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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ㅣ 기담문학 고딕총서 9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진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토요일 밤의 공포
13년 전이다. 토요일만 되면 항상 즐거웠다. 지긋지긋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일요일까지 실컷 놀 수 있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토요일이 오기를 간절히 바랬던 이유는 늦은 밤까지 TV를 실컷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은 어린 나에게 밤 12시까지 TV 보는 것을 금했지만 유독 토요일만은 눈 감아 주었다. 늦게까지 TV 보다가 내일 일요일 같은 날에 늦잠을 자도 상관 없는 것도 있었지만 항상 밤 10시가 되면 우리 가족이 꼭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S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토요 미스테리 극장> 이었다.
그 당시만해도 S 방송사는 서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지역방송이었지만 대구에도 지역방송이 생기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S 방송사의 프로그램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토요일 밤 10시에 무시무시한 제목의(?) 방송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초자연 현상을 겪은 사람들의 실제 경험담을 토대로 재연한 프로그램으로써 ' 미스터리 신드롬 ' 을 낳을 정도로 시청률 역시 잘 나온 걸로 기억하고 있다. ' 미스터리 ' 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공포영화를 볼 때 느끼는 공포감을 전달해주는 포맷의 재연 프로그램은 아마도 <토요 미스테리 극장> 이 최초일 것이다. (물론, 그 때도 금요일 밤, M 방송사에서는 하는 <이야기 속으로> 라는 <토요 미스테리 극장> 과 비슷한 포맷의 방송이 있었다. 하지만, 인지도 면에서는 S 방송사의 <토요 미스테리 극장>이 앞섰다)
나는 항상 방송이 시작되는 토요일 밤 10시를 기다렸지만 초등학생에겐 밤 10시는 슬슬 잠이 몰려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방송하기 전 광고 중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아침 8시였다. 이런 경우 때문에 프로그램을 못 본적이 꽤 많았다. 가끔, 예기치 않은 편성방송 때문에 간혹 밤 11시, 심지어 12시부터 할 때도 있었지만, 졸림을 이겨서라도 꼭 ' 본방 사수 ' 하곤 했다.
' 노약자나 임산부, 심장에 이상이 있으신 분들은 방영을 자제해 줄 것을 권합니다 . '
이게 정확한 멘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항상 프로그램 시작 전, 그리고 방송 중간중간에 이 유명한 멘트가 나오는 것은 필수였다.
하지만, 아무리 제보자의 실제 경험이라고 해도 대부분 경험담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너무 시시한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밤잠을 설칠 정도로 아주 무서운 이야기도 있었다. 지금은 재연 속에 등장하는 귀신의 모습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 때만해도 적절히 등장하는 TV 속 귀신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간혹 어떤 사연은 TV를 보고 있는 나도 소름을 돋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내용들도 있었다.
그러나, ' 미스터리 ' 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들은 오랫동안 방영이 되지 않기 마련이다. 점점 떨어지고 있는 시청률에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프로그램의 유해성에 대한 문제가 시청자들 사이에서 부각이 되자 토요일 밤만 되면 시청자들에게 간담이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를 선사하던 프로그램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렇게 폐지되고 말았다.
' 미스터리 ' 로 살다가 ' 미스터리 ' 로 죽은 작가
' 앰브로스 비어스 '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작가의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나름 호러영화 매니아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1탄의 흥행에 힘입어 제작된 <황혼에서 새벽까지 3> 에 나오는 극중 인물 에 소설가 앰브로스 비어스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클루니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출연하는 유명한 1탄과 뒤이어 나온 후속작은 봤지만, 3탄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흥행 영화의 후속작은 항상 전작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2탄 역시 전작이 줬던 공포와 전율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1탄보다 선혈이 낭자하고 더 잔인한 영상으로만 가득했을 뿐이다. 3편 역시 2탄과 같은 아류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앰브로스 비어스는 1913년에 일어난 멕시코 혁명 때 실종되어 지금까지도 그의 최후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앰브로스 비어스가 나오는 영화 <황혼에서 새벽까지 3>가 소설가의 실종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H.P. 러브크래프트와 더불어 공포 문학을 확립한 작가로 재평가되었지만 앰브로스 비어스도 러브크래트프의 삶 못지 않게 지금까지도 그의 생애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것이 없으며 추측과 주변 지인들의 기록에 근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재미있게도, 이 두 사람에 관한 또 다른 공통점은 자신의 작품들은 생전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 미스터리 ' 라는 주제로 소설을 쓰면서 먹고 살다가 최후 역시 ' 미스터리 ' 가 된, 아주 보기 드문 삶의 이력을 남긴 작가였던 것이다.
짧은 소설, 긴 여운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이 어떤가요? ' 라고 묻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그의 소설을 읽게 되면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보는 거 같습니다. "
앰브로스 비어스가 쓴 총 17편의 단편소설들을 모은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을 읽게 되면 (국내에서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 선집으로는 이 책이 최초일 것이다) 각 소설들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소설들 중에는 재미있는 것도 있고, 재미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13년 전에 했던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다시 보게 되면 어설픈 재연 묘사에 재미없어하듯이 요즘 같은 시대에 앰브로스 비어스의 고전적인 고딕소설을 읽게 되면 재미없어 할지도 모른다.
앰브로스 비어스의 단편소설들은 대체로 짧은 분량이다. 그리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화자인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자신이 겪은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경험담을 전해주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처럼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괴생명체가 등장하여 독자들을 놀래키는 것은 아니다.
남북 전쟁이 종전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전쟁의 공포와 살육의 트라우마 그리고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대륙에도 발 딛은 세기말의 공포까지 미국 사회의 정신에 가득한 어두운 면들을 앰브로스 비어스는 날카롭게 포착하여 유감없이 자신의 소설로 재현하였다.
에두아르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년
책의 표제작인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은 전쟁터에서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곧 처하게 될 교수형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필사적인 의지가 겹치게 되면서 혼란한 정신 상태를 경험하게 되지만,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자신도 모르게 죽음이 두렵지 않는, 안락한 분위기의 환각 상태에 이르게 된다.
정치적 배경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했던만큼, 남북 전쟁 때 자행된 학살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일상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학살당하는 인간의 죽음을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묘사함으로써 암울한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의 공포를 실감나게 전달해주고 있다.
<개기름>이라는 단편소설에서도 어두운 사회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를 포획하여 만든 개기름으로 인해서 부의 탐욕에 눈이 먼 어느 부부의 이야기는 흡사 최근에 일어난 일명 ' 쥐 식빵 자작극' 사건을 연상케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려고 하는 부부의 참혹한 결말은 결국, 자신의 업체의 이득을 위해서 제빵업체가 꾸민 자작극으로 밝혀져 문제의 사건이 일단락된 것처럼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다.
<믹슨의 걸작>과 <시체를 지키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이토 준지의 일러스트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호러 매니아들에게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아예 호러소설로서 취급을 안해줄 것이다.
<믹슨의 걸작>은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볼 수 없는 기이한 존재가 등장하여 인간을 위협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즘 시대에 재미있게 읽히기에는 너무 고전적이다. <시체를 지키는 사람>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비어스의 짧은 소설답지 않은 진부한 전개의 시도 때문에 비어스 소설 특유의 공포의 묘미를 살리지 못하였다.
그만큼, 소설 속 배경이 우리에게는 너무 오래된 구시대적이라서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들 중에는 호러소설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의 사건을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기게 하고 있다. 이 여운이라는게 특별히 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공포감에 미치지는 않지만, 한 번 읽으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는 소설 속 장면과 결과들이 주는 페이소스가 머릿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고딕소설계의 오 헨리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115948
때마침,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나오게 된 오 헨리의 단편소설 선집과 함께 앰브로스 비어스의 단편소설들을 읽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오 헨리와 앰브로스 비어스는 같은 동시대에 살았던 미국의 단편작가이다.
러브크래프트를 호러소설계의 ' 미친 존재감 ' 이라고 붙여줬으니, 안 그래도 러브크래프트의 명성에 가려져 있는 판에 앰브로스 비어스에게도 별칭을 부여하지 않으면 무척 섭섭해할 것이다.
사실,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은 호러소설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고딕소설에 잘 어울린다. 오 헨리가 19세기 말 미국 사회의 일상적인 풍경을 단편으로 따뜻하고 정감 있게 표현하였다면, 반대로 앰브로스 비어스는 차가우면서도 어둡게 그려내고 있다. 앰브로스 비어스를 ' 고딕소설계의 오 헨리 ' 라고 불러도 비어스 입장에서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 작은 고추가 더 맵다 ' 라는 말이 있다. 정말 집게손가락만한 풋고추를 먹게 되면 매운 것이 더러 있긴 하다. 앰브로스 비어스의 소설들도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후세의 호러문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몇 편의 소설들 중에도 훌륭한 작품성도 갖추고 있다. 짧은 단편만으로 독자들에게 색다른 공포의 여운을 주고 있는 그의 소설들을 앰브로스 비어스답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 작은 고추가 더 무섭다 ' 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는 일상적이면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낯선 공포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