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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황석영의 근작 『바리데기』를 읽었다. 잘 알다시피 서사무가 <바리공주> 이야기를 차용한 소설이다. 황석영의 그간의 글쓰기의 맥을 이어가는 작업이었다. 『손님』이라든가 『심청』이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 <바리(데기)공주> 이야기를 많은 이들은 한두번쯤은 들었을 법한 설화다. 어쩌면 듣지 않았어도 그 내용 쯤은 여하히 추측해 내고도 남을 만큼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는 설화다. 이 이야기는 현재 7차교육과정 중등 국어 2학년 2학기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 만큼 이 널리 알려진 설화가 어떻게 변용되고 차용되는지 황석영이 내어 놓은 작업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겠다.
헌데, 이 책을 읽은 것은 이달 초다. 읽어내기까지 근 보름이 걸렸다. 잘 읽히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내용이 어려워서도 아니며, 별반 재미가 처져서도 아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럭저럭' 혹은 '그저그런' 정도라고 해야할까?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황석영이란 이름이 가지는 소설적 재미의 보증상표를 가지고 태어난 이 소설의 기본적 재미를 느낄 수는 있다는 점에서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겠고, 그 외에는 별반 얻을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저그런' 정도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내가 황석영을 꾸준히 읽어 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지는 소설가로서의 지위와 권위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편이어서 언제나 그의 작품에는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틈틈히 지켜보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일찍이 황석영에 대한 어떤 외상外傷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그의 초기 단편들, 그러니까 그의 등단작 「입석부근」을 비롯한 「삼포 가는 길」등의 작품을 읽고 심심찮은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다는 말이다. 어렸을 적에 읽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그의 작품의도 등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을 읽는 것은 영 지루한 감을 떨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그의 장편들은 어느 정도 이런 외상의 공포을 떨올리지 않을 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작품 『바리데기』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그런 외상의 징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이번 작품이 앞서 말한대로 익숙한 이야기 구조를 차용하여 전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 이 작품은 보름이 넘게 걸려 마침내 읽어 내었다. 왜일까? 김훈의 『남한산성』도 하룻밤을 지새우며 다 읽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황석영의 이번 소설도 하루만에 읽어내기에 충분한 이야기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별반 어렵지 않은 필치로 짜여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하루쯤 손에도 놓아도 좋을 만큼 빠져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내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황석영은 내가 기대하기에는 그의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그런 것을 느끼지는 못했다.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현대적(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떨떠름하지만)인 변주를 읽는 약간의 재미도 찾아 볼 수 있지만, 북한과 중국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 제법 잘 구성한 요소들(이를테면 9·11테러라든가, 아프간 전쟁 등)을 짜맞춘 소설가의 재능에 탄복하기도 하지만, 그것 외에,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을 찾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작 중요한 그 무엇은 무엇일까? 책 말미에 작가의 인터뷰에서 황석영은 "제가 19세기를 배경으로 『심청』을 먼저 쓰고 난 다음에 『바리데기』를 쓴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요. 19세기의 제국주의와 21세기의 신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것처럼 말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언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것은 <바리공주>이야기의 그 익숙함 만큼이나 상투적인 신자유주의의 면면들일 뿐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비참함과 폭력성 등의 폭로들 말이다. 이것은 현실 그자체로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소설가가 그걸 작품으로 리얼하게 보여주는 것도 가치 있는 것이겠지만, 그보다 한 걸은 더 나아가 뭔가 다른 깨달음(혹은 해법)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의문에 대해서 이 작품에 물었을 때 여간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바리'는 <바리공주> 설화에서의 그 바리데기와 별반 차이가 없다. 서사무가에서의 바리데기는 하나의 영웅의 일대기 구조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이 구시대적 영웅설화의 모티브까지도 있는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 즉 바리는 서사무가의 그 바리데기와 그 모든 것을 동일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바리데기』에서 바리는 영웅인가? 또한 그렇다면 작가가 신자유주의의 비참함을 폭로하고 그것을 분쇄하는 데에 얼마만큼 이 바리가 역할을 감당해 내고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결국 아쉬움은 그거다. "분열과 증오와 죽임의 21세기 지구촌에서 생명의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란 물음에 황석영은 '숨은그림찾기'라며 어디 한 번 니들이 찾아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숨은그림찾기에는 분명 '숨은 그림'이 있다. 하지만 여기 『바리데기』에는 숨은 그림은 없고 뻔한 그림만 있다. 이것이 못내 아쉬운 점이다. 바리가 신비하고 영험한 어떤 무속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마치 이 신자유주의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어떤 '신비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서사무가에서 보이는 영웅의 구조처럼 이 사회에서도 그런 영웅의 존재가 출현해야만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굳이 애써 옛날 옛적의 케케묵은 이야기를 차용하여 새로쓸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뭔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변주하고 변용하였어야 했다. 새로운 모색이랄까? 그런 것이 없다. 이번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말이다.
황석영은 소설을 시작하기 전 진도아리랑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우리네 살림엔 수심도 많네". 바리의 일생이 그렇다는 것일테다. 우리 인생도 무수한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수심이 가득할 것이다. 같은 노래에 이런 구절도 있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구부야 구부가 눈물이고나". 바리도 그렇고 우리네들도 험하고 험한 고개를 넘고 넘어 눈물의 세월을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이 소설 『바리데기』가 애잔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진도아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로 이어지며 그 많은 수심과 고개들을 흥겹게 넘어가고 있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저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나 가세"라며 흥을 돋우기도 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치부를 들어내며 농을 떨기도 한다. 진도아리랑에는 그렇게 해학도 있고 재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마저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으니, 진한 아쉬움은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