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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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cafe.naver.com/openbooks21/742  

 

 네끄라소프처럼 독서하기 
  

새벽 2시, 밤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편의점에 들어오는 손님의 인적은 드물어지고, 편의점 안에 있는 것은 오직 나와 진열된 물품뿐이다. 조용하다 못해 너무 고요하다. 딱 잠이 몰려올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이다.  

2년간의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마친 뒤, 사회로 복귀하여 3개월째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아르바이트로 편의점 카운터로 일하고 있다. 군인 시절에도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던지라 전역을 하고나면 원 없이 잠을 실컷 잘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회에 나와서도 야행성 활동은 계속 되었다. 아르바이트 모집 전에 편의점 사장님과 면접을 하면서 군 생활 시절에 많이 밤새봤다면서 나를 고용해달라고 자신 있게 어필했었건만 진짜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편의점 안에 혼자서 카운터에 앉는 것도 그리 편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속도는 느리지만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다. 심심하면 간혹 열린책들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들을 읽으니깐. 그러나 쏟아져오는 잠을 못 이기지 못해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은 항상 느끼게 된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많지 않은 잠으로 지쳐있는 정신을 회복시키고 점심시간에 일어나면 그 때 몰려오는 피곤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낙천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일도 나름 장점이 있긴 하다.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 멍 때린다거나 컴퓨터 모니터만 보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공부와 독서를 한다. 새벽 2~3시 이후부터는 손님이 드문드문 오게 되고, 편의점 내부는 조용해서 공부와 독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편의점에서 읽었던 책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처녀작『가난한 사람들』이다. 광대한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 지대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 관련된 일화가 재미있다. 러시아의 시인 네끄라소프가 밤 새워 가면서 이 작품을 끝까지 완독하자마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권위 있는 문예 비평가였던 벨린스키에게 원고를 주면서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라는 말을 남겼단다. 당시 신인 소설가였던 도스또예프스키의 천재성을 한 눈에 알아 봤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훌륭했기에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신인 소설가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걸까?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나도 네끄라소프와 심정을 느끼면서 그의 처녀작을 밤 새워 읽게 되었다.  

네끄라소프도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이 작품을 접했을 것이다. 책은 새벽 2시부터 읽기 시작했다. 간혹 몇 몇 손님이 들어와 흐름이 끊기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독서를 하는 도중에 피곤함이라는 불청객은 찾아오지 않았다. 4시 10분에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러시아의 우석훈이 나타났다.” 

  

 


 공포 경제학적 소설

작품 속 남녀 간의 러브 스토리에는 당시 러시아 빈곤층의 현실과 애절함이 숨어져 있다. 보통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과 상대적 박탈감이다.『가난한 사람들』속에 숨겨진 공포의 경제학을 발견하면 서늘한 진실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88만원 세대』출간했던 당시, 우리나라 기성세대들 뿐만 아니라 88만원 세대들까지 우석훈 박사의 지적에 대해서 당혹감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처럼...   

 

 

3년 전, 어느 경제학자가 쓴 독특한 제목의 책이 서점가뿐만 아니라 사회에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름은『88만원 세대』. 이 한 권의 책은 우리나라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현실과 이로 인해서 발생한 세대 간의 경제학적 갈등을 날카롭게 집어내고 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20대들은 ‘88만원 세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직함을 달게 되었다. 이 책은 우석훈 박사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박권일이라는 사회부 기자와 함께 쓴 것이다. 그래서 박 기자 특유의 취재의 눈은 88만원 세대가 겪고 있는 어두운 생활 모습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다. 우석훈 박사는『88만원 세대』출간 이후에도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포함해서 4권 정도 나왔다. 그의 책들은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불편한 사회적 진실들을 경제학적 관점으로 비판, 분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연구 활동을 ‘공포 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도 일종의 공포 경제학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제적인 작품 구성은 가난한 하급관리 마까르 제부쉬낀과 역시 가난한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의 연애 모드로 설정하고 있다. 서술도 두 사람 간의 서신 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얼핏 보면 그냥 가난한 연인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연애하는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 있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가볍게 읽을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편지 내용에는 두 인물이 처하고 있는 상황을 알 수 있는 구절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제부쉬낀은 넥타이와 셔츠 하나도 일 년에 한 번 살까 말까 하는 정도의 가난한 상태이다. 재미있게도 알렉세예브나는 그런 제부쉬낀을 동정하면서도 제발 가난한 티를 내면서 살지 말라고 사랑의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자신도 제부쉬낀을 동정하고 챙겨줄 수 있는 그런 부유한 입장도 아니고 그럴 잔소리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의 가난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알렉세예브나가 시골 농장 대지주인 비꼬프와 청혼하기 때문이다. 알렉세예브나의 청혼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보낸 제부쉬낀의 마지막 편지에는 사랑의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 가난한 처지와 사랑의 실패가 제부쉬낀을 두 번 죽이게 된 셈이다.  
 

 

  

 

 가난이 죄인가요?

 

제부쉬낀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겨냥한 알렉세예비치의 잔소리가 불편했던 것일까? 결국에는 참고 있었던 불편한 감정을 편지 통해서 털어 놓는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친구여,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이런 소릴  

  한다고  화를 내지는 말아요. 제 가슴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까다로운 법이죠. 선천적으로 그래요. 이미 옛날부터 느끼고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이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들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 도스또예프스키『가난한 사람들』석영중 역, p 129 -

이 구절을 보게 되면 인간의 심리 묘사에 대한 도스또예프스키의 뛰어난 관찰력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쓰고 있을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의 빈곤층들의 마음은 같을 것이다. 단지 '가난'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하는 따가운 시선은 빈곤층들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며칠 전에 빈곤층 자녀일수록 정서 불안이 심각하다는 통계의 기사를 접했다. 특히 열 명중 한 명 꼴로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의심 증상이 있다고 한다. 이런 빈곤층 자녀와 ADHD 발병의 상관 관계의 원인을 자녀를 향한 빈곤층 부모의 소홀한 훈육과 일반 가정보다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점을 들고 있으며 낮은 경제력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권위 있는 연구소의 자료라도 그냥 믿어버리지 말고 꼼꼼히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단순하게 빈곤층 가정 입장 쪽으로 원인으로 몰아가는 주장을 그대로 믿게 되버리면 오히려 빈곤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꼴이 된다. 정신학계에서는 ADHD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밝혀진 바가 없으며 다만 여러가지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원인을 추측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 중에는 정서 박탈 같은 심리 사회적인 요인도 정서 장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빈곤층 아이들에게 향하는 주위의 시선들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봉원 어린이의 추억

 

그런 예를 쉽게 들어보자면, 8월 18일에 방영된 <황금어장 -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개그맨 이봉원 씨가 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데 사실은 지금과 같이 성격이 쾌활하지도 않았으며 의외로 어렸을 때 무척 내성적이고 소심했다고 밝혔다. 허름한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살 정도로 집안이 너무 가난했었고 얼마나 가난했었으면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가면 옷도 만날 같은 것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봉원 어린이(?)의 짝꿍은 당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예쁜 여자아이였는데 가난한 티를 내고 다니는 봉원 어린이를 무척 싫어했던가 보다. 얼마나 싫어했었으면 책상에 선을 그어 봉원 어린이에게 선 넘어 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대부분 남성이라면 옛 초등학생 시절에 한 번쯤은 겪어봤을 상황이다. 그래서 여자 짝꿍의 어이없는 으름장에 대항하여 자신의 책상 권리(?)를 찾기 위한 대립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소심한 봉원 어린이는 그만 주눅이 들어 하루하루를 긴장감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손가락 하나라도 짝궁의 책상 범위로 넘어오지 않기 위해서.....  이봉원 씨는 녹슬지 않은 재치있는 개그로 썩 유쾌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재미있게 풀어놓았지만 지금의 빈곤층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은 아마도 어린 봉원 씨가 느꼈던 심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몇 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서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옛 말?

 

지금은 과거보다 경제도 좋아졌고 대부분 잘 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봉원 씨와 같은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은 당시 못 살았고 소박했던 시대의 재미있는 추억으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기르는 부모가 된다면 곤란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들에게 가난한 집안의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교육을 할 것이다. 어렸을 때 가난한 짝꿍과 어울리면 괜히 자신도 가난한 아이로 볼게 될까봐 책상 위에 선을 그었던 것처럼 그런 부모들은 자신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마음껏 뛰어 놀고 어울려야 할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도 선을 그어놓는다. 더 무서운 사실은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똑같이 따라하는 습성이다.

그런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부모의 못된 생각을 되물림받게 된다. 자신의 이상형은 무조건 돈이 많아야 하며, 대기업 임원과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사람을 만날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성격보다는 우선적으로 배우자의 직업, 재산 보유 그리고 집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먼저 따지고 보려고 한다. 결국 가난한 형편인 사람들에게는 결혼은 그림의 떡이다. 이제 가난한 사랑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꿈꿀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연애일 뿐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중에서 -

이 시처럼 가난하고 애틋한 추억의 감정이 있는 사랑은 이제 옛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 시 구절처럼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려야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한다거나 현실을 비정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간혹 우리보다 힘든 생활고에 살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분들은 세상에 대한 믿음과 진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지만 그런 분들이 있기에 차갑기만한 현실 속에서도 아직도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축복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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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0 0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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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haring #4 - 앙드레 지드 <좁은 문> (마감)
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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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01-240]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누가복음 13장 24절

 ↳ Re: 굳이, 그 힘든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할까?

- cyrus  

 

 
   

 도대체 나는 누구랑 결혼한 거야?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의 발전을 위해서 한평생 동안 헌신하는 대신에 사랑과 결혼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신의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 본인 자신도 한번쯤은 사랑을 하고 싶은 여성이었으니 몰래 남자 귀족들과 연분을 나누었고, 그들과의 스캔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연애는 했을 뿐, 결혼은 하지 않았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며 마음속으로는 권력 쌓기에 혈안이 되어 여왕에게 달콤한 말로 추파를 던지는 귀족 남정네들의 꿍꿍이를 그녀 스스로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는 하느님과 결혼했다’라고 말하면 당사자는 어떤 생각이 들게 될까? 그리고 이미 법적으로 부부가 성립된 관계라면?  이런 일은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실제로 일어난 사례이다.

슬하에 2남 1녀의 자식이 있으며 평범한 맞벌이 부부였던 철이와 순이. 철이의 부인 순이는 교회에 자주 찾아가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순이가 계속 다니던 A 교회를 가지 않고, 이번에는 다른 B 교회를 가게 되었다. 철이는 순이가 다른 교회에 가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눈 여겨 보지는 않았다. 순이가 새로 다니는 교회도 기독교 교회였으니까. 그러나 그 후로부터 순이의 일상 습관이 예전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무조건 B 교회로 갔으며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러니 집안 관리도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오전 내내 일 하다가 일이 끝나면 무조건 B 교회로 갔으니 자식들 양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을 것이다. 철이는 이런 순이의 변한 모습이 걱정이 되어서 B 교회의 이단성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면서 순이에게 그 문제의 교회에 가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순이는 철이의 말을 한 쪽 귀로 흘러버렸다. 심지어 순이는 좀 더 교회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이 다니던 일도 그만두기에 이르렀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잠자리에까지 커지게 되었다. 순이는 ‘하나님과 결혼했다’라는 말을 하면서 철이와의 잠자리를 거부하기도 한다. 

종교에 집착하는 순이의 태도와 엉망이 된 가정생활에 진저리가 난 철이는 결국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법정 판결은 종교생활에 심취하여 가정을 돌보지 않은 순이가 이혼에 큰 책임이 있다며 이혼 청구소송에서 철이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순이는 종교 문제를 제기하는 철이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 가정 생활 안정에 대한 노력을 보이지 않은 점과 단지 교리의 덕목을 가지고 성 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가정파탄에 큰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지상의 사랑을 추구하는 남자, 신의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  

 

우리나라의 철이와 순이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앙드레 지드『좁은 문』에 등장하는 제롬과 알리사 커플의 경우는 사랑과 종교의 갈등에 얽매여 두 사람 다 헛물켠 사랑으로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알리사는 마음속으로 제롬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런 세속적인 사랑이나 행복보다는 하느님을 따르는 삶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반면 제롬은 알리사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종교를 향한 알리사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려고 여러 번 설득한다. 하지만 이 둘의 사랑은 끝내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알리사와 결혼하는 것. 제롬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자신 인생의 첫 관문이 알리사와의 결혼이다. 그런데 결혼하기 위해서 그 관문을 통과하기에는 너무 비좁다. 하지만 제롬은 성경 속에 있는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구절을 듣고 나서,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한다. 알리사를 사랑해줄 수 있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와 구애 때문에 괴로워하는 알리사를 위해서 3년이나 되는 군 생활을 하기로 스스로 결정한다. 그리고 알리사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면서 알리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음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둘의 마음은 점점 쇠약해져가고 있었다. 제롬의 마음에는 이미 그녀를 만나기 전부터 예전의 알리사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스치기도 한다. 그리고 알리사와의 잦은 편지 왕래하는 것도 지쳐만 갔다. 아무리 설득해도 알리사는 종교의 교리를 강조하면서 사랑에 대해 강경한 입장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고 오히려 설득이라기보다는 종교적 논쟁으로 확대되어 서로 다투기 일쑤이니 결국에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한 지상의 사랑의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만다.  

알리사는 이보다 더 심하다. 제롬과의 만남 자체를 두려워하기에 이르며 몸도 점점 약해져만 갔다. 알리사가 죽기 전에 쓴 일기에서 기독교적인 인간의 완성을 위해서 스스로 지상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한 투병의 삶 역시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만족하기에 이른다.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지드의 해석

『좁은 문』이 출간된 지 101년이 지난 지금도 알리사의 태도에 대해서 엇갈린 의견들이 공존하고 있다. 신의 사랑을 위해서 지상의 사랑을 거부하면서 헛되이 죽어가는 알리사를 통해, 비인간적인 자기희생을 추구하는 종교적 교리의 허무함을 강조한다는 평가와, 반대로 알리사를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추구한 ‘성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제롬의 경험을 실제로 겪어봤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상한 작가, 앙드레 지드의 중립적인 해석이다. 그는 자기희생적인 교리를 강조하는 개신교 신비주의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알리사의 행동에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은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드의 중립적이면서도 애매모호한 해석에 대해서 독자들은 쉽게 수긍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종교적 교리에 따르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허구적인 테두리 안에 가두려고 한 알리사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점에 대해서는 지드는 종교의 추구에 대해서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지상의 양식

유년 시절의 지드는 엄격한 종교적 계율을 강요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왔다. 그 시절에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과 자신에게 강요하는 종교적 분위기는 지드를 심신 적으로 병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처럼 그도 외사촌 누이 마들렌을 사랑하게 된다. 마들렌 역시 알리사처럼 지드의 사랑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이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사랑의 방황을 겪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지드는『지상의 양식』이라는 한 편의 산문을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마들렌과의 결혼한 지 2년 뒤인 1897년에 정식 출간하게 된다. 발표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그가 1947년에 노벨 문학상 받은 이후, 그의 처녀작은 뒤늦게 서야 문학적 평가를 받게 된다.  

 

이 작품에서 지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육체와 정신에 대한 자유를 찾으려는 능동적인 태도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 책의 1927년판 서문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간략하게 표현되고 있다.  

 

 

  “나의 이 책이 그대로 하여금 이 책 자체보다 그대 자신에게 - 그리고 그대 자신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도록 가르쳐주기를.“  이것이 바로 그대가『지상의 

  양식』의 머리말과 마지막 문장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지상의 양식』1927년판에 붙이는 서문, 앙드레 지드, 김화영 역, 민음사, p 14 - 

 

그리고 1장에서는 무조건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자를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신을 찾게  

 될 때까지는 어디를 향하여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결국 신은  

 도처에, 아무 곳에나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분,  

 그리하여 사람들은 아무 데서나 무턱대고 무릎을 꿇는 것이다.

  -『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김화영 역, 민음사, p 20~21 - 

 

 

만약에 제롬이 알리사에게 이런 문장을 편지로 썼다면 알리사의 태도에 변화가 올 수 있었을까? 이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알리사의 마음 깊이 박힌 신의 사랑을 한순간에 바뀔리는 없지만, 제롬을 향한 지상의 사랑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신의 사랑으로 포장하여 모순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알리사에게는 이에 대해 스스로 재고해봤을 것이다.  

 

『좁은 문』은『지상의 양식』이 발표된 지 3년 후에 출간되었다. 이 때는 마들렌과의 결혼 생활을 하고 있어서일까?  자신의 처녀작에는 지나친 신앙을 경계하는 생각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 발표한 소설에 등장하는 알리사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지드의 아이러니한 종교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공감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제롬과 알리사.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에 다투던 그들의 사랑싸움은 결국에는 종교적 차이에 의한 대립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알리사의 지나친 종교적 금욕주의로 말미암아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반면, 제롬은 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을 부정하면서도 알리사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좁은 문을 목사의 설교만으로 단정적으로 짓는 무모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알리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알리사가 죽은 뒤에도 알리사를 향한 희망 없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만든 좁은 문을 파괴하기 보다는 오히려 들어갈 수 없는 그 좁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끊임없이 주장하고, 찾고자 했던 ‘사랑’은 결국에는 ‘공감’이었다. 사랑과 공감은 서로 다른 것이다. 지드는『지상의 양식』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 때면 오직 그의 남들과 다른 면 때문에 흥미를 느꼈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공감일 뿐이며 순간적으로 삶의 다양한 형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하라고 말한다.  

 

서로 다른 사랑을 추구한 제롬과 알리사가 빠른 시일 내 헤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한 것은 단순히 이들이 서로 사랑하기 보다는 서로 각기 다른 사랑의 지향점에 대란 공감만 있었던 것뿐이다. 알리사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유화적으로 다가온 제롬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자신은 알리사보다 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도 알리사처럼 종교적 영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알리사는 제롬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더욱 더 공감하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은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었으며 이들의 결혼 성립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생 텍쥐페리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제롬과 알리사, 그리고 우리나라의 철이와 순이처럼 종교라는 하나의 관점을 마주 보다가 마지막에는 파멸을 겪게 되는 것처럼 남녀 간의 사랑도 종교 이외에도 경제적 요건, 성격 차이 등으로 마주 보다가 사랑이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도 오게 된다. 물론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기 위해서는 마주 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고정된 채 마주 볼 수는 없다. 가끔 위나 아래, 옆이든 주위의 시선도 봐야하기 때문이다. 생 텍쥐페리의 말처럼 사랑이 오래 가기 위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연애 미경험자로서 이렇게 해야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관점을 수용하고 조화시키려고 각자가 노력한다면 마주 보던 관점들이 점점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면서 사랑의 갈등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혹시 자신과 배우자의 관계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공감이면서도 억지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랑이라고 우기고 있지 않은지,『좁은 문』을 읽은 연인들은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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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17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멋진 말을 생 텍쥐베리가 했단 말이죠?^^
저도 고전을 좀 읽어야 할텐데 말이죠.
앙드레지드는 중학교 때 필독서로 읽고 독후감 써서 무슨 상까지 받았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지금 님의 리뷰를 읽으니,기억이 너무 새로워 안 읽은 책 같아요~

cyrus 2010-10-17 14:01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살면서 처음 읽은거랍니다. 진짜에요ㅎㅎ
이거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읽은 고전이나 문학작품들도
올해 들어 처음 읽은거랍니다.
예전에는 고전에 관심도 없었는데,,,
올해 군 전역 이후에 고전과 문학에 대해서 슬슬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읽게 되는거 같습니다.

2010-10-17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간 비행 / 남방 우편기 펭귄클래식 37
생 텍쥐페리 지음, 앙드레 지드 서문,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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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을 위한 소네트     

내가 태어난 이래로 아홉 번이나 태양이 자전에 의해 거의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가기를 거듭했을 때 지금 내가 마음속으로 흠모하는 영광스러운 여인이 처음 눈앞에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베아트리체’라고 부르는 바로 그녀가 말이다. (중략)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때 생명의 기운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나보다 강한 신이 있구나. 그가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중략) 그리고 정말로 그때부터 줄곧, 내 영혼과 결혼한 사랑의 신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생』단테 알리기에리, 박우수 역, 민음사, p 19~20 - 
 

이제 막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던 9살짜리 소년은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어여쁜 소녀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의 엑스터시(Ecstasy)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9년 후, 어엿한 청년이 된 소년은 길을 가다가 사랑의 신과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 ‘축복을 내리는 여인’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청년에게는 사랑의 신과의 재회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사랑의 신이 먼저 따뜻한 미소가 머금은 인사를 건네자 청년은 9년 전에 느꼈던 황홀했던 감정을 또렷이 떠올렸다. 그 짧은 만남 이후로 청년의 뜨거운 심장 속에는 베아트리체라는 숭고한 여성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마음속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상적인 프리마돈나(Prima donna)로.  

수줍은 성격의 청년은 베아트리체에 향한 사랑의 감정들을 직접 표현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에 꿀벌들이 모여들듯이 그녀 주위에는 수많은 구혼자들이 몰려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지 못하고 있는 감정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기에 너무나 벅찼던 것일까?  청년은 마음 속 감정들을 마구 토해내듯이 베아트리체를 위한 소네트로 표현하였다.  

축복의 재회 이후 7년 뒤, 베아트리체는 예고 한 마디 없이 신들이 살고 있는 천상계로 떠나고 말았다. 9살 때의 첫 만남부터 16년 동안 사랑의 신 앞에서 고백 한 마디도 못 해본 체 소네트를 쓰면서 사랑앓이를 해야 했던 청년은 망연자실하였다. 메마른 청년의 영혼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준 사랑의 신이 떠나다니. 베아트리체가 죽은 이후에도 청년은 자신의 심장 밖으로 그녀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라틴 어 고전들을 읽어도,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가장이 되어서도 청년은 베아트리체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심장 속에 살고 있는 환상의 여인을 잊지 않기 위해서 소네트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청년은 지금까지 써온 베아트리체를 위한 소네트들을 모아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을 완성하여 발간하였다. 이 책은 훗날 『신곡』이라는 르네상스 문화를 대표하는 장편 서사시를 완성시킨 단테 알리기에리의 처녀작으로 남게 되었다.      

 

   


 하늘을 나는 단테, 자크 베르니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처녀작인『남방 우편기』에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어느 비행사의 삶과 애상(哀傷)의 감정을 서정적이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남방 우편기』의 주인공인 비행사 자크 베르니스는 9살의 단테처럼 어린 나이에 평생 연정을 품게 될 주느비에브라는 여인을 보자마자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느비에브와의 첫 만남 당시 자크의 나이는 13살이었고, 주느비에브는 이보다 두 살 위인 15살이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첫 만남을 13살의 자크도 9살의 단테 못지 않게 순간의 감정을 생명의 약동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도 역사 단테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신적 존재로 부여하고 있다.    

당신은 요정이었던 것이다. 기억이 난다. (중략) 여전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조종 소리 
 를 덮으면서 부엉이들이 사랑을 찾아 서로서로를 불렀다. 떠돌이 개들은 동그랗게 모여 달을  
 향해 짖어댔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갈대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났다. 계속해서 달이 떠오르 
 고 있었다. 그러면 그대는 우리의 손을 잡고 귀를 기울여 보라고 말했다. 우리를 안심시키는  
 좋은 소리는 바로 대지의 소리니까 말이다.》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남방 우편기〕생텍쥐페리, 허희정, 펭귄클래식코리아, 
    p 160~161 - 

베아트리체와 주느비에브와 얼마나 아름다웠길래 두 남자들은 그녀들을 사랑의 신과 요정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베아트리체가 사랑의 신인 아프로디테라면 주느비에브는 요정이 아니라 모든 자연물의 생명력을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연상된다. 자크는 단테보다 한 술 더 떠서 주느비에브와의 첫 만남의 순간을 사랑의 기운으로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식물들을 열거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테의 표현과 비교하면 자크의 표현에는 사랑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단테의 멋들어진 표현은 상투적으로 느끼게 된다.

   
  

 

 

 슬픈 베아트리체, 주느비에브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고백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16년간의 짝사랑은 슬프게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자크는 주느비에브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지만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으며 오래 가지도 못했다.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서 죽었다는 죄책감은 마음이 연약한 주느비에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였다. 주느비에브 자신도 물론 자크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자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활짝 피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크가 자신을 냉담하게 외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의 망상에도 시달리게 된다.

 

주느비에브의 불안정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그리고 사그라지고 있었던 사랑의 불씨를 다시 한 번 지피기 위해서 자크는 주느비에브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다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느비에브의 마음은 조금씩 병들어 가고 있었고, 육체마저도 쇠약하게 된다. 결국, 슬픈 베아트리체는 자크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께요.....  

 

자크는 자신의 애마인 우편기를 통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주느비에브를 향한 사랑의 감정들을 공중 위로 날려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비행기 아래에 보이는 광활한 자연의 대지 앞에서 잊어야 할 감정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만다. 대지 위의 자연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대지의 요정인 주느비에브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에도 우편물을 목적지에 전달하기 위해서 홀로 비행해야만 하는 자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들 사이에서의 비행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행기 주위에 있는 하늘과 대지에 위치하고 있는 모든 자연물들을 죽은 주느비에브의 분신의 일부처럼 여기기도 한다. 특히 그에게는 달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어두운 밤하늘을 훤히 비쳐주는 주느비에브라고 생각한다.    

 

 《‘비가 오나 보군.’  

   손을 뻗자 세찬 빗방울이 느껴졌다. 
   ‘이십 분 후면 다시 해안으로 돌아갈 거야. 거기는 평지니까 덜 위험하겠지.....’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밝아지는 거지!  구름 걷힌 하늘에 별들이 물로 씻긴 듯 말갛게  

   반짝였다. 달은.....  아, 달은 모든 전등 중에 가장 밝게 빛나는 전등이다!  

   아가디르 착륙장이 전기 광고판처럼 세 번 반짝였다.
    “저런 불빛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  내겐 달이 있는 걸.....!”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남방 우편기〕생텍쥐페리, 허희정, 펭귄클래식코리아, p 235 -

주느비에브가 죽고 나서도 위험한 야간 비행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가 주느비에브에 대한 그리운 기억과 오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잠시나마 자연의 광경을 통해서 스스로 달래려는 것이 아니라, 대지의 자연물로 상징되는 주느비에브를 잊지 않기 위해서 홀로 위험한 비행을 자처한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자를 먼저 떠나보내 생기게 된 공허감과 그리움을 잊기 위해서 틈만 나면 소네트를 썼던 청년 단테처럼 말이다.   

  
  

 


 아직 못 다한 이야기

내게 불어오는 바람아 / 너는 내 얘기를 어서 그녀에게 전해주렴
    내 몸을 적시는 빗방울아 / 너는 그녀 향길 어서 내 몸에서 씻어주렴
    내게 내리쬐는 태양아 / 너는 여길 떠나 어서 그녀에게 비춰주렴
    뭐든지 볼 수 있는 하늘아 / 그녈 볼 수 있게 어서 너의 눈을 빌려주렴.

    - 김진표(Feat. BMK) 「아직 못 다한 이야기」중 일부 -   

 

 

생텍쥐페리의『남방 우편기』중 자크의 비행 장면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다. 하늘, 태양, 바람, 빗방울.....  이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구름 위의 세상은 비행사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별천지다. 하지만 이 미지의 세계가 주고 있는 원시적이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악천후 속에서도 자크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행을 하면서 하늘과 대지의 아름다움만 느낀 것이 아니라 자연의 도움을 통해 주느비에브를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주위에 있는 하늘의 자연들은 위험 요소가 아닌 자신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느비에브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하늘을 나는 단테' 자크 베르니스는 새벽 찬 이슬 맞아가면서 비행한 끝에 결국에는 그토록 찾고 싶었던 '하늘의 보물'이며 '베아트리체'인 주느비에브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주느비에브를 만난 곳은 인적이 드문 모래만 가득한 사라하 사막 한가운데에서..... 주느비에브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하늘 위에 빛나고 있는 별을 바라본 채.....  

 

 "여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도다." 

 

단테는『새로운 인생』의 첫 페이지부터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애틋한 사랑은 700여 년이 지난 옛 이야기로 남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가 남겼던 소네트 속에는 이제 막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이 있는 천국에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단테와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이 불멸의 사랑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크 베르니스의 죽음으로써 『남방 우편기』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위험천만한 일에 진심으로 열성을 다해 헌신하며 그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야  

  행복한 휴식을 찾는다

 

  -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서문] 앙드레 지드, p 9 -
 

자크는 주느비에브를 찾기 위해서 위험한 비행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우편 배달 임무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비극적이라기 보다는 사랑과 일에 열중한 한 남자를 위해 신이 주신 행복한 휴식인 것이다. 그리고 단테가 죽어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것처럼 죽어서 주느비에브가 살고 있는 별로 간 자크에게도 이제 아름다운 사랑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다카르에서 툴루즈에 알림. 우편물이 다카르에 잘 도착함.  

 그리고 프랑스-아메리카 우편기의 조종사는 무사히 천국으로 도착했다고 함.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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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10-10-1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생떽쥐베리...
정성 어린 서평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0-10-13 22:55   좋아요 0 | URL
정리가 안 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생 텍쥐페리의 이 작품뿐만 아니라 같이 수록된
<야간비행>도 이야기가 좋답니다. 이 작품 역시
조종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든요.

2010-10-13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3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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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29] 그리스인 조르바

 

 

 

 여러분의 행복지수는 몇 점입니까?

어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넷 사이트를 눈팅하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측정한 결과에 대한 기사였다. 결과가 참으로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할 때가 말하는 것과 먹는 것이란다. 하긴 여자들에게 수다는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먹는 즐거움은 남녀노소 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행복하게 드는 요소인가 보다. 그런데 직업과 나이별대로 행복 지수를 측정하기도 했는데 서로 상반된 결과를 보여주었다. 40대 여성은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에 40대 남성들은 행복하기는커녕 삶에 대한 흥미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40대 남성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이유로는 경제적인 문제와 업무를 꼽았다. 40대 여성의 행복지수가 5점대인 반면에 남성의 행복 지수는 3점대에 불과하다.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평균 행복지수는 대체로 50점을 넘는다. 그리고 이 인터넷 기사에는 기사문을 읽고 있는 네티즌들을 위해서 행복지수를 측정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도 있다.  

 

(사족: 참고로 나의 행복지수는 4.44점이다. 건 뭐 숫자 자체부터 꺼림칙하다. 비록 평균 행복지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측정된 행복지수를 가지고 내 자신이 정말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좀 애매한 점이 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행복지수가 높게 나왔다고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 우리나라 행복지수 측정 결과 관련 기사 및 행복지수 측정 테스트  

(그냥 재미로 한 번 하셔도 좋을 듯)
http://news.joins.com/article/292/4391292.html?ctg=1200&cloc=home|showcase|main

  

 

 

 조르바식 행복론

 

만약에 조르바가 행복 지수를 측정하게 된다면 과연 얼마 정도 나오려는지 궁금하다. 조르바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이런 허접한질문들과 숫자 놀이를 가지고 행복을 측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색을 낼 것이다. 만약에 측정을 하게 된다면 평균 행복지수를 거뜬히 넘을 것이다. 기사문을 계속 읽다보면 ‘행복 십계명’이라는 글이 있다. 재미있게도 십계명 속의 일부 내용들이 조르바가 지향 했던 삶의 방식과 비슷하다.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 N.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p 38~39 -

자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적 가치에 정열을 쏟기보다는 물질적 가치를 얻기 위한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의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돈이 많다고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다. 조르바가 말한 ‘자유’의 정의대로 물질주의가 만든 고상한 정열을 버리게 된다면 자본주의적인 삶에 속박당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있으며, 더불어 행복감도 느끼게 된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중략)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 N.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p 333 -

조르바는 복잡하게 세상을 사는 것을 거부했다. 한 번 생각해서 행동하는 인간이 되기보다는 본능을 따르는 자유로운 ‘짐승’이 되려 하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실천하였고, 자신의 집게손가락일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고민 없이 잘라내고 마는 행동파이다. 남이 뭐라고 하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남의 일에도 그는 개입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의 방식이 쾌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불경스럽기도 하며 혼란스러운 세상에 대해서 지나친 낙천주의에 빠진 인간으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치장을 걷어낸 진정한 삶의 승리자였다.   

 

 

  

 모든 대한민국 40대 아버지, 아저씨들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조르바는 60대의 노인이지만 세상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는 혈기왕성한 젊음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젊었을 때의 호기는 사라지게 되고 일상적인 세태에 순응하게 된다. 그리고 예전과 같은 그런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무딘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조르바는 자신에게 다가올 정신적 변화를 이미 알고 있었고 인생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스스로 대처하고 있었다. 조르바는 행복을 유지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가족과의 단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 보쇼. 보아하니 당신은 악기 하나 못 만지는 모양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집구석에 들어가면, 있는 건 근심 걱정뿐..... 마누라가 그렇고, 새끼들이  

  그렇잖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장차 이러다 무엇이 될까? 이런 젠장,  

  이래선 안 돼요. 산투르를 치려면 환경이 좋아야 해요. 마음이 깨끗해야 하는 거예요.  

 

   - N.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p 22 -

조르바가 원하지 않는 삶이 지금 우리나라 40대 남성들의 모습을 보는 거 같다. 이 소설이 나온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버거웠던가 보다. 특히 대한민국 40대 남성을 대변하는 아버지들은 오늘도 가족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의 짐을 짊어지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열심히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급여는 부족하기만 하고, 집에 있는 마누라는 돈 많이 못 벌어온다고 바가지를 긁어대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뭐 사달라고 조르기만 한다. 그렇다보니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불편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조르바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자유분방한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비결이 옳다고는 볼 수가 없다. 조르바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삶의 방식일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불만, 근심, 걱정과 같은 부정적인 사고에 지배당하면 정작 우리 눈 앞에 가까이 있는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환경과 방식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남성들의 성격상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나약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 줄까봐 고민을 털어 놓는 것을 꺼려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행복이 스스로 찾아올까? 행복이 자신에게 찾아오게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고민을 가족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하고, 가족들은 아버지의 고민을 공감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이 있는 보금자리야 말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최선의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과 자유를 예찬하는 이 책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특히 인생의 참 맛을 느끼고 있을 대한민국 40대 아저씨들 그리고 아버지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단, 앞에서 언급했던 자유를 찾기 위한 가정생활에서의 도피나 조르바마초 기질은 소설 속 내용이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넘어가시길. 괜히 실천에 옮겼다가는 가정 파탄(?)이 생길 우려가 있다.

조르바의 삶의 방식은 자유과 행복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치게 그의 삶을 찬양만할 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인생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삶의 진리를 제시할 뿐이지 무조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인생의 자습서가 아니다. 학창 시절에 숙제로 낸 수학 문제들을 풀기 싫어서 참고서에 베끼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행복이라는 답을 찾기 위한 삶의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나가지 않고 타인의 삶이나 책에 의지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렇게 된다면 남은 일생을 번뇌에 시달리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자신보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에서 행복을 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행복은 자신과 같은 높이에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눈높이에 맞추게 되면 숨어 있었던 행복이라는 존재가 보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그리스인 조르바』가 대한민국 40대 모든 분들에게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그만 도움이 되는 책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다음에는 모든 40대 아버지들, 아저씨들이 행복해하는 희망찬 뉴스가 날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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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10-1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에 얽매어 살아야 하는 남자들에게 책을 통해서나마 거침없는 자유인(사실상 난봉꾼)을 만나는 기쁨을 누려보라고 카잔차키스가 선물을 마련했구나 하고 생각해야죠.실제로 조르바 같이 산다면...욕을 엄청나게 얻어먹을 겁니다.

cyrus 2010-10-12 16:28   좋아요 0 | URL
저도 조르바를 읽으면서 이 사람의 행동과 쿨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지만..
간혹 배워서는 안 되는 것(?)도 있더라구요ㅎㅎ^^;;
그래도 이 책을 젊은 시절에 읽었다는 사실에 뿌듯하답니다.
물론 나이가 지나서도 읽어도 되는 고전이지만
대한민국 많은 중년 남성분들이 젊은 시절에 많이 조르바를
많이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리뷰에도 40대 남성 기사 내용과
연관시켰습니다.

2010-10-12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0-10-12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 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영혼을 가진 남자죠. 저도 조르바의 무모함에 기가 질리긴 했지만 그가 삶과 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막힘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는 점은 카찬차키스처럼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선입견,편견 없이 사물을 대하고 노래하고 행동하는.잊었던 한 남자를 키로스 님 글에서 보고 갑니다.
저는 행복지수 59.3 나오네요...^^ 감사~~

cyrus 2010-10-12 16:3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이런 그리스에 이런 걸출한 작가와 작품, 그리고 개성이 강한
캐릭터가 나왔다는 점에 저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카잔차키스가 두 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데,
생전에 받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1 범우 세계 문예 신서 14
리처드 F.버턴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2년 12월
평점 :
품절


 

 

[1001-1] 아라비안나이트

 

 

 무모한 천일야화 도전


이번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주최한 리뷰 이벤트에서 운이 좋게 당첨이 되어 『천일야화』세트를 받게 되었다. 원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세트 중 랜덤 발송이었지만 이미 『신』세트 모두 소장하고 있던 터라 뭐 어떻게..... 저렇게 하여.....『천일야화』세트를 받게 되었다. 사실 『천일야화』세트를 받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어릴 때부터 읽었던 축약본 아라비안 나이트가 아닌 완역본의 고전을 서재에 있다는 자체가 기뻤다. 그리고 1001Books 독서 프로젝트 목록에도 『천일야화』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번 당첨이 나의 독서에 큰 활기를 불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천일야화』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리처드 F. 버턴 (1821~1890) 판이 아니다. 버턴이 번역하기 100여 년 전에 이미 프랑스의 앙투안 갈랑(1646~1717)이라는 작가가 방대한 이슬람의 전설과 민화를 번역한 것이다. 이슬람 문화를 유럽에서 최초로 소개한 사람을 리처드 버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앙투안 갈랑이 먼저이다. 이 책에 대한 알라딘 서지 정보에 의하면 발행 당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면 괴테, 스탕달 등의 작가에도 큰 영향을.....  

 

이야기가 갑자기 앙투안 갈랑 버전의『천일야화』로 새는 거 같다. 자세한 정보는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검색해서 찾아보시길. 어차피 앙투안 갈랑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읽고난 뒤, 리뷰에 언급해도 되니깐..... 설명은 여기까지 하겠다.   

  

각설하고, 이제 리처드 버턴 판의 『천일야화』아니, 범우사에서 출간된 『아라비안 나이트』에 대해서 글을 시작해보겠다. 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 1001권』에는 당연히 리처드 버턴 판이 소개되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라면 리처드 버턴이라는 이름의 꼬리표는 항상 붙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좀 망설였다. 출간된 지 무려 17년 정도 되었으며(초판 발행 시기가 1992년 12월이다!) 이미 몇 년 전에 쓴 리뷰에는 이 책에 대한 찬평을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있어서 읽는 내내 지루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같은 형태의 이야기가 나온다.....  

   몇 권부터는 번역이 엉망이다..... 등등.      

 

간혹 평이한 칭찬과 책 속 일부 이야기들을 리뷰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대체로 후반부의 권수로 갈수록 그다지 그렇게 좋은 평의 리뷰가 없다. 그래서 범우사판 시리즈를 두고 보류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이벤트에 덜컥 당첨되어서 안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도서관에 당당히 서가에 꽂히고 있어서 최장수 출판 책으로서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래서 열린책들 세트가 집으로 배송될 때까지만 1권만 읽기로 하였다. 딱 1권만.....  

 

우여곡절 끝에 1권을 빌리게 되었는데 나와 친분이 있는 동네 도서관의 스마일 사서(남성인데 성격이 무척 착해서 도서관 사서 중에서 제일 친절하고 항상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분이다)가 나에게 1권을 가리키며 씩 웃으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건투를 빕니다."   

    ...... ??

 

그 말을 바로 듣자마자 이해를 하지 못한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을 본 사서는 본인도 헌책방에서 범우사판 시리즈를 헐값에 구입해서 읽었는데 4권까지 읽다가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버턴이 쓴 완역판이라서 범우사 시리즈가 최고인 것은 인정하였지만 역시나 이 책의 구성의 단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가에 2~4권이 안 보이는데 그 부분의 권수는 보존서고에 보관되어 있냐고 물어봤다.  출간된 지 오래된 책은 보존서고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컴퓨터에 검색하고 난 뒤,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마일을 활짝 지으면서  

사서가 하는 말.....

  

    "네, 보존서고에 있구요..... 만약에 다음 2권도 읽고 싶으면 

    저에게 이야기하세요. 언제든지 빌려드릴께요."   

    ..... ?! !!!! 

 

나는 의도적(?)이지 않은 사서의 친절한 말에 무심결에 '네' 하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시리즈를 완독하려는 무모한 시민이 되고 말았다. 1권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음 권도 안 읽어도 되는 일이지만 스마일 사서의 친절한 표정을 보니 안 읽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스마일 사서는 4권까지 읽다고 포기했는데 나는 1권부터 포기하면 X팔리지 않은가! 

  

은연중에 드러난 독서에 대한 알랑한 자존심이 시리즈 도전에 대한 포기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읽는데 괜찮으면 다음 권도 읽을 생각이다. 솔직히 1권은 좀 무난하였다. 읽다가 중간에 지루한 느낌은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친절한 스마일 사서가 나의 독서 프로젝트 도전을 할 수 있게 해준 숨은 공로자였던 것이다.  

 

 

아! 아라비안 나이트 특유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구성에 혹한 나머지 이상하게도 리뷰도 길어지게 되었다. 이제 진짜로 내용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사실 1권에는 그렇게 기억이 나는 이야기가 없다. 왜냐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나중에 기억이 남는 이야기가 없다.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도중에  새로운 이야기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인해서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뭐 계속 읽다보면 적응은 되지만..... 그래도 읽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1권에서 기억나는 이야기라곤 수많은 여자들과 하룻밤의 동침을 하고 난 뒤에 잔혹하게 죽이는 샤리야르 왕의 이야기, 그리고 운명의 여인 샤라자드(요즘은 세헤라자데라고 하는데 출판 당시 외국어 표기법에 의거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샤라자드’라고 표기하고 있다)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외설적인 대화와 삽화들이 기억이 날 뿐이다. 어린이용 축약본이 있는 이유가 원전에 있는 외설적이면서도 잔혹한 내용들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원전에는 샤리야르 왕이 자신의 아내와 흑인 노예의 불륜 장면을 본 뒤에 열 받아서 여성들과의 잔인한 동침을 하게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고, 요즘에 나오는 어린이용에도 이야기의 시작을 샤라자드가 샤리야르 왕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부터 일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초반부터 불륜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곤란하다.    

  

1권에는 우리가 아는 캐릭터인 신드바드나 알리바바의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온다. 그래서 내용이 좀 낯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딱 하나 온전히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으니..... 그것은 ‘왕과 매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야기에 나오는 왕의 이름이..... 신드바드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신드바드가 아닌 동명이인의 인물이다)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신드바드 왕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는 매 한 마리가 있는데, 어느 날에 사냥하는 도중에 왕이 무척 갈증이 나서 눈 앞에 마침 물방울이 흐르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왕은 나무에 흐르는 물을 잔에 받으려고 하는데. 자신의 매가 발톱으로 잔을 엎질렀다. 매의 기이한 행동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왕이 계속 잔에 물을 받으려고 하면 또 매가 잔을 엎질러버렸다. 이에 왕은 무척 화가 나서 단번에 매를 죽이고 말았다. 이제 곧 숨이 멎게 될 매는 왕에게 나무 위를 보라는 몸짓의 신호를 보냈다. 왕은 다 죽어가는 매의 신호에 따라 나무 위를 응시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독사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알고 보니 독사들의 입에서 나온 독인 것이었다. 뒤늦게 매의 행동을 알게 된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매를 죽인 것에 대해 큰 후회감에 목놓아 울면서 후회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방이 무슨 의도로 행동이나 말을 하는지 잘 헤아려보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이야기 말고도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비난하거나 삶에 대한 교훈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원전이 단순 성인용은 아닌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변강쇠 타령>이나 <고금소총>과 같은 성(性)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듯이 이슬람 인들도 성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자유분방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다. 
  

1권의 또 다른 특징은 버턴이 번역본을 출판 당시 쓴 머리말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라비안 나이트 판본의 역사(물론 앙투안 갈랑 판본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 그리고 아랍 어에 대한 언어 법칙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말이 무려 23페이지나 할애되고 있다.  

  

분량도 많은 것도 있지만 버턴은 머리말에서 자신의 번역이 이전의 번역보다 월등히 훌륭한 점들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가면 설명하고 있어서 읽기에 지루하다. 자신의 정통된 이슬람 어 사용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번역본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정도 가지고 영국인 버턴이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 식견이 넓고, 본인도 유럽에서의 이슬람 문화의 전파를 주장할 정도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유독 강했던 이유는 머리말의 후반부에 알 수 있다.  

 

   요즈음 영국은, 자국이 세계 최대의 이슬람교도국임을 차차 잊어가는 모양이다.  

   또한 최근에는 조직적인 아라비아어 연구를 경시하고, (중략) 인도 문관(文官)의 임용시험 

   에서조차 조금도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 갑자기 이슬람교국에서 통치권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근소한(지극히 근소한) 우리 우방마저 분개시키고 마는 결과가 되어 결국  

   실패를 겪게 될 것이다.  

 

    - 『아리비안 나이트 1권』[영역자 버턴의 머리말] 리처드 F. 버턴. 김병철 역, p 26 -   

 

영국이 이슬람교도국이라.....??   '인도' 문관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인도를 식민지 삼아 지배하는 영국의 통치 상황을 알 수 있다. 버턴이 아라비안 나이트를 번역, 출간한 시기가 1885~1888년이다. 인도는 1857년에 무굴 제국 멸망 후, 영국의 식민지국이 되었고, 1877년에는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이 인도의 여왕이 된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버턴이 왜 영국을 이슬람교도국이라고 자처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버턴은 한술 더 떠 이슬람교도를 지배하는 자는 이슬람 교의 문화와 언어를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습득 방법에는 자신이 번역한 아라비안 나이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다.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했던  근대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의 성향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1권은 무난하게 읽었지만 다음 2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앙투안 갈랑 번역본을 읽기 전에 잠깐 버턴 번역본 1권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일단 2권도 읽어 보기로 하였다. 원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드바드, 알리바바 이야기 정도는 읽어봐야 할 거 같기 때문이다. 2권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몇 권까지 읽을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일단 읽을 수 있을 능력이 될 때까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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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차드 버턴이고,앙투안 갈랑이고를 떠나서...
어릴때 만화책으로 말고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ㅠ.ㅠ

cyrus 2010-10-07 21:41   좋아요 0 | URL
아무리 버턴 본 번역판이 세계적으로 알아준다고 해도...
뭐니뭐니해도 그냥 만화로 읽는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아예 원전을 만화화한 아라비안 나이트가
출간되었으면 좋겠네요. 오히려 만화가 더 읽기가 쉽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10-0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헌책방에서 40년전 번역된 정음사판을 사서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물론 버튼 판이죠.매 이야기는 징기즈칸의 일화에도 나옵니다.민족이나 국적을 떠나 비슷한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cyrus 2010-10-07 19:05   좋아요 0 | URL
어! 저도 칭기즈칸 생각 했었는데..
나무에 물을 마신다는 점만 다를 뿐
내용과 결말이 같죠ㅎㅎ
그래서 1권의 내용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남는 거 같습니다.
사실 리뷰에 칭기즈 칸 일화를 언급하려다가
리뷰가 아라비이안 나이트화(?)될까봐 언급 안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07 23:01   좋아요 0 | URL
아하...역시 징기즈칸 이야기...아무래도 그게 연상된다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