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어떤 이슈가 생기고 새로운 관심사가 생길 때마다 유행하는 것이 패러디다. 패러디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의 방식이다. 그냥 눈으로 보고 지나치는 유머로서의 패러디가 아니라, 패러디에 대한 추가적인 패러디나 대응 표현을 하거나, 패러디 속에서 메시지를 읽어내는 진지한 반응도 보인다. 패러디를 통한 풍자와 우회적 표현으로 원래 사실적 내용에 담긴 길고 딱딱하고 어려운 얘기도 재미있고 쉽게 표현할 수 있다. 이제 누구나 패러디 컨텐츠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고, 패러디 콘텐츠를 유통할 수 있는 환경인 셈이다. 물론 패러디가 때론 악의적이거나 인신공격적일 수도 있다.
이번 주에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의 풍자 그림 『더러운 잠』 국회 전시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솔직히 알라디너 누군가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쓰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직까진 풍자 그림 논란에 관한 글을 보지 못했다. ‘서재통합검색’으로 ‘표창원’, ‘더러운 잠’을 입력해 봐도 관련 글이 나오지 않는 거로 봐서는 글을 쓴 사람이 없는 듯하다. 이번 해프닝은 ‘표현의 자유’, ‘여성 혐오’가 겹쳐 있어서 풍자 그림이 적절한지 부적절한지 분별 있게 판가름하기 어렵다.
나는 『더러운 잠』 그림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그림에 풍자는 가득했으나 해학이 눈곱만큼 보이지 않았다. 풍자는 기성문화의 정통성과 근엄함을 비웃으면서 폭로하는 방법이라면, 해학은 다양한 표현 수단을 통해 사람을 웃게 하여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예리한 풍자로 해학 넘치는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다. 『더러운 잠』 원작자는 마네의 『올랭피아』와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를 패러디하여 통렬한 풍자나 해학, 파격을 담아내려고 했으나 그 지나친 패기가 독이 되고 말았다. 아시다시피 『올랭피아』는 전시 당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대작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알라딘 서재에서 『올랭피아』를 언급한 글을 참 많이도 썼다.
* [음란과 예술 사이] 2011년 8월 3일 작성
* [근대회화의 혁명을 알린 진정한 선구자, 마네] 2012년 12월 27일 작성
* [그녀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2014년 5월 26일 작성
* [마네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본 순간] 2015년 5월 6일 작성
* [《세계 명화 백선》 계몽사(1989년 중판)] 2015년 5월 10일 작성
* [고양이가 만만하니?] 2016년 4월 12일 작성
『올랭피아』는 전시장을 찾는 남성 관객들의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누드화의 전통에 반기를 든 그림이다. 남성 관객들로부터 사랑받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누드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여성 모델은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가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마네가 묘사한 벌거벗은 매춘부는 액자 밖에서 자신을 훔쳐보는 남성 관객들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남성 관객들은 자신의 관음증적 시선이 들켰다는 생각에 화풀이하는 식으로 마네의 그림을 조롱했다. ‘이게 그림이냐? 이러려고 전시장을 찾았나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올랭피아』가 수동적인 여성이 그려진 누드화 표현을 거부한 혁신적인 그림이라고 해서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마네는 침대에 누운 벌거벗은 주인공을 신성한 비너스 대신 매춘부로 바꿨을 뿐이다. 『올랭피아』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파리를 뒤흔들었던 충격의 진동은 이제 전설처럼 회자하는 옛이야기일 뿐이다. 충격의 진동이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났고, 그 파격적인 아우라가 시들시들해졌다. 『올랭피아』를 처음 본 파리의 남성들은 아우라에 흥분했겠지만, 원작을 복제한 이미지로 접한 오늘날의 남성들은 아우라를 느낄 수 없다. 아우라가 상실된 『올랭피아』는 애석하게도 ‘관찰자로서의 남성’을 위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매춘부와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하녀의 대조적인 구도는 남성의 사랑을 원하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벨 훅스 같은 제3세계 페미니스트는 흑인 하녀의 표정에서 흑인이자 여성이 겪은 인종적 · 성적 불평등의 이중적 고통을 읽었을 것이다.
그림 오른쪽 구석에 관객들을 노려보는 검은 고양이가 있다. 바짝 올라간 고양이의 꼬리는 ‘팔루스(Phallus)’다. 오늘까지도 이 고양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은밀한 본성을 숨긴 채 근엄한 척하는 파리의 신사들을 도발하는 의미(가운뎃손가락을 내밀 때 하는 욕설 ‘Fuck you!’을 떠올려보시라)일 수 있고, 벌거벗은 매춘부조차 피할 수 없는 남근중심주의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여성을 남성 시선의 수동적 대상으로 만드는 남성 중심의 권력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무튼, 여성중심주의의 시선으로 『올랭피아』를 바라보면 남성으로부터 완전히 갇힌 여성성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원작을 패러디한 『더러운 잠』은 ‘더러운 풍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이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표정이 한편으론 남자들 앞에 수줍은 척해야 했던 누드모델의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검은 고양이를 다른 대상으로 가리든지 아니면 없애야 했다. 원작에 있는 고양이를 그대로 옮긴 것은 『더러운 잠』 원작자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어쩌면 원작자는 패러디에 나타난 고양이를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의 부적절한 관계로 해석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실적 근거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불확실한 루머가 패러디 소재로 사용되면 도리어 풍자와 해학의 맛을 떨어뜨린다. 혹자는 패러디는 패러디일 뿐, 확대하여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도 원론적으로는 맞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따지자면, 해학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더러운 잠』은 인식공격에 가까운 그림이 되었고, 표 의원 가족을 악의적으로 묘사한 ‘질 나쁜 패러디’까지 나오고 말았다. 그림 하나가 서로 비난을 일삼는 정치적 갈등의 불을 지른 것이다. 사실적 근거에 기초하고 공익에 도움 되는 패러디라면 법적으로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