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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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지금 이 시간은 무척 피곤하다. 아니 점점 피곤해왔고, 이제는 조금의 여력이 남아 있을 것같지 않은 지금이다. 왜 그렇냐고? 물으신다면, 내 사생활의 일부, 일부이면서도 어쩌면 대부분의 전체를 대표하는, 그 일부를 조금 공개해 보자.

  내가 일하는 곳은, 우리나라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이라는 공간이다. 그 '대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주5일제를 실시해왔고, 빨간 날이면 다 노니, 오늘이 월요일이어서, 난 엊그제와 어제, 양일은 쉬임없이, 쉬었다. 이틀을 그렇게 쉬다보면, 생활패턴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는 일요일을 맞는 오후에 극에 달해, 다음날 월요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또다른 급격함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월요일에도 존재했다.

  월요일부터는, 즉 오늘부터는 내가 국방의 의무를 아직 다 마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예비군 훈련이 시작되는 날인 것이다. 그렇다. 오늘 나는 예비군 훈련을 받고 왔다. 그러니,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고, 평소보다 더 빠른 아침이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생활패턴의 더욱 급격한 변화를 주기 위하여 일요일을 꼬박 샌 것이다. 그것은 조력자가 있어, 월드컵을 관전하다보니, 날 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날을 꼴딱 새고, 예비군 훈련, 그 하는 것 없는 훈련에도 힘이 들고, 또한 6월의 이른 여름 땡볕에 마구 쪼이어 나는 지금 녹초와도 같다. 아니 녹초이다. 그런데 내가 아직 이 녹초를 풀어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또한 월드컵 때문이다. 일본과 호주의 관심가는 경기가 지금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얼 하는가? 옆에는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지금 나는, 오늘 내가 읽은 시집 한 권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 지금 이때에 시집인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오늘 내내 땡볕에 쪼이면서도 그 허술한 예비군 훈련 사이사이, 이 사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이가 길었고 많았다. 그 사이사이 나는 가지고 간 이 시집을 단숨에 읽어 내었던 것이다.

  단숨에 읽힌다는 것은, 쉽다는 말보다는 본질적으로 어떤 매력, 감동, 재미가 있었다는 뜻이어야 한다. 쉽다는 의미는 그와 함께 따라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쉬워도 재미없는 것은 단숨에 읽힐 수 있어도 결코 그렇게 읽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팽겨치기, 바로 그것에 쉽다는 말은 더욱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이 녹초와도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지고 이 시집을 말하려고 한다. 함민복. <<햄버거에 관한 명상>>이란 시집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나는 이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읽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시집은 <<햄버거에 관한 명상>> 이전에 나온 것이다. 1996년에 나온 것이니, 내가 대학에 오기 전, 내가 고1 이었을 시절에 나왔다. 이 책이 나올 때, 시인은 강화에 있었다. 나도 그때는 강화에 있었다. 같은 공간적 근접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나의 경계에 꽃이 피는 지는 몰랐으니, 이것도 좀더 관심가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첫 시는 <선천성 그리움>이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시집의 제1부 또한 '선천성 그리움'이다. 그것은 그만큼 이 시가 갖는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시집을 사 보라는 의미에서 맛보기로 이 한 편 올려보자.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선천성 그리움>

  이 시는 7개의 행이 아닌, 7개의 연으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한 행으로 된 한 연, 즉 한 줄의 시구들이 갖는, 아니 거기에 시인이 부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줄 한 줄을 더많은 여유, 혹은 되새김을 가지고 읽으라는 시인의 권고, 혹은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 독자는 그 시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세를 가져보자. 결코 그것은 수동적 읽기가 아닐 것이다.

  사람을 그리워 하는 것은 특정 사람에 대한 사람이나 모든 이들에 대한, 만인에 대한 사랑이나, 매 한가지 즉,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아는 행위는 그 사랑에 대한 자동적 결과이자, 행위이다. 그 행위는 하지만, 일치될 수 없는,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사랑을 멸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서로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합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사랑이 모든 것이 동일하여, 더 나아질 어떤 것도, 사랑의 극대화도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 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은, '선청성 그리움'을 갖게된다. '선천성 그리움' 아 이것은 사랑을 사랑답게 한다.

  이 시집의 큰 줄기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그리움'과 동의어다. 슬픔도 있고, 아픔도, 외로움도, 고독도 있다. 그렇지만 종국에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이 명징하게 새겨놓는 추억, 추억에 대한 아픔 이면의 행복도 있다.

  '사랑'이라고 하는 거대한 폭의 부피는 무엇들로 채워질 수 있을까? 그 큰 부분이 '어머니'다.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이 무척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이 시집을 아름답게 한다. 거기에 아버지도 포함된다. 시인 자신에 대한 사랑도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냉소적이고 자조적이라 하더라도, 냉소적 자조적 낙망이 아니라, 그것은 희망을 위한 냉소이며 자조이다.

  정말 정신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빨리, 하려고 했던 말을 내뱉어내고 끝내야 겠다. 이 시집에는 뛰어난 언어의 표현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소 상투적이지 않나 할 정도로, 표현과 비유와 시적 언어 사용의 측면에서 이 시집은 다른 시인들의 것들에 비해 빼어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시집이 그러한 부족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것은, 시인의 깨달음, 통찰력, 그리고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시적 전략들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시가 얼마나 많이 어머니를 얘기했던가?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했던가? 자신의 고뇌와 격정을 노래했던가? 하지만, 여기에는 그 많은 어머니, 사랑, 고뇌와 슬픔을 함민복만의 깨달음으로 아하! 무릎을 치며 읽게 만드는 명석함이 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그 경계에 피는 것은 '사랑'이다. 그것이 곧 이 시집에서 내가 얻은 결론이다. 가시가 있는 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는 꽃이 피어도, 색이 흐릿한 꽃이 피어도, 내 경계, 내 삶의 경계에는 꽃, 꽃 한 송이 피어난다는 사실, 나는 그런 꽃, 사랑이 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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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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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미뤄두었던 서평쓰기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이 책이 나온 직후 읽어두었다가 서평은 미루고 미루고 이져야 쓰게 된다.

  왜 이제야 쓰는가? 나 자신의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이 흥미로운 기획, 곧 우리 문학사의 거대한 봉오리들을 라이벌이라는 대립적 구도로 읽어내는 이 획기적 기획에 다소간의 회의라고나 할까? 혹은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 책의 집필진들은 수유연구실의 인연들이 아닌가? 그들이 고전문학계에서 아직은 주류가 아니고, 하나의 아류이고, 아직은 젊은, 즉 정통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그들의 시기가 오지 않은 학자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 흥미로운 기획이 단지 흥미차원 이상에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이 설정해 놓은 각각의 라이벌구도에 나는 약간의 메모를 해 놓았다. 그것은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편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은 우리 문학의 정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입장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다분히 대중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간 우리 고전문학자들이 놓쳐온 부분을 보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전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부분말이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해볼 때, 정민 교수나, 이 책의 집필진 중 한 사람인 고미숙 씨 같은 분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라거나 <<한시미학산책>>같은 책에서부터, <<열하일기>>의 열풍을 일으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고전문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폭을 넓히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부분에 어느정도 부합한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다소 나는 위험천만의 우를 범하고 있는지 않난 하는 회의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산맥은 우뚝한 봉우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상에 가린 작은 봉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을 좀더 우뚝하게 만들어 주는 깊은 계곡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선 아득한 정상에만 시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간의 삶이란, 따지고 보면 그의 다채로운 일생 가운데 아주 특징적인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작업도 이런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진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대비시켜 그들의 삶을 다루려는 이 글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라이벌로 맞세운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키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책머리에 8쪽)

  저자들 자신도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 위험성을 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이러한 위험성에 큰 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 월명사 VS 최치원

  월명사와 최치원이 과연 라이벌이 될 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여기서는 시대가 그들을 라이벌이게 만들었다는 것이 고작이다. 다소 긴 시간의 층을 건너뛰면서까지 이런 자의적인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여기서는 조동일 교수의 생극론적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곧, 향가와 한시의 상호대립적, 보완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표자로써 월명사와 최치원을 내세운 거인데, 과연 이러한 생극론적 관점이 라이벌의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의문이다. 시대가 그들을 라이벌로 읽히기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은 시대의 역사이지, 문학사라고 하기에는 다소 의문스럽다. 그들의 작가적 존재가 많이 가벼워 지는 것에서 그러하다.

  <삼국의 여성을 읽는 두 '남성'의 시각> 김부식 VS 일연

  김부식과 일연이 이러한 라이벌로써 읽히는 것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과연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라이벌로까지 내세울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강력한 문학사의 라이벌로써 존재하기 위한 문학사의 거대한 봉우리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는 데서 오는 회의이다. 그들은 문학사에 있어 중요한 존재들이긴 하나, 그들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함은 그들이 남겨놓은 역사서때문인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논하고 있는 이 글도 편협한 데가 없지 않음을 느낀다.

  <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이인로 VS 이규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라이벌다운 라이벌관계라고 생각한다. 그 둘은 다양한 문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시대와 공간과 세월의 굴곡을 넘어 현시점에서 이규보의 승리를 단언하는 것은 자칫, 잘못이겠지만, 이규보의 문학관, 세계관에 동조되어지는 것을 어쩔 수는 없는 듯 하다.

  <건국이 만들어낸 역사의 두 갈래 길> 정도전 VS 권근

  여기서 정도전과 권근의 라이벌 구도에 의문을 던진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세울만한 능력을 지녔고 권근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지켜나갈 능력을 지녔다. 정도전과 권근, 라이벌이라 하기에 그들의 임무가 달랐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대부 문인의 두 초상> 서거정 VS 김시습

  김시습에 무게가 확실히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가는 길이 달랐건만, 김시습의 삶의 다이나믹함이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일까? 서거정과 김시습은 김시습의 거대한 때문에서인지 모르지만, 라이벌로 인식되시기에 서거정은 조금 작다.

  <가문소설의 시대를 연 선의의 경쟁자> 김만중 VS 조성기

  김만중의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 조성기는 전문학자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여기에서는 다소 반가울 만한 것이, 조성기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킨데 있다는 것 뿐, 라이벌로 읽기에는 조성기가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다.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 박지원 VS 정약용

  너무 다른 두 인물이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이나 둘은 이런 구도를 결코 용납지 않았을 것만 같다. 너무 멀리서 있는 거대한 봉우리는 어쩌면 그 크기와 외양을 비교하기에는 그 위치가 너무 멀지 않은가? 이것은 고미숙씨가 말하고 있는 박지원과 정약용의 거리이다.

  <두 중세인이 그려낸 사유와 정감의 극점> 이옥 VS 김려

  반가운 것은, 이옥과 김려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의식화되고 무비판적이 되어버린 고루한 편견들을 버리라는 추상과 같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울리고 있다.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 VS 안민영

  판소리와 시조라는 두 장르는 우리에게 우리 문화 전반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고 특히 안민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은 관심이 간다.

  다소 난잡하게 서평을 쓰게 된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구도의 연구는 그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작위적이고 의도적인 라이벌 구도의 형성에서 오는 문제점을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사의 굴곡을 보다 세심하게 그려내는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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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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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15쪽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대체로)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17쪽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다."

결국 그것은 제국주의, 식민지 건설에 봉사한 것이다.-18쪽

"오리엔탈리즘은, 영국 및 프랑스 그리고 19세기초까지는 실제로 오직 인도와 성서관련국만을 의미한 동양 사이에서 경험된 특수한 근접관계 closeness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역학은 모두 서양(영국, 프랑스, 미국)의 동양에 대한 우월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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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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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버트로스,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불리는 이 새는 시 속에 많이 등장한다. 꾀꼬리만큼이나. 그 중 아마도 제일 유명한 시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航海)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海鳥)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蒼空)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

    가소(可笑) 가련(可憐)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 (C.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ꡔ악의 꽃ꡕ, 김붕구 옮김, 민음사, 1991.)


  여기서 ‘알바트로스’는 속세에 사는 ‘저주받은 시인’을 상징한다. 이들은 ‘창공의 왕자’의 자태를 보여주지는 이제 그들은 ‘가소 가련’하기만 한 것이다. ‘지상에 유배’된 시인의 운명이란 뻔한 것. 이 세상은 이 ‘알바트로스’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모 코미디에서처럼 “아무도 우릴 이해 못해!”인 것이다. 그런 세상 사람들에게 시로써 아무리 떠들어 봐도 “우리가 이해시”키는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 그러니 시인은 고독하고 허무한 것.

  이야기가 빗나간 느낌이 들지만, 앨버트로스에는 이런 느낌이 담겨져 있다. 시인의 비극 같은 종류의. 그래서 그런지 이런 앨버트로스가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 그리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는다. 여기 앨버트로스가 만들었다는, 아니 “앨버트로스의 똥”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졌다는 작은 나라가 있다. ‘나우루 공화국.’ 어쩜 이 나라도 앨버트로스의 시인과 같은 운명, 즉 비극적 운명의 굴레에 갇혀버릴 것만 같지 않은가?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들어 졌다는 나라가 있다? 동화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웃자고 지어낸 우스갯소리도 아니다. 여기 ꡔ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ꡕ가 있다. 바로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의 한 점, 바로 나우루 공화국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나우루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동화속의 이야기인줄 만 알았더니, 진짜로 이 작은 섬이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유토피아’? 그렇게 이름 붙여도 되는 것일까?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있단다. ꡔ홍길동전ꡕ에나 나오는 이상국(理想國)일까?

  이 책을 읽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나의 씁쓸함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살짝 던져놓고 간다. 그 씁쓸함이라는 것은, 이 지구상에 ‘유토피아’의 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또 하나의 반증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근대의 제국주의와 야만적 폭력의 문명이 망가트려 놓은 한 평화롭던 작은 섬의 비극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어떤 것일까? 근대문명이 가져다 준 ‘부’라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일까? 그렇다면 여기 나우루 공화국은 한 때지만 이 유토피아를 경험했다. ‘앨버트로스의 똥’이 쌓이고 쌓여 섬을 이루고, 이것이 어떤 화학작용을 거쳤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인광석이 되어, 이 섬의 국민 모두를 부유하게(한 때에 불과하지만) 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경험한 행복한 나라였던 것이다. 부러운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지 않는다. 지금의 나우루 공화국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긴 하지만, 인광석의 고갈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나우루 공화국의 지금 현실은 흔한 유토피아의 붕괴를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전의 국민 모두가 부유했던 그 시기가 절대 유토피아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제국주의와 근대 문명이 가져다 준 하나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문명과 기계를 인광석이라는 자원을 이용해 물질적 부를 미끼로 준 것이다. 어쩌면 인광석을 이용할 수 있기 이전의 이 섬이 어떤 의미에서는 유토피아에 더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인광석을 이용할 수 있었을 때부터가 이 나우루 공화국의 비극의 시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기, 아니 지금의 대책 없는 현실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 ꡔ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ꡕ에서 우리가 얻어낼 것은, 자원의 고갈을 대비해야 한다거나, 아무리 부유해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거나, 나우루 공화국의 국민들이 너무 무식해서 그 좋은 걸 가지고도 나라를 망쳐버렸으니 어의가 없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 문명이 가져온 이 지구의 비극의 축소판으로 나우루 공화국을 읽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이 근대 문명 속의 ‘알바트로스’와 같은 시인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있게 만은 읽을 수 없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런 씁쓸함을 무엇으로 대신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시집을 읽어볼까! 어쩜 앨버트로스의 외침을 엿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망할 놈의 세상, 이제 좀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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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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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近代)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역사의 시대 구분은 대단히 자의적이다. 중세라는 시대는 그대로인데, 근대는 자꾸만 길어진다. 상대적 불합리. 近代라는 설정 자체가 이런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는 “지나간 지 얼마 안 되는 가까운 시대”를 말한다. 우리 역사 구분에서는 현대를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 현대는 없다. 왜 그런가? 역사는 과거를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는 단 1분 1초도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내온 모든 것이 근대이다. 어디까지를 ‘가까운 시대’라고 할 것인가?

 

  따지자면 대단히 골치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근대’를 받아들인다. 역사 연구자들이 던져준 근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시대 구분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진짜 골치 아프다. 역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시간을 쪼개어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어쩌면 신의 능력을 소유해서나 가능할 수 있는 가공할 상상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고, 따라서 신적 능력의 발휘자(發揮者)들이 던져준 근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도리 밖에 없다.

 

  과연 근대란 무엇인가? 아니 근대적 사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는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 애매모호한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서 앞서 말했던 역사의 시대 구분의 위대성을 따지는 것은 자칫 불경죄에 해당하는 신격모독일 수 있으므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타협을 하고 간다. 아하 이 ‘근대’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저자 고미숙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 연암 박지원의 역작 ꡔ열하일기ꡕ를 새롭게 읽어낸 ꡔ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ꡕ에서였다. ꡔ열하일기ꡕ라는 그 방대한 고전을 이처럼 재미나게 읽어내는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이 ꡔ열하일기ꡕ를 얼마나 재미있게 읽어 냈던지, 어지간한 전공자나 완독할 법한 이 방대한 분량의 ꡔ열하일기ꡕ가 일약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게 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겠다.

 

  ꡔ나비와 전사ꡕ는 그런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아니 고미숙 선생의 읽기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역작이다. 여기서는 이 ‘근대’를 읽어내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싶다. 근대라는 거대한 산에 바위나 칠 법도 못한 계란을 던지는 형국이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반란은 반란이다. 어쩌면 ‘근대’는 하나의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전의 시대와는 단절된 근대를 주장한다. 즉,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은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좀더 확실히 하자면, 시대의 단절은 불가능하므로, 근대가 아닌 근대적 사유가 이전의 사유와는 완연한 단절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근대적 사유라는 것, 근대성이라는 것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복시켜야만 할 탈근대적 사유,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반란, 혹은 혁명.

 

  근대는 왜 ‘리바이어던’인가?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9장까지를 이 근대의 모순들을 파헤치는데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시간’, ‘인간’, ‘性’, ‘몸’, ‘앎’이라는 큰 테제들을 가지고 여기서 잠복해 있는 근대적 사유의 ‘괴물성’을 밝혀내고 있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 오직 인간의 활동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p.22.) ‘단 하나의 척도’는 바로 ‘돈’이다. “시간이 돈”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괴물성은 바로 시간, 속도의 균질화, 혹은 화폐화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일컬어 “속도의 파시즘”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인정해야할 근대의 모순이다. 저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어떻게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드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동질화될 수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서 이 근대의 속도는 우리를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다.

 

  지금까지는 이 책의 1장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시간, 속도의 불합리성 혹은 모순들을 다양한 예에서 찾아내고 있다. 재미있던 것 중의 하나는 이 근대적 시간화, 속도화의 상징인 ‘기차’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를 평범하게, 혹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다양한 소재에서 이 근대적 사유의 맹목성과 파시즘적 성격을 찾아내고 있다. 유쾌, 상쾌, 통쾌, 그리고 쓰라린 웃음!

 

  2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다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예민한 주제이다. ‘인간’을 테제로 한 장에서 ‘종교’를 논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근대’에 대한 규정만큼, 아니 그 이상이나 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생매장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종교’ 안에도 근대의 괴물성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겉으로 뚜렷이 인식될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에 대한 반성 혹은 전복.

 

  3장과 4장은 ‘性’이라는 주제에서 역시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을 탐색하고 있다. ‘변강쇠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근대의 전형적 괴물성을 유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뜨거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9장까지의 내용은 이 근대의 리바이어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소월과 만해, 그리고 허준까지도 등장하니 말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볍게 다루어야 한 책 안에서 많은 소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만큼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으면서도, 단점이 될 여지가 많다. 그것은 근대라는 이 거대한 괴물을 그렇게 가벼이 다루어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닌 기암절벽 거대 산치기가 아닐 수 없다.

 

  끝의 2장에서는 이런 근대성, 혹은 근대적 사유의 리바이어던을 전복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탈근대의 비전을 탐색한다. 그 비전은 연암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 이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 18세기 중세의 문인이 21세기를 넘어 탈근대를 추구하는 한 지식인에게 그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다니! 오 놀라움! 그 놀라움으로 그 비전을 읽다보면, 에휴,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 거대한 괴물과 맞선 나비, 혹은 나비의 꿈.

 

  이 책 제목 “나비와 전사”에서 나비는 바로 박지원이다. 그럼 ‘전사’는? 다름 아닌 푸코이다. 이 책 각 장의 시작은 나비와 전사의 공통된 사유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절단과 채취를 통해! 그런데, 근대적 리바이어던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서는 정작 전사는 숨어버리고 나비만이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라니! 이것은 어쩌면 저자가 근대에 대한 맞섬에서 살짝 꼬리를 내리는 기미로 보일 수도 있으려니와, 다정한 애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반란은 하되,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읽으면서, 나는 근대적 사유의 모순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에 가장 큰 보람과 가치를 느낀다. 그 거대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고 가벼운 터치는 다분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곧 이것은 약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 그 깊이를 줄이고 있는 것은, 다분히 체계적이지 못한 서술이기 십상이다. 그만큼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체계라는 것 또한 근대적 사유에 다름 아닐 수 있기에 뭐라 딱부러지게 말하기 꺼려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후의 보람은 크다. 저자 고미숙씨가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탐구, 곧 근대에 대한 반란, 탈근대에 대한 비전 찾기는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하지만 근대와 싸우는 나비만 있고 전사를 어디를 갔는지? 진정한 싸움은 전사의 등장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나비와 단짝을 이룰 전사를 찾아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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