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

 

EP. 4

 

 

2021113일 수요일, 햇살 좋은 날





오후에 글을 쓰고 싶어서 담담(책방)에 갔다. 계단이 있는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책방지기였다. 입구 주변에 빗자루를 쓸면서 청소하고 있었다. 그분이 뒤돌아볼 때까지 나는 청소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책방지기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지만, 무례한 행동일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책방지기가 뒤돌아서자 나는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책방지기는 먼저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책방지기는 책방에 오는 택배 기사들에게 호박 진액(호박 즙)을 준다. 3층에 오는 택배 기사에게 늘 미안한 감정을 느껴서 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게 호박 진액과 같은 건강보조식품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호박 진액이 상당히 좋은 거라면서 내게 하나 마셔보라고 줬다책방지기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많이 달지 않아서 호박 그대로의 맛이 났다.  


책방에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있다. 손님은 이곳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비밀 공간은 책방지기의 아들들이 쓰는 방이다. 책방지기의 아들은 두 명이다. 책방에 있으면 아들들이 비밀 공간을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담담을 이용하려는 분들에게 이 사실을 꼭 알리고 싶다. 앳돼 보이고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책방에 들락날락한다면 당황하지 마시라. 책방지기의 아들이다. 아니면, 그 사람은 나일 수도 있다책방지기의 아들들은 채식을 선호한다. 작년에 책방지기의 아들 한 명이 전역했다. 책방지기와 터놓고 대화를 하게 되니까 아들들에 대한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책방지기를 만나려는 남자 한 분이 책방에 왔다. 남자가 오기 전에 책방지기는 잠깐 어디 나갔다. 아들이 대신 책방지기의 개인 사무실(책방지기가 개인 업무를 볼 때 이용하는 작은 방)을 지키고 있었고,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손님에게 책방지기가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말했다. 그러자 손님이 날 보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 , 네가 전역한 (책방지기의) 아들이구나. 축하한다.” 나는 전역한 책방지기의 아들은 사무실에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손님이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게 나와 전역한 책방지기의 아들은 안경을 쓰고 있다. 여기에 내가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손님이 나를 책방지기의 아들로 오해하는 건 당연했다.


밖에 나갔던 책방지기가 돌아왔고, 그분은 간식으로 크루아상을 사 왔다. 책방 근처에 빵집이 있다. 예전에 내가 책방을 가기 전에 빵을 샀던 곳이기도 하다(‘전망 좋은 []두 번째 이야기 참조). 책방지기는 밖에 나갔다가 출출해서 빵을 샀다고 했다. 그러고는 같이 먹자고 했다. 책방에서 간식과 마실 것을 얻어먹게 될 줄이야‥….



















* 그림 형제, 김열규 옮김 그림형제 동화전집(현대지성, 2015)

 

* 그림 형제, 홍성광 옮김 그림 동화집 1, 2(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 《그림 동화집 1헨젤과 그레텔이 수록되었음. 





그 순간 책방이 그림(Grimm)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Hansel and Gretel)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처럼 느껴졌다부모에게 버림받은 헨젤과 그레텔은 숲속을 떠돌다가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한다. 남매는 그곳에서 집주인을 만난다. 하지만 그 집주인은 알고 보니 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였다. 헨젤은 우리 안에 갇히게 되고, 마녀는 헨젤을 포동포동하게 살찌우기 위해 그레텔을 하녀처럼 부린다.


간식과 음료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책방이 동화에 나온 과자로 만든 집이라면 책방에서 안락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변질할 수 있다. 자꾸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이러다가 서재를 탐하다가 아니라 담담을 탐하다가 되겠군그런데도 책방지기는 항상 내게 얼마든지 책방에 와서 편안하게 이용하라고 말한다. 장난스러운 표현이지만, 이런 책방지기의 모습은 마녀와 같다. 책방을 마음껏 이용한 대가로 책방지기가 나에게 계단이 있는 입구나 책방 내부를 청소하는 일을 맡길 수도 있다. 만약에 책방지기가 나에게 무급으로 청소를 부탁한다면 기꺼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책방을 아늑한 내 방처럼 편안하게 이용했다. 내 방을 스스로 청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커피를 마셨으면 빈 찻잔을 흐르는 물로 씻어서 찬장에 넣을 수 있다. 이건 어려운 일도, 귀찮은 일도 아니다. 책방을 편안하게 이용했으면 당연히 뒷정리를 해야 한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책방지기는 나를 배웅한다. 나는 항상 그분에게 오늘 하루도 책방을 잘 이용했고, 즐거웠습니다라고 말한다. 빈말이 아니다. 책방에서 책방지기와 주고받은 대화들, 책방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 이 모든 게 나한테는 특별해 보인다. 그리고 그냥 흘러 지나가 버리는 시간의 일부로 여기고 싶지 않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결국 책방에서 보낸 시간을 기억하려면 기록해야 한다기록은 기억을 낳는다항상 이 말을 명심하면서 책방에 관한 기록을 꼭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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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15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기록도 기대합니다!!!

cyrus 2021-01-15 18:13   좋아요 2 | URL
네,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올해의 목표 중 하나가 대구에 있는 책방에 가보는 거예요. ^^

페넬로페 2021-01-15 1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꾸 담담에 가고 싶어요~~
cyrus님
‘아무튼, 책방‘~~
책 내셔요^^

붕붕툐툐 2021-01-15 15:25   좋아요 2 | URL
와~ 찬성찬성!!

cyrus 2021-01-15 18:15   좋아요 2 | URL
이미 책방에 관한 책을 쓰신 분들이 계시고, 사실 책방 일기는 누구나 쓸 수 있어요. 저는 나태해지지 않고 기록하는 것에 만족합니다. ^^

수이 2021-01-15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져 기록도 책방지기님두 크로와상 먹고싶어진다

cyrus 2021-01-15 18:17   좋아요 2 | URL
최근에 비건 빵의 맛을 알게 돼서 그 빵의 맛을 잊지 못하고 있어요.. ^^;;

blanca 2021-01-15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방 오래오래 흥하기를...

cyrus 2021-01-15 18:18   좋아요 2 | URL
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대구에 책방이 더 생겼으면 좋겠고요. ^^

미미 2021-01-15 1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번도 직접 뵌적 없는데 담담책방지기님 이젠 익숙하고 친근해요ㅋ. 저에게도 다닐만한 저런 책방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cyrus 2021-01-15 18:19   좋아요 2 | URL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책방을 알고 있는 저는 행운아 같습니다. 책방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어요. ^^

붕붕툐툐 2021-01-15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자로 만든 집에서 글 잘 쓰셨습니까? 어떤 글을 쓰셨는지 궁금하네요~ 전 왠지 이 글이 ‘나는 앳돼 보이고 대학생처럼 보여요~‘하는 자랑의 글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건 나뿐인가..훗...)

페넬로페 2021-01-15 16:08   좋아요 2 | URL
와! 저도 비슷한 생각했어요~~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cyrus님이 제가 생각한것보다
훨씬 어리신건 아닌지?

cyrus 2021-01-15 18:21   좋아요 1 | URL
어제 블로그에 등록된 글 중에 한 편입니다. 생각보다 금방 글이 써지더라고요. 책방의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았어요... ㅎㅎㅎ

제가 아직도 대학생 같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

cyrus 2021-01-15 18:22   좋아요 2 | URL
To. 페넬로페 님 / 제 나이 숫자 앞자리는 3입니다. ^^

stella.K 2021-01-15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너도 이제 숫자 앞자리가 바뀌었구나.
그래도 그런 소릴 들을 정도면 아직 한창으로 보이나 보다.ㅎㅎ
훈훈해. 광에서 인심 난다고 역시 책도 좋지만 먹을 게 있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