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또, 페미니즘은 ‘단 하나의 정의(定義)’로 규정할 수도 없다. 페미니즘은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경합하는 담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다. ‘페미니즘(들)’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도 있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Marxist Feminism)도 있고, 사회주의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도 있고,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도 있고,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도 있어 사상이 풍성하다. 이성애주의에 도전하고, LGBT(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등 각종 성 소수자 인권을 바탕에 둔 퀴어 페미니즘(Queer Feminism)도 주목받고 있다. 범세계적으로 본다면 제3세계 페미니즘(Third World Feminism)에 접근할 수 있다. 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흑인 여성, 아시아 여성, 이슬람 여성 등이다. 그리하여 젠더, 인종, 사회계급 모두를 아우르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 또는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이 부상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활발하게 활동 중인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에 가깝다. 메갈리아는 급진적 페미니즘을 표방한 온라인 커뮤니티였다. 메갈리아는 과거의 정제된 페미니즘 운동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여성 운동을 펼쳤다. 혐오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혐오에 대항하는 방식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SNS를 중심으로 메갈리안들이 활동하게 되자 미러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메갈리안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반응도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페미니즘을 ‘진짜, 가짜’로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메갈리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감별’하는 것을 무슨 합당한 권리인 마냥 말하고 있는 것일까? 페미니즘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페미니즘 감별사’로 행세하고 다닌다.

 

MtF(Male to Female, 의학적으로 지정된 성별이 ‘남성’이었으나 ‘여성’으로 전환한 것) 트랜스젠더가 여성 운동을 한다고 하면 콧방귀 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사라진 후 일부 메갈리안들이 모인 워마드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은 게이의 여성혐오에 맞서 미러링을 시도했다. 그러나 게이를 향한 워마드의 미러링은 방어적인 측면이 크다. 워마드는 성 소수자 인권 보호보다는 여성 인권 보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워마드의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본 사람들은 ‘워마드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할 뻔 했다. 하지만 ‘페미니즘(들)’의 광범위한 담론을 생각한다면 그런 입장도 옳다고 보기 어렵다. 워마드는 ‘성 소수자를 배제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이다. 미국에서는 그들을 가리켜 TERF(Trans Exclusionary Radical Feminism)라고 부른다. TERF는 ‘남성’과 ‘여성’으로 말하는 ‘생물학적 성별’과 ‘이성애’를 지향한다. 그래서 동성애자, 생물학적 성별을 거부하는 트랜스젠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년에 한서희가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다’, ‘성(性)은 바꿀 수 없다’라는 등의 발언을 해서 하리수가 비판한 일이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설전이 벌어졌을 때 일부 네티즌들은 ‘한서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앞서 말했듯이 상대방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세우면서 비난하는 것은 ‘페미니즘 감별사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한서희의 발언을 ‘비판’하고 싶으면 성 소수자들도 여성 인권 신장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워 반박하면 된다. 그런데 퀴어 페미니스트를 조롱하는 TERF의 호전적인 태도가 만만치 않다. TERF는 퀴어 페미니스트들, 트랜스페미니스트들, 심지어 자신들의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멸시하는 의미로 ‘쓰까페미’라고 부른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 [개정판 절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2000)

* [구판 절판] 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 종합적 접근》 (한신문화사, 1995)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성 구분을 아예 철폐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혁명을 지향했다. 그녀가 원했던 세상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는 문화적 구분이 사라지고,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는 자연적 생식(임신)을 거부한다. 파이어스톤이 ‘급진적 페미니스트’로만 알려져 있다 보니 그녀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간과했던 인종차별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했던 사실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듯하다. 《성의 변증법》 5장‘트랜스페미니즘’에 근접한 파이어스톤의 탁월한 분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에서 나는 인종차별주의는 성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개인의 정신에 있어서 성차별주의처럼,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를 가족의 권력 위계질서와의 관계에서만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성적 계급의 발달에서처럼 인종의 생리학적 구별은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에 기인할 때에만 문화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러므로 인종차별주의는 성차별주의가 확장된 것이다. (157쪽)

 

개별적인 백인 가정은 개별적인 흑인 여성을 성적으로뿐만 아니라 평생 가사노동으로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169쪽)

 

 

 

파이어스톤은 이분법적 성별이 사라진다면 여성을 억압하고 종속하게 만든 ‘생물학적 가족’, ‘(남성)문화’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정형적인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틀에 갇혀 생활할 필요가 없어진다. 지금 그녀가 살아있다면 이분법적 성별을 지지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을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파이어스톤은 자신이 꿈꿔왔던 ‘페미니스트 혁명 국가’가 당장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인간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와 가부장제의 재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로즈마리 푸트남 통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구판, 114쪽). 그녀의 급진적 생각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하다.

 

급진적 페미니즘 역시 ‘단 하나의 페미니즘’으로 볼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서로 다른 여성운동 전략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파이어스톤의 책을 읽으면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는 생각이 든다. 두 진영 간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구분하는 일도 편향적으로 비교하는 ‘감별’의 오류로 빠질 수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페미니즘에 입장 차이는 있다(다양한 페미니즘의 특징, 문제점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많지 않다. 시의성이 떨어지지만 로즈마리 푸트남 통의 《페미니즘 사상 : 종합적 접근》 훌륭한 ‘페미니즘 종합 참고서’다). 그러나 아주 꼼꼼하게 살펴보면 미묘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파이어스톤은 급진적,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교차성을 잘 이용하여 두 진영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두 진영을 상호 보완한 독창적인 여성운동론을 제시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올 수 있었다. 당연히 급진적 페미니즘은 좌파 성향이 강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 역사는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면 짧은 편이고, ‘페미니즘(들)’끼리 서로 경합하면서 논쟁을 진행하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아직도 ‘마르크스’, ‘좌파’를 편협하게 보는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남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의 호의적 반응이 늘어나는데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이 부각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누군가가 ‘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순간, 네티즌들은 그 사람에게 ‘욕을 부르는 좌빨과 꼴페미의 환상적인 조합’이라고 조롱할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음지에서 벗어나서 급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접점을 찾아 여성 문제를 접근하는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다. 퀴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도 더 많이 알려져야 한다. 그들에게 더 분발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어느덧 ‘주류’로 자리 잡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음지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다가가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상대 진영의 페미니즘이 나의 페미니즘과 다르다고 해서 ‘너의 페미니즘은 틀렸어!’고 규정해선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들)’이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교섭하고, 보완해야 한다. ‘페미니즘(들)’끼리 서로 “내가 잘 낫다‘는 식으로 싸우는 것은 페미니즘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소모적인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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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8-02-09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리고
자유주의 페미니즘 Liberal Feminism,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Marxist Feminism, 사회주의 페미니즘 Socialist Feminism, 급진적 페미니즘 Radical Feminism,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 Queer Feminism, 제3세계 페미니즘 Third World Feminism,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 또는 트랜스페미니즘 transfeminism)
중에서 *** 페미니즘의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어느 알라디너가 마립간 님도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댓글을 받았는데, 제 가치관이 이 중 어디에 가까울까 생각했습니다.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Intersectional Feminism?

cyrus 2018-02-10 10:07   좋아요 0 | URL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는 OOO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뚜렷하게 밝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페미니즘 정체성을 밝히기보다는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저의 관점에 근접한 ‘페미니즘(들)’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원래 처음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J. S. 밀, 베티 프리단)으로 시작했다가 제3세계 페미니즘(벨 훅스, 김미덕)을 알게 됐고, 최근에 급진적 페미니즘(파이어스톤), 사회주의 페미니즘(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채트킨)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2018-02-0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0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8-02-09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인글 잘봤습니다 폐미니즘 공부 해야겠네요!

cyrus 2018-02-10 11:12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여성들이 살면서 말하지 못했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심판매 2018-02-12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페미니즘이라는 말을들었을때는 ˝뭐, 이런 이기적인 집단들이 다 있나?˝ 였는데 이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현대사회의 공동체 분화현상 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의 가부장적인 가족중심 공동체에서 분화된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인거죠. 부모세대를 돌아보며 절대 이런 공동체는 만들지 말아야겠다라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공동체 같아요.
그런 공동체를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건 응원과 비판이라고 생각해요.
개별의 공동체라는것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기도하고 불필요한것들은 걸러서 듣는 정리정돈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그들의 말을 듣다보면 몇몇은 괜찮은 내용도 있는데 가끔 몇몇은 (제기준에서) 말도 안되는 미숙한 생각의 내용도 있어 보여요.
이럴때일수록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서로를 존중하는 ˝해체주의˝가 아닐까해요.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자유는 언제나 어디서나 있으니까요.
있는 힘껏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마음껏 쏟아 냈으면 해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더이상 없을때까지...
그러면 지금과 같은 가끔은 생기는 볼 성 사나운 모습은 없어지지 않을까해요.
천만 다행인것은 제 귀에 바로 대고 육성으로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거에요.

cyrus 2018-02-12 13:3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이 여러 갈래의 분파로 나뉜 건 페미니즘은 다양한 학문 및 사상과 결합할 수 있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마다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보는 시선, 그것을 해체하는 관점들이 다릅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마음껏 펼칩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 내부에서도 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집니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입니다. 합당한 비판은 경청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거나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꼬투리 잡아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려는 입장에 반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