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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놀 -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ㅣ 세창클래식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0월
평점 :
평점
4점 ★★★★ A-
얼굴은 얼(정신)이 뭉쳐진 신체 부위다. 시간이 지날수록 얼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매일매일 성장한 얼굴에 한 사람이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책의 얼굴도 그렇다. 서문은 독자가 맨 처음 마주하게 되는 책의 얼굴이다. 책은 자기 얼굴을 절대로 숨기지 않는다. 책이 독자에게 알리고 싶은 본문의 핵심이 얼굴에 다 나타난다. 서문이 책의 얼굴이라면 본문은 책의 몸통이다. 대부분 글쓴이는 책을 쓸 때 서문부터 쓴다. 그런데 니체(Nietzsche)는 정반대의 순서로 책을 쓴 철학자다. 그는 본문을 먼저 썼으며 서문은 몇 년 지난 후에 썼다. 니체에게 서문은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마침표다.
《아침놀: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은 니체가 1880년부터 쓰기 시작한 책이다. 이듬해에 나온 초판은 서문이 없다. 《아침놀》은 얼굴이 없는 책으로 태어난다. 니체는 1886년에 《아침놀》 서문을 쓴다. 초판이 나온 지 6년이 지난 뒤에 얼굴 있는 《아침놀》 재판이 나온다. 니체는 책을 쓸 때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항상 글을 천천히 썼다. 곡을 직접 만들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 니체는 자신과 본인의 책을 느리게 연주하는 방식인 ‘렌토(lento)’로 비유한다. 《아침놀》은 잠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아침놀》이 음악이라면 잠언은 음표다. 니체의 짧은 글을 단번에 읽으려고 하면 글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성급하게 읽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을 숭배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거부한다. 그에게 도덕은 뜨겁게 빛나야 할 인간의 삶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해로운 밤안개다. 도덕으로 흐릿해진 사회 속에서 인간은 ‘도덕의 노예’가 된다. 도덕은 자신을 따르는 노예에게 명령한다. “생각해서는 안 되고 말도 적게 하라. 여기서는 오로지 복종만 해야 한다!”[주1] 도덕의 노예는 솔직한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누른다. 도덕에 짓눌린 인간의 얼굴에 ‘나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니체는 《아침놀》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도덕과의 한판 전쟁을 선포한다.
니체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기 전에 먼저 읽어야 할 니체의 책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이 사람을 보라》, 《도덕의 계보》, 《우상의 황혼》이다. 이 세 권의 책 또한 니체의 주저라서 《아침놀》은 ‘니체 철학 필독서 목록’에 끼지 못하고 겉도는 책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아침놀》은 니체 철학을 이해하는 데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 ‘권력에의 의지(힘에의 의지)’와 ‘초인(위버멘쉬)’의 의미를 설명한 잠언이 나온다. 니체가 《아침놀》 서문을 쓰기 직전인 1885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이미 완성된 연도다. 1885년과 1886년은 천천히 만들어진 니체 철학이 충분히 무르익은 시기다.
《아침놀》은 느리게 읽어야 할 책이다. 니체는 천천히 읽으라고 당부한다. 《아침놀》은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도 되는 책이기도 하다. 니체는 독자에게 《아침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아침놀》은 ‘가끔 펼쳐서 읽기 위한 책’이다. [주2] 니체는 서문에서 ‘완벽한 독자와 문헌학자’가 이 책을 원한다고 했다. 그의 말에 부담을 갖지 말자.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니체는 논리성을 포기한 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잠언을 썼다. 니체에 맞서는 독자는 《아침놀》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읽을 수 있다. 잘못 읽는 최악의 독서를 한다고 해도 결국 스스로 읽어야 한다. 인간은 방황을 거듭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끔찍한 방황과 연습’을 경험하면서 지식을 얻는다.[주3]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언제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 자신이 직면하는 오류와 한계를 스스로 넘어서는 인간이야말로 니체가 《아침놀》에서 강조하는 초인이다.
[주1] 《아침놀》 서문, 16쪽.
[주2] 《아침놀》 잠언 454, 479쪽.
[주3] 《아침놀》 잠언 452, 478쪽.
<cyrus의 주석과 정오표>
* 39쪽, 옮긴이 주 43
『아침놀』에서 ‘권력에의 의지’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1906년에 출간되는 유고집[주4]의 제목이 되기도 한다. 특히 ‘권력’으로 번역된 ‘Macht(마흐트)’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다. 권력이라는 단어는 언제부턴가 근대적인 어감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흔히 ‘힘’으로 번역됐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만이 진리라고 틀을 정해 버리면 문제가 된다. 니체는 후기에 들어서 주인 도덕을 노예 도덕과 비교하면서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초인은 이런 주인 도덕과 주인의식으로 충만한 존재다. 니체는 그러니까 자기 삶에 주인이 되는 그런 도덕을 요구했다.
[주4] 니체의 유고집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초판은 1901년에 초판이 출간되었고, 1906년에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Elisabeth Förster-Nietzsche)와 니체의 친구 페터 가스트(Peter Gast)가 니체의 유고를 임의로 엮은 책으로, 니체의 저작물로 분류되지 않는다.
* 279쪽, 잠언 192
그리고 또 예를 들어 프라피스트[주5] 수도회의 창시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수도회의 창시자는 기독교의 금욕적 이상을 예외적인 프랑스인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프랑스인으로서 정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원문]
Da steht der Gründer der Trappistenklöster, er, der mit dem asketischen Ideale des Christenthums den letzten Ernst gemacht hat, nicht als eine Ausnahme unter Franzosen, sondern recht als Franzose.
[주5] ‘트라피스트’의 오자. 박찬국 교수가 번역한 《아침놀》(책세상, 2004년) 206쪽 참조.
* 340쪽, 잠언 237
거의 모든 정당에는 우습기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벼이 넘길 것은 것은[주6] 아닌 그런 곤경이 생겨날 수 있다.
[주6] 넘길 것은 것은 → 것은
* 344쪽, 잠언 240
죄 그 자체와 그 죄로 인해 발생한 나쁜 결말 따위는 셰익스피어나 아이아스, 필록테테스, 「오이디푸스」의 소포클레스[주7] 같은 시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죄 자체를 연극의 지렛대로 삼는 것은 상당히 쉽겠지만, 이런 시인들은 그런 일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비극 시인도 삶에 대한 자신의 비극적 형상을 통해 삶에 등을 돌리려 한 것은 아니다!
[주7] 아이아스(Aias), 필록테테스(Philoctetes), 오이디푸스(Oedipus)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작품 제목이자 작품의 주인공이다. 홑낫표(「 」)는 작품 제목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문장 부호다. 따라서 아이아스와 필록테테스에도 홑낫표를 표시해야 한다.
* 360쪽, 옮긴이 주 335
루터는 당시 교황이었던 루이 10세[주8]에게 반항적이면서 교훈적 의미로 헌정했던 『그리스도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에서 ‘구속의 자유’라는 이념을 펼쳤다.
[주8] 루이 10세(Louis X, 1289~1316)는 프랑스 왕이다. 1520년에 활동한 교황은 레오 10세(Leo X, 1475~1521, 재위: 1513~1521)다.
* 558쪽, 옮긴이 주 529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탈리아의 항해사다. 그는 항해를 떠나기 전에 부호들로부터 후원받을 요량으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또 설명하기 위해 탁자 위에 달걀을 세우는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고 한다. [주9]
[주9] ‘콜럼버스의 달걀’로 알려진 이 일화는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탐험가인 지롤라모 벤조니(Girolamo Benzoni)가 1565년에 발표한 <History of the New World>에 언급되었다. 하지만 벤조니의 책이 나오기 15년 전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한길사 번역본 기준으로 2권)에 콜럼버스의 달걀과 비슷한 일화를 언급했다. 달걀을 세운 주인공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세운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다. 대성당 돔의 설계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달걀을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