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평점 :
동물들은 고대부터 인류의 전쟁에 동원됐다. 인간과 동물이 하나가 되어 전장에서 싸우기도 했고 수송·통신·적 탐지에 투입됐다. 한니발이 이끈 카르타고 제국의 코끼리 공격에 혼이 났던 로마군. 돼지의 등에 기름을 바른 뒤 불을 붙여 뜨거움에 악을 쓰며 돌진토록 해 코끼리들을 교란한 전술을 썼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박쥐 폭탄 실험도 이루어졌다. 미국의 해병은 박쥐를 훈련해 가미카제 특공대를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박쥐에 폭탄을 달아 투하하면 적의 공장 등 시설물로 날아가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43년 이 계획은 돌연 중단되었다. 몇 년 후에 박쥐 폭탄보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무기가 등장했다. 그 무기는 바로 원자폭탄이다.
군에서 동물을 전쟁에 투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감각이 인간보다 뛰어나며 먹이 외에는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아 유지하기 쉽다. 하지만 군사적 효용성과는 별개로 이는 동물 보호론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한다. 군사 목적으로 포획 당한 동물들은 훈련 과정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상식적으로 동물은 당연히 감정을 느낀다. 동물을 키워본 사람에게는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인간만이 지구상의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물 학대나 착취가 용인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동물이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인간처럼 고귀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강아지 공장’이라고 불리는 개 사육장의 끔찍한 실태가 최근 알려졌다. 개 100여 마리가 좁디좁은 철창 속에 빼곡히 갇혀 있다. 업주들은 이런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어미 개들이 강제로 새끼를 배게 해 낳은 강아지를 반려견으로 내다 팔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보호’를 명문으로 개들을 가둬놓고 사실상 방치하는 ‘애니멀 호더(animal hoarder)’가 만든 사육장도 문제가 많다. 많은 개들이 함께 있다 보니 병들거나 서로 싸우다 죽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주인의 동의 없이는 긴급 구조가 불가능하다.
만약 프리모 레비가 개 사육장의 끔찍하고 참혹한 실태를 목격했더라면 ‘아우슈비츠가 동물을 대상으로 해서 부활’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반 파시즘 운동에 참여해 악명 높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로 이송당했다.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끌려온 수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와 두려움에 떤다. 나치의 잔인한 학살행위 속에서 수인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만이 유일한 목적이 돼버린 채 점차 동물화되어 간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극한상황에서 수인번호로 인식되며 물건처럼 취급받는 그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에서 수인들은 고통과 욕구만 남긴 채 존엄성과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이 되어버린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교수형에 처하는 모습을 본 뒤에도 그들은 잠을 청하고 죽을 나누면서 배고픔이라는 일상적인 분노를 가라앉혔다.
사육장 우리에 갇힌 개들도 마찬가지다. 사육장은 도저히 살아있는 개들이 지내는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위생적인 곳이다. 부패하는 사체 바로 옆에서 새끼들에게 젖은 물리는 개, 낳자마자 굶주림에 지친 개들의 먹이가 된 새끼들, 신체 일부가 잘려 불구가 된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개. 그들은 배설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썩은 음식물 찌꺼기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개들도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그렇게 그들은 인간이 만든 아우슈비츠에서 눈 뜨고는 못 볼 정도로 망가지고 죽어간다. 레비 또한 아우슈비츠 참상을 잘 알기에 말 못하는 동물들이 인간에게 학대당하는 모습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으리라. 그는 <고통에 반대하며>라는 글에서 동물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물도 고통을 감지하는 존재이므로 고통을 일으켜선 안 된다. 레비는 곤충이 고통을 느끼는 존재인지 의심하고 있는데, 그들도 ‘타자’다. 머리에 서식하는 이(蝨)와 개의 생명까지도 가치 있게 여기는 이규보의 주장처럼 개와 이, 소와 양을 모두 똑같이 여기는 것은 생명의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태도다. 반대로 레비는 이들의 생명 가치가 서로 다르다고 보는 상대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한 사람만 손을 들기 어려운 문제다.
인류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지만, 인간성의 가치가 퇴색되어 타자를 연민하는 어진 마음을 잃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고, 특히 동식물의 아픔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마비되었다. 동물들은 인간의 삶을 위해 기계 부품처럼 죽어가고 또 그만큼 채워진다.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자들은 폐기 품처럼 가차 없이 제거된다. 동물이 학대받는 사회에서는 인간도 학대받는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나치의 민간인 대량 학살을 두고 “우리는 ‘이름 없는 범죄(a crime without a name)’에 직면해 있다”고 표현했다. 불행하게도 나치와 아우슈비츠가 사라진 지금도 ‘이름 없는 범죄’가 벌어지고 있다. 겨우 반세기 전에 제노사이드(genocide)의 비극을 겪은 민족이 세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대량 학살극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살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다. 목숨을 무엇보다 존중하는 문명을 이뤄가야 한다.” 슈바이처 박사가 우리에게 던진 이 말을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