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 열화당미술문고 210
김진송 / 열화당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 '이O대'라는 글자로만 남은 화가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1949년

 

 

혹시 이쾌대라는 이름의 화가를 아는가. 올해가 이쾌대 탄생 100주년이다. 이쾌대는 이인성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월북작가’로 낙인찍혀 이름 없는 화가로 남아 있었다. ‘쾌’(快) 자가 빠진 채 ‘이O대’로만 알려졌다. 1991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문 대작, 그리고 근대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군상으로 당시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인 대구,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올해 문화계 계획에도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지역 출신의 또 다른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이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에서 이를 기념한 전시, 학술대회를 대대적으로 연 것에 비하면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아본다면 지난 달 27일에 대구미술관에서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끝이다. 하지만 대구시 그리고 시민들은 화가 이쾌대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 타 시도들이 저마다 연관 있는 예술가들을 문화 브랜드로 발굴하고, 스토리텔링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다. 한마디로 대구의 작가를 스타로 만드는 붐 조성에 실패한 것이다.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어느 미술 관계자는 “수창초교를 함께 다닌 이인성, 이쾌대를 잘 엮으면 대구의 훌륭한 브랜드가 될 텐데 아쉽다”고 했다.

 

 

 

 ♣ 혼돈의 시대에 낀 천재 화가

 

이쾌대는 1913년 1월 16일 칠곡군 지천면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 군수를 지냈던 인물로, 일찍이 신식문물을 받아들였다. 이쾌대는 1928년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담임선생으로 화가 장발을 만나면서 미술을 권유받았다. 당시 장발은 “이쾌대만큼 데생력이 뛰어난 학생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함께 서울 생활을 했던 12세 위의 형 이여성은 당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진보적 지식인으로, 미술에 남달리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사회주의 관련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려다 체포돼 3년간 복역하기도 했고 언론과 미술 분야에 몸담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이쾌대와 그의 아내 유갑봉 여사

 

 

 

이쾌대는 1932년 한동네에 살던 유갑봉과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특히 아내를 모델로 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아내 유갑봉은 그가 북으로 간 후 소중하게 그림을 보관해왔다. 유갑봉은 포목점을 하면서 네 자녀를 키웠고,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회의 반공 분위기 아래서 그림들을 벽장 속에 감춰두고 지켜왔다. 물론 물질적 유혹도 잘 이겨냈다. 이런 유갑봉 여사 덕분에 오늘날 이쾌대의 작품을 고스란히 우리가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쾌대는 1934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는데, 특히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활동을 하던 이쾌대는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모든 미술 단체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하고 있었으나 이쾌대가 중심이 된 신미술가협회는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치열하게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던 이쾌대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8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고 미술학도들을 가르쳤다.

 

해방 후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사회는 그와 상관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그의 형 이여성은 근로인민당 대표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월북했고, 그때 남한은 정부수립 이후 좌익 소탕에 나서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949년 초 이승만 정부는 이쾌대를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미술가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반공 포스터전에 참가시켜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6.25전쟁은 다시 이쾌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미처 피란하지 못했던 이쾌대는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다시 정치적 전향을 강요받았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 때문에 자수를 강요당하고 조선미술동맹에 재가입해야 했던 것. 이들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을 그려야 했다. 얼마 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다시 유엔군의 수중에 들어갈 무렵, 이들은 다시 혹독한 정치 보복이 닥쳐올 것을 직감했다. 미술동맹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북으로 갔다. 저자 김진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 다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보기에는 역사의 격량이 너무 거세었다.

 

서울이 탈환되기 일주일 전 이쾌대는 서울을 빠져나왔고, 국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수용소에 수감됐고, 그 이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좌익으로 몰렸다는 사실과 1953년 휴전이 되자 북을 선택해 갔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으로 올라간 이쾌대의 소식은 몇몇 자료에 등장하지만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987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몇 몇 연구가들은 지금도 북한에 남아 있는 이쾌대의 흔적을 발굴하가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인데다 북한 미술계에서도 이쾌대에 관한 언급을 쉬쉬하는 편이다. 그야말로 남북 양쪽에서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지 않은 독특함, 이쾌대만의 독창성

 

 

 

 

 

이쾌대 「무희의 휴식」1938년

 

 

이쾌대의 작품은 대개 인물풍속화다. 후기로 갈수록 당대 현실 속의 인물 즉 특정 상황 속의 인물을 묘사했지만 등단 초기만 해도 전통 속의 인물을 선호했다.「무희의 휴식」은 화사하기 그지없는 전통 복장의 젊은 무희의 좌상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에만 한정 짓는 제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일보한 표현방식을 위해 실험했다.

 

 

 

 

 

이쾌대  「운명」 1938년

 

 

애매한 상황 속의 인물의 배치는 점차적으로 뚜렷한 시공간을 알리면서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내든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30년대의 야심작으로 「운명」과 「상황」을 꼽게 한다. 「운명」은 좁은 방안에 누워 있는 남성 주위로 슬픔에 젖어 있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품 「운명」은 구체적 사건이나 장소 혹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화면에 나타난 사항만 가지고 볼 때, 가장과 같은 남성의 절망적 순간과 이를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특정 상황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비극의 현장, 하지만 작품 속에는 그 구체성을 알리지 않고 있다.

 

 

 

 

이쾌대  「상황」 1938년

 

 

 

다만 제작년도인 1938년은 한 해 앞서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시기라는 점이다. 「상황」은 「운명」보다 적극적인 스토리텔링의 경우에 속하는 작품이다. 여타의 작품과 달리 서사적 구도는 무엇인가 엄청난 격동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무희가 춤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슬픔을 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은 상반신이 벗겨져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방바닥에는 깨진 그릇 파편이 뒹굴고 있어 뭔가 격렬한 상황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상황, 분명히 어떤 구체적 사건을 도해화한 것 같으나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이색 형식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난해한 그림 중 하나일 것이다.

 

 

 

 

 

이쾌대  「2인 초상」 1939년

 

 

다만 「상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화면 중앙의 젊은 여성이다. 그의 자세는 춤추는 모습으로 ‘특정 상황’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식 전통복장, 암흑기 일제시대에 이러한 옷차림의 당당한 제시는 작가 의식의 단면을 확인하게 한다. 이쾌대는 화필을 들고 자신이 화가임을 천명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같은 자화상도 더러 그렸지만 인상적인 작품은 「2인 초상」이다. 이 작품은 부부초상으로 부인을 전면으로 내세워 강건한 존재로 부각시킨 반면 화가 자신은 부인 뒤에서 하나의 실루엣으로 약화돼 있다. 부인의 그림자, 이색적인 부부초상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페미니즘 측면에서 부상시킬 수 있다. 여성 강조의 부부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부초상 작품도 사례가 없어 의미부여를 각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쾌대 최고의 대작, '군상' 시리즈

 

 

 

 

 

이쾌대  「군상 Ⅳ」 1948년

 

 

이쾌대의 그림은 잔잔한 감동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압도하는 벅찬 감동은 강렬하다. 예컨대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펙터클한 ‘군상’ 시리즈(‘군상-1 해방고지’, ‘군상 Ⅱ’, ‘군상 Ⅲ’, ‘군상 Ⅳ’)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35명의 남녀가 나체로 한 덩어리가 된 ‘군상 Ⅳ’는 광복의 기쁨과 건국의 열기로 달아오른 격동기를 조형한 절창이다.

 

무엇보다도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질의 인물들이 압권이다. 웅장하다. 그런데 이들은 비현실적인 관념 속의 인물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각 인물들의 포즈가 작위적이란 점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처럼 포즈가 과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의 작위적인 포즈가, 칼레를 구하기 위해 나선 시민들의 결연한 비장미를 극대화 해주듯이, ‘군상 Ⅳ’의 포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해방공간의 낙관적인 전망과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비탄에 잠겼다가 서서히 일어서는 인간군상은 마치 빛을 향해 자라는 ‘향일성 식물’ 같다. 이 식물의 ‘머리’는 그림의 왼쪽에 놓여 있는 셈인데, 이 지점에 선 인물들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이는 좌절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희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구성이 독특하다. 보편적인 시선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보통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그런데 ‘군상Ⅳ’는 이와 반대다. 인물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불편을 감수하며 그림을 ‘읽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그림의 무게중심은 왼쪽에 있다.

 

김진송은 이런 동세를 좌절에서 희망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혼란에서 안정으로 향해 가는 과정으로 읽었다.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가 해방 후의 혼란한 현실을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 가능하다는 의지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만약에 이런 동세를 고려하지 않고 보면 어떻게 될까? 감상이 불편해진다. 일반적인 시선의 방향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힘겹다. 인물들의 시선과 마주치며 오른쪽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보면 물살의 흐름을 타듯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서양화에 전통적인 조형방식을 접목한 것이다.

 

 

 

 ♣ 분단 대립의 희생양, 이쾌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쾌대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며 “서구적인 지성과 동양적인 감성을 융화”(김용준)시킨 역동적인 작품세계를 일궈갔다. 그 중에서도 ‘군상 Ⅳ’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해방공간에서 발견한 우리 민족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조형적 사상’이다. 서로 뒤엉킨 인물들의 역동적인 포즈와 풍부한 표정은 가슴 벅찬 ‘볼거리’를 제공하며,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았던 해방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인 문맥에서 이탈하여, 작품 자체만 감상해도 심심하지는 않다. 그만큼 볼거리가 쏠쏠하다. 이러한 훌륭한 대작을 대구 시민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지 못했고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남한에서는 월북화가라 해서 금기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파가 아니라서 역시 금기인물이었던 이쾌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20세기 전반부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술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은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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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분야에서 이런 이유로 잊혀져버린 이름들이 제법 있을 것 같아요.
남에서는 월북했다고, 북에서는 숙청당했다고 양쪽 모두에서 금기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요.

문외한이지만, 딱 보기에도 그림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특히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참 독특한 느낌이네요.
덕분에 좋은 그림 잘 보았습니다.

cyrus 2013-08-02 00:0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은빛님이 선물한 <현대사 아리랑>이 생각났어요. 최근에 납북 문학가들이 재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지만 여전히 남북한 양쪽에서 외면받거나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이쾌대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독창적인 재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외면받았죠.
 
기생충 제국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칼 짐머 지음, 이석인 옮김 / 궁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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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곁에 있는 기생충

 

그리스에서 기생(parasitos)이란 단어는 '음식의 곁'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단어를 처음엔 사원의 제사를 돕는 제관'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나중에는 귀족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자잘한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식객'을 부를 때도 썼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은 생물학적인 기생 현상을 알고 있었다. 돼지의 혓바닥에 살면서 우박처럼 딱딱한 포낭을 만드는 생명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사전적 의미의 기생충은 다른 동물(숙주)의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이다. 그래서 일하지 않고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을 '인간 기생충'이라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 학교에서 단체로 회충약을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을 TV 영상으로만 본 나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기생충은 작년에 영화로 개봉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 ‘연가시’일 것이다. 물론 영화처럼 사람 잡는 변종 연가시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지만 기생충은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굳이 숫자로 따져보자면, 14억 명 이상이 장 속에 뱀처럼 생긴 회충을 지니고 있고, 13억 명 정도가 피를 빠는 구충을, 그리고 10억 명이 편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출간한 서민 교수의 <서민의 기생충 열전> 덕분에 다시 한 번 기생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작년에 영화 때문에 기생충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부터 비롯된 호기심의 시작으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다르다. 기생충의 생태 과정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반응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생충이 대중 과학의 관심 대상으로 등장하고 부각받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다. 그 때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예비 수험생이었다. 마침 나온 기생충 관련 책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이언스’ 등에 기고하는 과학 칼럼니스트인 칼 짐머가 쓴 <기생충 제국>이었다. 당시 이 책을 완독하지는 못했는데 마침 서민 교수가 쓴 책을 읽어보기 전에 잠시 세월의 흐름 속에 잊고 있었던 짐머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 은밀하게 신비하게, 기생충이 살아가는 법

 

책 표지는 확대한 기생충의 얼굴 사진이 박혀 있다. 표지와 어울리는 부제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떡 하니 자신을 바라보는듯한 기생충의 모습에 이 책을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은 독자가 있을 거라 본다. 곤충 사진을 싫어하거나 일종의 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을 둘러싼 ‘미지의 세계’는 위험하다기보다 오히려 신비하고 경이롭다. 괴기스러운 생김새와 달리 그들은 섬세하다. 기생충은 숙주의 생식능력을 없애기도 하고, 정신세계를 조절할 수도 있다. 2~3㎝짜리 흡충은 우리의 복잡한 면역계를 조롱하여 자신을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최종 숙주를 위해 중간 숙주를 조종하는 것은 기본이다. 촌충에 감염된 물고기는 두려움이 없어져 수면 가까이 올라가 물새에게 ‘날 잡 수슈’하고 다닌다. 물론 촌충의 목적은 물새다. 기생충에게 몸을 빌려준 송사리는 멀쩡한 송사리에 비해 새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30배나 높다. 물새가 ‘병든 송사리’를 선호하도록 하는데도 어떤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가지고 있다는 톡소포자충은 가장 성공한 기생충이다. 임산부나 에이즈환자가 아니라면, 대개 해롭지 않다. 이 유능한 기생충은 원래 고양이가 최종 숙주인데 쥐의 몸 안에서 뇌를 조작, 쥐를 고양이 쫓는 ‘자살특공대’로 만든다. 심리학자들은 톡소포자충으로 인해 인간 숙주의 인격도 바뀌는 것으로 본단다. 남자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지키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여자는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고 인정이 넘친다는 거다. 하기야 촌충의 경우, 4억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동안 지구는 공룡의 소멸 등 4차례의 대량멸종을 겪었지만 촌충은 살아남았다. 바퀴벌레의 영원한 동지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 ‘생태계의 파수꾼’ 기생충

 

칼 짐머의 주장은 기생충이 생명의 진화에 '절대적 기여'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태계의 엑스트라 기생충에게 ‘생태계의 파수꾼’이라는 새 역할을 부여한다. 기생충이 숙주와 경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숙주와 기생충 모두 진화한다는 것. 그 사이 먹이 사슬은 정교해지고 지구 생태계는 탄력을 유지한다.

 

따지고 보면 둘의 관계가 빼앗기고 착취하는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상생과 보완의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몇몇 기생충은 숙주의 면역체계를 보호한다.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의 세차원들은 주혈흡충증에 자주 감염되는데 흡충은 흡충과 에이즈에 동시에 감염된 사람들보다 흡충에만 감염된 깨끗한 숙주에 더 많이 알을 낳는 것으로 조사됐다. 숙주가 면역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흡충이 나서 도와야 하는 이유다. 한번 주혈흡충에 감염된 사람은 새로 흡충에 감염되기 어렵다는 연구도 있다. 선배 흡충이 숙주의 면역계를 도와 나중에 도착하는 흡충을 공격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숙주 내 흡충의 숫자를 조절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만 생존에 유리한 한도 내에서이긴 하지만 기생충은 다양한 방식으로 숙주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 기생충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

 

징그러워 얌체 같아서 외면해오던 기생충. 하지만 태양과 물만으로 자생하는 식물이 아닌 다음에야 지구 위 어느 생물이 기생충의 혐의를 벗을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기생충인지 모른다. 저자는 인간이야말로 지구라는 숙주에 붙어사는 고등 기생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맞춰 생명체의 생리를 전혀 새롭게 바꿨고,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스스로 파멸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자제할 줄 모르는 기생충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자신의 숙주마저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만다'는 기생충 사회의 평범한 진리를 인간은 곧잘 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기생충보다 나은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인간이 제대로 된 기생충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훌륭한 선배들에게 한참 더 배워야 한다.

 

그는 “우리가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한다. “인류는 처음부터 기생충이었지만 지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명체로 자리해 모든 변화를 이끌 역량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먹이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앉은 기생충을 아는 건 그래서 지구를 알고 우리를 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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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살 예고가 현실로

 

에펠탑,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세계를 대표하는 명소 세 곳의 공통점은? 명소를 보려고 하는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자살자들도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에펠탑이다. 에펠탑은 ‘자살자의 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339번째 자살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사복을 입은 순찰대원이 증원되고 높은 난간이 설치됐다고 한다.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는 1937년 건설된 이래 자살자가 500명을 넘어서자 다리 주변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고 경찰이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양되지 못한 시신들을 감안하면 실제 자살자수는 2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OECD 가입 국가 중에서 자살자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 한강에 뛰어내리는 자살자수가 많다. 경찰이 순찰을 강화했다고 하지만 심심찮게 투신 소식이나 자살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가 서울 마포대교에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성재기 대표는 하루 전날 자신이 대표로 있는 남성연대 운영 자금을 모으겠다며 “한강 24개 다리 중 경찰, 소방관 분들에게 폐 끼치지 않을 다리를 선택해서 기습적으로 투신하겠다"고 예고했다. 성 대표가 투신 장소로 택한 다리는 마포대교. ‘자살 다리’라는 오명이 붙어 있는 곳이다. 그는 오후에 자신의 트위터에 “정말 부끄러운 짓입니다. 죄송합니다. 평생 반성하겠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올렸다.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성 대표의 모습이 있는 사진이었다. 전날 트위터에 예고한대로 한강에 뛰어내리고 만 것이다.

 

‘남성연대’가 뭐길래 성 대표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남성 인권 향상을 위해 2008년에 발족되었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한다. 병역의무, 부양의무, 생물학적 성 관점에서 여성을 보호하고 배려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대한민국 남성들이 온전히 짊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남성연대는 정부의 보조금 없이 회원들 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성 대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운영하고 있는 단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 한 몸을 바치는 자살을 예고한 것이다.

 

전날 성 대표의 자실예고가 SNS상에서 확산되자 누리꾼들은 '노이즈 마케팅'을 노리는 꼼수라며 비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대해 성 대표는 남성연대의 열악한 재정 사정은 물론 한국 남성 인권의 현주소를 고발하기 위해 투신하는 것이라며 ‘자살 소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대한민국 남성을 대표하는 미시마 유키오가 되고 싶었던 성재기

 

성 대표가 정말로 자살할 생각으로 뛰어들었는지 아니면 자살 소동을 염두하고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으나 정말 의도치 않게 실현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후자일거라 생각한다. 성 대표의 한강 투신 이후 남성연대가 불고기 파티를 예정했던 걸로 봐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한 퍼포먼스의 일환일 가능성이 있다. 현재 마포대교 주위에 경찰과 소방당국이 헬기까지 동원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란다.

 

 

 

 

 

 

 

 

 

 

 

 

 

 

 

 

 

 

성 대표가 남성연대 회생과 여성 인권에 억눌리고 있다는 남성 인권의 부활을 위해서 남성연대 대표, 아니 대한민국 남성의 대표로써 정말 한강에 뛰어내렸다면 그의 의도와 선택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의 최후는 흡사 일본의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를 보는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1925~1970)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문학계에서도 독특한 작가다. 그는 애국심과 군국주의에 매혹돼 전후의 일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서구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일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전통 무술인 가라테와 검도를 연마하고, 천황제를 수호하겠다며 사병대를 만들기도 했다. 1970년 11월, 도쿄 육상자위대 동부총감 사령관실 본부를 점거하고 평화헌법 반대와 천황제로의 회귀를 외쳤다. 한물 간 군국주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안 미시마는 사무라이 같은 죽음을 택했다. 할복자살이었다. 미시마의 할복사건은 전후 일본 사회의 저변에 가라앉아 있던 군국주의의 촉수를 건드려 구심점을 잃고 있던 보수우익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됐다.

 

성 대표는 ‘남성 인권 부활’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반 페미니즘에 가깝다. 그를 옹호하는 남성들도 존재하지만 여성 인권에 대한 도발적인 발언이 문제를 일으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한강 투신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가운데 남성연대 사이트를 통한 후원모금이 최근 이틀 사이 크게 늘었던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전 날까지만 해도 하루에 후원 한 건 있을까 말까한 남성연대 홈페이지 게시판이 이틀 새 후원하겠다는 글로 새까맣게 뒤덮일 정도다. 자신이 의도한대로 자살(또는 퍼포먼스)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셈이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마지막 트윗이 의미심장하다.

 

‘믿고 싶다. 남성을 일으킬 수 있다니.. 허허’

 

그렇다면 성 대표가 이 세상과 마지막 작별 행동을 사진으로 촬영하면서까지 트위터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에펠탑에서 투신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곳에서 일어난 자살사건이 보도된 신문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공공장소에서의 자살을 연극적 행위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관객 또는 뉴스의 시청자를 향해 “나한테 일어나는 일의 책임은 당신들에게도 있다”고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미시마는 세계대전 패퇴 이후 무기력한 일본을 지탄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자신의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을 일본 사회로 돌린 것이다. 성 대표도 기 눌린 채 살아가면서도 저항하려는 마음 한 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남성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무작정 비난하고 반대하는 여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연극적 심리가 있었지 않았을까? 자신의 원대한 꿈을 펼치고 싶었으니 거대한 사회의 벽을 넘지 못해 비장미가 느껴지는 최후를 선택하는 영웅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 어제, 오늘 우리 모두는 제노비스였다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남성들의 영웅이 되고 싶어했던 성 대표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정말 부끄러운 짓을 한 사람은 성 대표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방관했던 우리들이다. 오늘 성 대표의 자살 장면을 목격하고 촬영한 사람들은 자살방조죄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성 대표가 투신할 당시 남성연대 관계자들과 KBS 카메라 기자, 시민 등 최소 4명. 자살 방조 논란이 이어지자 KBS는 구조신고를 두 번 했으며 현장 취재에 나선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그가 추락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든 간에 (성 대표가 자살로 판명된다면) 자살 방조 논란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살 방조 논란에 대한 비난 여론의 불을 지피기 전에 전날 성 대표의 자살 예고를 방지했던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스스로 생각해봐야 한다. 도발적으로 남성 인권을 옹호하는 글을 남기는 트위터라인에 집중하고 지금도 그의 트위터를 검색하고 있는 우리들 말이다. 어제, 오늘 우리 모두는 제노비스가 되고 말았다.

 

 

 

 

 

 

 

 

 

 

 

 

 

 

 

 

 

 

1964년 3월 13일 새벽 미국 뉴욕 주택 골목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한 여성이 귀갓길에 괴한으로부터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여인은 괴한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살인극은 30분가량 이어졌고 비명에 놀란 이웃주민 38명이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창가에서 범행 현장을 지켜만 볼뿐, 아무도 위기에 처한 제노비스를 돕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괴한에 의해 그녀가 죽어가고 있음에도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다른 목격자가 경찰에 신고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범죄심리학에서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 한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행동하지 않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 데 흔히 '방관자 효과' 또는 '구경꾼 효과'라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SNS 세계에서도 제노비스 신드롬의 영향력은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작은 무관심과 방관은 의도치 않게 한 남자의 자살 쇼를 기획하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안타까운 비극

 

 

 

 

 

 

 

 

 

 

 

 

 

 

 

 

나는 편협되고 잘못된 여성의 심리에서 기인한 불합리한 남성 인권의 실태에 분노한다. 다만 성 대표의 반페미니즘 사상과 상대방을 언어의 힘으로 제압하려는 공격적인 발언 태도는 옹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무모한 행동이 안타깝다. 자살 예고 트위터 전에 우울증 앓는 아내가 자살하겠다고 집을 나간 사건 때문에 새까맣게 속을 태운 그였다. 남성연대의 운명이 사랑하는 아내보다 그렇게 중요했던 것일까? 미망인이 될 수 있는 성 대표의 아내가 앞으로 처하게 될 상황이 심히 걱정된다.

 

자살의 역사에 관해 기술한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투신 자살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자살하는 사람보다 장소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떠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인지, 사회적 불명예를 감내하기 어려웠던 것인지, 죽은 자의 심정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비극이라는 점만은 분명할 듯싶다.

 

싸움에 패한 사무라이는 할복자살을 가장 고귀한 의무로 생각했다. 사무라이처럼 자살은 아침햇살을 받고 벚꽃이 떨어지듯 화려한 미학이 아니다. 아무런 동요 없이 존재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로움은 더욱 아니다. 자신에 대한 무책임이요 창조주에 대한 반역이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자살은 윤리적 관습이 금기하는 행위이다. 사회는 인간에게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자살은 염세주의자에게 허용된 ‘최후의 만찬’이 될지 모르지만 최악의 자해행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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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7-26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기뻐해야할까요,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요....

cyrus 2013-07-27 23:51   좋아요 0 | URL
성재기를 싫어했던 페미니즘에게는 기쁨을, 그를 옹호했던 남자들은 슬퍼하겠죠? 본인이 의도한대로 그에 대한 남자들의 애도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연 포스트 성재기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반짝 관심으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들어 누구나 역사를 이야기하는 세상이다. 정치가들은 역사에 물어보라거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인들은 역사를 알아야 교양이 있어 보인다고도 한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분노하고, 또 우리 ‘역사’를 너무 모르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역사 과목을 필수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 과정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언급되는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한 논란 가운데 정작 ‘역사’가 무엇이며, 왜 ‘역사’를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단순한 역사학에 대한 이론서가 아닌 저자 자신의 역사관을 명확하게 밝힌 책이다. 카는 기존 랑케 중심의 실증사학을 비판하면서 남겨진 사실은 과거에 해당하나, 이를 발굴하여 연구하고 서술하는 역사학자는 현재의 존재이기에 그 해석과 평가의 기존은 현재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즉 현재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살펴보고, 이러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에 대한 교훈을 찾아내기 위함이 역사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역사가’ 없이는 역사로 탄생될 수 없으며, 역사가 또한 과거 없이 역사를 쓸 수가 없다. 결국 역사는 역사학자와 과거 사실 간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재생산되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쓴 역사학자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카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역사가는 신(神)이 아니다. 역사가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관’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 가운데 카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카는 ‘사회와 개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대보다 훨씬 앞서 갔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세대에 의해서만 그 위대함이 인정되었던 위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위인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힘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이었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한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하였던 그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역사의 기능은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역사의 과학성’ 부분에서 그는 근대학문이 자연과학의 발달에 영향을 받았기에 역사학에서도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가 과거 남겨진 특수한 개별사실들과 일반적인 사실들 간의 관계성을 파악하고자 하기에 ‘과학’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역사학에서 연구의 대상을 ‘원인’에 관한 것이라 하였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부분을 보면, 모든 사실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개인적 원인 및 장기적 원인과 단기적 원인 등 다양하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학자는 역사적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다양한 원인 중 궁극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다른 원인들 간의 선택과 배열의 결정을 해석을 통해 행한다고 하였다. 이를 행하는 것이 역사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와 미래를 동일한 시간대의 일부이며,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역사학자는 ‘왜’라는 질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어디로?’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어디로 역사가 전개될 것인가를 다룬 부분이 ‘진보로서의 역사’이다. ‘진보로서의 역사’ 부분에서 그는 역사는 신학처럼 종말을 강조하거나 현실 밖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획득된 자산의 전승과 연결된 미래의 진보를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역사의 흐름에 퇴보의 시기도 있을 것이고, 또 ‘진보’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강력한 신념으로서 ‘진보’를 설정하고 있다. 나아가 이는 역사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이며,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표현을 진전시켜,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역사의 본질은 운동이며, 곧 ‘진보’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즉 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사회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도 역사가의 임무라고 제시하고 있다.

 

물론 카의 역사인식이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여러 문제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책이 출간된 1960년대 초반보다 현실의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더 불투명하며, 빈부격차나 종교, 혹은 이념간의 갈등도 더 심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의 역사인식이 효용성을 갖는 것은 이러한 진보과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의 실천적 역사관에서 제시하고 있는 ‘진보’의 개념에 오늘의 위기상황을 접목시켜 이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마련하는 역사관의 생산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대안을 위해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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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2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학 때 리포트 때문에 대충 읽고 말았던 책이군요.
언젠가 한번은 제대로 다시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시루스님께서 잘 정리해주신 덕분에 다시 안 읽어도 될 것 같은데요. ^^

'실천적 역사관', '역사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이 꼭 필요한 시기죠!
뉴라이트나 딴나라당 애들이 대학 때 이 책만 제대로 읽었어도 나라 꼴이 이 모양은 아닐텐데요.

cyrus 2013-07-26 22:22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 내용이 어려워서 읽다가 포기한 적이 많았습니다. 저도 은빛님처럼 리포트 때문에 읽었다면 정말 마음 속으로 짜증날 정도로 혐오감이 들 수 있는 책이었을 겁니다. ㅎㅎㅎ 그래도 완독하니까 왜 이 책이 대학생 필독 도서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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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려면 먼저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춤에서의 공간 개념이란 한 마디로 단순하게 설명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일차적으로는 공간의 한 지점 안에서 신체 모든 부분들이 어떤 각도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성과도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똑같은 포즈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느리게 회전하는 움직임의 경우에 어떤 각도로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지를 인식하고 그런 다음에 회전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객석의 관객이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 시간을 보다 많이 배려하는 것, 말하자면 지극히 단순한 한 동작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선택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더 많이 깨어 있어야만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깊이 인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에 의한 조화의 결과는 비단 춤만 있는 건 아니다. 사진은 언제 어디서든 조화의 느낌을 눈으로 볼 수 있다. 과거처럼 특정 부류만 비밀스럽게 향유하는 게 아니라 셔터를 누를 힘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을 만들고 소비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진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거친 욕’이 되기도,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되기도 한다. 사진 한 장은 ‘이미지’로 기능하기보다 의미를 주고받는 ‘언어’로 작동한다. 이미지를 넘어 의도를 담지(擔持)한 기호인 것이다.



“인간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故 최민식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렇게 요약한다. 그는 인생의 반세기동안 인간을 찍었다. 인간은 최민식 사진의 영원한 주제였고 의미가 함축된 하나의 언어로 봤다. 지금까지 펴낸 12권의 작품집 제목이 모두 ‘인간’이었다. 반면 조던 매터는 삶이 거기에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가 포착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활동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표정이며 인간의 그늘이고 인간의 현재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삶이라는 하나의 결합체로 사진을 통해 구성된다.



삶은 늘 반복의 연속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어느 날 문득,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오고 그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어쩌면 쉽게 지나쳤기 때문에 소중한 줄 몰랐던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무용수들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지상에 묶여 있는 인간이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파인더에 담아낸다. 도시 곳곳에서 이들은 마음껏 춤의 본능을 발산한다. 무용수들의 애크로바틱한 동작은 트램펄린이나 와이어를 이용하지 않았다. 무용수들의 포즈 역시 디지털 보정을 거치지 않았다. 맞다. 여기에 뽀샵질은 없다. 사진은 오직 무용수들의 100% 리얼한 동작에 의존했다. 조던 매터는 무용수가 점프해 허공에 떠 있는 장면을 담기 위해 셔터 속도를 1/320로 맞추고, 각각 점프마다 단 한 컷의 사진만 촬영했다. 무용수들의 결정적인 순간을 예측해서 한 번에 승부를 걸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들과 같이 움직이고자 몸이 들썩거린다. 그렇게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보는 이의 심장을 바운스(Bounce)하게 만드는 생(生)춤이다.



우리가 이들의 몸짓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몸이라는 언어가 그만큼 생동감과 소통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꿈과 사랑, 일, 인생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감정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진다. 그들이 높은 점프를 하고 고난도의 포즈를 취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연기가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사진가의 삶을 살게 된 조던 매터의 진솔한 이야기가 만나면서 오랜 순간의 여운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가 세상을 감지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제한적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가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맛보기도 한다. 사실 영상 매체야 말로 확대된 시간과 공간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과학적 산물이지만. 사진이라는 것이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정서와 감정과 감동을 불어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진의 기적이다. 이것은 마치 시인이 무생물인 언어에 호흡을 넣어 생명의 말을 만들 듯이 조던 매터는 무생물인 카메라에 호흡을 불어넣어 일상적인 삶을 새롭게 잉태하고 있다.



무용수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더욱 풍부한 춤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듯이 더 많이 깨어 있는 관객일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보다 둔감한 관객이라면 시공 에너지의 섬세한 부분들의 아름다움을 상대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조던 매터의 사진을 보는 우리 독자 또한 그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놓쳐 버리고 있는 공간이나 스쳐 지나는 시간에 대한 감지력이 지금보다 더욱 예민해지게 된다면 우리는 현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좀 더 깊이 시간과 공간을 확대해서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놓쳐 버리는 ‘찰나’라는 시간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너무나 평범하고 미미하다고 여겼던 일상적인 것들이 값지고 위대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세상과 화해하고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된다. 우리가 스쳐 지났던 모든 것, 우리가 지금 스쳐 지나가려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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