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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파리
에리카 맥앨리스터 지음, 이동훈 옮김 / 마리앤미 / 2023년 11월
평점 :
평점
4.5점 ★★★★☆ A
“안 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아직까진‥….” 그가 말했다. “김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예.”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적이 있으세요?”
“가만 계셔 보세요.” 그는 안경 속에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며 잠시 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없어요, 파리밖에는‥….”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무진기행》 (민음사, 2007년), 43쪽 -
2024년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겨울을 대구에서 지내는 나. 서른다섯 살짜리 대구 출신인 나는 《위대한 파리》라는 책을 다 읽었을 때 갑자기 할 말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파리에게 감사하고 나서 하고 싶은 얘기를 시작한다.[주1]
“여러분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내 질문을 마주친 여러분은 너무 황당해서 퍼뜩 대답하지 못한다. 말문이 막힌 여러분의 머리 주변에 물음표들이 ‘엥? 엥?’ 거리며 날아다닌다.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김 형이 선술집에서 군참새 안주를 집으면서 말했던 파리. 조만간 2024년을 대구에서 만나게 되는 내가 방금 말한 파리. 이 파리는 모두 곤충이다. 2024년은 파리의 해다. 아! 방금 말한 파리는 곤충은 아니고 프랑스의 수도다. 내년 올림픽 개최지는 파리(Paris)다. 전 세계 사람들이 축제의 도시로 몰려 들어오면, 날아다니는 파리도 파리행 인간의 몸을 타고 건너온다. 말장난 같이 들린다고? 웃자고 한 말이 아니다. 파리는 지구상에서 적응력이 뛰어난 생명체다. 파리는 어디에나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건 물론이고, 미국의 도시 파리(Paris)[주2]에도 있다.
여러분 중 누군가가 ‘안 형’이 되어 내게 ‘최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예’라고 대답하고 싶다.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파리는 어디든지 살 수 있으니까. 놀랍게도 파리는 바다에서도 산다. 바다에 서식하는 파리는 단 네 종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사는 파리의 생존력은 인간 입장에서 바라보면 달갑지 않다. 파리가 우리만 보면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만나면 반드시 피해야 할 파리도 있다. 얼굴파리는 인간 눈과 코에 나오는 분비물을 먹는다. 눈치코치 없는 얼굴파리가 인간의 눈과 코를 접시로 삼아서 식사에 열중하면 자신의 몸속에 있는 병균을 흘린다. 채식 파리목에 속한 과실파리와 혹파리 유충은 식물 뿌리를 먹으면서 자란다. 유충으로 인해 뿌리가 많이 손상되면 식물의 수명은 짧아진다.
무시무시한 몇몇 녀석이 날아다닌다고 해서 파리를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곤충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파리가 없으면 자연은 엉망진창이 되고, 지구가 살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파리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꿀벌처럼 꽃가루를 먹으면서 살아가는 파리가 있다. 꽃 찾으러 부지런하게 날아다니는 이들 덕분에 꽃들의 수분이 원활히 이루어지고, 열매가 맺어진다.
부식성 파리목에 속한 파리는 ‘작은 청소부’다. 부식성(腐食性)은 사체나 썩은 고기를 먹는 생물의 식성을 뜻한다. 하지만 부식성 파리목은 말라 죽은 식물과 썩은 낙엽도 좋아한다. 부식성 파리목이 없으면 썩지 못해서 완전히 분해되지 않은 사체와 죽은 식물이 즐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된다.
《위대한 파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파리의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진, 파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 파리뿐만 아니라 파리의 친척 모기도 등장한다. 모기는 밤이 되면 피를 훔쳐 먹고, 잠을 깨우게 만드는 성가신 녀석이다. 그런데 모든 모기가 피만 먹으면서 사는 건 아니다. 수컷 모기는 꽃가루를 먹는 채식주의자다. 암컷 모기도 꽃가루를 좋아하는데, 산란하기 전에 피를 섭취한다. 핏속에 있는 단백질은 모기알을 발달시키는 영양분이다. 우리의 소중한 피를 먹을 수밖에 없는 모기의 사정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기도 사랑하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다.
“알면 사랑한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가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이 단순한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자.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 없는 감정으로 나와 다른 존재를 대하면 그 관계 속엔 편견과 증오만이 남아 있다. 사랑까지 바라지 않는다. 일단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존재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 등을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 파리를 사랑하는 《위대한 파리》의 저자는 지금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파리들이 많다면서 ‘행복한 불만’을 드러낸다. 파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 사랑한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파리가 있다는 사실만은 꼭 알아 두자.
[주1] 서평 첫 두 문장은 『서울 1964년 겨울』 속 문장 일부를 빌려서 섞어 쓴 것이다. 모든 인용문의 출처는 《무진기행》(민음사)다.
*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 (중략)
* 그는 내가 스물다섯 살짜리 시골 출신, 고등학교를 나오고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군대에 갔다가 임질에 한 번 걸려 본 적이 있고 … (중략)
* 나는 새카맣게 구워진 군참새를 집을 때 할 말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군참새에게 감사하고 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주2] 미국 아칸소주 로건 카운티(Logan County)에 있는 도시.
<cyrus의 주석>
* 166, 173쪽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검정파리과의 검정파리 중 일부 종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사체도 탐지할 수 있다. 무려 16킬로미터 떨어진 사체를 찾아온 일도 있다.
하와이에서 일하는 법의곤충학자인 매디슨 리 고프(M. Lee Goff) 박사[주3]는 파리들의 이동 속도 또한 매우 빠르다는 것도 알아냈다. 불과 10분 만에 온 사례도 있다. 파리는 그만큼 신속하며 또 그래야 한다. 부패하는 사체는 그 속성상 상태가 계속 변하는 식량 자원일뿐더러 다양한 성장 과정의 다양한 곤충 종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식량 자원이기 때문이다. (중략)
당시 고프는 의약품, 특히 코카인이 구더기의 성장에 주는 영향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책 《기소하는 파리》(A fly for the Prosecution)[주3]에서, 실험용 토끼에서 코카인을 부여하기 투여하기 위해 동물보호 및 사용위원회에 출원했던 얘기, 그리고 합법적으로 코카인을 구매하기 위해 겪었던 일들을 매우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주3] M. 리 고프의 책 《기소하는 파리》는 《파리가 잡은 범인》(황적준 옮김, 해바라기, 2002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
* 363~364쪽
영국의 연구자 데이브 굴슨(Dave Goulson)[주4]과 동료들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80년이 되면 기후 변화로 인해 집파리 개체수가 2005년의 244퍼센트로 늘어날 거라고 한다. 파리를 좋아하는 나에게도 너무 많은 수다. 기후 변화의 구체적 양상과 그것이 인간과 환경에 줄 영향을 완벽히 점칠 수는 없다. 그러나 파리의 삶에도 영향을 줄 것은 확실하다.
[주4] 데이브 굴슨은 기후 변화로 인해 곤충이 멸종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곤충학자다. 그는 자신의 책 《침묵의 지구: 당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장 작은 종말들》(이한음 옮김, 까치, 2022년)에서 곤충 멸종이 지구의 풍요로운 환경을 파괴하는 지름길임을 경고한다. 굴슨은 벌 연구 권위자로 유명한데, 《사라진 뒤영벌을 찾아서》(이준균 옮김, 자연과생태, 2016년, 절판)도 번역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