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 현실에서
평범한 알라딘 서재 글도 뮤즈가 될 수 있다. 특히 생각 거리를 심어주는 글은 또 다른 글을 위한 영감을 제공한다. 오늘 ‘사월의책’ 출판사 대표 안희곤 님이 페이스북 계정으로 쓴 글을 오거서(五車書)님의 소개로 읽었다. 필자의 단단한 사유와 정성이 묻어나 있는 글에 ‘좋아요’만 누르고, ‘잘 썼다’라고 칭찬하면서 지나치기가 아깝다.
안희곤 대표의 글은 책 안 읽는 사회의 단면을 정확하게 보여줬다. 그의 말대로 오늘날의 책은 책 좋아하는 ‘덕후’들만 위한 골수취미 상품이 되었다. 애서가들은 책 안 읽는 사람보다 유난히 책을 소중히 여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책은 제작자나 소유자에게나 귀중한 물건이었다. 중세 사회에서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기독교 대중을 지배하던 두 계층, 즉 성직자와 귀족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속했다. 따라서 책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읽을거리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독자와 책의 관계는 훨씬 자유로워졌다. 이때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종이책의 전성기였다. 20세기 중반 이후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많은 정보를 소유하는 사람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독자는 ‘사용자’라는 개념으로 변화한다. 사용자는 독자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독자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사용자는 꼭 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사용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책만 읽는 사람이다. 진짜 독자는 종이책을 향한 애정이 강하다. 일단 책을 사서 보려고 한다. 반면 사용자는 읽는 것이 힘들어서 책을 사지 않는다. 원하는 지식 및 정보는 구글 같은 검색 도구에 찾으면 된다. 결국, 소수의 독자만이 종이책을 사서 모으는 덕후가 된다. 책은 책 덕후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쯤 되면 책 안 읽는 사회가 정말 심각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데 안 대표가 너무나도 뻔한 문제를 강조하려고 길게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 안 읽는 현상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책을 무기로 삼은 가짜 식자들이 넘치는 현실이다. 책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책을 향한 애서가들의 뜨거운 열정만 숨 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열정을 파괴하는 차가운 광기도 흐른 적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은 귀족 같은 특권층의 전유물이라고 했다. 그들은 책(지식)뿐만 아니라 권력도 가졌다. 즉, 책을 소유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권력자들은 책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만 가지고 있던 지식의 무기가 피지배층의 손에 쥐어지면,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흉기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권력자는 진실을 가리거나, 더 편하고 쉬운 통치를 위해서 책을 없애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은 종교, 국가, 미풍양속 등을 거스른다고 '위험한' 책들을 금서로 만들었다.
시대가 변하고, 권력 변동이 수차례 이루어지면서 이제 지식인들이 ‘지식 권력자’가 되었다. 국가 권력자들은 과거처럼 책을 가지지 않아도,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그들을 대변하는 지식 권력자들이 있으니까. 지식 권력자들은 국가권력을 동원해서 자기 사상을 강요한다. 심지어 자신들의 이념과 다른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 진시황이나 히틀러의 시대에 있을 법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일어났다. 이제는 교과서마저 마음대로 바꾸려고 시도한다.
지식을 왜곡하고, 자기 입맛대로 통제하는 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책이다. 안 대표는 독서로 키운 ‘분별심’이 대항적 지식이라고 말한다. 분별력은 올바른 시민 정신과 도덕적 행동을 위해 선약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옳고 그른 지식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으면, 문제점을 날카롭게 포착한 비판이 ‘비난’으로 보이고,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국가 권력 및 지식 권력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스트가 쓴 책을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페미니즘을 ‘남성을 위협하는 사상’으로, 《자본론》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마르크시즘을 ‘북한이 좋아하는 사상’으로 여긴다. 단순한 생각이지만, 책을 멀리하여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편견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안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공감불능의 괴물’로 변한다.
나는 책 읽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올 거라는 낙관적 희망에 반대한다. 앞으로는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계속 나온다. 책 읽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해서 사회 전체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은, 남을 업신여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했던 말이다. 이 말에 내 생각을 덧붙이자면 책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책 읽은 권수는 중요하지 않다. 독서로 단련한 분별력은 보여주기식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제로 실천해야 한다. 안 대표의 글이 대충 읽으면 안 되고, 끝까지 정독해야 한다. 이 글의 핵심 내용은 후반에 나와 있다. 반성 의식과 비판 의식을 키우지 않는 독서는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