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로스] 서평을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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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삼십 평생을 연애 한 번, 찐한 사랑놀음 한 번 못 해 본 나같은 사람에게, 연애가 이러쿵 저러쿵, 사랑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한낱 사치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그나마의 위로 혹은 위안 삼는 자위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을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를 구성지게 뽑아 제낄지언정, 그 씨앗을 어디에 심어야 할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랑이 뭐길래?"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그것에, 언제부턴가, 스스로로부터, 때론 타의에 의해서 집착하고 집착하게 된다. "여자 친구 없냐?" "장가가려면 얼런 여자를 사귀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에서부터, 괜히 쓸쓸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나기까지, 세상은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드러워서라도 내 한 평생 사랑 한 번 해보고 말리라! 젠장.
사랑이야기들, 연애담들, 사랑학개론들, 사랑은 이렇게 담론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랑을 팔기 위해 안달인 세상같다. 연애 고수들은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몸발이 좋은 사람들, 얼굴이 꽃미남에 동안인 인사들, 게도 안되면 말발이라도 자지러지는 인간들, 그들은 줄곧 연애전문가로 통한다. 연애와 사랑이 시시절절 끊이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수시로 바뀔 뿐이다. 하여간 잘도 한다. 삼십 평생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내 경험을 걔들은 무시로 해치우고 만다. 대단하다. 대단한 고수들.
우리는 그들을 연애박사, 연애대장 쯤으로 부른다. 누가 박사학위를 준 것은 아니지만, 나름 그들도 사랑 혹은 연애에 자신을 전문가쯤으로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들이 많은 여자를 사귀는 데에도 나름의 노하우와 전략이 있을 것이다. 그게 능력이든, 돈이든, 얼굴이든, 말발이든 간에, 그것도 개뿔 없는 나와 비교해서는 대단한 장점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수식, 혹은 명명들을 거둬들여야 할까 보다. 이 시대에 연애 고수들에게 "니들이 사랑을 알아?" "공부 좀 더 하셔"하고 온갖 자신감 충천하여 건방지게 떠들고 나온 이가 있으니, 그가 다름 아닌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이다. 중년의 나이에 참 용감도 하셔라. 그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사랑의 '사'자로 모를 위인처럼 보일 뿐인데, 자칭 사랑의 달인 납시오 하며, 사랑에 대한 썰을 마구마구 풀어댄다.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이 중년의 아줌마(고 선생께 죄송스럽지만, 양해 바란다)가 뭘 안다고, 사랑의 달인 타령일까? 쪼끔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이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읽을 자격이 충분히 되는 셈이다. 우선, 읽기 전에 아줌마라고 얕보고 들어가진 말길 충고한다.
고미숙 선생이 보기에 요즘 세대, 정확히는 근대 이후의 세대, 더 정확히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이 점령한 80년대 이후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은 이런 것이야, 이쯤 해야 사랑한다고, 연애한다고 말할 수 있지, 하고 조언한다. 고미숙 선생이 지적하는 요즘 세대의 사랑의 문제는 대략 이런 것들이다. 첫째, 사랑과 연애의 고수들이 판을 치는 '연애공화국'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안에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이들은 없다는 것. 둘째, 순정 아니면 냉소, 선수 아니면 스토커, 사랑과 섹스, 차고 차이고 등으로 대별되는 사랑 공식의 그 무식한 이분법. 셋째, 사랑에 대한 말도 안되는 상상과 이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과 유리된 사랑. 이런 것들이 오늘날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라고 지적한다. 대단히 동의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 곧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은 다만 개인적 인식의 잘못 만이 아니란 사실, 그 사실을 고미숙 선생은 이어서 분석한다. 이 사회는 총체적 구조 속에서 사랑에 대한 헛된 망상을 조장하고 왜곡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국가, 사회, 학교, 가족, 문화 등등등. 이 모든 것들이 자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속에서 사랑을 왜곡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 일례가 되는 것이 사랑은 곧 소비가 되는 현실이다. 모든 사랑의 진행과정은 그야말로 소비의 진행이다. 첫만남은 스타벅스에서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것은 이제 공식이 되어 버렸다. 무슨무슨 데이는 특별한 사랑을 창조하는 것 같지만, 기실은 조장된 소비문화일 뿐이다. 이 데이데이에 맞춰서 사랑이 진행될 뿐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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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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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전도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뻔한 사랑, 밋밋한 사랑일 뿐이고, 점점더 자극적이 되고, 이벤트가 가장 소중한 사랑이 되어 버리고, 본말은 전도되고, 나와 네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네가 세상의 물질과 소비를 사랑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일찍이 혜은이는 말했다. "만나서 차마시는 그런 사랑 아니야, 전화로 얘기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 웃으며 안녕하는 그런 사랑 아니야"라고. 밋밋한 사랑 공식들, 연애 과정들 속에서 사랑은 점점 그 힘을 잃어갈 뿐이다. 그러니 더 자극적인 요소들을 찾아간다.
사실 혜은이는 열망했다. "가슴 터질 듯 열망하는 사랑, 사랑 때문에 목숨 거는 사랑"의 열정을 원했던 것이다. 살자고 사랑하고, 사랑하자고 사는 것인데, 죽을 이유는 하등 없어 보인다. 좀더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사랑이다. 고미숙 선생의 말대로라면, 좀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면,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그런 사랑, 정말 아니다.
내가 사랑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병통은 사랑과 섹스의 문제다. 사랑과 섹스는 하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둘 도 아니다. 사랑 없는 섹스는 잘못일까? 섹스 없는 사랑은 숭고할까? 섹스는 섹스 자체로도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게 일단 내 지론이라고만 밝혀두자. 이런 사랑과 섹스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의 틀도 결국은 근대 이후의 자본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만들어낸 괴상한 것일 뿐이라고 고미숙 선생은 말한다.
자 이쯤해서 고미숙 선생의 사랑학개론의 결론을 말해보자. 고미숙 선생은 프롤로그에서 우리에게 이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사랑의 주체와 대상은 곧 나라는 것이다. 자꾸들 사랑에서 나를 거세시켜 버리는 것, 이거 안 된다. 다음으로 실연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다. 또 다른 시작을 향해 힘차게 나갈 수 있는 행복한 기회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에로스는 쿵푸다.
에로스는 쿵푸다. 사랑하려면 공부하라. 이것이 결론이다. 사랑이라는 헛된 망상을 위해 정신줄 생명줄 놓는 인간들이 참 많다. 진정한 사랑은 창조적이고, 삶을 한결 충만하게 하며, 나아가 나와 너를 자유롭게 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인문학적, 정신적, 지성적 공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알아야 사랑하지. 현대 사회가 벌여놓은 그 사랑의 공식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그로부터 탈출하여 보다 창조적 사랑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공부가 필수다. 책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난 책은 좀 읽는데, 왜 이러지?)
나아가 사랑은 혁명이다. "사랑, 노동, 지식은 우리 생활의 원천이며, 이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고 빌헬름 라이히가 말했다고 고미숙은 인용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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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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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랑은 창조적이어야 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혁명은 세상을 전복하고자 한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수로 혁명이 가능할까? 세상의 그 구조적 오류들을 사랑으로 극복하고 전복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창조적 발상들을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하고, 공부해서 사랑하고, 사랑해서 혁명하자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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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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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이런! 이쯤되면 혁명을 꿈꾸는 내가 안달해마지 않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자 이제부터 혁명하자! 아니 사랑하자! 그럼 공부하자! 그런데 의문! 나 남들보다 책 많이 읽고, 인문학적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모양이람. 사랑하고 혁명하는데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러냐 이 말이다. 어이쿠! 고미숙 선생 친절히 말씀하신다. "정말 사랑의 열정을 맛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훈련에 돌입해야 한다."고. 그럼 그렇지! 젠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는 대목이다. 사랑도 혁명도 혼자서는 못하는 법! 아니 그럼 공부는 혼자서해야 하잖은가? 기분 좋게도 공부는 여럿이서 하면 더 좋은 것이다. 세미나, 이것이 고미숙 선생이 제시하는 사랑을 공부하는 방법이고 전략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일상의 배치를 바꾸고, 함께 공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은 찾아 나서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공부하면서 눈이 번쩍 띄이는 사랑의 짝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만들고 찾으라는 것이다. 흠흠! 쉬운일이 아닐 터이다. 내일부터라도 찾아나서야겠다.
알라딘에 많은 분들 들으시면 좋겠다. 우리 사랑하십시다. 아니 혁명하십시다. 아니 공부하십시다. 아니 '세.미.나' 하십시다. 자 난 내일 혁명하러 갈 참이다. 세미나 하러 갈 계획이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보지는 마시라. 그냥 전부터 하던 것이었으니까, 일상의 배치가 바뀐 것은 아니다. 암튼 이제 알았으니, 다르게 보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아! 혁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