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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주인님이 저에게 양말을 줬어요! 도비는 자유로운 집요정이에요"
(영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도비가 하는 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올해도 고객의 구매 기록을 수치화한 통계 내역을 공개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알라딘 홈페이지 위에 ‘당신의 총 구매 금액은 얼마일까요? 라는 문구가 적힌 배너가 보인다. 알라딘 구매 고객이라면 그동안 구매한 책이 총 몇 권이며 월평균 구매 금액은 얼마인지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구매한 작가가 누구인지, 거주지에서는 몇 번째로 책을 많이 구매했는지 등 다양한 구매 관련 통계도 확인할 수 있다. 서비스 오픈 16주년 기념 이벤트 기간 중 이벤트 대상 도서를 포함해 5만 원 이상 구매하면 책 표지로 만든 북 스탠드를 받는다. 알라딘 측에서는 구매 고객을 위한 16주년 특별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 선물을 받으려면 지갑을 과감히 여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매 과정에서 선택한 증정품에 따라 구매 마일리지가 차감된다. 도서정가제의 최대 할인 폭인 ‘정가의 15%’를 넘지 않기 위해서다.
알라딘은 구매 고객의 눈에 속삭인다. 당신은 16년간 알라딘과 함께했다고. 그러면서 당신의 구매 기록을 보여준다. 램프의 요정 지니(genie)는 알라딘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신령이다. 알라딘은 디지털화로 탈바꿈한 거대한 지니다. 일명 ‘디지털 지니’다. 알라딘 홈페이지를 접속하는 구매 고객이 지니에게 명령하는 알라딘이다. 그래서 알라딘 블로그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알라디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구매 고객을 ‘알라디너’로 부르겠다) 디지털 지니는 알라디너가 가지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알라디너는 매달 디지털 지니가 선보이는 증정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책을 주문한다. 디지털 지니는 책을 구매한 알라디너에게 선물을 준다. 5만 원 이상 책을 사지 않은 사람은 선물을 받을 수 없다. 디지털 지니는 16가지나 되는 알라니더의 기록들을 상세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알라디너에게 지금과 같은 독서 패턴을 쭉 유지하면, 80세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자신의 구매 기록을 타인에게 공개하도록 권유까지 한다. 알라디너는 자신의 구매 기록에 흡족해하면서 수치화된 독서량을 블로그나 SNS에 공개한다. 16가지의 맞춤형 기록을 다 보여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디지털 지니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알라딘과 함께해 주세요!”
심리정치 시대에 사는 대중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한다. 신자유주의는 대중에게 자유를 허용한다고 약속을 하나, 현실은 자유를 얻으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즉,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자본을 지불해야 한다. 자유를 얻기 위한 돈을 마련하려고 노동에 투입되다 보니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마저 희생하는 상황을 감수한다. ‘디지털 지니’ 알라딘이 운영되는 방식은 디지털 심리정치의 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창출하고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심리정치라고 한다면, 알라딘의 디지털 심리정치는 알라디너에게 ‘책을 사고 싶다’라는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메피스토펠레스다. 독서를 권장하는 세련된 악마는 알라디너의 지갑과 구매 마일리지를 담보로 증정품을 준다. 알라디너는 매년 달라진 게 없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알라디너는 알라딘에서 읽고 싶은 책을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읽고 싶은 책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제한적이다.
‘알라딘 추천마법사’는 알라디너의 구매 내역, 클릭 내역, 블로그 활동 등을 기반으로 고객의 취향을 분석해 그에 맞는 최적의 도서를 추천해주는 서비스이다. 추천마법사는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 영향을 수집하는 빅테이터를 기반으로 한 추천 시스템이다. 알라디너의 구매 성향이나 관심사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알라디너에게 책을 추천한다. 최고의 책을 투표로 선정하는 ‘제6회 독자 선정 이 분야 최고의 책’ 이벤트에 알라디너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최고의 책을 뽑을 수 있다. 추천마법사에 근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빅데이터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행동패턴, 무의식적 욕망까지 읽어 낸다. 한병철은 인간의 행동을 정량화하는 빅데이터가 자유의지의 종언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북플의 마니아 지수는 북플 내 모든 활동을 수치화한 것이다. 관심 있는 책에 별점을 주거나, 서평을 작성하면 누구나 특정 분야의 마니아가 된다. 결국, 지수를 높여서 어떤 분야의 첫 번째 마니아가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책을 구입하고, 읽고, 글을 쓰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알라딘의 스마트 권력은 소통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지만, 알라디너는 '자유'라고 착각한 채 글이나 사진을 블로그에 채움으로써 스스로 노출하고 전시한다. 자기 노출의 정보는 더 많은 구매욕을 생성한다. 북플은 마니아 지수가 높은 알라디너와의 소통을 유도하여 마니아가 소개한 책을 읽도록(구매하도록) 장려한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디지털 파놉티콘’ 안에 욕망을 창출하는 심리정치가 작동된다.
한병철은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벗어나려면 내면을 비우는 백치 상태가 되라고 말한다. 지폐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린 그리스의 아이들처럼 자유를 착취하는 대상을 멀리하자는 의미인 셈인데 대안이 현실적인 면에서 떨어진다. 돈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 속에 자본의 속박을 벗어나서 해탈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에서 나는 알라딘의 마케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심리정치의 손아귀에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적으로 여유 있게 살아야지”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어느새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게 나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멀리하여 디지털 문맹으로 살겠다는 현대판 러다이트 족이 되고 싶지 않다. 디지털 사회를 거부할 수 없지만, 냉정하게 손익계산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너무나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신을 차리려면 이런 중심 잡기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