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1998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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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 아침은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가 추적추적 끈덕지게 내리는 ‘흐린 날’보다 더욱 축축한 날이다. 이런 날에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시를 읽는 것이 다소 모자람 있지만 제격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부분


  내가 아직은 이런 감상에 젖을 나이는 아니다. 아직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술도 잘 못한다. 아직까지 ‘술잔의 수위’가 줄어드는 데에 아까움을 느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왜일까? 이런 흐린 날에는 그래도 이 시가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니 말이다. 그래서 시는 이중, 삼중, 다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또한 저렇게.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 시의 목표라면 목표이다.

  시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재미난 일화가 있단다. 정작 시인은 시집제목을 ‘等雨量線’으로 하려고 했는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들이 상업적 전략을 발휘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면서도 공감과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제목을 골랐으니 그게 바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이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어서 시집이 대박이 났단다. 원래 붙이려던 ‘등우량선’으로 했다면 아마도 쪽박을 찼을 거라는 안도의 한숨 속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하다. 무슨 아쉬움이 남았을까? 그건 아마도 제목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다만 상업전략에 치우쳐 무시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제목이라는 것은 시집의 얼굴이 되고, 시집으로 엮인 시들의 전체적 맥락의 중심이 되는, 그리고 그 시들을 풀어내는데 열쇠가 되는 그런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시집의 제목을 ‘등우량선’이라 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았으니, 시집은 많이 팔렸더라도 끝내 아쉬움은 남았으리라. 그 후에 시인은 이런 생각 품지 않았을까? ‘정말로 등우량선이라 했으면 팔리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시인은 왜 시집의 제목을 ‘등우량선’으로 하려고 했을까? 여기서 「등우량선」을 읽는 것이 필요하겠다. ‘等雨量線’이란 제목을 단 시는 모두 4편이 있는데, 이중 가중 짧은 「等雨量線 2」를 맛보도록 하자.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날

연기나는 地球儀; 머리에 깍지낀 손을 얹고

포로들은 이란 고원을 넘어가고,

이집트로 들어간 그때부터

대일파스만한 관광 엽서, 받았습니다.

이 인류를 위해 누군가 한 사람은

사막으로 나가봐야겠지요?

거기서 누군가가 울었습니까?

해가 람세스 신전으로 내려가고

그대가 보낸 北 아프리카의 붉은 밤;

덴 것처럼

그날 내내 내 얼굴이 후끈후끈했습니다.

피가 없는 평화를 원한다면

날 내버려두십시오.

나는 남조선, 선거 끝난 담벼락을

터덜터덜 지나왔습니다.

                        「等雨量線 2」 전문


  ‘등우량선’이란 기상도에서 같은 강우량의 지역을 선으로 이어그인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왜 ‘등우량선’이란 제목을 달고 있을까? 얼핏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알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뚫어지게 쳐다볼 필요는 없다. 이 시는 부분적으로 다양한 사건들 상황들 지역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놓았다. 아니 그것을 선으로 그어놓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상에 그어진 ‘등우량선’인 셈이다. 그 선으로 이어진 지역은 곳 같은 등급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날”은 “포로들은 이란 고원을 넘어가”던 날이다. 그리고 “대일파스만한 관광 엽서, 받”은 날이기도 하다. “나는 남조선, 선거 끝난 담벼락을/터덜터덜 지나”온 날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그것은 조금만 더 시집을 충실히 읽어내면 또 다른 시편들에서 찾아 낼 수도 있다.

  아까 제목이 시집을 대표한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시집은 첫째 번으로 실리는 시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히려 시집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제목보다 더욱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동급으로 줄그어 놓은 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첫째번의 시를 읽어볼 필요가 있으리라.


논에 물 넣는 모내기 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斜線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름다운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아직은 바깥이 있다」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바깥’을 말한다. 새삼스레 왜 ‘바깥’인가? ‘바깥’은 대립적 존재로써 ‘안’이 있다. 우리는 어쩌면 늘 ‘안’에서 사유하고 살아간다. 그러하기에 ‘바깥’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소외되고 잊혀진다. 그래서 시인의 ‘바깥’의 관한 사유는 새삼스러운 것이 된다. 안과 바깥은 대립적 사유에서는 ‘바깥’은 소외되지만, 이 시인의 ‘바깥’의 사유는 대립을 넘어 조화로, 조화를 넘어 지향으로써의 ‘바깥’이 된다. 그럴 때에 안과 밖의 경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또한 안과 밖은 이면대립이 아니다. 밖은 셀 수 없을 만큼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범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과 밖은 다중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계를 무너뜨리며 거기에 ‘등우량선’이 그어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다. 시인의 사유에서 등우량선은 이런 ‘바깥’에 대한 사유 속에서 그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等雨量線 2」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졌다. 내가 존재하는 곳과, 고르바초프가 사라지던 곳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리고 저 멀리 소외되었던 포로들이 고원을 넘어가는 곳까지도 그 선은 놓치지 않는다. 무엇하나 놓쳐버리지 않고, 나와 같이, 나와 같은 의미에서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시집의 제목은 ‘등우량선’이 되어야 했다.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이런 시인의 사유의 큰 틀에서 잠시 방황하고 주저했던 시기의 단편에 지나지 않으니, 시집의 제목으로써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으리라. 하지만 어떠랴? 이 시집을 엮고 있는 모든 시들이 어쩌면 등우량선으로 그어져 같은 등급의 시들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 시인은 제목을 바꾸는 데에 그리 반대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이 시집에서는 나는 좀 특별히 울컥한 대목이 있어 이걸 말하고 끝나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안부 1」 전문


  화자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린 노인이거나 중풍을 맞은 환자이거나. 그런 어머니를 아들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그런 아들의 마음은 곧 어머니의 마음과 등급을 이룬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고 말하는 아들의 마음은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시는 어머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어머니는 때론 ‘꼬마 계집아기가’되기도 한다. 이것 또한 등급을 이룬다. 이런 등급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 시도 또 하나의 등우량선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바깥에 대한 사유는 결국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려는 조화와 사랑의 결과, 곧 ‘등우량선’으로 줄줄이 이어 결코 끊이질 않는 인연의 선을 만들어 놓았다. 황지우 시인의 사유 속에는 이런 기상도가 그려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의 등우량선만으로 그려진 일기도말이다. 그게 이상한 것은 ‘안’의 삶과 사유 속에서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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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4-1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우량선에 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집 제목을 왜 저걸로? 갸웃하면서 시를 읽었네요. 멜기세덱님의 리뷰를 읽고 등우량선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거 같습니다. 시인의 아주 넓은 마음 속에는 세상 만물이 등우량선 범위 내에 들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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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나는 공선옥 작가와 몇 번의 통화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조교로 일하는 곳에서, 지역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방학 중에 연수를 하는데, 여러 강좌 중에 <소설가와의 만남>이라는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공선옥 작가가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업무상의 통화였지만, 내게는 참 흥분되는 일이었다.

  공선옥 작가가 온다기에, 나는 공선옥 작가에게 사인이라도 받아둬야 겠다고 생각해서, 가장 최근작인 이 책을 다짜고짜 샀다. 그리고 읽었다. 읽지도 않고 사인을 받기에는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공선옥이란 이름, 작가 공선옥을 그전에는 알지 못했다. 공씨 작가는 공지영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 공선옥이란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꽤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만나게 되는 날이 꽤나 기다려졌다.

  몇 번의 통화에서 나는 공선옥 작가가 어떤 사람일거라는 추측을 조금은 할 수 있었다. 연수 강좌를 맡았기에, 몇가지 서류와 함께, 강의 원고를 작성해 나에게 보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설가라는 사람이 원고를 어떻게 써야되느냐, 3시간 동안 말해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느니, 말주변이 없다느니 하는데, 그 목소리 또한 왠지 털털한 느낌이기도 했고,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과는 다른 느낌. 왠지 말을 조용조용 조리있게 잘 할 것만 같고, 분위기 고상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옆집 아줌마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 것은 공선옥 작가에 대한 무례일까? 그건 아닐거라는 생각은 이 책 <<유랑가족>>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녀의 그런 목소리, 그런 솔직한 대답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 (작가의 말)

  자기는 가난한 작가, 그리하여 '유랑작가'이니, 고상한 척, 잘아는 척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유랑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털털해 지고, 또한 옆집 아줌마처럼 생활력 강하고 모든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치워야하는 그런 작가여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유랑가족>>은 떠도는 가족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이전에, 왜 유랑, 즉 떠돌아야 하는 가족이 될 수 밖에 없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가난이라는 문제, 가난한 사람들의 삶, 거기에서 오는 많은 아픔들, 고통들, 그래서 결국에는 유랑해야만 하는, 그래야만 질긴 생명 부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구성은 5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며 한 편의 연작소설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단편들이 등장인물의 중복, 또는 장면의 교차, 또는 가난이라는 주제의 큰 틀 안에서 하나의 유기적 구성을 갖게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인물은 작가의 분신처럼 생각되어지는 '한'이라는 사진작가이다.

  이 '한'이라는 사진작가는 어쩌면 작가와 동일시 되어진다. 공선옥 작가는 가난이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들을 한 장의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서도 이 '한'이라는 인물, 그리고 이 '한'의 가족들 또한 그 '가난'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즉 가난한 작가 공선옥처럼 '가난하다.' 그러기에 나는 '한'을 보면서 공선옥 작가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질긴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몇 가지 나의 의문은, 이제 가난타령은 진부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선옥 작가는 왜 이리 가난에 천착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 둘은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의문이리라.

  '가난' 타령은 이전 소설에서 많이 애용되어 왔다. 2~30년대의 사실주의 소설, 대표적으로 현진건의 소설에서나, 1950년대 이후의 전후소설에서 이 '가난'의 모습은 너무 많이 나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 더이상 '가난'의 이야기들은 적어도 소설에서는 더이상 먹히지 않는 소재가 아닐까? 98년의 IMF이후 가난이라는 것이 이슈가 될만도 했지만, 빠른 요즘 세상에서 잊혀지는 것 또한 빨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진부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런데 유독 공선옥은 가난이라는 이야기를 써내고 있다.

  왜 이리도 가난에 천착하는가?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가난 이외에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가난을 가장 잘 아는 작가라는 뜻일까?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는 그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곧 '가난'을 이 시대에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면서, 소외되어 있는 이 시대 이 세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문제적인 것으로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이 사회의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도 모른다.

  가난이 먹히지 않는 소설계에서 공선옥 작가의 '가난'이야기는 그녀를 계속적으로 가난한 작가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 모르겠다. 잘 팔리는 소설을 써야 가난에서 면할 수 있는 방법이기때문에, 진부한 소재로 외면받는 가난이야기는 잘팔리기에는 애당초 그른 것이 아닌가? 그럴 수록, 작가가 가난할 수록, 공선옥은 가난 이야기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나는 공선옥 씨처럼 유행적인 담론이 아니라 자기의 독자적인 경험과 사유에 의해 굳건히 뒷받침된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일층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선옥 씨는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한 존재다. 먼 훗날 누가 21세기 벽두에 한국인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가 하고 물을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비한 타임캡슐 안에 공선옥 씨의 소설들을 넣어두어도 될 것이다."

  작품의 해설을 쓴 방민호 평론가의 말이다. 그렇다. 누구도 쓰지 않는 이 시대의 가난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공선옥은 그렇지 않은 다른 소설가에 비해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먼 후일에 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공선옥 작가의 가난말하기가 그래도 이 당대에 이슈가 되고 잘 팔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지독한 가난에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겠는가?

  며칠전에 공선옥 작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번 연수에 강좌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신 권지예 소설가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꽃게무덤>>을 사놓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공선옥 작가를 만나서 꼭 사인을 받아두고 싶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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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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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의 열기가 차츰 식어가고 있다. 식어가고 있다는 진행형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중요한 순간에서는 ‘확’이라는 부사를 붙이기에 적절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 對 스위스전 말이다. 한국이 스위스를 이겼다면, 원정 첫 승의 쾌거와 함께, 원정 사상 첫 결승 토너먼트 진출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한 판이었으니, 또한 국민들의 기대는 2002년의 재현을 부르짖고 있었으니, 스위스전의 아쉬운, 그리고 어이없는 패배는 이번 독일월드컵에 ‘확’이라는 찬물을 끼얹기에 충분했다. 

  그 순간에 나는 어떤 공황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 팀의 패배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무슨 낙으로 사는가 하는 그런 공허감 말이다. 결승 토너먼트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남의 잔치이니 흥분과 기대는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상황에서 나는 생각했다. 아하! 그게 있었지.

 

  2002 월드컵의 영광 안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그때에 군대에 있었던 것이고, 8강전 스페인과의 경기, 사상 처음으로 4강에 진출하는 역사적 순간, 홍명보의 마지막 승부차기의 골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대한민국 육군 보병 제9사단 백마부대 28연대 3대대의 관문 위병소에서 근무 중 이상무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 그것도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치러지는 월드컵, 그것도 우리나라로서는 전무후무할 역사를 펼치고 있던 그 순간을 군대에서 보냈다는 비애는 이번 월드컵은 누구보다도 뜨겁게 보내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만반의 준비를, 물질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붉은 악마 티도 샀고, 붉게 빛나는 악마 뿔도 일찌감치 사 두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책 󰡔아내가 결혼했다󰡕에 머리두건을 끼워 판다는 정보를 입수, 이거다 하고 낼름 사버렸다. 책보다는 머리두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온갖 무장을 하고 월드컵 응원에 여념이 없던 나에게 이 책은 내 책장 어딘가에서 소리도 없이 숨어 있었다. 그 때, 내 공허감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할 그 순간에, 왜 이 책이 생각났을까, 그것도 이 책은 내 시선에 한 눈에 박혀왔던 것이다.

 

  제목이 특이하다. “아내가 결혼했다”(?) 이것은 모순 혹은 역설이다. 아내라는 존재는 이 현대사회에 있어 ‘결혼했음’을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남편이 있고, 그리고 아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아내가 무슨 결혼을 하는가?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그래서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역설이다. 역설이라는 것은 모순 형용, 혹은 모순 어법을 통해서, 자체로는 모순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의 통찰이 있고 진리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모순 형용 속에는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가? 어쩌면 작가는 이 모순된 문장 끝에 하나의 부호를 붙였을 만하다. <아내가 결혼했다?> 조금 망설이다가 이것을 가로 안에 넣지는 않았을까? <아내가 결혼했다(?)> 가로 안에 넣을 바에야 생략의 묘미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의문부호. 이것은 저자의 의도이건 아니건 간에 내가 이 책을 대면하는 첫 마당에서 강력하게 부각되어졌고, 궁금증은 스위스전 이후의 월드컵 공황을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위안으로 다가왔다.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이 문장 자체는 역설과 동시에 반사회적 서술 혹은 ‘내뱉음’이다. 반사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법과 도덕과 질서로 ‘계약되어진’ 사회에 대하여 그 법과 도덕과 질서, 즉 사회적 가치를 이반하고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일부일처라고 하는 법적 도덕적, 이 사회의 질서적 가치로부터 이 문장은 이탈, 혹은 배신을 때리고 있으니 이 문장은 반역, 좋게 말해 혁명적이다. 혁명은 사회를 변혁하는 것,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뒤엎는 것이기에 반사회적이므로, 이 문장에도, 나아가 이 소설에게도 ‘혁명적’이라는 수식이 가능하리라.

 

  이 소설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이 소설은 크게, 한 남자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한’, 혹은 완벽에 가까운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고,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유별난’ 사상의 소유자로서 일부일처제적 사회 가치에 반대하고, 개인적으로는 일처다부를 꿈꾸고, 나아가 다부다처의 사회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런 사상의 소유를 가진 이 여자는 그것을 현실화하기에 이르고, 결국 결혼을 한다. 이러한 것이 이 사회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기에 다른 사회로의 이주, 이것은 망명이겠다, 다른 나라로의 이민을 하면서 끝내게 된다. 결국 이민을 갖는지, 이민 이후에는 어떤 생활을 펼치게 되는지는 속편의 가능성을 남기면서 독자의 상상과 기대를 재촉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렇게 간단한 줄거리라지만, 이것은 하나의 장편 소설을 충분히 구성하고 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할까? 이 사회에서는 이것은 하나의 ‘불륜’으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것이 조금 엇나가면 하나의 야설화가 가능하다. 그러면 충분히 장편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리 야한 부분은 눈을 씻고 찾아는 봤지만,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바로 ‘축구’와의 접목이다. 2~3쪽의 짧은 부분들의 이야기들은 축구 에피소드와 연결되면서 나름의 재미를 유발한다. 그로써 이 짧은 줄거리가 살이 붙어 장편이 되기 가능했던 큰 이유가 아닐까한다.

 

  제목도 특이하지만 축구와의 접목은 색다르다. 그 색다름은 월드컵이라는 열기와 만나 대중적으로 이 책은 부흥했다. 많이 팔렸다는 얘기다. 솔직히 말해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축구 에피소드들이 내겐 더 재미있었다.


일부일처제의 통념에 대한 소설적 논의에서 단 3인의 등장으로 장편을 이루어 낼 만큼 작가의 역량은 눈부시다. 월드컵 4강전을 관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이 작품이 지닌 미덕이다. -김윤식(문학평론가)


보편적 윤리관을 뛰어 넘는 주제가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하듯 경쾌하게 전개된다. -김원일(소설가)


  김윤식 교수나 김원일 작가는 이 이야기가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 비슷한 축사를 하고 있지만, 이 소설 자체가 ‘축구’라는 큰 테제를 벗어나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의문부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의 제재가 가지는 특이성, 전통적 사회가치에 대한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이야기 진행은 내 입장에서는 흥미진진이라는 사자성어보다는 ‘뻔’하다는 인상을 읽어갈 수록 높여만 갔다. 나만 그랬던 것인가? 갈수록 이야기 진행보다는 축구 에피소드들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왜일까?

 

  나는 그 문제를 이 소설이 가지는 주제의식,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일부일처제라는 통념에 대해 의문부호를 달아놓고 있는 이 소설이, 중대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의 묘미가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데 있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무거운 주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것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의문부호를 달아 놓기는 했으나, 소설적 논의 안에서 작가 혹은, 작가의 대변인으로서의 화자는 나름대로의 설득력 있는 견해를 내놓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소설의 문제점으로 지적 가능하다. 어쩌면 너무 쉬워서 탈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이 <세계문학상>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기에는 조금 모자란 듯 보인다. 여기에는 어쩌면 상업적 논리가 크게 작용해 보인 듯하다. 월드컵이라는 상황과, 소재의 논쟁적 요소는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소설 자체는 그 관심에 부흥하기에 불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소설적으로도 몇 가지 점에서 다소 고전적인 면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이 소설의 주인공, 그 ‘아내’라는 인물의 고전성이다. 고전소설 중에 「박씨전」이 있다. 이 ‘아내’라는 인물은 거반 ‘박씨’라는 인물과 동급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만능이라는 얘기다. 인물이 특출나게 예쁜 것이 아닌 것만 빼고. 그리고 작중인물들의 현학취미 또한 약간의 불쾌감을 자극한다. 폴리아모리니 뭐니 하는 인류생물학적 용어의 빈번한 사용도 그렇거니와, 이 여자는 거의 전문연구자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로, 작가는 이 여자는 책이 무진장 많다는 것을 전제했다.

 

  이 책을 읽기 얼마 전 나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2005.)를 읽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성적 습성이 전 지구적 동물사회에서는 매우 특이한 별종이라는 논점을 보이고 있고, 거기에서 인간의 섹스가 유전자 전쟁이라는 주 테제아래 진화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도 일부일처니, 일부다처니 하는 논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단순히 인간의 유전자 번식을 거의 유일한 목적으로 결혼과 섹스를 보는 관점이 조금 미흡해 보인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것이다. 이것을 단순한 유전자 번식 외의 어떤 것으로라도 설명해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월드컵이 끝나갈 무렵이다. 4강이 가려졌다. 스위스는 16강에 조1위로 올랐으나, 16강 진출국 중 가장 약체로 꼽히는 월드컵 처녀 출전국 우크라이나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승부차기까지 가서 한 골도 넣지 못하고 월드컵 역사상 전무한 승부차기 3 : 0 패를 기록하고 탈락했다. 아이고, 고소해라.

 

  반면에 프랑스는 조별예선 이후 승승장구, 강호 스페인을 물리치더니, 8강에서는 브라질을 꺾었다. 아이고, 이런! 우리가 올라갔으면 브라질도 이길 수 있었던 거 아니야! 아이고 배 아파라. 브라질이 떨어졌으니 이번 월드컵의 격이 조금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왜 일까? 고만고만한 팀들이 4강에 남았다. 독일 對 이탈리아, 포르투갈 對 프랑스. 누가 이길지 모르는 이 상황이 내게 어떤 흥미를 자극하고 있으니 말이다.

 

  스위스전 이후 월드컵 공황을 이 책으로 채우려고 했으나, 그것은 다소간의 실패로 돌아갔다. 이 책이 누구 말대로 가독성이 뛰어나서, 나는 이 책을 읽는데,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축구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어나가는 재미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지만. 이제는 잠시 월드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한다. 2006 독일 월드컵의 주인공은 누가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조심스럽게 예측하건데, 독일의 2연패에 점수를 조금 더 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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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시집 71
김용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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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의 시인, 섬진강의 작은 시골 마을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순박하고 순수함 그 자체의 아이들의 모습들을 그려낸 <섬진강 이야기>, 이런 것들이 주는 그는 '섬진강'으로 존재한다. 그는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82년 '창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섬진강으로 시작한 그는 아직 끝끝내 섬진강을 벗어나 살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또한 섬진강 이상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에게는 자랑이면서도, 아픔이지 않을까?

  <섬진강> 연작에서 그려지는 그의 농촌시적 경향은 김용택이란 시인을 가히 우리 문단의 총아의 위치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이후 펴낸 시집이건, 산문집이건, 시선집이건 간에 그야말로 대박들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그 무엇도 <섬진강> 이상은 아니었다. 시집의 판매량만을 놓고 본다고 한다면야, 이후의 책들이 베스트셀러를 연신 기록하고 있지만, 시인 김용택에 붙은 섬진강은 여전하게 그를 휘어감는다. 이것은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딜레마라고도 할 수 있고, 김용택을 읽는 우리 독자에게는 아쉬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나에게는 그 아쉬움이 아주 진하게 남아있다.

  나는 근래에 김용택을 멀리하고 있었다. 그가 펴낸 책들은 그에게는 소중한 것들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대중에게 영합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본으로 하는 서정시인의 본령에서 벗어난 듯한 냄새가 나기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독특한 성향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번쯤은 김용택 시인에게 날카롭게 딴지 걸어보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대답이 궁금해 진다.

  시인 김용택이 조금씩 류시화처럼 되어가는 느낌! 나에게는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가 이전에 펴낸 <<그 여자네 집>>은 어느 정도의 성취를 거두었다고는 하나 <<연애시집>>에서는 조금 갸우뚱이다. 이어서 나온 것은 이 시집 <<그래서 당신>>인데, 이것에게서도 아쉬움은 남는다.

  "잎이 필 때 사랑했네 // 바람 불 때 사랑했네 // 물들 때 사랑했네 // 빈 가지, 언 손으로 // 사랑을 찾아 // 추운 허공을 헤맸네 // 내가 죽을 때까지 //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사랑타령'이라고나 할까? '그래서'라는 접속사의 사용에서 번뜩이는 기지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런 시적 깨달음은 뭐랄까? 수준미달이 아닐까? 이 시집은 참 가벼웁다. <섬진강>의 무게보다도 가볍다. 어쩌면 그의 시들이, 이전의 섬진강의 그 구체적 모습들과 거기에 담긴 구구절절의 이야기들이 그 끝을 보여서인 것인지, '사랑타령'의 관념 속에서, 날아다니는 그 관념들을 가슴에서 울렁이다가 내보내고 있는 것이서인지 모르겠다. 그가 서문에서 쓰고 기뻤다는 <남쪽>이라는 시를 보자.

  외로움이 쇠어

  지붕에 흰 서리 내리고

  매화는 피데

  봉창 달빛에

  모로 눕는 된소리 들린다

  방바닥에 떨어진 흰 머리칼처럼

  강물이 팽팽하게 휘어지는구나

  끝까지 간 놈이

  일찍 꽃이 되어 돌아온다

  '지붕', '매화', '달빛', '꽃' 등 이러한 것들이 더이상 우리에겐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이 시가 담고 있는 것은, 어느 옛 선비의 읊조리는 시조와 같은 그런 고상한 감이 담겨 있는듯도 하다. 왜 이 시를 쓰고 시인은 기뻤을까?

  "바람이 불면 // 내 가슴속에서는 풀피리 소리가 납니다"<그리움>

  2연으로 된, 위에서처럼 문장으로는 단 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시. 이런 것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꼭 일본의 하이쿠같은 느낌이다. 이것은 <<연애시집>>에서도 주로 사용되고 있는 방법들이다. 이것은 좀 구식의 느낌이 든다. 시적 후퇴, 아니면 시적 능력의 후퇴? 어떤면에서 나는 그가 시인으로서는 진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아쉬움이다.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이 '풀피리 소리'가 된 것은 더이상 새롭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 것인가?

  이런 점에서 안도현 또한 그런 종류의 아쉬움이다. 어쩌면 김용택은 많은 책들을 펴내야 하므로, 시를 쓸 시간이 꽤나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시집 한 권 내자고 이쪽 저쪽에서 보체는 통에 이런 후퇴한 시들을 토해낸 것은 아닌지. 내가 너무한 듯도 하다.

  <그래서 당신>에서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수긍할 수 있었다. "음! 그렇지" 정도의 감탄사 외에서, 어떠한 새로움도, 그 이상의 통찰도, 명쾌함도, 번뜩이는 기지도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신"이 아닌 "그러나 김용택은"이라고 묻고 싶다. 김용택 시인의 시적 진화는 어젠쯤 이루어 질 수 있을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 "당신", 시인 김용택의 이번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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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06-1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미안한 마음이 있어, 별을 하나 더 띄워준다.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 시인선 291
나희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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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에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귀뚜라미」


  안치환의 노래다.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서는 마음은 잔잔한 풀밭을 헤매면서 귀뚜라미 울음에 왠지 모를 가슴 속 어느 한 덩이, 덩이가 울렁이는 듯하다. “귀뚜루루르 귀뚜루루르 보내는 내 타전소리가/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귀뚜라미는 내 가슴에서 크게 울었다.

 

  이 노래를 좋아하면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안치환이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야말로 주옥같은 이 가사는 곧 시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 시를 쓴 이는 나희덕이라는 여류시인임을 알았다. 나희덕! 이 이름도 왠지 귀뚜라미 울음의 작음 울림으로 들렸다. 그로부터 나는 나희덕이란 이름을 내 귓가에 귀뚜라미 울음과 같이 기억했고, 이 노래를 좋아 듣던 만큼이나, 듣던 때에나 또한 흥얼거릴 때에나, 나희덕이란 이름도 함께 기억했다. 하지만 그 이름뿐이었다.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 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르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배추의 마음」


  이 시는 중학교 3학년 1학기 1단원 시의 표현 소단원(2)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나희덕! 그 이름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내가 중학생이 아니고, 이놈의 국어교과서를 학교 다닐 시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할 입장에 있어, 새롭게(이제 다시 8차 교과서를 펴낸다고 하니 새로울 건 이제 없지만) 7차교과서를 공부하다보니, 이 책에 나희덕의 시가 있었던 것이다. ‘배추의 마음’을 읊는 나희덕의 마음이 아하 곧 ‘배추의 마음’임을 느끼면서, 내 소매에는 ‘배추 풀물’이 들었고, 어느새 ‘귀뚜라미’의 울음소리 들려왔다. 나희덕! 나희덕! 이 이름이 계속해서 내 주의에서 맴돌았다.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대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사라진 손바닥」


  ‘배추 풀물’이 거의 다 빠져갈 즈음, 나는 재미삼아, 대학교 말년, 교양수업으로 시창작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나는 전공이 국어교육이었지만, 국어국문학과 강의 중에 이 수업을 들은 것이다. 이 과목은 국문과 전공과목이지만, 내가 들었으니, 교양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그만큼 대충 들었다.) 아하 이런, 나희덕! 그 이름은 또 내게 확 띄었다. 아뿔싸, 이젠 도저히 나희덕을 만나지 않고는 아니 되겠구나. 하지만 나는 참으로 게을러서 나희덕 시인을 이제야 만났다.

 

  삼일간의 예비군 훈련 덕분인 것이다. 삼일 동안 4권의 시집을 읽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나희덕 시인의 이 시집 『사라진 손바닥』이다. 말하자면, ‘사라진 손바닥’이 불현듯, 혹은 우연처럼, 혹은 어쩔 수 없는 필연처럼.

 

  왜 그렇게 돌고 돌아, 이제야 만나야만 했을까? 나희덕이라는 이름을 안지는 1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듯한데, 왜 이제여야 하는가? 하긴, 그걸 묻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내 운명은 왜 이런가 하고 따지니 보다, 앞으로의 운명을 걱정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처럼. 그러니, 이제는 나희덕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필요할 터, ‘사라진 손바닥’이 내 얼굴에 뺨을 치고 말게끔 그렇게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희덕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준 예비군 훈련에 고답다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집『사라진 손바닥』을 통해, ‘연밥’도 여러 그릇 얻어먹었다고나 할까, 나희덕 시인이 숨겨 둔 ‘빈손’ 또한 잡아보았다고나 할까, ‘흰 꽃’이 하얗게 내 앞에서 빛났다고나 할까, 그럴 수 있어서 또한 즐거웠다. 귀뚜리미가 울고, 풀물 냄새도 나고.

 

  이렇게 내가 오랜 세월을 거쳐 나희덕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왜일까? 나는 거기에 나희덕의 시의 힘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시인의 말>


  ‘관념’을 떨쳐버리고, 잘 짜여진 비단결처럼, 나희덕의 시는 곱디고운 아름다운 옷으로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시집 곳곳에는 따뜻함과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귀뚜라미의 울음처럼, 배추의 마음처럼, 따뜻한 겨울 솜옷처럼, 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게 바로 나희덕의 힘이 아니겠는가?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그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국밥 한 그릇을

눈물도 없이 먹어치웠다.

국밥에는 국과 밥과 또 무엇이 섞여 있는지,

국밥 그릇을 들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삼키려는 게 무엇인지,

어떤 찬도 필요치 않은 이 가난한 음식을

왜 마지막으로 베풀고 떠나는 것인지,

나는 식어가는 국밥그릇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국밥 한 그릇」 부분


  이게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으니, 나희덕이란 이름은 내게 참으로 여린 잎사귀의 흩날림이었던 것이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김진수는 ‘직조술로서의 시학’이라고 명명하였거니와, 나는 나희덕이 만들어 내는(만들어 낸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문제가 있지만) 시들은 따뜻한 털옷,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낸, 바늘로 세세히 박음질을 한 그런 옷의 시학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한 동안은 나희덕의 시세계에서 이런 따뜻함 느끼지 않을까 한다. 근데, 지금은 한여름이군! 아하! 그렇다면 또한 얼마간이 지난 후에 또 우연처럼 나희덕이 내게 찾아올 것이야!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을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땅 속의 꽃」


  그 때까지는 ‘땅 속의 꽃’으로 남아있을 나희덕의 시를 내가 ‘흰개미’가 되는 그 때에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렇게 나희덕의 시는 내게 또 다가올 것이다. 나희덕과의 기나긴 인연의 줄 굵게 잡고 놓지 않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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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 오늘 보내주신 책 두권 잘 받았습니다. 넘 감사하고 기쁩니다.
즐겁게 독서할게요. 제 서재에 페이퍼로도 간단히 올렸어요. 괜찮죠?
그러고보니 나희덕의 시집 한 권 사야지 하면서 미루고 있었는데, 이 시집
제가 좀 바구니로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