸 자신의 혈액 4ℓ를 채혈해 만든 시뻘건 ‘피 두상’이다. 자신의 피로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을 만든 것이다. 일단 대부분 사람들은 마크 퀸의 피로 만든 두상을 끔찍하게 여긴다. 무엇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은 두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4ℓ의 혈액은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는 전체 피의 양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Self'는 일회적인 작품이 아니다. 놀랍게도 연작작품이다. 1991년 첫 작품을 제작한 후, 조금씩 자신의 피를 뽑아 모았다가 5년마다 한 개씩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마크 퀸의 작품은 간신히 혐오감을 누르고 보면 ‘인간 존재의 찰라성과 허무함’을 ‘핏속’까지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냉동장치를 통해 적절한 온도를 맞추어 주지 않으면 변색이 되거나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퀸은 왜 굳이 자신의 피를 뽑아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일까.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정기적으로 채혈 작품을 만들어도 퀸은 생명에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허삼관처럼 퀸에게 피는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인 것이다.
“설령 목숨을 파는 거라 해도 전 피를 팔아야 합니다.” (291쪽)
‘피’는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매혈은 목숨의 일부를 파는 일이다. 허삼관의 인생여정이 가장의 삶을 넘어 이타적 인간의 삶으로 비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삼관의 매혈 인생은 자신이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매혈은 ‘자라 대가리’라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무식하고 어리석은 방법일 수 있으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뜨겁고도 진한 생명력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