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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 제24회 영남일보 책읽기賞 독서감상문 대회에 출제한 글입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인간은 뇌가 있음으로써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기록한다. 무기를 발명해 맹수나 큰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도, 농업을 통해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도 모두 뇌의 덕이다. 자연계를 통틀어 농사를 짓고 산업을 일으킨 종은 인간이 유일하다. 실제로 사회성이 높은 생물들은 하나같이 지구상에서 가장 영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명한 인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류가 똑똑할지는 몰라도 결코 현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룩한 문명을 통해 굶주림, 질병, 폭력 등을 막을 수 있는 보호막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인간은 희망과 환상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현재가 과거보다 나아졌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나아질 것이라 믿고 싶어 한다. 첫 번째 믿음은 신(god)이 존재하며, 이 세계에는 장엄한 신의 계획이 내재하여 있다는 것이었다. 인류는 수천 년간 권위는 신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다음은 진화론이다. 진화론의 등장으로 신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인간은 진화론을 내세워 자신의 우월성을 정당화했다. 진화가 인간이라는 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진행되는 과정이며 인류의 발전은 곧 진보의 역사라고 믿었다. 거의 맨몸으로 짐승을 사냥하며 생활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지금의 인간은 엄청난 진보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놀라운 과학 문명의 발달로 편리한 물품과 풍족한 음식에 둘러싸여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점에서 인류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는지 한 번은 의문을 가져볼 만하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책의 제목은 매우 도전적이다. 호모 데우스의 등장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더 우월한 종의 탄생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암묵적 두려움의 근원을 표면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작 《사피엔스》(김영사, 2015)로 전 세계인들로부터 단숨에 주목받은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또 한 번 술술 읽히는 언어로 넓은 오지랖을 과시하고 있다. 농업 혁명부터 과학 혁명까지, 전통적 인본주의에서 기술적 인본주의까지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어렵거나 심각하지 않게 미래의 총체 상을 손에 잡힐 듯 그려준다.
인류는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 없어!’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하라리는 전통적 인본주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지능과 의식이 출현했듯이 인간과 비슷한 알고리즘의 등장으로 자유의지의 의미가 희미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온라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정보를 선택해서 읽고 공유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는 알고리즘 체계 내부에서 제한된 선택만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검색엔진이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는 알고리즘의 거대한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거대한 알고리즘의 체계 속에 살고 있으며 현대사회는 알고리즘에 의해 조합되는 사회라 부를 수 있다.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회에 데이터(data)를 숭배하는 새로운 신흥 종교 ‘데이터 교’가 등장한다. 기술의 진보가 가져다준 혜택을 누린 인간은 더 이상 한계를 갖지 않는 신을 만들려고 한다. 하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류가 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생명공학과 사이보그 기술에 힘입어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는 데이터 교를 만들어 낸다. 하라리는 데이더 교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 인류는 신체적 · 정신적 측면에서 상당한 한계에 직면한다고 전망한다. 데이터 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면 결국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모두 알고리즘의 결과가 되는 셈이다. 자신의 판단 따윈 사라지고 모든 것을 데이터에 의존하게 된다. 하라리의 전망이 허황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볼 상상임이 틀림없다.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경고하기 위해 방대한 인류사를 책 한 권에 빼곡히 담아냈다. 근성이 느껴지는 그의 자료 수집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호모 데우스》를 냉정하게 단 한 줄로 평하고 싶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데이터가 지배하는 세상을 경고하는 하라리의 주장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리고 우린 이미 알고리즘이 주는 편익에 익숙해졌다. 어떤 언론은 《호모 데우스》 서평 제목을 ‘하라리표 호러 극’이라고 썼다. 그 제목을 보면 마치 밀레니엄이 임박한 데 따른 공포감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호들갑 떨던 언론들의 모습이 떠올린다. ‘호러 극’은 과장된 표현이다. 데이터 중심의 사회를 경계하는 전망은 빅 데이터의 강점이 주목받던 2013년부터 나왔다. 빅토르 마이어 쇤버거와 케네스 쿠키어 공저의 《빅 데이터가 만드는 세상》(21세기북스, 2013), 루크 도멜의 《만물의 공식》(반니, 2014), 한병철의 《심리정치》(문학과지성사, 2015)만 읽어 봐도 데이터에 의존하는 사회 현상을 경고하는 전망을 확인할 수 있다.
‘진화론적 자본주의(또는 인본주의)’를 중립적으로 바라본 하라리의 입장에 대해 유감스럽다. 진화론적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의 기원,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적자생존’과 거의 유사하다.
진화론적 자본주의는 갈등은 한탄할 일이 아니라 박수 칠 일이라고 주장한다. 갈등은 자연선택의 원재료로 진화를 추동한다.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고, 따라서 인간의 경험들이 서로 충돌할 때는 최적자가 다른 모든 이를 누른다. 우월한 인간은 열등한 인간을 억압할 권한이 있다. 우리가 이런 진화 논리를 따른다면 인류는 점점 더 강해지고 점점 더 최적자가 되어 결국에는 초인간을 낳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 350쪽)
히틀러와 나치는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대표하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나치즘의 공포 때문에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통찰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나치즘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특정 인종차별주의 이론들과 초강력 민족주의 감정이 결합해서 생겨난 산물이었다. 모든 진화론적 인본주의자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며, 인류가 더 진화할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 세력이 반드시 경찰국가와 강제노동수용소의 설치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유발 하라리, 355~356쪽)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둔 인종차별주의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 깔렸다. 그들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통곡할 정도로 진화론을 왜곡한다. 사회진화론과 진화론적 자본주의는 사람의 권리와 존엄성을 철저히 배제한 자기중심적인 논리이다. 진화론과 비교할 수 없는 조야한 논리일 뿐이다. 이 논리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사회 전반의 시스템까지 자신들의 틀 속에 종속적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심을 폭력과 차별을 통해 표출한다. 모든 진화론적 인본주의자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해도 그들의 논리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라리가 잘못 알고 있는지 아니면 번역본이 인쇄되는 과정에서 나온 오식인지 잘 모르겠다. 프랑스의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연도를 잘못 적었다.
19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나톨 프랑스와 아름답고 재능 있는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만남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실화는 아닐 것이다. 던컨은 당시 인기 있던 우생학 운동을 거론하며 “내 외모와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상상해봐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좋지요. 하지만 내 외모와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82~83쪽)
프랑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해는 1921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