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틀비, 그는 왜 그랬던 것일까?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은 독특한 인물이 등장하고 일반 소설과 다른 독특한 전개가 있는 흥미로운 단편소설이다.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지젝 등의 철학자들까지 멜빌이 쓴 단편소설의 매력에 꽂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비유처럼 <필경사 바틀비>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변신>의 첫 장부터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느닷없이 바퀴벌레로 둔갑하여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듯이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진 바틀비라는 사내는 "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라는 말만 늘어놓는다. 도대체 바틀비라는 인물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
<필경사 바틀비>는 월가의 변호사인 화자가 바틀비란 인물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자신을 나이가 꽤 지긋하며 직업의 성격상 흥미롭고 다소 특이한 집단의 사람들을 제법 깊이 접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화자는 바틀비에 대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이상한 필경사’ 라고 말한다. 화자인 ‘나’ 는 부자들의 채권, 저당증서, 부동산 권리증서 등을 쌓아놓고 수지맞는 일을 하는 야심 없는 변호사인데 업무가 증가하자 바틀비란 필경사를 새로 고용한다.
하지만 이 필경사는 평범하지가 않다. 필사에 굶주린 사람처럼 밤낮으로 필사를 하다가 사흘째 되던 날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필경사의 업무는 필사를 하고 그것을 원본과 대조하는 것인데 바틀비는 서류를 대조해보자는 ‘나’ 의 요청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소설 속에서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원문으로는 I prefer not to). 이 말을 반복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바틀비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바틀비의 존재를 죽음의 잠재성과 싱명의 잠재성을 동시에 접해 있다고 보고 있거나(조르조 아감벤) '하지 않겠다' 는 행위는 단순히 어떤 행위를 거부한다기보다는 '하지 않음' 의 가능성과 이에 대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리까지 동시에 강조하기 위한 의미로도 보고 있다. (역자, pp 101) 그 밖에도 월 스트리트가 번성함으로써 도시화가 되어가는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 팽배해온 고립과 소외, 계급투쟁, 허무주의, 기독교적 알레고리가 담긴 메시아론까지 다양한 해석이 있다.
역자는 이 작품을 '프로테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변신 능력이 뛰어난 신)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읽는 독자들마다 받아들여지게 되는 소설의 주제 및 바틀비의 행위에 대한 의미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관료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바틀비
가르치는 주제와 범위마다 차이가 있지만 행정학 과목 중에는 '관료제' 에 대해서도 다루게 된다. 관료제의 '관'(官, 벼슬) 자 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료 즉 행정가가 국민에게 행하는 통치제도를 일컫는 말이다.
관료제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는 관료기구 내부의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도 엄중한 신분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상사에 대한 복종의 체계로 이루어진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이와 같은 관료제의 특권적 지배로 인해 수많은 폐단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병리적 문제를 '관료주의' 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관료주의는 관료제의 폐단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용어로 간주되고 있다.
<필경사 바틀비>도 관료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관료주의는 정치적 직무를 담당하는 집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무직, 노동직과 같은 경영 집단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멜빌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19세기 말 미국인의 모습을 '평일에는 상점이나 공장, 사무실 등 외얽고 회반죽 친 벽 안에 갇혀 계산대나 작업대, 책상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사람들' 이라고 비유하였다. 멜빌이 비유한 '사람들' 에는 <바틀비>에 등장하는 화자 그리고 화자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필경사' 의 원어는 Scrivener 이다. 1828년 판 웹스터 영어사전에서는 '계약서나 기타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 으로 정의되어 있다. 말 그대로 필경사는 책상에 앉아서 문서를 작성해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관료제' 의 원어는 Bureaucracy 이다. Bureaucracy는 '책상과 사무실' 을 뜻하는 Bureau와 '통치' 를 뜻하는 cracy가 합쳐진 단어이다. 그래서 관료주의가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상에만 앉아서 탁상공론에만 매달리는 관료' 의 단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필경사 바틀비> 속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형식주의, 관료의 방해행위
관료제는 형식적인 규칙과 절차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조직 내의 목표 달성보다는 규칙을 더 중요시되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형식주의가 심화되면 '문서주의'(레드 테이프 현상)로 발전됨으로써 조직목표의 달성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화자의 사무실에 일하는 인물 중에는 '진저 너트' 라는 별명의 소년이 있다. 자신의 아들이 판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로 인해서 소년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원과는 반대로 진저 너트는 판사가 되기 위한 업무와는 다른 엉뚱한 임무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무실 직원 중에서 담당하는 임무의 비중이 적지만 그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직원들은 소년에게 '진저 너트' 라는 이름의 생강 과자를 자주 사오도록 하고 있다. 이 소년이 특이한 점은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에 개인 책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그의 책상 서랍 안에는 온갖 종류의 견과 껍데기가 가득하게 있을 뿐이다.
진저 너트는 정작 자신이 하고 있는 임무의 목표 및 당위성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대로 과자를 사오고 사무실을 청소하는 잔심부름꾼이다. 과자를 사오고 사무실 청소만 하는 임무가 어린 진저 너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규칙' 이다. 그런 규칙적 임무에 매달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저 너트' 라는 별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저 너트는 사무실 안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잉여 노동력일뿐이다. 감독자가 시키는 일만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그 밖의 임무에는 일체 행동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임무에 투여할 수 없는 비생산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결국 조직 목표의 달성에 방해가 되는 장애를 초래한다.
2) 책임 회피
업무에 대한 규정과 절차가 정해지면 이에 따른 책임 역시 결정된다. 그러나 관료적 책임은 업무의 능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인만큼 쉽게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다.
터키는 업무중에도 진저 너트가 사온 과자를 먹고 하다보니 업무상 실수를 자주 발생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능글스럽게 자신이 행한 실수를 무마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사무실 업무를 총체적으로 담당하고 이끌어나가는 화자의 태도에서도 집단 내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이 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업무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음에 한가할 때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은 잊기로 했다.
- pp 30 -
화자는 바틀비의 알 수 없는 거절 행동에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흥분한다. 그러나 서류 대조를 안하겠다는 바틀비의 의지를 꺾지 못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바틀비의 거부가 계속되면서 화자는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면서 바틀비의 행동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행동의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는 점이다. 한가할 때 바틀비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는 화자의 안일한 생각은 정작 해결해야할 문제점을 회피하려는 주관적 변명으로 포장되고 있다.
소설의 전개는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면서 거부하는 일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우체국에 들러서 우편물이 와 있는지 봐달라는 부탁도, 옆방의 직원을 불러달라는 부탁도 거부한다.
'방황하는 기계' 로 남은 사내, 바틀비
관료제는 형식적인 규칙과 절차를 중요시하고 조직 구성 운영 능력이 경직화되어 있어서 변화에 대한 저항성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제도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촉진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바틀비의 알 수 없는 거부 행동 속에는 '현상유지적' 관료주의를 주체적으로 거부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월 스트리브의 회반죽 벽 그리고 사무실 안의 칸막이 벽으로 상징되는 폐쇄적이면서도 수동적인 관료제'국' 앞에서 홀로 외롭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바틀비의 조용한 거부는 무엇보다도 ‘안정’을 가장 중시하며 월 스트리트를 움직이고 있었던 관료적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왔던 화자와 그 밖의 인물들에게는 큰 혼돈과 충격일 수 밖어 없었을 것이다. 돈으로 꼬드기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보면서 화자는 바틀비가 자신의 자선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지만 그때마다 듣는 대답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일 뿐이었다.
왜 업무를 거부하는 행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바틀비의 사연을 알 수 없다. 그만큼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바틀비의 행위에 대해서 독자적미면서도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다만 사무실에 입사하기 전에 워싱턴의 사서 우편물을 담당하는 하급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해고된 적이 있는 그의 짤막한 경력을 추정하면 이미 관료제의 수동적인 폐해의 실체를 몸소 경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 우리는 똑같이 숭고한 인간을 이윤을 위해 마음대로 모욕하고, 마음대로 해고하면서 기계부품처럼 취급하는 비인간적인 고용체제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벽 안에 들어가기 위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라고 세뇌시키는 사회적 체제 속에 살고 있다. 특히나 제도의 안정성과 수동성에 익숙해지게 되면 자연히 변화와 개선 의지가 줄어들게 된다. 관료주의로 이루어진 사회적 집단 내에서 관료주의로 인한 사회적 문제만 늘어날 뿐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정작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관료나 행정가를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바틀비의 1인 거부 시위(?)는 관료제라는 접착제로 만들어진 월 스트리트의 벽을 무너뜨릴 만큼 너무나 미약했다. 한 때 관료제가 만들어낸 '기계'였던 바틀비는 견고한 제도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유로운 '인간' 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관료제도 앞에 '방황하는 기계' 로만 남고 말았다.
* '관료제' 내용 참고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