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벌써 같은 수식어는 좀 식상하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그 식상함 만큼이나 너무 당연하게도 이런 수식어로나마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오는 세월에 안타까워해야겠다.

나는 좀 달리해보자. '이제야' 11월이다. 낙엽이 지고 바람 횡하고, 쓸쓸함의 대명사가 바로 11월이다. 그러나 내게는 좀 다르게 다가온다. 무언가 재생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1부터 10까지 힘겹게 달려왔다가 다시 1로 돌아가는,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달인 것만 같다. 고작 2를 넘기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나는 11월에 한 해를 다시 시작한다. 꼭 내가 11월의 어는 한 날에 태어나서만은 아니다. 이 쓸쓸한 가을날 나는 한 없이 쓸쓸해져서, 하나도 남김없이 허전해져서 무언가 마구마구 채워가고 싶은, 그런 달이다. 이런 11월에 나는 또 무엇으로 채울까?

이번달은 시집을 틈틈히 읽어야겠다. 나는 이 가을과 어울리는 남자이고, 그런 가을 남자에게 어울리는 것은 시집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이번달 우리 학교(우리 과)에 박완서 선생이 오신다. 과내 학술제 행사에서 김명인 교수님을 통해 박완서 선생을 초청하기로 한 것이다. 그간 박완서의 작품을 등한시했더랬는데, 오신다 하니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20세기 한국소설>의 『박완서』를 읽고 있고, 최근 출간한 『친절한 복희씨』가 대기중이다. 이번달에 엄마의 말뚝 시리즈를 완독할 예정이다.

그리고는 무계획이다. 닥치는 대로 읽어야지 싶다.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과 『발자국』이 대기중이다.(이분 책 출간을 좀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 일말의 바람도 있다.) 몇 달 전 구매한 강준만의 『광고, 욕망의 연금술』도 대기중이다. 부담없이 재밌는 내용인듯 싶어 읽어야지 하면서 미루고 있다. 최근 구입한 한국소설들도 내쳐 읽어야 할 것들이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고, 그리고 또 쌓여갈 많은 책들이 있을 것이다.

시험이 12월 2일이다. 그런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11월만은 공부의 달이였더라도 참 좋았을 것도 같다. 젠장맞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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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04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전에 갔다가 박완서선생님의 사인회에 갔었는데, 악수를 하시는 손이 참 곱고 예쁘고 따뜻하게 늙은 손이었어요 ^^ 멜기세덱님도 그 손 꼭 한번 잡아드리세요! ^^

멜기세덱 2007-11-04 23:01   좋아요 0 | URL
ㅎㅎ "손 한 번 잡아주이소....ㅋㅋㅋ"

Jade 2007-11-04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로퀜스 저도 주문했는데! ㅎㅎ 멜기세덱님 11월에 생일이셨군요. 주변에 11월 생일인 사람이 많아요 ^^ 수능도 있고.. 의미있는 11월이 되시길!

멜기세덱 2007-11-04 23:02   좋아요 0 | URL
그겁니다...제가 바로 11월에 생일이라는 거....

2007-11-05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05 18:08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절대 책선물 사절 안합니다...ㅎㅎㅎ
근데...막....생일 축하기념 데이트....이런것도 괜찮은데...ㅋㅋ(농담...)ㅎㅎ

2007-11-06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6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06 00:54   좋아요 0 | URL
↑ 이거 내가 쓴 비밀글...
근데 이걸 나말고 또 누구 볼 수 있지....ㅋㅋㅋ

앗, 이런 여기서 내가 비밀글 하면 안 되는 거잖아....ㅋㅋ

2007-11-04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1-04 23:04   좋아요 0 | URL
ㅎㅎ 좋은 질문거리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1번질문은 제가 그 소설을 읽고 꼭 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2번째 질문은....글세요..그 실수와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ㅎㅎ 나중에 살짝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제게 올수 있을지도 무척 의문이네요...ㅎㅎ

심술 2007-11-05 18:00   좋아요 0 | URL
너무 부담 갖지는 마시고. 기회가 안 되면 안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프레이야 2007-11-04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 앞두면 꼭 다른 책 보고 싶죠. 그래도 잘 참고 우선 시험 잘 보시기를요.^^
완전 가을남자 같아요, 세덱님^^

멜기세덱 2007-11-04 23:04   좋아요 0 | URL
ㅋㅋ완가남....ㅋㅋㅋ멜기....

웽스북스 2007-11-05 00:48   좋아요 0 | URL
푸흐흐 완가남이라니 멋져요 ㅋㅋ
 

어제 전국적으로 각 시도교육청은 2008학년도 중등 임용시험 공고를 했다. 시험일까지 딱 한달하고 하루를 남겨두고 말이다. 대부분의 응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기 과목이 어디서 몇 명을 뽑느냐에 일희일비하기 마련이다. 선발 인원에 따라 어디에서 응시할지를 결정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하여간 그간 공부를 해오면서도 올해는 몇 명이나 뽑을지 걱정은 태산이다. 좀 일찌감치 발표를 해주면 안되나?

두 주 전 초등 임용시험 공고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다. 선발인원이 증원되어 공고를 다시 한 모양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번 중등 임용시험 공고도 시험 1달을 앞두고 발표된데에 좀 불만이 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발인원을 결정하는 부분에 있는 것인데, 이게 그렇게 시간을 촉박히 남겨두고 결정되는 문제냐 하는 것이다.

시험 한 달 밖에 안 남겨두고서야 당해 선발인원이 결정된다는 건 얼핏 이해하기 힘들다. 말하자면 그 해 몇명이나 뽑아야할지 2달 전까지도 모른다는 얘기 아닌가? 이건 어찌보면 우리나라 교원수급 정책이 완전 주먹구구식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교육은 대계라고 하는 말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교육정책이 이렇게 조잡하게 이뤄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한 교육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교원수급에 관한 문제이고, 이 교원수급 계획이 몇 십년은 아니더라도 1~2년은 앞을 내다보고 수립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당장 한달 후에 몇명을 뽑을지가 결정된다는 것은 내부사정이 어떻든간에 욕먹을 만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초등 교사 선발인원이 이렇게 하루사이에 변경된 것은 이런 조잡한 교육정책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비교사들은 그 숫자 하나하나에 목을 매달고 있는 실정에서 보다 일찌감치 그 숫자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렇지 않고 질질 끄는 이유를 나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

교원 선발 인원이 한달전에나 가야 결정되어서 그렇다고 할 것이라면 욕을 한바가지 해주어야 할테고, 그것이 아니고 괜히 일찍 발표하면 짱돌들고 시워할까봐서 질질끌다가 이도저도 못할때 공고하는 것이라면, 이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기도 하다. 아무튼 미운놈이 하는 짓은 뭘해도 밉다.

이번 시험은 어느 시험보다도 이번 응시자들에게 중요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내년부터는 선발 방식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2차 선발방식에서 3차 선발방식으로 변경되고 전공 및 교육학에 관한 문제도 더 확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공포된 새로운 교육과정을 새로이 공부해야 한다는 어려움도 더한다. 말 그대로 더 빡세지기 때문에 이번 시험에 사력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 시험에서는 지난 해까지 와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응시자들의 제출 서류 중 '대학 학적부'라는 것이 추가된 것이다. 지난 해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학적부라는 게 중고등학교때의 생활기록부 같은 것이라는데, 이걸 왜 내라고 할까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우리 정아 누님 때문이지 싶다.

신정아가 학력을 속이느니, 권력의 실세가 개입했느니 떠들지만, 이건 죄다 남의 얘긴줄만 알았다. 그게 이렇게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기서 몇가지 드는 생각은 세상 모든 일이 나와 상관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고, 이것도 일종의 나비효과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등이다. 정아 누님 덕에 전국 몇 만의 예비교사들이 대학 학적부를 떼게 생겼으니 하는 소리다. 금전적으로도 500원씩 더 손해본다. 이 덕에 대학들은 수입이 좀 늘게 생겼다. 정아 누님 여러모로 사람 피곤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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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0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교육자체뿐만이 아니라 정책과 행정에도 문제점이 많은 우리나라 교육현실이군요.
신정아씨는 아직도 자신이 예일대 출신이라고 우길지 그건 굼긍하더군요. 재판 초기만하더라도 모든 사실은 날조되었고 자신은 분명히 예일대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했었더랫죠.^^

이매지 2007-11-0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도서관 앞에서 만난 친구는 이제 삼십 며칠 남았다고 좌절하던데;
아무쪼록 멜기님은 좋은 성적으로 합격! 하시길 바랄께요 :)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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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김제동 어록(語錄)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어록 중에 하날 가져오면 이런 식이다. “키가 작았던 나폴레옹은 자기 자신의 키를 땅으로부터 재면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작은 키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자신의 키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시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세요.”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에 그다지 특별한 재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말은 참 빠르고 재미나게 잘하는 김제동의 어록이 연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화제가 되었던 데에는 이런 식의 촌철살인(寸鐵殺人)과 같은 반전과 당대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일순간 꺾어버리는 단순명쾌한 사고의 역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폴레옹의 일화를(그것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용케도 찾아와 다만 입으로 옮겨놓았을 따름인데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겐 주옥과도 같은 교훈을 주고 있기에, 김제동만의 어떤 호소력을 높이는 말하기 방법이 곁들여져서이겠지만, 한때나마 화제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서 흔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유행이 되었다. ‘누구누구 어록’이라고 해서 재미난 말들, 혹은 말실수들 같은 것을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이 유행 아닌 유행을 탔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내가 아는 것 중 하나는 전거성, 즉 전원책 변호사가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 한 발언들을 모아놓은 어록이다. 그 사람 말은 참 황당무계한 면이 없지 않지만, 가히 격분에 찬 말하기 모습은 너무 웃기게 재밌다. 아무튼 이 어록의 유행이 다만 웃기는 말모음 정도로 저급화되긴 했지만, 그 유행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김제동의 말모음은 충분히 ‘어록(語錄)’이란 말이 지니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스런 의미에 값하는 것이지 싶다.

  정민 선생도 이 어록의 유행을 감지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 무슨 어록이니, 누구 어록이니 하는데, 누구누구 말실수나 모아놓고 웃고 즐기는 것에 ‘어록(語錄)’이란 거창한 명칭을 붙여놓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정민 선생은 이 어록 유행에 종지부(終止符)를 찍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이다. 어록(語錄), 말씀 어(語)에 기록할 록(錄)을 쓰는 이것은 그냥 흔하디흔한 말들을 기록하여 모아놓은 것은 아니다. 말 중에서도 말씀이 될 만한 것을, 그러면서도 그것을 베끼어 써서 책으로 만들어 낼 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민 선생은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이 저급화된 어록의 유행에 종지부를 찍을까?

  그것은 바로 정민 선생이 엮고 첨언(添言)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최근 다산을 연구하여 방대한 저술을 내보인 정민 선생이지만, 다산의 말과 글들이 어찌나 높고 귀한지 그 방대한 저술을 하고도 끝내 남은 귀한 말씀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에 모아 엮어 놓은 것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는 오롯이 다산 선생의 방법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다. 다산은 이황의 『퇴계집』을 “매일 한 편씩 아껴서 읽”으면서 마음으로 공감한 귀한 글귀들을 모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들을 덧붙여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엮었다. 다시 정민 선생은 다산의 방법 그대로 다산의 글귀들을 모아 “말게 감상한”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펴낸 것이다. 말하자면 정민 선생의 「다산사숙록」인 셈이다.

  ‘다산어록(茶山語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어록이야 말로 어록의 지존(至尊)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어록이라는 것이 ‘귀한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할 때, 그 귀한 말씀이란 것은 금가루를 갈아 먹인양하여 쓴 글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록으로 남겨 고이고이 간직하고 세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읽고 또 듣고, 길이길이 남기고 되새길 만한 그런 말씀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제동의 그 ‘말씀’들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도 좋게 보아줘도 그것이 세대를 넘기고 세월을 넘겨서까지 어록일성 싶지는 않다. 진정한 어록이란 이런 것이야 하고 보여줄 수 있을만한 ‘말씀’들이 어디 한갓 연예인의 입에서 쏟아진 것들이어야 쓰겠는가 하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오는 그런 불순한 발상에서만은 아니다. 시대를 넘어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우리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귀한 말씀들이 분명히 여기 있기에 그런 것이다.

  ‘청상(淸賞)’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맑게 감상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감상하는 이의 자세를 나타내는데, 감상하는 그 대상이 분명 맑고 청아하게 울릴 때에야 비로소 청상(淸賞)이 가능한 것이다. 정민 선생이 ‘청상’한다고 하였으니, 그가 그렇게 맑게 감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 선생의 ‘귀한 말씀’이다. 다산의 방대한 저술들 중에 “삶의 자세 전반에 관한 성찰과 충고”를 추려 엮은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을 손에 들고 한 말씀 한 말씀 되새기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의 복이요”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나누고 싶다.”

  200년 전 쯤에 살았던 다산 선생의 말씀이 그 당시에도 그러했겠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한다. “죽는 날 사람과 뼈가 함께 썩고, 한 상자의 책도 전하는 바가 없다면 삶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人與骨俱朽, 一簏之書無所傳, 猶之無生.)” 여기에 정민 선생은 좀 더 격하게 덧붙인다. “마음공부를 하라 하면 ‘한가한 소리 하고 앉았다’고 빈정댄다. 책을 읽으라면 ‘따분한 말 좀 그만 하라’고 한다. 온통 돈 벌 궁리,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 생각뿐이다. 결국 이룬 것 없이 죽어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과 같이 잊혀진다. 자식들은 그 재물을 두고 싸움질을 한다. 세상을 살다 가는 보람은 그런 것들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속에 품은 생각의 크기가 대인과 소인을 가른다. 개돼지도 배부르면 기뻐한다. 개돼지도 별 걱정 없이 살다가 간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돈만을 좇아가는, 썩어질 것들에만 충성하는, 물신(物神)의 광신자들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말이 주는 울림이 적다고 하겠는가?

  “성인(聖人)이 되느냐 광인(狂人)이 되느냐는 뉘우침에 달려 있다.(其聖其狂, 唯悔吝是爭.)”라거나 “진실로 부모에게 능히 효도하는 사람은 비록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苟於父母能孝者, 雖曰不學, 吾必謂之學矣.)”는 다산의 어록에는 날카로운 칼날로 찔러오는 그 무엇이 있다. 항상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미친놈이 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나와서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된들 무엇 할 것인가? 이 시대 재주가 뛰어나고 박사들이 넘쳐난다지만 그 중에 사람구실 제대로 하는 진짜 사람을 몇이나 될까? 제 부모도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 말씀들은 가히 촌철살인, 그 자체다.

  특히 다산 선생은 독서를 많이 하기로 유명하다. 다산의 말씀들 중에 독서에 관한 언급은 책 한 권으로 따로 엮어내어도 충분할 만큼 어느 하나도 소중한 말씀이 아닌 것이 없다. 다산은 독서의 방법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을 읽을 때는 구름 가고 물 흐르듯 해도 괜찮다. 하지만 백성과 나라에 보탬이 되는 책을 읽을 때는, 단락마다 이해하고 구절마다 깊이 따져 대낮 창가에서 졸음을 쫓는 방패막이로 삼아서는 안 된다.(凡無益於世之書, 讀之可如行雲流水. 若其書有裨於民國者, 讀之須段段理會, 節節尋究, 不可作午牕禦眠楯而已.)” 여기에 정민 선생의 이런 첨언도 또한 명쾌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산의 어록을 읽으면서 정민 선생이 청상(淸賞)한 바를 또한 훔쳐보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평생 가까이에 두고 스승으로 삼을 책 한두 권을 갖는 것이 독서의 큰 보람이요 행복이다.” 정민 선생의 ‘청상(淸賞)’ 중에 하나를 좀 길지만 옮겨보자. “과문은 과거 시험장에서 쓰는 글이다. 실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문(吏文)은 아전들이 행정 실무에 쓰는 실용문이다. 요령만 있으면 된다. 고문은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다. 배우기는 고문이 가장 쉽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과문만 공부한다. 고문을 공부하라고 하면 시험에 안 나오는데 왜 하느냐고 되묻는다. 고문을 열심히 익히면 과문은 저절로 잘 써진다. 과문에만 힘 쏟으면 고문도 안 되고 과문도 안 된다. 글은 테크닉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쓴다. 테크닉을 아무리 익혀도 정신의 뒷받침이 없이는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과문을 배우는 지름길은 고문을 천천히 익히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생각의 힘을 길러라. 글쓰기의 기술과 잔재주를 익히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기본기를 충실히 닦아라. 나머지는 저절로 따라온다.” 다산 선생의 말씀을 좀 더 쉽게 옮기면서 보다 직접적으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논술이라는 감옥에 빠져버린 어린 학생들에게 일침을 주는 또 다른 어록이다. 다산과 정민을 함께 읽는 두 배의 즐거움이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에 있다.

  이 밖에도 구구절절한 다산의 어록이 많다. “즐거움은 누림을 급히 하지 않아야 늙도록 이어지고, 복은 다 받지 않아야만 후손까지 미친다네.(樂不亟享, 延及耄昏. 福不畢受, 或流後昆.)”, “무릇 재물을 비밀스레 간직하는 것은 베풂만 한 것이 없다.(凡藏貨秘密, 莫如施舍.)”, “대저 이미 동서남북의 가운데를 얻었다면 어디를 가든 중국 아님이 없거늘, 어찌 이른바 동국으로 본단 말인가? 대저 어디를 가도 중국이 아님이 없을진대, 어찌 이른바 중국으로 본단 말인가?(夫旣得東西南北之中, 則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東國哉! 夫旣無所往而非中國, 烏覩所謂中國哉!)” 등의 말씀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렇게 200년 전을 살았던 다산 정약용의 어록은 오늘날에도 구구절절이 유효하고 새롭다. 오랜 세월을 묵혀 읽어도 새롭게 발효되는 말씀이고 나서야, 진정한 어록이라 이름하는데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김제동 어록이 따라올 수 없는 지경에 다산의 어록이 있음을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정민 선생이 정리하여 첨언한 이 책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은 다만 인터넷 검색으로 간단히 찾아 여흥삼아 읽고 보는 김제동 어록을 비롯한 누구누구 어록과는 달리, 책상 위 한 곳에 고이 모셔두고 하루하루 읽고 되새기며 ‘맑게 감상’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어록이지 싶다. 이쯤 돼서는 일전의 어록 유행도 더는 나대기가 어렵지 않겠나? 연암(燕巖) 어록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서가에는 3, 4천 권의 책을 꽂아두고, … 마루에 올라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와 투호 하나가 있다. 붓과 벼루, 책상과 도서의 배치가 고아하고 정결해서 기뻐할 만하다.(揷架書三四千卷, … 上其堂入其室, 有琴一張, 投壺一口. 筆硯几案圖書之觀, 雅潔可喜.)”는 다산의 말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은지 너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40세 이전에 4천 권의 책으로 방안의 네 벽을 채우고, 책상 위에는 볼펜과 연필을 채운 단정한 필통이 한 곁에 놓여 있고, 한 쪽엔 컴퓨터가 있으며, 한쪽 구석엔 기타와 피아노가, 또 다른 쪽엔 바둑판과 바둑알이 놓여 있는 곳, 들어서면 오랜 된 책 향기가 깊게 배어나오는 그런 서재 하나 갖고 싶은 내 마음이 간절하다. 다산이 기뻐했던 그런 공간과는 많이 다르면서도 그 맥은 다르지 않은 그런 공간, 그런 곳을 하루 빨리 마련하여 다산의 그 마음과 나의 이 마음이 서로 통하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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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신 없는 종교는 가능한가 고정관념 Q 11
리오넬 오바디아 지음, 양영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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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도 일종의 익숙해-지기다. 어떤 것들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서로 길들여가고,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익숙해진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익숙하다의 '익숙'은 한잣말이겠거니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해당되는 한자는 보이지 않는다. 순우리말인가 하니 또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고어에 '닉숙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닉(다)'와 '숙(熟)'의 결합니다. 고어 '닉다'는 오늘날 '익다'로 쓴다. 熟도 대표 훈음이 '익을 숙'이다. 삶은 계란을 생각나게 한다. 물에 계란을 넣고 끓이면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가 서서이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익숙해지는 가장 기본적 의미는 아닐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오늘날에는 어떤 것에 능란하고 숙달된 상태, 눈에 익어 잘 아는 것, 혹은 가깝게 잘 아는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잘) 안다'라고 종종 표현한다.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말하고, 서울 지리를 잘 '안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나는 내 오랜 친구를 잘 '안다'. 그래서 익숙한 것은 잘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최종의 익숙한 상태란 없다. 더 익숙해지고, 더 잘 알 수 있는 상태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알지만, 나보다 더 자전거 잘 탈 줄 '아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익숙하다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고 알아 가는 것이다. 진행형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익숙한' 것, 혹은 그러한 상태가 진행형이어야 함을 종종 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종종 '너무' 또는 '아주'와 호응하는데, 이른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는 듯 뻐기는 경우다. 내겐 너무나 익숙하기에 뒤도 볼 것 없이 너무나 자명하다. 여기서 나오는 것은 고정관념이고, 이것은 때론 편견과 차별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런 익숙하고 자명한 것들에 의문부호를 붙여주어야 한다. 상식이라는 그 익숙하고 자명한 지식은 그래서 자주 부패하고 상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물음표를 달고 다닐 때 그것은 보다 유효한 지식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것, 익숙한 것,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떤 도움을 얻는다면 조금은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친구로서 웅진지식하우스에서 나온 <고정관념Q>시리즈는 제격일 수 있겠다. 현재 이 시리즈가 다루고 있는 것으로 '종교, 예수, 이슬람, 세계화, 이집트 문명'이 있고, 앞으로 다룰 것으로 '동성애, 왼손잡이, 피카소, 유대인, 팔레스타인, 석유' 등이 있다고 한다. "역사 · 문화 · 사회 · 예술 · 과학 · 건강 등 너른 분야에 걸친 깐깐한 문답은 상식의 틀을 께고 즐거운 지식을 찾을 수 있는 검색창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획의도에 맞게 다양한 분야의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다루려 하고 있다.

이중 나는 관심사항 중 하나인 『종교』를 읽었고, 『예수』를 현재 주문중이다. 이 책 『종교』는 그 주제의 무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가볍다. 그래서 빨리 읽힌다. 속독이 특기가 아닌 나같은 사람도 한 두 시간이면 너끈하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것말이다. "종교는 비이성적이다", "종교는 인간 소외의 근원이다", "신은 죽었다" 등.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문장들인가? 이책의 각각의 소주제들만으로도 책 한 권씩은 충분히 뽑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다소간 이 책이 너무 거대한 것을 건드려서 이도저도 아닌 게 된 듯한 느낌, 말하자면 계륵(鷄肋)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책 『종교』는 우리가 흔히 종교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 그러니까 너무 뻔해서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종교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하나씩 친절히 물음표를 붙여놓는다. '모든 생물 중 인간만이 종교를 가진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방점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 찍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각각의 소주제들은 우리가 종교에 관해 익숙한 문장들이지만 여기에는 모두 물음표를 붙여놓고, 차분히, 그리고 가볍게, 그러면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교라는 그 자체는 인류역사와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렇게 가볍고 쉽게, 그러면서도 한 두 시간만에 후다닥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다룬다고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듯이 이 책은 그 불가능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가능한 만큼에서까지는 물음표를 던짐으로써 '고정관념'은 이렇게 의심하고 회의하라는 방법들을 시범보이고 있다. 그것은 그 나름으로 의의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은 아니고, 이것을 통해 보다 익숙해지는 과정의 선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괜히 부담을 갖지 않고도 이 주제 '종교'에 대해 한번 훑어보자고 한다면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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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종교에 관한 스무 가지의 흥미로운 주제들
    from centris 2008-11-24 20:39 
    인간의 역사와 사회 속에서 종교가 존재 치 않았던 적은 없었다. 이성적, 과학적 사고가 ‘진리’에 가깝게 대접받는 현대에도 이성과 합리주의 앞에서 종교는 여전히 건재하다. <고정관념Q: 종교>는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으로 예측했던 종교가 현대 사회에 들어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우리가 종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킨다.
 
 
순오기 2007-10-23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로부터 해방되고 싶은데요...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로부터 해방의 자유!
하지만 서평에 공감하며 꾹~~~~~

멜기세덱 2007-10-24 00:3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종교로부터 해방되시길 하나님께(누군가에겐 누군가의 신에게) 기원합니다.ㅎㅎ
추천 감사하고요.ㅎㅎ

마늘빵 2007-10-2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요새 책 많이 읽으시는데요? ^^ 올라오는 책들이 다 제 관심사라.

멜기세덱 2007-10-24 00:40   좋아요 0 | URL
아마 선후가 바뀐 것일지도 몰라요.ㅎㅎ 아프님은 언제나 저의 최대 관심사였으니까...ㅋㅋㅋ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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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근작 『바리데기』를 읽었다. 잘 알다시피 서사무가 <바리공주> 이야기를 차용한 소설이다. 황석영의 그간의 글쓰기의 맥을 이어가는 작업이었다. 『손님』이라든가 『심청』이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 <바리(데기)공주> 이야기를 많은 이들은 한두번쯤은 들었을 법한 설화다. 어쩌면 듣지 않았어도 그 내용 쯤은 여하히 추측해 내고도 남을 만큼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설화다. 이 이야기는 현재 7차교육과정 중등 국어 2학년 2학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 만큼 이 널리 알려진 설화가 어떻게 변용되고 차용되는지 황석영이 내어 놓은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겠다.

헌데, 이 책을 읽은 것은 이달 초다. 읽어내기까지 근 보름이 걸렸다. 잘 읽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워서도 아니며, 별반 재미가 처져서도 아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럭저럭' 혹은 '그저그런' 정도라고 해야할까?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황석영이란 이름이 가지는 소설적 재미의 보증상표를 가지고 태어난 이 소설의 기본적 재미를 느낄 수는 있다는 점에서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겠고, 그 외에는 별반 얻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저그런'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황석영을 꾸준히 읽어 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는 소설가로서의 지위와 권위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어서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틈틈히 지켜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일찍이 황석영에 대한 어떤 외상外傷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그의 초기 단편들, 그러니까 그의 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한 「삼포 가는 길」등의 작품을 읽고 심심찮은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어렸을 적에 읽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의 작품의도 등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은 영 지루한 감을 떨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그의 장편들은 어느 정도 이런 외상의 공포을 떨올리지 않을 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작품 『바리데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그런 외상의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이번 작품이 앞서 말한대로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차용하여 전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이 작품은 보름이 넘게 걸려 마침내 읽어 내었다. 왜일까? 김훈의 『남한산성』도 하룻밤을 지새우며 다 읽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황석영의 이번 소설도 하루만에 읽어내기에 충분한 이야기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별반 어렵지 않은 필치로 짜여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하루쯤 손에도 놓아도 좋을 만큼 빠져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내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황석영은 내가 기대하기에는 그의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현대적(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떨떠름하지만)인 변주를 읽는 약간의 재미도 찾아 볼 수 있지만, 북한과 중국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 제법 잘 구성한 요소들(이를테면 9·11테러라든가, 아프간 전쟁 등)을 짜맞춘 소설가의 재능에 탄복하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을 찾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책 말미에 작가의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제가 19세기를 배경으로 『심청』을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바리데기』를 쓴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19세기의 제국주의와 21세기의 신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언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것은 <바리공주>이야기의 그 익숙함 만큼이나 상투적인 신자유주의의 면면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비참함과 폭력성 등의 폭로들 말이다. 이것은 현실 그자체로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소설가가 그걸 작품으로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뭔가 다른 깨달음(혹은 해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의문에 대해서 이 작품에 물었을 때 여간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리'는 <바리공주> 설화에서의 그 바리데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 서사무가에서의 바리데기는 하나의 영웅의 일대기 구조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이 구시대적 영웅설화의 모티브까지도 있는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 즉 바리는 서사무가의 그 바리데기와 그 모든 것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바리데기』에서 바리는 영웅인가? 또한 그렇다면 작가가 신자유주의의 비참함을 폭로하고 그것을 분쇄하는 데에 얼마만큼 이 바리가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결국 아쉬움은 그거다. "분열과 증오와 죽임의 21세기 지구촌에서 생명의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란 물음에 황석영은 '숨은그림찾기'라며 어디 한 번 니들이 찾아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숨은그림찾기에는 분명 '숨은 그림'이 있다. 하지만 여기 『바리데기』에는 숨은 그림은 없고 뻔한 그림만 있다. 이것이 못내 아쉬운 점이다. 바리가 신비하고 영험한 어떤 무속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마치 이 신자유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어떤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서사무가에서 보이는 영웅의 구조처럼 이 사회에서도 그런 영웅의 존재가 출현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애써 옛날 옛적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차용하여 새로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뭔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변주하고 변용하였어야 했다. 새로운 모색이랄까? 그런 것이 없다. 이번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말이다.

황석영은 소설을 시작하기 전 진도아리랑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네". 바리의 일생이 그렇다는 것일테다. 우리 인생도 무수한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수심이 가득할 것이다. 같은 노래에 이런 구절도 있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구부야 구부가 눈물이고나". 바리도 그렇고 우리네들도 험하고 험한 고개를 넘고 넘어 눈물의 세월을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 『바리데기』가 애잔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진도아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며 그 많은 수심과 고개들을 흥겹게 넘어가고 있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저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나 가세"라며 흥을 돋우기도 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치부를 들어내며 농을 떨기도 한다. 진도아리랑에는 그렇게 해학도 있고 재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마저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진한 아쉬움은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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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조용히 추천하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