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책]방
EP. 26
인스크립트
고즈넉한 동네 서대문구 연희동에 가면 애서가와 연극쟁이를 위한 놀이터 <인스크립트>(Inscript)를 만날 수 있다. <인스크립트>는 ‘희곡 가게’다. 국내외 희곡과 연극 관련 서적을 만날 수 있는 서점이다.
<인스크립트>가 처음으로 문을 연 날
2023년 6월 24일 토요일 오전 10시
희곡 가게는 작년 6월 24일 오전 10시에 태어났다. 서점이 태어난 날을 잊지 못한 이유는 내가 <인스크립트>를 처음 방문한 손님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게 내부에 들어왔을 땐 이미 남자 손님이 먼저 서점 내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인스크립트>에 두 번째로 방문한 손님이면서도 이곳에 처음으로 방문한 비(非) 서울, 지방 출신 손님이다.
이 날 마신 음료는 토마토 에이드다. 구매한 책 두 권 모두 희곡이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닫힌 방. 악마와 선한 신》(민음사, 2013년)과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해피 데이스》(문학동네, 2020년)다. 사실 이 두 권을 읽고 싶어서 산 건 아니다. 아주 유명한 작가가 쓴 희곡이고, 서재에 없는 책이라서 샀다. 일단 사놓으면 언젠가는 읽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합리화하면서 산 책들이 산더미다.
서점 주인장은 연극 배우로 활동 중인 젊은 부부이며 고양이 집사다. 희곡 가게는 연극 배우들을 위한 놀이터 겸 소극장이 되기도 한다. 이곳에 정기적으로 희곡 낭독 모임과 낭독극 공연이 펼쳐진다. 배우와 연극쟁이들이 만나는 희곡 가게의 축제에 나도 함께 즐기고 싶지만, 지방에 살고 있어서 축제 소식을 멀리서 접하고 있다. 내게 희곡 가게에서 하는 모임과 공연은 ‘하늘 위에 열리는 축제’다.
운이 좋게도 <인스크립트> 첫 번째 낭독극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공연작은 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의 희곡 《아무것도 아닌 일로》다.
* 나탈리 사로트, 이광호 · 최성연 옮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지만지드라마, 2023년)
작년 12월 14일 목요일 저녁 8시 공연을 봤는데, 이날 공연은 박세인 배우와 문가에 배우가 진행했다. 박세인 배우는 <인스크립트>를 운영하는 주인장이며 이분의 남편 권주영 배우가 낭독극 연출을 맡았다.
공연 날의 날씨가 정말 짓궂었는데, 겨울비가 찬 바람과 같이 내리고 있었다. 권주영 배우는 저녁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연희 곰탕’이라는 식당을 추천해 주었다. 곰탕집은 희곡 가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날 처음으로 곰탕을 먹었는데, 허전한 배 속을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여기에 잔술을 곁들어 마셨다. 연희동에 식사하게 되면 무조건 가는 곳이 곰탕집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는 2인극이지만, 아주 잠깐 남성 1명과 여성 인물 1명이 등장한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이름이 없다. 주인공 두 명은 ‘남자 1’과 ‘남자 2’다. 그 외의 인물은 ‘남자 3’과 ‘여자 1’이다. 박세인 배우와 문가에 배우는 ‘남자 1’과 ‘남자 2’를 연기했다. ‘남자 3’과 ‘여자 1’ 연기는 이날 공연을 보러 온 두 명의 관객이 하게 되었는데, 나는 ‘남자 3’을 연기했다. 낭독극 연기가 처음이라서 NG를 내고 말았다. 작은 공연장은 한순간에 웃음바다로 변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럽구먼. 침착하게 ‘남자 3’의 대사를 읽었다. 영혼 없는 뻣뻣한 낭독이 되지 않으려고 ‘남자 3’이 말하면서 느꼈을 감정을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읽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정말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
<인스크립트>을 알게 된 이후부터 희곡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외국 극작가의 희곡뿐만 아니라 국내 극작가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희곡 가게에 가면 제일 눈에 띄는 책은 ‘지만지 드라마’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이라는 출판사가 펴내는 희곡 시리즈다. 책의 색깔이 분홍빛이라 눈에 확 띈다. <인스크립트>에는 절판된 몇 권의 책을 제외한 지만지 드라마 시리즈가 전부 다 있다. 이곳에 가서 제일 많이 구매한 책이 지만지 드라마에서 나온 책이다. 오늘 지만지 드라마에서 나온 희곡 두 권을 구매했는데(알라딘 주문), 내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출고일을 며칠 지나서 받아야 하는 책들도 있다. 이런 책은 인터넷 서점으로 주문하지 않고, <인스크립트>에 직접 가서 구매한다. 다음 주 토요일에 <인스크립트>에 가서 희곡 한 권 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