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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원문 http://cafe.naver.com/openbooks21/742
네끄라소프처럼 독서하기
새벽 2시, 밤이 깊으면 깊어질수록 편의점에 들어오는 손님의 인적은 드물어지고, 편의점 안에 있는 것은 오직 나와 진열된 물품뿐이다. 조용하다 못해 너무 고요하다. 딱 잠이 몰려올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이다.
2년간의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마친 뒤, 사회로 복귀하여 3개월째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 아르바이트로 편의점 카운터로 일하고 있다. 군인 시절에도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했던지라 전역을 하고나면 원 없이 잠을 실컷 잘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회에 나와서도 야행성 활동은 계속 되었다. 아르바이트 모집 전에 편의점 사장님과 면접을 하면서 군 생활 시절에 많이 밤새봤다면서 나를 고용해달라고 자신 있게 어필했었건만 진짜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줄이야.....
편의점 안에 혼자서 카운터에 앉는 것도 그리 편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속도는 느리지만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다. 심심하면 간혹 열린책들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들을 읽으니깐. 그러나 쏟아져오는 잠을 못 이기지 못해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은 항상 느끼게 된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많지 않은 잠으로 지쳐있는 정신을 회복시키고 점심시간에 일어나면 그 때 몰려오는 피곤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낙천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일도 나름 장점이 있긴 하다. 카운터에 앉아 있으면 멍 때린다거나 컴퓨터 모니터만 보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공부와 독서를 한다. 새벽 2~3시 이후부터는 손님이 드문드문 오게 되고, 편의점 내부는 조용해서 공부와 독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편의점에서 읽었던 책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처녀작『가난한 사람들』이다. 광대한 도스또예프스키의 문학 지대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 관련된 일화가 재미있다. 러시아의 시인 네끄라소프가 밤 새워 가면서 이 작품을 끝까지 완독하자마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권위 있는 문예 비평가였던 벨린스키에게 원고를 주면서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라는 말을 남겼단다. 당시 신인 소설가였던 도스또예프스키의 천재성을 한 눈에 알아 봤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얼마나 훌륭했기에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신인 소설가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걸까?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무지의 상태에서 나도 네끄라소프와 심정을 느끼면서 그의 처녀작을 밤 새워 읽게 되었다.
네끄라소프도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이 작품을 접했을 것이다. 책은 새벽 2시부터 읽기 시작했다. 간혹 몇 몇 손님이 들어와 흐름이 끊기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독서를 하는 도중에 피곤함이라는 불청객은 찾아오지 않았다. 4시 10분에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러시아의 우석훈이 나타났다.”
공포 경제학적 소설
작품 속 남녀 간의 러브 스토리에는 당시 러시아 빈곤층의 현실과 애절함이 숨어져 있다. 보통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과 상대적 박탈감이다.『가난한 사람들』속에 숨겨진 공포의 경제학을 발견하면 서늘한 진실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88만원 세대』출간했던 당시, 우리나라 기성세대들 뿐만 아니라 88만원 세대들까지 우석훈 박사의 지적에 대해서 당혹감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처럼...
3년 전, 어느 경제학자가 쓴 독특한 제목의 책이 서점가뿐만 아니라 사회에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름은『88만원 세대』. 이 한 권의 책은 우리나라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의 현실과 이로 인해서 발생한 세대 간의 경제학적 갈등을 날카롭게 집어내고 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20대들은 ‘88만원 세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직함을 달게 되었다. 이 책은 우석훈 박사의 단독 저작이 아니라 박권일이라는 사회부 기자와 함께 쓴 것이다. 그래서 박 기자 특유의 취재의 눈은 88만원 세대가 겪고 있는 어두운 생활 모습을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다. 우석훈 박사는『88만원 세대』출간 이후에도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포함해서 4권 정도 나왔다. 그의 책들은 공통적으로 사람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불편한 사회적 진실들을 경제학적 관점으로 비판, 분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의 연구 활동을 ‘공포 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스또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도 일종의 공포 경제학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전제적인 작품 구성은 가난한 하급관리 마까르 제부쉬낀과 역시 가난한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의 연애 모드로 설정하고 있다. 서술도 두 사람 간의 서신 교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얼핏 보면 그냥 가난한 연인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연애하는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 있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가볍게 읽을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편지 내용에는 두 인물이 처하고 있는 상황을 알 수 있는 구절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제부쉬낀은 넥타이와 셔츠 하나도 일 년에 한 번 살까 말까 하는 정도의 가난한 상태이다. 재미있게도 알렉세예브나는 그런 제부쉬낀을 동정하면서도 제발 가난한 티를 내면서 살지 말라고 사랑의 잔소리(?)를 하기도 한다. 자신도 제부쉬낀을 동정하고 챙겨줄 수 있는 그런 부유한 입장도 아니고 그럴 잔소리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의 가난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알렉세예브나가 시골 농장 대지주인 비꼬프와 청혼하기 때문이다. 알렉세예브나의 청혼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보낸 제부쉬낀의 마지막 편지에는 사랑의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 가난한 처지와 사랑의 실패가 제부쉬낀을 두 번 죽이게 된 셈이다.
가난이 죄인가요?
제부쉬낀은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겨냥한 알렉세예비치의 잔소리가 불편했던 것일까? 결국에는 참고 있었던 불편한 감정을 편지를 통해서 털어 놓는다.
하지만 나의 소중한 친구여,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이런 소릴
한다고 화를 내지는 말아요. 제 가슴속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까다로운 법이죠. 선천적으로 그래요. 이미 옛날부터 느끼고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이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들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 도스또예프스키『가난한 사람들』석영중 역, p 129 -
이 구절을 보게 되면 인간의 심리 묘사에 대한 도스또예프스키의 뛰어난 관찰력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쓰고 있을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의 빈곤층들의 마음은 같을 것이다. 단지 '가난'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하는 따가운 시선은 빈곤층들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며칠 전에 빈곤층 자녀일수록 정서 불안이 심각하다는 통계의 기사를 접했다. 특히 열 명중 한 명 꼴로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의심 증상이 있다고 한다. 이런 빈곤층 자녀와 ADHD 발병의 상관 관계의 원인을 자녀를 향한 빈곤층 부모의 소홀한 훈육과 일반 가정보다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점을 들고 있으며 낮은 경제력 때문에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또 다른 원인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권위 있는 연구소의 자료라도 그냥 믿어버리지 말고 꼼꼼히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단순하게 빈곤층 가정 입장 쪽으로 원인으로 몰아가는 주장을 그대로 믿게 되버리면 오히려 빈곤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꼴이 된다. 정신학계에서는 ADHD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정하여 밝혀진 바가 없으며 다만 여러가지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원인을 추측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 중에는 정서 박탈 같은 심리 사회적인 요인도 정서 장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빈곤층 아이들에게 향하는 주위의 시선들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봉원 어린이의 추억
그런 예를 쉽게 들어보자면, 8월 18일에 방영된 <황금어장 -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개그맨 이봉원 씨가 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언급을 하는데 사실은 지금과 같이 성격이 쾌활하지도 않았으며 의외로 어렸을 때 무척 내성적이고 소심했다고 밝혔다. 허름한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살 정도로 집안이 너무 가난했었고 얼마나 가난했었으면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가면 옷도 만날 같은 것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봉원 어린이(?)의 짝꿍은 당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예쁜 여자아이였는데 가난한 티를 내고 다니는 봉원 어린이를 무척 싫어했던가 보다. 얼마나 싫어했었으면 책상에 선을 그어 봉원 어린이에게 선 넘어 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대부분 남성이라면 옛 초등학생 시절에 한 번쯤은 겪어봤을 상황이다. 그래서 여자 짝꿍의 어이없는 으름장에 대항하여 자신의 책상 권리(?)를 찾기 위한 대립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소심한 봉원 어린이는 그만 주눅이 들어 하루하루를 긴장감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손가락 하나라도 짝궁의 책상 범위로 넘어오지 않기 위해서..... 이봉원 씨는 녹슬지 않은 재치있는 개그로 썩 유쾌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재미있게 풀어놓았지만 지금의 빈곤층 아이들의 불안한 마음은 아마도 어린 봉원 씨가 느꼈던 심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몇 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보이지 않는 벽을 통해서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옛 말?
지금은 과거보다 경제도 좋아졌고 대부분 잘 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봉원 씨와 같은 이런 웃지 못할 상황은 당시 못 살았고 소박했던 시대의 재미있는 추억으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있다. 특히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녀를 낳아 기르는 부모가 된다면 곤란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들에게 가난한 집안의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교육을 할 것이다. 어렸을 때 가난한 짝꿍과 어울리면 괜히 자신도 가난한 아이로 볼게 될까봐 책상 위에 선을 그었던 것처럼 그런 부모들은 자신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마음껏 뛰어 놀고 어울려야 할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도 선을 그어놓는다. 더 무서운 사실은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똑같이 따라하는 습성이다.
그런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부모의 못된 생각을 되물림받게 된다. 자신의 이상형은 무조건 돈이 많아야 하며, 대기업 임원과 같은 생활이 보장되는 사람을 만날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성격보다는 우선적으로 배우자의 직업, 재산 보유 그리고 집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 먼저 따지고 보려고 한다. 결국 가난한 형편인 사람들에게는 결혼은 그림의 떡이다. 이제 가난한 사랑이라는 것도 그들에게는 꿈꿀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연애일 뿐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가난한 사랑 노래』중에서 -
이 시처럼 가난하고 애틋한 추억의 감정이 있는 사랑은 이제 옛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이 시 구절처럼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려야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자포자기한다거나 현실을 비정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간혹 우리보다 힘든 생활고에 살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분들은 세상에 대한 믿음과 진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지만 그런 분들이 있기에 차갑기만한 현실 속에서도 아직도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축복인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