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기술
모티머 J.애들러 외 지음, 민병덕 옮김 / 범우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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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당신은 책을 읽을 줄 아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이 사람이 나를 바보로 아나!'하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당연히 "Yes"라고 대답하거나, "눈이 침침해져서 못 읽어"라거나(연세 꽤나 드신 분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묵묵부답 웃거나(아직 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일게다.) 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문맹은 찾아보기 힘들어 누구나 다 책을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 사회는 문맹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을 줄 안다.


  책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의 첫 번째 조건은 ‘눈’이다. 즉,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점자책 등이 보급되어 ‘볼 수’ 없어도 책을 읽을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 ‘읽는 행위’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이라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나 예외 없는 것으로 ‘책을 읽는’ 행위의 필수 전제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눈’으로 책에 적힌 문자를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책읽기는 이처럼 단순하고도 간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책읽기는 사실상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오히려 복잡하고 어렵기 그지없다. 한 페이지를 제대로 넘기기 전에 책장을 덮어버려야만 하는 책이 많다. 이것은 대부분 독서가들의 경험에 의한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책을 읽을 줄 아는가?”라는 질문도 그리 유치한 것도 아니며, 그에 대한 대답도 간단치만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책읽기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을 통해 그 대답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생각해 본바와 같이 책읽기는 단순하지 않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글, 즉 기호의 담긴 의미를 해독해낼 줄 안다는 것이며, 그 기호들의 조합 속에서 각각의 의미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있고, 그 결합이 어떠한 의미를 산출해 내는지 판독해 낼 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호는 읽을 줄 알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결코 책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책읽기를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성인들에게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문제들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조금 양보하자면 우리가 읽을 줄 모르는 책이 많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대부분 양서, 즉 우리에게 많은 가치와 의미를 전해줄 수 있는 책들이 많다.


  내가 읽은 이 책 <<독서의 기술>>은 바로 독서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책을 읽어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독서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에 출간된 이 책은 그간 꾸준히 재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기술을 가르치며 좋은 독서가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의 기술’은 크게 4가지 단계로 나뉜다. ‘초급독서’, ‘점검독서’, ‘분석독서’, 그리고 독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토피칼 독서’의 단계에 따라 독서를 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단계의 순차적인 것으로 마지막의 ‘신토피칼 독서’를 하려면 앞 단계의 독서방법들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상정하고 있는 독서의 최종 목표인 ‘신토피칼 독서’란 “동일 주제에 대하여 2종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최고의 독자, 이상적 독자의 경지일 수 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초급독서’의 단계를 거쳐야 하고, 그런 다음 ‘점검독서’와 ‘분석독서’의 단계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초급독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책일 읽는다는 것의 기본적인 조건인 ‘글자를 읽을 줄 알며 그 의미를 일차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 단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 했던 바, 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이 ‘초급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에 불과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점검독서’와 ‘분석독서’로 나아가야만이 최종의 목표, 즉 좋은 독서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점검독서’와 ‘분석독서’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방법들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단계들을 이룬다는 것이 나로서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 또한 그렇게 하기가 무척 벅차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독서의 기술>>에서 제시한 방법들을 우리의 독서생활에 계속적으로 시도해본다면 어느새 ‘신토피칼 독서’의 경지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이 독서의 경지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독서생활 가운데 우리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듯 하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책 읽는 책>>(마이리뷰 첫 번째 글 참조)을 읽었다. 여기서 ‘네트워크 독서’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토피칼 독서’를 발전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의 방법을 알려주는 책으로써 나는 <<책 읽는 책>>을 조금더 추천하고 싶지만, 이 책 <<독서의 기술>>과 함께 읽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독서의 기술>>은 독서에 대한 보다 이론적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기에 그만큼 가치와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책 읽는 책>>의 경우는 보다 한국적 독서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책은 상호 보완적인 의미에서 더욱 완벽한 독서가의 탄생에 기여한다고 하겠다.


  어쨌거나 독서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책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독서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 독서생활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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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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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년 여 전이다. 박노자라는 이름을 이곳저곳에서 많이 보아왔고, 들어왔다. 그가 귀화인이라는 것, 근데 하필 왜 노자인가? 老子와는 썩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그의 사진을 보고 나름대로 한국인의 모습도 있는 듯 해 호감이 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서점 한 켠에서 박노자의 이 책을 보고는 선뜻 집어들어 읽게 된 것이다. 왜 선뜻일까? 나는 이 책의 제목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

  제목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왜 나에게 이런 신선함(신선함이라는 말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왠지모를 비하감이랄까? 이 사람이 괜히 딴지를 거는듯한 느낌이랄까? 뭐 그런 것이다.)을 느낀 것일까? 저자 박노자는 귀화인이다. 귀화를 했다면 모르긴해도 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일체감을 얻고자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니? 이 사람이 뭐하러 귀화한 것인가?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가?

  여기서 박노자에 대해 조금 소개를 하고 가야겠다. 박노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태생으로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였다. 그는 <춘향전>에 반해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귀화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이름 대학시절 은사님이 지어주신 것으로 '러시아에서 온 현인'이라는 뜻의 '露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귀화한 그는 역사학자로서, 한국의 명철한 지성으로서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이런 박노자의 첫 저서이다. 박노자는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진짜 한국이 된 것이다. 귀화한 그의 첫 저서가 왜 "우리들"이 아닌 "당신들의 대한민국"일까? 나는 거기에서 어떤 의아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신'은 '나'가 아닌 '너'이다. 예전에는 높임의 의미에서 주로 쓰였지만, 요즘의 우리말에서는 대화 상대 일반을 높낮이 없이 고루 가르키며, 상대를 비하하거나 비속하게 이를때도 주로 쓰인다. '당신'이라 하면 괜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아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당신들'이라 하면, '내'가 속하지 않은, 곧 '우리'가 아닌 타인들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쉽지 않은 귀화과정을 통과하고 대한민국의 일원이 된 그가 왜 '나'를 뺀 대한민국을 말하는가? 왜 자신을 굳이 배제시키는가?

  나는 그를 진정한 한국인으로 인정한다. 이것은 그의 이 책을 읽고나서의 확신이다. 그리고 그를 나는 '경계인'이라 정의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모순일테지만,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한국사람이 아니라는 뻔한 사실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이제는 당당히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러시아에서 자란 러시아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경계인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요건인 것이다.

  "나무를 보면 숲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말은 천성 한국사람이 이 한국사회를 제대로 볼 수 있는가하는 자명한 의문을 갖게한다. 대한민국의 사회안에서 태어나 자라고 배운 한국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못된 구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이 자명한 이치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다. 아니 많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을 샅샅이 해부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누가 뭐라도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또다른 이치도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에도 박노자는 해당한다. 분명 그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경계인'의 자격조건을 완벽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말하는 이 대한민국의 초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경계인'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는지 타인의 냉철한 지적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으로, 나와 같은 한국인의 뼈저린 반성의 자세로 그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경계인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점은, 서문격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귀화과정을 겪으며 느낀 감회를 쓴 <국적 취득기>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그가 이런 경계인이 아닌 진짜배기 한국사람이라면 이런 한국 사회의 곁가지에 자라있는 문제들을 지적해 낼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박노자라 분명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 겸허해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의 충격을 가라앉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장부터 그가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단적으로 이순신 동상에 담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을때 나는 멍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충격들이 이 책 가득 담겨져 있다.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을 경계인 박노자는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이 박노자의 이야기가 우리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知彼이전에 知己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을 알려주는 박노자의 이 책은 분명 우리에게 소중한 목소리이다. "그는 이방인의 눈을 가졌으나 그의 가슴은 한국인의 것이다." 이런 경계인 박노자가 냉철하게 전하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의 숨겨진 실상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제 나는 말한다. 박노자는 진정한 한국인이라는 것을,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지 않고는 한국인이라 말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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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젊은 레이서들 어디로 갔을까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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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결국 "미쳐야 미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狂'이라는 이 한 글자는 광인(狂人), 즉 미친놈을 의미할 때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狂은 단순한 미친놈은 아니다. 단순한 미친놈이 아니면 무엇인가? 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 이런 말이 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

  공자님의 말씀인 즉, 무엇인가를 단순히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거워해야 道(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道通한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이 '樂之者'의 경지가 '狂'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즐겨행하고, 그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경지! 그것 하나에 푹빠져 밥먹는 것도, 여자친구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의 경지! 이것이 곧 '狂'인 것이다.

  이 '狂'의 경지가 되면 '及'한다. 곧 미치면[狂] 미칠[及] 수 있는 것이다. '及'은 곧 '道通'이겠다. 이 어쩌면 단순히 진리를 말하고 있는 책이 바로 정민 선생의 <<미쳐야 미친다>>이다.

  정민 선생은 국문학자 중에서는 꽤나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MBC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민 선생의 저서들이 대중적 취향을 잘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정민 선생은 조선시대의 한문산문 중 명문들을 선별하여 현대인이 읽기 쉽도록 새롭게 번역하여 해설하는 작업들을 많이 해 온 사람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손꼽는 박지원의 산문들을 엮은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이덕무의 소품을 엮은 <<한서이불과 논어병풍>> 등이 그러하고, 최근에는 <<죽비소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정민 선생의 그러한 작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역작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도 하듯이,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탐색"하고 있다. 조선시대를 살아온 천재들이 어떻게 천재가 될 수 있었는가? 그들이 어떻게 미침[及]의 경지에 이르렀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곧 '狂'에 있음을 정민 선생은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책에서는 '허균,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등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몇몇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일화들, 그리고 그들의 문장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狂'이 어떠했으며, 그로인해 어떻게 '及'했는지를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첫 장에서부터 나를 미치게 만든 것은 '창가벽'을 가진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들과 함께 엮어나간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덧 우리는 '狂'하고 싶어질 것이다.

  현대사회를 생각할 때, 이 시대는 전문가를 요하는 시대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專門란 어느 하나에 통달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의 통달이라면 곧 위에서 말한 '도통'의 경지, 곧 '樂之者'의 경지이다. 결국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狂'의 경지를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우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곧, 현대인들에게 "미쳐라, 미쳐야 한다. 그래야만 이 시대에 살아 남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어느 하나에 미칠 수 있게끔 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해내야 하는 것은 현실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에만 맘 놓고 달려들 수 없는 것이 현실아닌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不狂'하고 결국 허망하게 사라진다.

  나는 이 책을 우리 현대인들이 읽고 한번쯤 미쳐보길 바란다. 미침[狂]은 많은 노력과 고생과 타인들의 차가운 시선들을 수반한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그러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하는 행복이 있다.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미친다고 해서 정신병원에 가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단, 부스럼을 뜯어 먹는 짓은 좀 그렇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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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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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초, 우리 사회는 이상야릇한 열풍을 경험했다. 세번째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찾아온 이 태풍은 자본주의의 망망대해에 거대한 물결로 온 사회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다름아닌 '체 게바라'의 붉은 물결이었다. '체 게바라'는 과연 누구인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빛나는 별이 박힌 베레모, 아메리카 민중 해방을 위해 끝없이 제국주의와 싸운 그의 게릴라 활동을 보여주듯 길게 풀어헤친 장발, 그가 언제나 입고 다녔던 게릴라의 자존심 군복. 이러한 모습은 온 거리의 포스터에서, 이 나라 청년들의 티셔츠에서, 상점에서, 그리고 서점에서, 책에서, 이곳 저곳에서 우리에게 전시되고 있었다.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은 이 나라에서 이 물결을 선도했다. 사실, 이 물결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회가 이 공산주의자에 대해 관대할 수 있기 이전에 이미 서구 유럽에서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 엄청난 물결로 밀어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체는 남미에서 영웅이었고, 신격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한가?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의학도였다. 하지만 그는 쿠바의 혁명 전쟁에 피델 카스트로와 뜻을 같이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혁명가이자 게릴라였다. 그는 쿠바의 혁명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일등공신으로서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장관, 그리고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혁명가로서 아프리카의 콩고, 남미의 볼리비아 등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체 게바라는 마르크스주의자요, 공산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존경했던 인물이며, 민중 혁명을 위해 총을 든 혁명가요, 게릴라였다. 그런 그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반공의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꿈틀거리고 있는 이 사회에서 강한 태풍을 일으킨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 물결을 살짝 피해왔다. 사실 내가 그 물결을 피한다고 해서 피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이 '체 게바라'의 물결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아니 그것이 두려워서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을 멀리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이 물결을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온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에서, 유행처럼 입고다니던 티셔츠에서 나는 이 인물을 대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술집 이름에서까지.

  체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거대한 물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참 아이러니다. 체 게바라와 자본주의는 절대 공유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바다는 이 혁명 전사 체 게바라까지도 집어 삼킨 것이 아닌가? '체 게바라'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한 상품이 되었으며, 유행이 된 것이다.

  이 상품화된 유행이 되어버린 체를 나는 거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공의 교육에 세뇌되어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체 게바라를 읽게 되었다. 왜 이 인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싸웠던 제국주의 문화에서 상품화되고 열광을 일으키고 유행이 되었는지를, 내가 가지고 있던 반공의 이데올로기의 거미줄을 이제는 조금씩 걷어버리고 싶어서, 나는 그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체라는 인물이 왜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이 문화에 거대한 물결, 거대한 태풍, 거대한 파도와 같이 몰아쳤는지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체는 더이상 혁명 전사도 아니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총을 든 게릴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감히 주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체는 아르헨티나의 그리 부유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집안에서 귀한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늘 안고다니던 천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혁명가가 된 가장 큰 계기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우와 함께 한 남미여행 때이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아메리카의 민중들의 삶과 그 고통과 아픔을 몸으로 체험하고 그는 마음속에 이 민중들의 아픔을 위해 싸워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여행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쿠바의 혁명전선에 가담함으로써 혁명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혁명가로써 볼리비아의 한 시골 마을 학교에서 총살됨으로써 그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체의 삶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는 더이상 '민중 혁명'이 아니다. 더욱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이런것은 전혀 먹혀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 청년들을 열광케할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볼 때 '열정'이다. 그는 혁명가 이전에 '열정'을 가득담은 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체 게바라 아니,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한 인간의 열정이 이 땅의 청년들에게 강하게 어필한 것이 아닐까? 그의 의학도로서의 모습, 다재다능의 면모, 멀고 험한 고생길이 분명한 모험의 감행,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 부하들을 아끼고 배려하는 인간적 면모, 무엇이든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 내려는 집념, 민중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끝없는 헌신 등등. 그는 무엇하나 하찮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일에서, 모든 생각과 삶에서 열정으로 살아온 인간 게바라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그런 그였기에 그는 그가 그토록 혐오하고 타파하고자 하던 제국주의의 신식민사회의 청년들에게 깊은 꿈 하나 던져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은 '혁명'의 붉은 물결이 아닌 '열정'의 더욱 강한 물결로 말이다.

  체 게바라의 삶을 읽어가면서 나는 몇가지 점에서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었고, 그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열정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 그 첫째다. 둘째는 그는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릴라의 야전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늦게 잠에 들었다. 이유는 물론 독서라는 사실. 그가 그토록 많은 역할을 그 누구보다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완벽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점도 어쩌면 이 점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그는 가족을, 친구를, 부하를, 민중을, 조국을 사랑할 줄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가족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부하들을 다스리고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닌, 가르치고 인도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진정한 혁명가가 되도록 도움을 주며, 민중들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몸소 느끼고 그들과 같이 그 고통과 아픔을 나누고, 조국을 위해, 나아가 민중해방을 위해 삶을 바쳤던 체, 그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네번째, 그는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았다. 이 책을 보면 그의 다양한 필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게릴라 생활의 기록돌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반성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 게바라였기에 이 땅, 이 나라 청년들에게 강한 열풍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자본가들의 눈에도 강한 상품성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이 사회가 이제는 아무리 체 게바라가 살아온다 하더라도 총을 들고 무작정 산 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쳐봐야 돈키호테로 봐주면 다행이요, 곧장 교도소아니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야할 처지가 될 만큼 성숙(?)했기 때문에 체의 그 열정과 모험, 다이나믹한 삶 등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에서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리뷰를 마무리하며, 그의 혁명정신과 투쟁, 사회의 변혁 등에 대해 그 중요도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단지 그의 열정만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체 게바라가 주는 한가지 금언 만큼은 우리에게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 21세기에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체 게바라의 뜨거운 열정과 정신은 무엇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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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 - 저술 출판 독서의 사회사
존 맥스웰 해밀턴 지음, 승영조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에 끌려 나는 이 책을 과감히 선택했다. 카사노바가 정말 책을 더 사랑했나? 그럼 나도 책을 더 사랑해볼까? 카사노바처럼? 그래, 카사노바처럼 여자도 사랑하고 책도 더 사랑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루 말할 것 없이 좋은 것.

이 책의 제목은 나를 끌어당겼다. 카사노바가 여자만 잘 유혹한 것이 아닌가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카사노바에게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랑, 책을 더 사랑했다는 이 책의 제목에 큰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책 제목만 보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큰 호기심이 발동할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책을 파는 기술이 여간 높은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카사노바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책 제목만 보고 괜히 카사노바 전기나 평전같은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카사노바와는 많이 거리가 먼 내용이기 때문이다. 카사노바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거금 18000원을 투자한 자신이 바보같은 것이 자명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이 책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저술 출판 독서의 사회사'에 관한 내용이라 하겠다. 말이 좋아 사회사지 쉽게 말하면 책에 관한 잡史라 해야 겠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게된 큰 동기가 카사노바때문이었다면,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게된 이유는 이 잡史가 나름대로 흥미있고 재치있고 읽을 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나는 처음 이 책 편집이 아주 형편없이 잘못된다고 느꼈다. 곳곳에 빈 페이지가 나온다. 간혹 엉뚱하게 보이는 그림 한 조각들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뭐 이런 책이 다있어'의 불쾌감은 잠시, 어느새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날린다. "종이에 베일 수 있음. 장갑을 끼시오!" 나는 한없이 웃었다. 그렇게 이 책은 번역자가 말하듯이 '해학'으로 일관한다. 간혹 신랄한 비판도 있지만 인상을 찡그리기 보다는 웃음짓게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책에 관련한 우리가 알지못했던 다양한 에피소드 혹은 책의 뒷면, 책 갈피속의 숨은 이야기, 즉, 책의 야사라할 만하다.

곳곳에서 보이는 작가의 재치와 해학의 시선은 나를 줄곳 이 책에 빠지게 했다. 옛날의 저술가들의 뒷얘기들이 그러했고, 책을 파는 기술, 감사의 글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웃기는 것인지, 서평에 대한 이야기들, 책이 대박이 나기까지 어떤 운이 작용했는지, 미국의 대통령들이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등등등.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가장 잘 도둑맞는 책은?" 정답을 공개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책의 뒷 이야기들을 재치있게 전달해 준다.

하지만 이 책을 누구나 재미있게 읽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일반인들에게는 나름대로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곳곳에서는 따분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따분함을 느낄때 다음으로 확확 넘어가면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부분은 "가장 먼저 도둑맞는 책"이라는 장일 것이다.

저자 존 맥스웰 해밀턴의 박식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는 이 책은,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탄생한 노작이라 할 만하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 저술 출판 독서의 뒷 이야기들을 엮어 보아도 흥미있을 듯 하다. 예를 들면 백석이 조만식의 비서였다는 것, 그리고 누구는 세금을 걷으러 다녔다는 것 등등.

나는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읽을만 하다. 단, 꼭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길 바란다. '카사노바'에 대해서는 이 책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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