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부터 내일 화요일까지 7일을 쉬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가장 긴 황금연휴를 손에 쥐었다. 원래는 화요일과 수요일로 연차 휴가 신청을 냈지만, 수요일만 승인받았다. 화요일도 쉬는 날이었으면 대구 동네 책방 여러 군데 방문하면서 책방지기들에게 연휴 인사를 하려고 했다. 책방지기들을 위한 연휴 선물로 책을 잔뜩 사려고 했는데 물 건너갔다.


연휴 열차표를 화요일에 예매했다. 사실 연휴 기간 열차표 전부 매진될 줄 알았다. 다행히 아침 일찍 출발하는 열차표는 남아 있었다. 수요일 826분 서대구역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열차를 예매했다. 826일은 생일 날짜다. 내가 일하는 공장은 서대구역에서 멀리 있지 않은 곳에 있다. 8시부터 일과가 시작된다. 8시 되기 전에 서대구역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묘했다.


수요일 서울 아침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날 대구에도 비가 조금 내렸으려나. 우산과 옷을 마구 때리면서 퍼붓는 장대비만 아니면 어디든지 걸어서 갈 수 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살짝 내리는 날에 서울에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2011년 여름이었나? 서울 독서 모임펭귄클래식코리아를 선보인 웅진그룹이 책 홍보 목적으로 만든 일반인 독서 모임이 있는 토요일에 비가 내렸다.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1년 차]

[대구 책방 <일글책> 시카고플랜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아리스토파네스, 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도서출판 숲, 2010)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향한 곳은 정독도서관이었다. 마을버스 종로 11이 정차하는 정거장을 찾지 못해서 헤맸다. 지난주 토요일은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날이었다. 그날 모임에 참여하려면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희극 을 읽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책을 <일글책>에 맡겨두었고, 찾으러 가지 못했다. 화요일에 쉬었으면, 책방에 가서 책을 가지러 올 수 있었다. 


도서관 여는 평일이라 정독도서관에 가서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를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책을 만져보지 못했다. 도서관에 책이 있음을 확인했지만, 이미 8월부터 도서관이 휴관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괴상하게도 운수가 좋더니만.


북촌 골목을 걷다가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에 갔다. 생태 및 환경 관련 도서 위주로 소장된 도서관이라서 내가 원하던 책은 없었다. 도서관 밖 주변 숲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좌석 공간이 있다. 햇볕이 따사롭고 숲이 맑을 때 여기 다시 와보고 싶다.

















* 박현수 경성 맛집 산책: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한겨레출판, 2023)

 


 

그날 운수가 너무 좋아서 점심은 종로에 있는 아주 오래된 설렁탕 전문 식당에서 먹었다. 내가 간 식당은 1902년에 생긴 <이문설농탕>이다. 경성 맛집 산책: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에 소개된 식당이다. 이 책을 보다가 처음 알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에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식당에 자주 왔다고 한다. 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일요일의 남자’ KBS 전국노래자랑 명 MC 송해, 주먹으로 종로를 접수한 김두한 등이 있다.








 

김두한의 생애를 극화한, 내 동년배들이 열광했던(지금 다시 봐도 재미있고, 강성이 부른 드라마 OST ‘야인이 귓가에 스치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김두한과 부하들이 설렁탕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나는 처음에 돼지국밥 파는 허름한 식당이라고 생각했다. 그 식당이 바로 <이문설농탕> 구 명칭인 <이문식당>이다. 평일 점심 시간대라 역시 식당 안에 직장인들이 많이 왔다. 다행히 혼자 먹기 딱 좋은 탁자가 구석에 있어서 편하게 밥을 먹었다.
















[대구 책방 <일글책> 202310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파스칼 키냐르, 류재화 옮김 세상의 모든 아침(문학과지성사, 2013)


* [절판] 아일린 파워, 이종인 옮김 중세의 사람들(즐거운상상, 2010)

 


  

종로를 지나갈 때 내가 늘 피해야 할 곳이 있다. 그렇지만 끝내 지나치지 못한다. 그곳은 바로 <알라딘 종로점>이다. 대구 알라딘 서점이 생기기 전에 많이 갔고, 책을 많이 샀던 알라딘 서점이 <종로점>이다. 책을 많이 사면 안 되는 걸 잘 알기에, 딱 두 권만 샀다.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세상의 모든 아침과 아일린 파워(Eileen Power)중세의 사람들이다. 중세 관련 책들을 사 모으고 있어서 마침 좋은 책 한 권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 아리스토파네스, 최현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선(범우사, 2001)

 

* 미셸 푸코, 오르트망 옮김 담론의 진실(동녘, 2017)

 

* 미셸 푸코, 심세광 옮김 주체의 해석학: 1981-1982,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동문선, 2007)

 

 

 

다음에 간 곳은 <소요서가>. 을지로에 있으면 자주 가는 베이스캠프같은 곳이다. <소요서가>에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책 두 권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선 샀다. 이곳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 있을 줄이야.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선에 가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숙소에서 읽어 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내가 책방 주인이라면 이 책을 손님에게 권하지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날 <소요서가>에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비극 번역본(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모두 있었지만,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 2는 없었다.
















* [절판] 미셸 푸코, 허경 옮김 문학의 고고학: 미셸 푸코 문학 강의(인간사랑, 2015)

 


 

절판된 미셸 푸코의 문학의 고고학이 있어서 망설임 없이 손에 쥐었다. , 그런데 그 책은 판매용이 아닌 열람용이었다. 내가 황금같은 책에 잠시 눈이 멀었다<소요서가> 직원이 문학의 고고학재고가 있으면 구해주신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소요서가> 직원이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 내용은 다른 출판사가 문학의 고고학출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간절히 원하는 책이 눈앞에 있는데 왜 사질 못하니. 괴상하게도 운수가 좋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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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0-03 12: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독도서관 주변이 한때 저의 나와바리였는데 ㅎㅎ~~
작년 봄 정독도서관에 오래간만에 갔었는데 그 곳 벤치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설렁탕과 막걸리 1병, 좋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영화로 봤는데
원작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cyrus 2023-10-03 16:45   좋아요 1 | URL
이제 서울에 가면 동네에 있는 공공도서관도 미리 확인해야겠어요. 서울에 디자인이 멋진 도서관이 엄청 많던데요. ^^

제가 돼지국밥을 혼자 먹을 때 막걸리 한 병 반주 삼아서 먹어요. 지금 대구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국밥+막걸리 조합이 당기네요. ㅎㅎㅎ

<세상의 모든 아침> 모임이 독서 모임과 영화 모임, 두 개로 편성되어 있어요. 이번 주 금요일에 독서 모임 날이고, 다음 주 금요일이 영화 모임 날이에요. ^^

페크pek0501 2023-10-0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렁탕도, 책들도 군침이 돌게 하는군요.ㅋㅋ

cyrus 2023-10-03 16:48   좋아요 1 | URL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은 못 읽었지만, 황금연휴 첫날은 나름 재미있었어요. ^^

추풍오장원 2023-10-03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문학의 고고학이 다시 나오는군요!

cyrus 2023-10-03 16:52   좋아요 1 | URL
<소요서가> 대표님을 뵌 적은 없지만, 책방 특성상 인문학 관련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과 인맥이 형성되어 있을 것 같아요. ㅎㅎㅎ 예전에 대표님이 제가 갖고 싶었던 절판된 책 한 권 구해주신 적이 있어요. 재출간하는 출판사 이름과 출간일은 모르지만, <소요서가>가 전하는 출간 정보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요. ^^

꼬마요정 2023-10-03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고고학>!! 다시 나오네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새>는 별로인가 봅니다. 아리스토파네스 작품은 <리시스트라테>밖에 몰라요. 이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알게 됐어요. 파스칼 키냐르는 <부테스>만 읽었는데 어려웠어요. 음악 같은 소설이었어요.

이문 설농탕!! 저도 가 봤어요. 맛있게 먹었답니다. 저보다 오래 산 식당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책이야 워낙에 오래되고 기억에 남을 책들이 많으니까 익숙한데, 식당은 그렇지 않잖아요. 어릴 때부터 먹던 식당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있으면 반갑고 동지 같고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책은 오래된 것들이 많은데, 서점은 그렇지 않네요. 오래된 서점들이 계속 살아남아 주면 좋겠습니다^^

cyrus 2023-10-03 16:57   좋아요 2 | URL
재출간 기다려 봅시다! ㅎㅎㅎ

<리시스트라테>는 희극 전집 2권에 있는데, 결국 2권 읽기는 미뤄졌어요. 희극이 얼마나 재미없었으면 독서 모임이 2시간 진행되는 동안 거의 한 시간은 다른 주제의 대화를 해요.. ㅋㅋㅋㅋ <일글책> 대표 모임장이 이건 아니다 싶어서 결국 이번 주 토요일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자고 제안했어요. ^^

이제 종로에 가면 이문설농탕에서 밥을 먹어야겠어요. 20대에 종로를 많이 갔었는데, 오래된 식당을 이제야 알았네요. 그땐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아서 분식집으로 끼니를 때웠어요. ^^;;

꼬마요정 2023-10-03 21:29   좋아요 0 | URL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멋집니다. 근데 진짜 재미없었나봐요 ㅎㅎㅎ 20대엔 분식이 최고죠!! 예전엔 2천원이면 친구들이랑 떡볶이, 김밥 먹고 배불렀는데… 하긴 그 때 제 시급이 1,500원이었어요 ㅎㅎㅎ

stella.K 2023-10-03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지.ㅎㅎ
픽업 서비스 해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냥 왕창 사서 맡기고 오지 그랬어.
그럼 다음 날 너의 집 앞에 짠하고 배달될텐데.
옛날에 가끔 정독도서관 가서 저자 강연 듣고 오곤 했는데.ㅠㅠ
그럼 이날 혼자 서울 왔다 간 거야? 혼자 각잡고 바바리 날리며 종로를 휘젓고 다녔겠구만.ㅋㅋ
근데 참 절묘하네. 8시26분. 8월 26일!

cyrus 2023-10-04 06:49   좋아요 1 | URL
연휴 전날에 책을 미리 주문해서 대구 알라딘 서점에 맡겼어요... ㅋㅋㅋㅋ

바바리는 안 입어도 될 정도로 연휴 기간의 서울 날씨는 아주 좋았어요. 낮에 더웠어요. 서울 여행기는 아직 남았으니 기대해 주세요. 아무래도 주말에 몰아서 쓸 것 같아요.. ^^;;

서울로 향하는 열차 시간 중에 매진되지 않은 시간대가 새벽 첫 차부터 시작해서 아침에 출발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여유 있게 8시 26분 출발하는 열차를 탔어요. 열차 탔을 때까지만 해도 좋은 기운이 느껴졌는데, 첫 번째 행선지를 잘못 정했어요.. ㅋㅋㅋ

얄라알라 2023-10-04 04: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카페인 부작용 겪는 새벽 cyrus님의 유쾌한 포스팅으로 혼자 ㅋㅋ 거립니다^^ 열람용이라니! 하필 도서관 문 닫고 있었다니!! ㅋㅋ그래도 이문설농탕을 건지셨으니까 cyrus님의 서울 stay는 WIN!

cyrus 2023-10-04 06:50   좋아요 1 | URL
수요일 저녁에 있었던 일은 이번 주말에 정리해서 공개하려고 해요. 수요일 저녁 여행기의 주제를 살짝 알려드리자면 제가 좋아하는 ‘술’입니다. ^^

얄라알라 2023-10-04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철부대3가 딱, 재미있으려 할 때 끊고 연결해주는 맛이 있던데 cyrus님 담 페이퍼는 이번 주말 ㅋㅋ제가 확실히 낚이었습니다 ㅎ감사드려요. 즐거워져요

cyrus 2023-10-07 22:27   좋아요 1 | URL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요즘 써야 할 글이 자꾸 나와서 진작에 써야 할 글을 못 쓰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