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페미니즘’이니 ‘페미니스트’니 하면 우선 경기(驚氣)부터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에게도 어떤 거부감이나 거리감을 갖게 하곤 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흔히 ‘여성주의’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단어 자체에 대한 대립적 위치에서 오는 거리낌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남성과 반대 개념으로써의 ‘여성’, 그에 기초한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은 일단은 반대부터 해야 될 것처럼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언어학의 의미론에서는 단어를 의미관계에 따라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반의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 단어의 의미가 반대관계에 있을 때 반의 또는 반대성에 있다고 말하고, 반의관계에 있는 단어를” 말한다. 이런 반의어는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상보적반의 ․ 단계적반의 ․ 관계적반의 등이 있다. 그 중에 상보적 반의라는 것은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라고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반의로서 원칙적으로 양극만 있고 그 중간, 즉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상태가 없는 양극적 상보적관계가 성립되는 반의를” 말한다. 다른 말로 ‘배타적(排他的) 반의라고’도 한다.

 

  이 상보적 반의에 해당되는 단어의 대표적인 예가 ‘남성/여성’이다. 즉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는 중간항이 없으며 상호 배타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남성/여성’의 중간항이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그렇다면 이것을 상보적 반의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존의 의미론은 문제제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언중들은 남성과 여성은 상호 배타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언어적 인식으로부터 편견은 시작된다. 이런 편견은 ‘여성주의’를 제창하는 ‘여성주의자’들을 ‘배타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왜 ‘여성주의’를 부르짖는가? 왜 ‘페미니즘’인가? 라는 물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정도한 비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물음 없는 비판은 비난이고 편견이기 쉽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런 편견과 비난에 대한 ‘도전’이다. 왜 우리 사회가 ‘페미니즘’을 혐오하고 배척하는가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사유가 담겨있다. 그로부터 왜 ‘여성주의’를 말해야 하고, 왜 ‘여성주의’여야 하는 가는 우리 사회의 곳곳에 담겨있는 편견들과 비난들에 차분하지만 강력하게 말함으로써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정희진은 우선 ‘언어’에 주목한다. 위에서 말한 언어 속에 숨어있는, 그래서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기는 편견과 오류들을 밝혀내고 있다. 페미니즘을 말하는 데 왜 언어에 천착해야 하는가? 그것은 지금은 ‘언어’가 남성들의, 정희진의 말을 빌리면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한 사유는 “백인이 아닌, 남성이 아닌, 중산층이 아닌, 성인이 아닌, 비장애인이 아닌, 이성애자가 아닌” 흑인과 유색인을, 여성과 중성을, 서민과 극빈층을, 미성년을, 장애인을, 동성애자를 배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배제는 억압과 착취를 낳고, 편견과 오류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어에 대한 천착과 도전은 ‘페미니즘’의 중요한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 속에는 많은 것들이 배제되어 있고, 남성중심적인, 그것도 서구의 백인 남성 중심의 사유와 인식이 담겨있다. 그러한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사유하는 우리들에게는 “사유 방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정희진의 이러한 언어에 대한 세심한 분석은 예리함을 보여준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에 대한 전복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에게만 주창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동안의 남성언어에 대한 ‘전복’으로서 ‘여성언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남성의 언어도, 여성의 언어도, 그리고 다양한 타자의 언어도 존재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여성주의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천착을 통해 우리는 여성주의에 대한 편견에 지대한 ‘도전’, 아니 그 이상의 철퇴를 맞게 된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으로서의 ‘여성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다양성의 공존을 지향하자는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사유는 이 다양성의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된다.

 

  정희진은 남성의 언어가 만들어 놓은 이 사회의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폭력과 억압으로 인해 ‘진정한 남성’이 아닌 이 사회로부터 타자화된 이들에 대한 인식과 그들과의 공존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성차별, 성폭력, 성매매에서부터 다양한 사회의 소수자들의 ‘차별과 타자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실증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차이에 대한 배척과 억압에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남성주의의 ‘전복’을 통한 차이의 인정, 즉 다양성을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무엇보다 페미니즘이 남성주의적, 가부장적, 이분법적 사회에서 하나의 효과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주의는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키”며 “현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도 “여성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었지만, 다양성과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은 이 사회에서 강력한 대안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희진는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으로서, 페미니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은 벗어버리고,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한다. 이 사회가 다양성의 공존을 인정하고 추구할 때 우리 사회는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인식의 전화’, ‘사유의 전복’으로서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전’으로써의 무모함보다는 설득과 타협과 대안으로써의 정희진의 목소리가 깊게 울리고 있다.

 

  나는 ‘과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제부터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겠다고. 섣부른 소리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래야 이 사회가 풍요하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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