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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제국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칼 짐머 지음, 이석인 옮김 / 궁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 우리 곁에 있는 기생충
그리스에서 기생(parasitos)이란 단어는 '음식의 곁'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단어를 처음엔 사원의 제사를 돕는 제관'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나중에는 귀족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자잘한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식객'을 부를 때도 썼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은 생물학적인 기생 현상을 알고 있었다. 돼지의 혓바닥에 살면서 우박처럼 딱딱한 포낭을 만드는 생명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사전적 의미의 기생충은 다른 동물(숙주)의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이다. 그래서 일하지 않고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을 '인간 기생충'이라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 학교에서 단체로 회충약을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을 TV 영상으로만 본 나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기생충은 작년에 영화로 개봉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 ‘연가시’일 것이다. 물론 영화처럼 사람 잡는 변종 연가시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지만 기생충은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굳이 숫자로 따져보자면, 14억 명 이상이 장 속에 뱀처럼 생긴 회충을 지니고 있고, 13억 명 정도가 피를 빠는 구충을, 그리고 10억 명이 편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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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간한 서민 교수의 <서민의 기생충 열전> 덕분에 다시 한 번 기생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작년에 영화 때문에 기생충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부터 비롯된 호기심의 시작으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다르다. 기생충의 생태 과정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반응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생충이 대중 과학의 관심 대상으로 등장하고 부각받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다. 그 때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예비 수험생이었다. 마침 나온 기생충 관련 책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이언스’ 등에 기고하는 과학 칼럼니스트인 칼 짐머가 쓴 <기생충 제국>이었다. 당시 이 책을 완독하지는 못했는데 마침 서민 교수가 쓴 책을 읽어보기 전에 잠시 세월의 흐름 속에 잊고 있었던 짐머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 은밀하게 신비하게, 기생충이 살아가는 법
책 표지는 확대한 기생충의 얼굴 사진이 박혀 있다. 표지와 어울리는 부제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떡 하니 자신을 바라보는듯한 기생충의 모습에 이 책을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은 독자가 있을 거라 본다. 곤충 사진을 싫어하거나 일종의 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을 둘러싼 ‘미지의 세계’는 위험하다기보다 오히려 신비하고 경이롭다. 괴기스러운 생김새와 달리 그들은 섬세하다. 기생충은 숙주의 생식능력을 없애기도 하고, 정신세계를 조절할 수도 있다. 2~3㎝짜리 흡충은 우리의 복잡한 면역계를 조롱하여 자신을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최종 숙주를 위해 중간 숙주를 조종하는 것은 기본이다. 촌충에 감염된 물고기는 두려움이 없어져 수면 가까이 올라가 물새에게 ‘날 잡 수슈’하고 다닌다. 물론 촌충의 목적은 물새다. 기생충에게 몸을 빌려준 송사리는 멀쩡한 송사리에 비해 새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30배나 높다. 물새가 ‘병든 송사리’를 선호하도록 하는데도 어떤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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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가지고 있다는 톡소포자충은 가장 성공한 기생충이다. 임산부나 에이즈환자가 아니라면, 대개 해롭지 않다. 이 유능한 기생충은 원래 고양이가 최종 숙주인데 쥐의 몸 안에서 뇌를 조작, 쥐를 고양이 쫓는 ‘자살특공대’로 만든다. 심리학자들은 톡소포자충으로 인해 인간 숙주의 인격도 바뀌는 것으로 본단다. 남자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지키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여자는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고 인정이 넘친다는 거다. 하기야 촌충의 경우, 4억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동안 지구는 공룡의 소멸 등 4차례의 대량멸종을 겪었지만 촌충은 살아남았다. 바퀴벌레의 영원한 동지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 ‘생태계의 파수꾼’ 기생충
칼 짐머의 주장은 기생충이 생명의 진화에 '절대적 기여'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태계의 엑스트라 기생충에게 ‘생태계의 파수꾼’이라는 새 역할을 부여한다. 기생충이 숙주와 경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숙주와 기생충 모두 진화한다는 것. 그 사이 먹이 사슬은 정교해지고 지구 생태계는 탄력을 유지한다.
따지고 보면 둘의 관계가 빼앗기고 착취하는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상생과 보완의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몇몇 기생충은 숙주의 면역체계를 보호한다.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의 세차원들은 주혈흡충증에 자주 감염되는데 흡충은 흡충과 에이즈에 동시에 감염된 사람들보다 흡충에만 감염된 깨끗한 숙주에 더 많이 알을 낳는 것으로 조사됐다. 숙주가 면역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흡충이 나서 도와야 하는 이유다. 한번 주혈흡충에 감염된 사람은 새로 흡충에 감염되기 어렵다는 연구도 있다. 선배 흡충이 숙주의 면역계를 도와 나중에 도착하는 흡충을 공격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숙주 내 흡충의 숫자를 조절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만 생존에 유리한 한도 내에서이긴 하지만 기생충은 다양한 방식으로 숙주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 기생충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
징그러워 얌체 같아서 외면해오던 기생충. 하지만 태양과 물만으로 자생하는 식물이 아닌 다음에야 지구 위 어느 생물이 기생충의 혐의를 벗을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기생충인지 모른다. 저자는 인간이야말로 지구라는 숙주에 붙어사는 고등 기생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맞춰 생명체의 생리를 전혀 새롭게 바꿨고,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스스로 파멸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자제할 줄 모르는 기생충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자신의 숙주마저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만다'는 기생충 사회의 평범한 진리를 인간은 곧잘 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기생충보다 나은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인간이 제대로 된 기생충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훌륭한 선배들에게 한참 더 배워야 한다.
그는 “우리가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한다. “인류는 처음부터 기생충이었지만 지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명체로 자리해 모든 변화를 이끌 역량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먹이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앉은 기생충을 아는 건 그래서 지구를 알고 우리를 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