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 우리말로 옮겨진 고전,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교수신문 엮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요즘 『논어』 관련 책들을 사모으고 있다. 이름난 『논어』만큼이나 이곳저곳에서 한 구절씩을 얻어 들은 것은 꽤 많다. 말하자면 서당개 풍월읇는 식이라고 할까. 아직 이 『논어』란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것이 나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움이다. 특히나 유명한 고전들은 읽어야지 하면서도 그 유명세의 귀동냥으로 아는 체나 할 뿐, 제대로 읽어본 것이 없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그래서 이참에나마 차분히, 그리고 정성껏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에, 그 시작은 무엇보다도 이 『논어』여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논어』관련 서적들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들'인가 하고 의문을 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 『논어』를 '그냥'은 읽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방어전 삼아 읽겠다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제대로 읽어보자는 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논어』와 관련된 책들, 이를테면 번역서, 해설서 등의 여러 책들을 함께 읽어보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여간에 이것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이 아니기에 그 계획의 실효성 여부를 지금은 판가름할 수 없겠지만, 『논어』를 시작으로 여러 동양고전들을 차근차근 읽어보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으로 『논어』관련 도서들을 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내가 구한 도서는 얼추 5~6권 가량이다. 이전에 구입한 것도 있고, 최근 구입해 놓은 것도 있다. 이것들을 찾아보겠다고 시중 서점들에도 가보고, 인터넷 서점들에서도 검색을 해보기도 했는데,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논어』란 제목을 단 책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하기사 그 유명세에 비하면 그정도는 약과이기도 하겠다. 문제는 그 많음이 아니라, 그 많음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있었다. 그 많은 양의 도서들을 모두 살 필요도 없겠거니와, 그럴 만한 경제력도 내게는 없으니,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쪽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그리 많은 문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에 그 선택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여간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한문학 전공 교수님의 추천도서나 유명한 『논어』전공자의 번역서 위주를 택하는 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주변의 여건이 있었지만, 이 『논어』를 읽어보겠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인데,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문제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 문제가 나게, 그리고 많은 독서가들에게 분명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책이 있다. 바로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이다. <교수신문>에서 그간의 우리 학계의 고전번역에 문제를 인식하고 이런 기획을 통해 고전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으며, 이 책은 그런 노력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외국의 고전들의 유명세를 앞세워 무자비하게 번역만 되어 내놓아졌을 뿐, 그 번역에 대한 여하의 비판은 전무했다. 거기에 나같이 외국말이라고는 ABCD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 이게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리니 큰맘먹고 그 유명한 고전 한 번 읽어보자, 나도 교양인 한 번 되어보자 하는 사람들은 그저 손 가는데로 집어들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이번 책의 시도는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의 반가움 못지 않게 아쉬운 마음도 적지 않았던 듯 하다.

사실 이 책을 만난 반가움은 아쉬움을 덮을 만큼은 아니다. 아쉬움은 이 책을 만난 후에도 더 찾을 수 있었다. 우선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은 고전들이 너무 적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책의 머리말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는 번역비판 작업이기 때문에, 이 아쉬움은 앞으로 계속될 번역비판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쇄시키고자 한다.

또다른 아쉬움은 우리의 한문문학의 번역작업에 대한 비판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박지원, 정약용 등의 뛰어난 한문 산문들도 시중에 많이 번역되어 나왔있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작업도 빠른 시일 내에 이뤄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대로된 번역서를 보기위해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하는 회의다. 한 권의 고전을 사기위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를 먼저 읽어야만 하는가? 난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할 만한 사람들이 그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번역비판에 대한 작업이 보다 대중화되고, 더욱 많이 공공연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많은 대중들이 좋은 번역서를 사게되고, 따라서 더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번역작업에 충실히 기한 책들이 나올 수 있을리가고 본다.

그런 아쉬움들이 많이 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2, 3권이 빨리 나왔으면 한다. 그런 것이 아직 자리잡지 못한 번역비판의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는 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내 서가의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놓아둘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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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20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관함에 들어갑니다. 꾹.

파란여우 2007-06-08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 나왔습니다. 님께 땡스투를 하고 오늘 1,2권 모두 신청했거든요^^
와 기대됩니다.

멜기세덱 2007-06-0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온지 꽤 됐는데요.ㅎㅎ 2권 나오자 마자 후딱 사서 봤어요...ㅎㅎ
 
구아바
키란 데사이 지음, 원재길 옮김 / 이레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직까지 우리에게 인도라는 나라는 '신비'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신들의 나라, 불교의 발상지, 각종 기행자들과 수도자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말이다. 이와는 좀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다를 바가 없는 '미개함', '더러움'으로도 다가온다. '신비'하면서도 '미개'한 나라, 인도는 아직까지 그런 나라로, 제3의 세계로 우리에게는 그다지 가깝지 않은 나라로 남아 있다. 많은 배낭여행객들, 특히 대학생들이 배낭여행의 목적지로 인도를 찾는 경우가 많다. 배낭여행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도전'과 '극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인도는 좋은 도전의 장소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비'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의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본다. 이전의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전략이었던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동양에 대한 타자화였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신비'와 '미개'라는 색칠을 하고, 그것에 대한 도전과 개척을 선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인도, 아니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각들도 이러한 오리엔탈리즘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시각은 우리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한다. 여기에서 또다른 인종차별과 같은 제국주의적 오만과 폭력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 세계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소설『구아바』는 그런 점에 있어서 인도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고 리얼한 인식을 갖을 수 있게 한다. 현대 인도의 사회와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놓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도 사회의 부패와 모순들에 대한 풍자에서 오는 비판을 읽음과 동시에, 우리 안의 인도에 대한 오랜 편견들에 단호한 일침을 맞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줄거리는 다소 간단하다. 삼파드라는 청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사회 속에 융합할 수 없어 답답한 심정에서 삼파드는 그 사회를 떠나 '숲'을 찾고, 거기에 자신만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는다. 그 숲의 한 나무에 올라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소동 등을 그리고 있다. 그 소동들 속에서 바로 현대 인도 사회의 온갖 모순들과 부패와 타락이 그려져 있으며, 이것을 우화적으로, 풍자적으로, 작가는 조소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우화의 중심은 '삼파드'라는 주인공이다. 마치 고전영웅소설의 주인공처럼 삼파드는 기인한 출생의 전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삼파드'라는 말은 우리말로 '행운'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갖게 되는 만큼 그의 출생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명명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즉 반어적 명명이다. '삼파드'는 이 사회에서는 결코 '행운'을 만드어낼 수 없는 인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회의 밖으로 그는 탈출하게 되는 것 아닌가.

사회에 융합하고, 사회속에서 '정상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었고, 결코 그 안에서 그의 이름처럼 '행운'으로 살 수 없었던 삼파드는 그 속에서 탈출하여 밖으로 나왔을 때 편안과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자신들과 다름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자신들과 같을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서 '삼파드'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의 이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파드가 나무에 올라가자, 사람들은 그를 무슨 도통한 도사처럼 떠받들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면서 소동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게 된다. 삼파드는 결코 다른 사람이, 즉 사회 안에서 '비정상'이었을 때와 결코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가 나무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그의 말은 성인의, 도사의 말처럼 신성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을 통해 인도의 사회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파드가 마치 그들의 과거를 투시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편지를 보고, 떠벌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졸지에 도사가 되어 버린다. 여기서 다시 삼파드의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삼파드를 '비정상'이라는 굴레에 가두었다면, 이제는 나무위의 도사로 그를 가둔다. 사람들이 모이고, 가족들은, 특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통해서 큰 몫을 잡으려고 한다. 인도 사회 내의 이런 어리석음들, 부에대한 욕심과 욕망, 비윤리적 가족관계 등이 이 소설 속에서 풍자되고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여성에 대한 성적차별 등이 인도 사회의 내재되고 내면화된 고질적인 병폐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삼파드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현대의 인도 사회의 문제들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도 유효한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파드는 숲 속에서의 대소동으로 인해 또 다른 곳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야 했거나, 아니면 "부글부글 끊는 가마솥"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파드의 부재함, 삼파드를 사회 안에 품을 수 없음은, 이 사회에서 결코 '행운'을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이 20대의 젊은 작가의 작품이란 사실이 다소 믿겨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자신의 모국에 대한 현실인식과 그 사회의 문제점 들을 신날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여러 사회에 내재한 보편적 문제들에 대한 예리한 문제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하나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사회가 제2, 제3의 삼파드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사회에 '행운'이 깃들고, 그로인해 '구아바' 나무가 주는 풍요롭고 풍족한 맛있는 과실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와 행복은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족이지만, 이 소설에 다소 아쉬운 점에 하나가 치밀하지 못한 번역이다. 군데군데 비문이 있고, 조사의 사용이 부적절하여 해석에 애를 먹었다. 예를 들면, 216쪽 중간에 보면 "그들은 소년을 헝그리 홉에게 다그쳤다."이 있다. 여기서 문맥상 '소년'의 이름이 바로 '헝그리 홉'이다. 즉 '소년'은 '헝그리 홉'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년을 헝그리 홉에게 다그"칠 수 있는가? 둘 중 하나가 빠져야 할 것이다. 또 236쪽에 보면 "물론 원숭이들이 시체를 전시하는 문제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을 계획서였다."에서 '원숭이들이'는 '원숭이들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치밀하지 못한 번역으로 인해 책을 읽으면서 눈살을 찌풀이게 되는 것이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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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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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것 제대로 한 번 해본 적 없는 나에게,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흔한 연애소설이나 시집은 그리 손에 잘 잡히는 종류의 것들은 아니다. 흔하디 흔한 사랑타령이려니 치부해 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이질감이거나 그것에 대한 반감의 작용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이 내 책읽기의 오랜 습성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게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니 있기도 했었다. 원태연이었던가?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봐.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느끼한 제목의 연애시집을 구구절절 가슴으로 느끼던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첫사랑의 기억이 내게는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첫사랑은 누구였던가 물어오면, 그 이름을 거론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내게도 학창시절의 짝사랑 쯤은 있었던 것인데, 그때의 그 마음을 녹여주기에 원태연이 그 시집은 참으로 탁월했다.

그런 경험은 그 이후로 내게 찾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그 애틋한 이름으로 명하기에는 가슴 들끓어오른 적이 없었다는 얘기다. 거기에 연애시집도, 사랑타령의 이야기들도 찾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사랑을 말하지 않는 시가 어디있겠으며, 사랑을 담지 않고서 어떻게 감동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보면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의 다름아니리라. 그러나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들어 느끼는 것은 가을을 부쩍 탄다는 것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제대로 된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삶에 이리저리 치이며 사는 나에게, 가을을 어느 누구에게 보다도 씁쓸한 계절이었는가 보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정이현을 만났다. 정이현의 소설집『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올가을의 시작에 즈음하여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 이 책『달콤한 나의 도시』를 그 가을의 끝자락에서 읽어내었으니, 올 가을은 정이현의 '사랑타령'에 푹 빠져 지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이현의 '사랑타령'은 남다르다. 그것은 낭만적이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때론 무섭게 치를 떨게도 했고, 잔인해 보이기도 했으며, 사랑이라 이름하기엔 너무 이성적이고 현실적 인물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단편「순수」에서처럼 "세 번 결혼하고 그때마다 남편을 잃은 여자"가 "세번째 남편의 죽음 때문에 경찰의 조서를 받"고 있는 이야기는 그 제목을 의심하게끔하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정이현의 대부분의 소설에서 이런 아이러니가 보여진다. 짓궂게도 그녀의 이야기는 그 제목과는 단순하게 볼 때 정반대의 내용처럼 읽혀지기 때문이다. 이런 아니러니적 명명의 방법은 그 의미를 역설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역설들을 진지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녀의 첫번째 소설집이다.『달콤한 나의 도시』에는 그 정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여전히 정이현 특유의 그와같은 어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이 정이현 소설읽기를 이 가을의 시작과 끝에서 함께 할 수 있게한 이유이기도 하겠다.

무엇이 달콤한가? 그녀들의 도시가 과연 달콤한 것이었는가?하는 의문부호는 이 소설 읽기의 뒷자락에서는 확실히 새겨진다. 오은수라는 30대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동갑내기 친구들이 보여주는 그녀들의 도시, 그녀들의 사랑은 '달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연하와의 돌발적 사랑도, 영수와의 현실적 연애도, 그녀에게 사랑의 '달콤'함을 주지는 못한다. 바로 여기에 아이러니적 제목짓기에서 오는 역설의 어법이 자리한다. 정이현은 왜 이 소설에 '달콤'함이란 수사를 동원하는가?

"……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가장 먼저 도착하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손을 공중으로 내밀어본다. 손바닥에 고인 투명한 빗물을 입술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의 맛이다."(강조는 필자)

'무장적 올라타지 않'는 것,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맛. 어쩌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첫사랑은 낭만과 달콤함으로 기억되지만, 그렇게 기억되기까지는 '실패'와 '이별'이 전제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거기에 정이현의 아니러니적 어법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본다. 연하의 남자와의 돌발적 사랑도, 영수와의 결혼을 위한 연애도, 모두 떠나보내고 난 후에는 지나간 옛추억, 낭만 혹은 달콤함으로 남게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무작정 올라타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아무맛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달콤하지 않은 도시에서 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오은수가 앞으로도 '무작정 올라타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아무맛도 없는 그녀의 도시에서 머지않아 곧 '달콤'함을 찾으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결코 '달콤'하지 않은 그녀들의 사랑얘기는 내게 사랑에 대한 회의나 현실에 대한 직시를 갖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또한 정이현의 의도일 것이다. 오은수를 비롯한 세여자의 '뒷담화'를 엿듣는 한 느낌으로 시종일관 흥미로움에 읽혀진 이 소설이 어느덧 내게 "너도 한 번 '달콤'함을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악마의 유혹처럼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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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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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국이 '우행시'로 울었다고 하면 약간은 과언이고 '상투적'이겠으나, '우행시'는 지금 큰 인기를 얻었있다. 영화 '우행시'로 많은 관객들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 여세가 미약해진 듯한 느낌이지만, 소설 '우행시'만큼은 아직도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을 울린건 맞는 말인듯 싶다. 몇 만이 울었을까? 아니 몇 십만? 몇 백만이 울었을까? 그 수치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겐 눈물 짖게 하는 '시간'이 되었을까? 이것은 이 소설(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다만 편집된 홍보물만을 보았을 뿐이고, 이나영이 여주인공이란 사실을 알 뿐이고,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진 않지만, 하여간에 그 얼굴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영화는 말할 수 없고 소설을 말할 뿐이다. 하긴 영화 이전에 소설이었으니 소설만을 말하는 것이 그리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듯 싶다. '진짜 이야기'는 소설이었으니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될 듯 싶다.

나는 이상하게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붙으면 거리낌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읽었고, 재밌다고들 야단에 법석을 해도 괜히 손길이 가질 않는다. 이것도 하나의 편견이겠지만, 이런 것들에는 상업적 냄새가 많이 풍기고, 큰 기대에 대한 실망감을 얻는 경우가 많고, 뭐랄까 품격이랄까? 그런 것들이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직' 베스트셀러인 이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다. 왜일까?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이름때문은 분명 아니다. 나는 아직 그 작가의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 이름은 아직까지는 대중적 인기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그의 높은 이름은 언젠가는 나에게 읽혀야 될 그 어떤 책무로 지워질 것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그 책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에, 그 공지영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 무엇때문인가?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하는 그런 궁금증 때문도 아니다. 이 책이 그렇게도 재미있나 하는 호기심도 아니다. 나는 그런 궁금증과 호기심의 발생을 차단하는 방어막의 고질적 편견 비슷한 것들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코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다. 그럼 왜일까?

오늘은 10월 31일, 지금은 그 '밤'이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귓가에 맴돌게 하는 '그날의 마지막 밤'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 노래를 틀어 놓고 지냈다. 아니 그건 오늘만이 아니었다. 10월에 들어서 이 노래를 자주 들었던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도 나는 이 계절 가을이 오면서부터 자주 듣느다. 이 가을이라는 계절감은 그냥 나를 울적하게 한다. 흔히들 이것을 두고 가을 탄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가을을 타는 것이 분명하다. 28의 지금의 나에게는 썩 어울리지 못한 감상이라고 하겠으나, 현재의 나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 가을의 노래들이 충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울어보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한 번 울었고, 그리고 그걸 드라마로 보면서 또 한 번 울었고, 타이타닉을 보면서도 청승맞게 울었고, 아마겟돈을 보면서 살짝이 울었던 기억이 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꽤나 많이 울지 못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아서, 나는 더욱더 울고 싶었다. 적어도 이 계절 가을에는, 가을을 타는 이 계절에는 더더욱 울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 '우행시'로 많은 이들이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다만 나도 '울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는, 밤잠을 조금씩 늦춰가면서 이틀에 걸쳐 읽어낸(보통 내가 책 한 권을 읽는데에는 3~4일이 걸린다.) 지금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왜일까? 이 책이 결코 슬프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의 이야기가 감동이 없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울음이 나지 않는 것은 나만의 탓일까? 하긴 내가 감수성을 많이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봤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울지 못했던 충분한 이유가 이 책에는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분명 한 남자, 그것도 사형수의 이야기이고, 한 여자, 비극적 상흔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15살의 나이에 근친으로 부터 폐륜적인 상처를 받은 주인공 '유정',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도망가고, 술만 먹고 때리기만 하는 아버지 밑에서 동생과 함께 어렵게 자라다, 아버지도 잃고, 동생도 떠나보내고, 소년원을 전전하고, 감옥을 수차례 다녀오고, 결국엔 사회의 낙오자로, 그리고 자신의 여자를 지켜줄 어떤 능력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떠 맡아야 했던 남자 주인공 '윤수'. 그 둘은 정말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으면서도,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그 둘이 동일시되기까지도 한다. '유정'은 말한다. "윤수와 나는 거울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분명 '유정'에게는 '윤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윤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두 문제적 인간은 모두다 아픔을 가지고, 그래서 모두다 이 사회에서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이상한 인간으로 분류된다. 즉, '유정'은 정신병원에 다녔어야 했던 것이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갖게 한다. 그리고 '윤수'는 감옥이라는, 사형수라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그 둘의 '같음'은 그 둘을 만나게 했고, 그럼으로써 그 둘을 변화시켰고,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위해서는 중요한 매개가 있었다. 바로 '모니카 수녀'이다. '모니카 수녀'는 유정과 윤수 모두를 껴안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어쩌면 성녀같은 인물이기도 한데, 재밌는 것은 유정은 이 '모니카 고모'와 간혹 동일시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에는 이 세명 모두가 포함되는 것은 아닐까?

유정과 윤수가 만나기 전까지는 그 둘은 분명 '같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유정과 윤수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자신이 같지 않음에 분노하고 괴로워했다. 그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소외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만남으로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그러한 '진짜' 모습을 보면서 '진짜 이야기'를 하게되면서부터 서로가 '같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해준 이유인 듯 싶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고모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유정도 자신의 모습에서 고모의 모습을 찾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은 어머니와 같았음을 깨닫는다. 또한 윤수와의 만남에서 '이주임'도 '진짜 이야기'를 하게되면서 그들과 '같음'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러한 '같음'은 용서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피해자의 어머니의 용서, 주인공 유정의 어머니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유정에게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을 주었던 사촌오빠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윤수의 자신에게 죄를 모두 뒤집어 씌웠던 선배에 대한 용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용서, '국선변호사'에 대한 용서, 그리고 검사, 판사 등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그들은 모두 '같음'을 공유하게 된다.

이 '같음'은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 결국엔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서의 '같음'이다. 그러하기에 그 '우리'의 범주에는 다만 유정과 윤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울었던 것인가? 윤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나는 내가 울 수 없었던 이유를 다만 내 무감각해진 감수성의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을 것 같다. 유정은 '상투'를 혐오했지만, 결국은 이 소설이 가지는 '상투'를 피해가지는 못했다는 점, 이 소설은 다분히 신파조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극단으로 치달았던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서 서로의 같음을 인정하게되는 데 까지의 개연성, 그 둘이 변화하여 무슨 성자, 성년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들, 그런 것들이 나는 너무나도 상투에 침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그 결말이 어느정도 예상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이(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신파조의 공식은 아주 성실히 따르고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이 '타는' 가을의 '울음'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죽음에 대한 몇 가지의 성찰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데에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는 데에 위안을 얻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경구를 얻은 것에 만족할 수는 있었다. "인간의 얼굴은, 그리고 눈은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연설문보다 더한 웅변을 담고 있다.",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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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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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이니 ‘페미니스트’니 하면 우선 경기(驚氣)부터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어떤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갖게 하곤 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흔히 ‘여성주의’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단어 자체에 대한 대립적 위치에서 오는 거리낌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남성과 반대 개념으로써의 ‘여성’, 그에 기초한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일단은 반대부터 해야 될 것처럼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언어학의 의미론에서는 단어를 의미관계에 따라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반의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 단어의 의미가 반대관계에 있을 때 반의 또는 반대성에 있다고 말하고, 반의관계에 있는 단어를” 말한다. 이런 반의어는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상보적반의 ․ 단계적반의 ․ 관계적반의 등이 있다. 그 중에 상보적 반의라는 것은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라고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반의로서 원칙적으로 양극만 있고 그 중간, 즉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상태가 없는 양극적 상보적관계가 성립되는 반의를” 말한다. 다른 말로 ‘배타적(排他的) 반의라고’도 한다.

 

  이 상보적 반의에 해당되는 단어의 대표적인 예가 ‘남성/여성’이다. 즉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는 중간항이 없으며 상호 배타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남성/여성’의 중간항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그렇다면 이것을 상보적 반의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존의 의미론은 문제제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언중들은 남성과 여성은 상호 배타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언어적 인식으로부터 편견은 시작된다. 이런 편견은 ‘여성주의’를 제창하는 ‘여성주의자’들을 ‘배타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왜 ‘여성주의’를 부르짖는가? 왜 ‘페미니즘’인가? 라는 물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정도한 비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물음 없는 비판은 비난이고 편견이기 쉽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런 편견과 비난에 대한 ‘도전’이다. 왜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혐오하고 배척하는가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가 담겨있다. 그로부터 왜 ‘여성주의’를 말해야 하고, 왜 ‘여성주의’여야 하는 가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담겨있는 편견들과 비난들에 차분하지만 강력하게 말함으로써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정희진은 우선 ‘언어’에 주목한다. 위에서 말한 언어 속에 숨어있는, 그래서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기는 편견과 오류들을 밝혀내고 있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데 왜 언어에 천착해야 하는가? 그것은 지금은 ‘언어’가 남성들의, 정희진의 말을 빌리면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사유는 “백인이 아닌, 남성이 아닌, 중산층이 아닌, 성인이 아닌, 비장애인이 아닌, 이성애자가 아닌” 흑인과 유색인을, 여성과 중성을, 서민과 극빈층을, 미성년을, 장애인을, 동성애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배제는 억압과 착취를 낳고, 편견과 오류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에 대한 천착과 도전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속에는 많은 것들이 배제되어 있고, 남성중심적인, 그것도 서구의 백인 남성 중심의 사유와 인식이 담겨있다. 그러한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사유하는 우리들에게는 “사유 방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정희진의 이러한 언어에 대한 세심한 분석은 예리함을 보여준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한 전복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에게만 주창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동안의 남성언어에 대한 ‘전복’으로서 ‘여성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의 언어도, 여성의 언어도, 그리고 다양한 타자의 언어도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여성주의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리는 여성주의에 대한 편견에 지대한 ‘도전’, 아니 그 이상의 철퇴를 맞게 된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으로서의 ‘여성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다양성의 공존을 지향하자는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사유는 이 다양성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정희진은 남성의 언어가 만들어 놓은 이 사회의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진정한 남성’이 아닌 이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이들에 대한 인식과 그들과의 공존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성차별, 성폭력, 성매매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의 소수자들의 ‘차별과 타자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실증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차이에 대한 배척과 억압에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남성주의의 ‘전복’을 통한 차이의 인정, 즉 다양성을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남성주의적, 가부장적, 이분법적 사회에서 하나의 효과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의는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키”며 “현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도 “여성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었지만, 다양성과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은 이 사회에서 강력한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희진는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으로서, 페미니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은 벗어버리고,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한다. 이 사회가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하고 추구할 때 우리 사회는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인식의 전화’, ‘사유의 전복’으로서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전’으로써의 무모함보다는 설득과 타협과 대안으로써의 정희진의 목소리가 깊게 울리고 있다.

 

  나는 ‘과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겠다고. 섣부른 소리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래야 이 사회가 풍요하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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