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권력 - 개마고원신서 26
강준만.권성우 지음 / 개마고원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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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권력(權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이다. "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고, "복종 시키는 힘"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힘'의 근원에 따라 그 권력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 '힘'의 근원이 권력의 소유자에게 있는가? 아니면, 그러한 권력의 부여자(그러한 권력에 대해 인정하고 복종한 자)에게 있는가? 어쩌면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도 같을 것이고, 또한 다를 것이다. 권력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것은 그 둘의 공존과 복합의 산물인 것은 아닐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시조로 내셨을 적부터 거기에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아담을 먼저 만들어 아담에게 권력이 있었다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아담은 하와보다 육체적 힘이 있었다.(이것은 현대의 남녀의 육체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에 가능하다고 하겠다. 누가 알겠는가? 하와가 아담보다 더 덩치가 컸을지!)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했고, 육체적 힘이 강한 아담은 그 노동에 더 효과적이었을 터이다. 하여튼 하와는 이러한 아담에게 '복종'함으로써 그에게 권력이 있음을 '인정'하였을 터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어디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관계는 사회를 형성해 나아감에 있어서, 이 권력의 소유와 인정을 반복하여 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가정을 구성하고, 집단을 구성하며, 나아가 부족과 나라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 곳, 어느 것 하나 권력이 존재할 수 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권력은 타협과 공존과 평화의 또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여간에 작금의 우리사회 어디에도 권력 아닌 것은 없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권력은 정치권력, 이른바 정권으로 대표된다. 여기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경제적 권력, 천하게 말하여 돈의 힘이다. 아차! 태고로부터 권력의 상징이 무력이 빠질 수는 없겠다. 이밖에 사회는 곳곳에서 권력과 그에 대한 복종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힘은 있으되, 복종이 없다면, 그 힘의 행사에 대해 그 누구하나 인정함이 없다면, 그것은 권력이 될 수 없다. 애써 그것을 권력이라 한다면, 정당성 없는 권력이 되겠다. 이 태초부터 존재하여 온 이 권력이라는 것은 그 정당성, 이른바 힘에 대한 인정과 복종이 있어야 함을 현대의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권력이 존재한다고 하였으되, 여기 또 하나의 권력이 있으니, 그것은 권력 아닌 권력, '문학권력'이다. 문학과 권력, 이 두 단어가 합성되어지리라고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문학이라는 것은 근대의 산물이고, 이 근대라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힘의 논리가 지배하여 왔던 시기가 아니었는가? 이성의 힘이라 포장된 가장 야만적 살육이 진행되었던 근대에 형성되어, 현대(엄밀한 의미에서 현대라는 명명이 가능한가는 의문이지만)의 초첨단과학적 무력과 그보다 무서운 자본주의적 경제의 권력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의 문학에 권력이 존재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영국에서의 '문학'의 진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따져보면 '문학권력'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것이리라.(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 서론<문학이란 무엇인가>와 제1장<영문학 연구의 발흥>을 참조하면 좋겠다.)

  더 따져볼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문학을 '한다'는 것에서부터 문학을 향유하는 것에까지 이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은 그리 깊이 파고 들어가서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누군가의 문학작품을 읽고 거기에 감명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작품의 작가에게 일종의 문학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종류의 작은 권력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거대한 문학권력이 형성될 수 있고,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권력은 앞에서 이야기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문학계에서 작용하는 이 '문학권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재의 대한민국 문학계에 존재하는 그 힘은, 정당하게 부여받은 '권력'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 책 <<문학권력>>은 바로 그 정당성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애초에 권력은 '인정'(복종)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으되, 그것은 지속적 인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권력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권력에 대한 인정의 지속이 있을 때에는 그 정당성이 유지 존속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속이 중단되어 회의되었을 때에 그 권력은 그 순간 정당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부당한 권력이라 이름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 <<문학권력>>에서는 현재의 우리 문학계의 권력의 정당성, 즉 그 권력이 오용되어 권력에 대한 회의와 의문이 만연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이상 그것은 문학'권력'이랄 수 없다. 대신 그 권력에 물음표를 달아줄 수는 있겠다. 물음표를 달아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 권력이 다시 정당성을 갖기 위한 자기 갱신을 해야한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금 그 권력에 대한 인종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런 물음을 던진다. "'한국 문학의 위기'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그 물음 옆으로는 큰 글씨로 "문학권력"이라고 써 놓았다. 따라서 이것은 이 책이 표방하고 있는 지금의 문학'권력'에 물음표를 달아 놓아서, 이제 스스로 성찰하여 갱신하고, 다시금 정당성을 찾으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학권력'이 왜 그 정당성을 잃게 되었는가? 역사적으로 권력은 자기 갱신을 모른다. 권력의 소유는 그것에 대한 소유욕을 낳고, 이러한 소유욕에 의해 잘못된 권력의 행사를 낳는다. 자연히 이것은 썩을 수 밖에 없다. 문학'권력'도 그러한 권력의 역사적 향방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자신들의 문학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그것은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끌어드리고 말았다. 저열한 상업주의와 결탁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줄 호의병들을 모아들였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문학에 과대한 상업적 포장을 하고, 대단한 문학인 것인냥 선전유포하고, 자본과 미디어와 결탁하여 결국은 문학대중들을 오도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억압과 소외를 그 이면에 동반한다. 그러한 권력옹호를 지탄하고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또한 오염된 권력의 당연한 처사 아니었는가?

  온갖 잡다한 문학권력유지 행위가 자행되어 왔다. 말이 좋아 '주례사비평'이지 그것은 "100% 30kg 감량"이라고 선전하는 다이어트식품 사기와도 같은것 아닌가? 자신들을 비판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원천차단을 행하고 있음을 이 책에서는 폭로하고 있다. 어쩌면 이 문학권력은 이제 썩을 대로 썩은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현재까지의 오염된 권력의 패퇴에는 그 부작용이 공공연해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때에, 이러한 폭로의 함성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문학계의 '권력'은 그러한 단계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하는 작은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강준만의 이 책이(강준만과 권성우의 공저라고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강준만의 작업이다. 사실 강준만의 편역이라함이 더 정확하겠다.) 나온지 5년이 되었지만, 아직 이 '문학권력'은 무너지지 않았음을 본다. 사실 그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오늘날의 문학권력이 너무나 공고한 것은 아닐까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끝으로 나는 이 책을 평가하면서 별 5개를 주었다. 책 자체의 평가라기 보다는 이 책에서 회의되고 비판되는 '문학권력'이 어서 빨리 정당해 질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절실하여, 그에 대한 응원의 작은 힘이나마 보내주고자 함에서의 별 5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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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 인터뷰 특강 시리즈 3
김동광, 정희진, 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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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달 전에 내가 생활하는 학교에서 어떤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몇몇 쟁쟁한 인사들을 초청해 특별강연을 한다는 포스터였는데, 지금 보니 바로 이 책에 실린 그 강연에 대한 홍보포스터였던 것이다. <<한겨레21>>에서 이벤트성으로 연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이란 주제의 이 강연 포스터에 유독 나의 눈길을 끌게 한 것은 평소 좋아하던 박노자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시대의, 아니 세기의 사기꾼으로 지칭될 황우석 사태가 터진 이후여서인지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이런 강연을 마련한 듯 보였다.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는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이 참으로 허탈감을 느꼈으리라.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 그 이상일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느 방송프로그램에서 황우석 교수에게 큰 기대와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는 희귀병으로 온갖 고통의 세월을 보내던 한 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의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나같이 별 기대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도 '허탈'이란 마음은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거짓말'이라고 하면 어떤 면에서 좀 약한 것이 아닌가 할 때가 있다. 많은 거짓말을 우리는 '거짓말'이라고 칭하지만 그런 거짓말에도 고저가 있고 장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로 죄 짓는 것을 사기라고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이들의 '거짓말', 한 노래가사의 어머니처럼 애써 자장면이 싫다고 하는 그런 거짓말도 있다. 그럼 거짓말은 때론 유익한 것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짓말들이 사실 울며 겨자 먹기일 뿐이지 그것을 유익의 차원까지 끄어올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세상에 거짓말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거짓말이 없었다면 이 세상이 존재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다. 어딜 가나 거짓 아닌 것이 없다고 할 때, 그런 세상에서 속고만 산다는 것은 비참한 노릇이다. 때론 속아주기도 하고, 때론 속아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속아주는 것이야 무에 그리 힘들 일이겠는가? 문제는 속지 않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7차례의 인터뷰 강연이 진행되었다. 기획의도는 사실 황우석 사태라는 시류를 탄 것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거짓말에 대한 성찰은 언젠가는 필요한 것이기에, 편집장 고경태가 이 책의 머리말에 쓴 것처럼 "거짓말로 가득 찬 세상. 이 책은 항(抗)거짓말 치료제가 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공부해서 속지 말고" 살아야 하겠다. 속지 않으려면 일단은 무엇이 거짓인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고, "알면 다친다."는 소리도 있지만, 여기서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관용어가 가장 어울리고 적합하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과학사회학자 김동광, 역사학자 한홍구와 박노자, 법학자 김두식, 새터민 김형덕, 여성학자 정희진, 그리고 저 멀리 인도에서 온 평화운동가 프라풀 비드와이까지 모두 8명이 우리 사회의 거짓말 7부분에 대해 흥미진진한 강연을 펼쳤다. 사실 그 강연을 직접 가보고 싶었지만, 당시에 이래저래 바쁘고 서울까지 올라가기가 벅차 단념해 두었다가 이 책을 만나서 한편 기쁘기도 하고, 한편 후회도 되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그 강연 현장에서의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이 된다.

  흔히들 세상에 거짓이 가득차 있다고 말하는데, 정작 뭐가 거짓이냐고 물어보면 쉬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실 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거 속는 것 같은데, 뭐가 거짓말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그러니 뭐가 거짓말인지 알려주어야 할 것이기에, 그 많은 거짓들을 시시콜콜 다 얘기할 수는 없겠고, 그 중에서도 이 사회에 만연한 덩치 큰 거짓말들 7가지 택한 것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는 얘기가 있잖은가? 우리 민중들은 그런 사람들일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이 7가지 항거짓말 치료제를 맞으면 그깟 자잘한 거짓말이야 한방에 충분히 날려버릴 것이다.

  첫 번째 강연자는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씨다. TV에 나와서는 차분하고 다소곳하게 말씀을 잘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만난 정혜신은 조금은 당차보이기도 하다. 주제는 '사람에 대한 거짓말'이다. 사실 이 주제는 너무 크다고 생각이 된다. 사람에 대한 거짓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사실 세상의 모든 거짓말들은 어쩌면 이 사람의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혜신은 당차게 이야기 한다. 자신이 하는 말 중에 참말이라고 확실할 수 있는 이 말, 바로 "모든 사람은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다."라고 선포한다. 그렇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그러기에 거기에서 거짓말이 발생한다. 그러니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참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들을 대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또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우리 사회에서 거짓말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정혜신의 이야기는 이런 순진한 생각인 줄 알면서도 희망을 갖게 한다.

  두 번째 강연자는 과학사회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학문을 하는 김동광 씨다. 얼마 전 최재천 교수의 '통섭'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도 좀 다른 듯 보인다. 과학사회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는 이 강연 첫머리에 잘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 넘어가자. 여기서는 과학에 어떤 거짓말들이 있는지 이야기 한다. 사실 현대/근대 국가의 성립의 기초는 몸통은 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가권련은 이런 과학에 기반에서 성립된 것이리라. 그러기에 거기에는 많은 거짓들이 존재한다. 과학이라는 학문에 겉으로는 거짓이라는 것을 배제하고 객관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 실상 안에는 온갖 거짓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기술이 많은 이로움을 외피로 하고, 그 이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죽여오지 않았던가?

  세 번째 강연은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읽어 오던 박노자가 한홍구 씨와 함께 한국사의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전 박노자의 여러 저서에서 이 나라의 거짓된 이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배경들을 보면서, 그것이 김일성 동상과 어떤 면에서는 같은 성격이 아닌가 하는 의문들을 꾸준히 제기해온 것이 박노자이다. 그런데 한홍구는 사실 여기서 처음 만난다. 박노자와는 또 다른 느낌의 관심을 갖게 하기 충분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를 다루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많은 거짓이 침투하기가 어느 것보다 쉽다. 역사가 왜곡될 때에 우리 현대사회에서 많은 잘못된 것들이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이 역사를 의심하고 진실이 무엇인가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법학자 김두식 씨의 강연이다. '거짓말 권하는 사회'라는 주제로, 우리의 기억이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위증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위증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이라는 얘기는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학계에 만연한 거짓들에 대해 폭로한다. 사실 너무나 공공연한 것이지만, 아무도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것은 폭로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 사회는 이런 거짓들을 강요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북한에서 월남한 김형덕 씨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 북한에 대한 잘못된 편견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나의 견해와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많은 언급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해서 보다 옳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섯 번째는 페미니스트 정희진 씨의 이야기다. '남자'의 거짓말과 말의 권력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장에서 나는 무척 흥분했다. 사실 페미니즘이니 페미니스트 하면 쓸데없는 소리하는 것으로만 생각해 온 것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사회에서 여자는 배제되어 온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이 사회의 거짓의 만연을 사실상 유발시키는 장본인이 아닌가 한다. 많은 부분에서 정희진의 강연은 나의 그동안의 편협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생각들에 하나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정희진을 앞으로 더 알아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마지막으로 평화운동가 프라풀 비드와이의 '인도에 대한 거짓말'이다. 사실 19세기나 20세기의 제국주의적 침략 속에는 오리엔탈리즘이 내재해 있다. 현재에도 이것은 꾸준히 적용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동남아나 인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뭔가 신비스럽게 미개해 보이는 나라 아닌가?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거짓된 생각들을 한풀 벗겨주는 유익함이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강연 중에서 한 가지 아쉬움 점이 남는다. 큰 건더기의 거짓된 주제들이 몇 개 빠진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 교육의 거짓말들, 우리 문학의 거짓말들이 그것인데, 기회가 된다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치료제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한다.

  이 책을 통해서 이것으로만 항치료제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보기는 힘들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공부해서 속지 말고" 살자고 했던가? 그렇다 이 책이 이 세상의 거짓에 대해 공부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의 역할을 충분할 터이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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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우석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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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화(珍貨) 보기 드문 물품. 색다른 물품.

    (2) 진ː화(進化) ①생물이 오랜 동안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종류의 것으로 되어가는 일. ②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퇴화.

    (3) 진ː화(鎭火) 일어난 불이 꺼짐, 또는 일어난 불을 끔.

  우석훈의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에는 이 '진화'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쓰인 '진화'의 의미는 곧 (2) 진ː화(進化)의 ②의 뜻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미 FTA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하는 순간, 결코 대충 살아가지 않는 국민들이 무서워서라도 정부는 대충 협상을 하지 않게된다. 단 한번이라도 국민들에게 '물어보는' 절차를, 헌법이 정한대로 가동시킨다면, 한미 FTA는 '새로운' 방향으로 ― 그것이 또한 '바람직한' 방향이기를 소망한다 ― 진화하게 된다.
  나는 지금 한미 FTA 문제를 넘어서 '자신의 경제적 삶'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이 땅의 국민들이 어떻게 '협동진화'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은 지금 '견제와 균형'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협동과 진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한미 FTA 국민투표에서 찬성하든 반대하든, 협상안을 직접 보고 스스로 투표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면, 서로 모르는 국민들끼리 '협동'을 통해서 하나의 '진화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그마가 아니라 상식이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질문이다.
  그야말로 "이 폭주가 멈추는 날, 진화가 시작되리라"는 새로운 경구가 필요한 순간이다.
(pp.261~2.)

  위의 인용한 글에 나타나는 5번의 '진화'는 모두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 일."이란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글 전체에서 한미 FTA는 '진화'이냐, '퇴화'이냐를 논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것에 대한 다방면에 걸친 증명이 이 책의 내용이다. 그런데 '진화'로 가는 길이라면 반대할 이유도, 이 책이 만들어졌을리도 없겠거니와, 이 책에서의 증명의 결과, 그것은 '진화'는 아니다. 엄밀히 말해 '퇴화'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나, 현재로써는 '퇴화'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진화'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찬 미래로 가는 '특급열차'일 것이되, 그렇지 않으니 '폭주'하는 기관차, 장차 거대한 벽에 부딪쳐 폭발하고 탈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것을 '폭주'하고 규정하고, 그것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 책과는 좀 상관없어 보이는 듯한 '진화'라는 단어의 말뜻을 우선 논하는 것은, 한가지 철학적 문제를 먼저 짚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이 보다 좋고 보다 고도의 것으로 발전하는"것이 곧 '진화'라는 말의 뜻이되, 어떤 것이 보다 좋은 것이고 보다 고도의 것이 되는가 하는 철학적 말놀음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진화'와 동의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발전'일 터인데, 여기에도 같은 문제가 담겨있다. 인류의 역사는 '진화'했는가? 또한 인류는 '발전'한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구하나 명쾌히 답변하기 어렵다. 과연 진정한 '진화'는 무엇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미 FTA를 통해 '진화'된다느니, '발전'하는 것이라느니 등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자는 이 '진화'라는 개념에 단순한 양적 물적 '발전' 이외에 질적 '행복'을 추가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진화'라는 개념에서 진정한 인간의 '진화'가 무엇인가를 해결해야만이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이 풀려질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담으로 치자. 그런데 나는 이 '진화'라는 동음이의어를 가지고 이 책을 재구성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제시한 3가지 '진화'의 동음이의어들이 이 책에 중심테마들을 절묘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1)의 '진화'와 노무현
  진화(珍貨)에서 진(珍)은 '보배'를, 화(貨)는 '재물'을 의미한다. 풀어보면, 보배로운 재물(물건)을 뜻한다. 사전에서의 의미인 "보기 드문 물품, 색다른 물품."에는 긍정적 의미인 이 '보배'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아주 좋고 귀한 것'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와 현 한미 FTA 폭주기관차의 '자랑스런' 특급기관사 노무현 대통령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사전에서 제시한 말뜻 그대로 '보기 드문', '색다른' 것으로써의 '진화'로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특종(特種) 혹은 별종(別種)이겠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독창적 상상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 아니다. 많은 이들이, 여기저기의 언론이, 어쩌면 국민 대다수가, 아니면 이 책의 저자 우석훈이 그렇게 노무현을 보고 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라 불리는 스크린쿼터, (광우병 의혹이 여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의약품 가격 재조정, 배기가스 규제완화 등의 사안을 한국이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결정적 협상카드를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준 꼴이었다. 결정적 협상카드를 협상도 하기 전에 내어준 꼴이었다. 뭔가 잘못 먹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이 '4대 선결조건'에 관한 의혹을 전면 부정해왔으나, 7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이 사실을 시인했다.)  (p.73.)

  이런 노무현 대통령은 어처구니 없이 '특별'하다. 박정희도 김일성도, 전두환 장군님(?)도 이런 점에서 노무현에 못 미친다. 하기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대통령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금상첨화라는 말은 여기에 쓰라고 있는 말 아니겠는가? 그가 운전대를 잡고 질주하고 있는 기관차에 우리는 탑승하고 있다. 내릴 수도 없다. 미 특수부대 요원들을 투입해 이 달리는 열차에서 구조를 요청해야 할까? 그런데 우리의 '진화(珍貨)' 노무현은 자신이 운전하고 있는 이 폭주기관차가 고장이 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일까? 미 최정예 특수부대 FTA협상단에 구조요청을 이미 해놓고 있으니 말이다.

  (2)의 진화, 과연 한미 FTA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는 망하는 것이냐? 한미 FTA를 놓고, 망하는 것이냐, 흥하는 것이냐, 첨예하게 논쟁하고 있다. 한 나라의 흥망이 걸린 이 문제에서 양측은 극단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달리고 있다. 어디로? 나는 잘 모른다.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는 노무현 정부도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한미 FTA의 결과를 놓고, 한쪽은 우리가 사는 길이요, 발전하는 길이라 홍보하고, 한쪽은 절대적 망하는 길이라 목 놓아 울어대니, 이것은 '진화'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한미 FTA가 이대로라면 망하는 것이라고. 이런 목소리가 있다면, 우리 정부는, 아니 노무현 정권은 새삼스럽게라도 되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 일단은 정상으로 보인다.

  (3)의 진화, 폭주하여 불타는 대한민국 기관차를 진화(鎭火)하라!
  진화(鎭火)는 곧 "불을 끄는 것"이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 했으니, 뭔가 타는 냄새가 나고 있다면 일단은 소화기를 챙겨야 한다. 그도 없다면, 바가지에 물 가득 담아 손에 들고, 타는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를 찾아 나서야 하겠다.
  질주하여 과열한 열차의 기관에서 냄새가 난다. 기관사는 속도를 즐기는데에 여념이 없다. 소화기를 어디에다 두었더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열차 기관에 접근금지! 기관사는 그렇게 명령했다. "달려라 달려 대한민국 기관차야"
  현재의 우리 상황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적어도 우석훈이 이 책에 써놓은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진화'시킬 것인가가 궁극적 해결책이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우석훈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이다. 진화의 소화기들이 있기는 하다. '국민투표'소화기.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그저 달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으니, 소화기를 내어 놓을 이유가 없다. 어쩌면 좋겠는가?

  이 책 전반에서 부족한 나름, 조목조목 한미 FTA에 대해 분석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때론 너무나도 심각한 나머지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 "그대여 떠나라"한다. 그러나 저자는 작은 희망하나를 결코 놓지 않는다. 
  요즈음, 북한 핵 실험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한미  FTA 논쟁은 일단 뒷전으로 밀린 듯 하다. 조심스럽지 않게 음모론을 제기해 보자면, 이 북한 핵 실험 발표는 미 부시와 노무현의 장난이 아닐까? 시기가 절묘하기도 하니 말이다. 부쩍 FTA논란이 거세게 일 때에, 국민들의 관심사가 높아져갈 때에, 느닺없이 북한이 핵 실험을 해버렸다. 지상파 뉴스에서 FTA 관련 뉴스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국민들의 당장에 핵이라도 날라올 것만 같아 불안에 빠져 있다. 이런 음모론이 가당찮은 것이지만,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알아야 한다"는 것의 절실함이다. 한미 FTA 체결을 제지하기 위해서나, 어쩔 수 없이 체결이 된 후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알아야'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아! 나는 도대체 경제는 모르겠는데, 정말 그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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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 우리시대의 논리 3
김명인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한 동안 뜸 했다. 이 '한 동안'은 조금은 긴 '한~ 동안'이다. 자그마치 한 달하고도 닷새는 지났으니 말이다. 그럼 무엇이 뜸 했는가? 뭐 다 아시겠지만, 서평쓰기가 뜸 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뜸하기 전에는 꽤나 많이 썼나보다 하면, 또 그건 아니지만서도, 한 달에 두서너 편은 꾸준히 서평을 써왔다. 일주일에 한 권 이상씩은 꾸준히 읽어 왔고, 그 중에서 몇 권여를 서평으로 남겨왔다. 하지만 요새는 한 달 이상을 쉬었다. 그렇다고 책 읽기를 쉰 것은 아니다. 단지 서평만을 쉬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뜸 했을까?

  몇 가지 이유를 대는 것은 어렵지 않겠다. 우선 현재의 처지가 독서의 여유만을 가지기에도 궁핍한 처지이고, 대략적으로 심리적인 압박과 부담 등으로 인해, 서평쓰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그렇기 때문인지, 서평을 쓰는 것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음의 여유가 없이 무턱대고 읽어 내려간 독서는 서평으로 되새김할 건덕지가 남지 못했고, 그런 상태에서 수박 겉핥기식 서평은 무의미하기에, 나는 한~동안을 서평을 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왜 "한 동안 뜸 했었지"를 말하는가?

  아시다시피, 이제 그 '뜸'함을 접고 한 권의 책에 대해 서평을 남기고자 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알라딘 서평단 모집에 응모해 당첨되어 책 한 권 받아놓고 반드시 읽고 서평을 써야하는 것처럼 그러한 각오와 목적을 가지고 읽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도 공으로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서평을 써야하는 강제와 의무를 없었다.

  이 책을 얻기까지의 경로를 얘기하자면, 다분히 나의 개인사가 조금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야기하는 판에 조금 적나라해 보도록 하겠다. 어느 날 이 책의 저자가 나에게 이 책을 내밀었다. 친필 사인과 함께 건네 온 이 책은 저자에게 있어서나,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은 의외의 책이었다. 왜 의외냐? 우선 저자와 나와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이면서, 교수와 조교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저자의 일거수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되었기에, 어떤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정도는 미리 입감할 수 있었을 것인데, 어느 날 문득 내민 이 책은 그 감지망에 전혀 탐지되지 못했었기에 나에게 의외의 책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자에게도 의외의 책이었다.

  "이 글들을 이렇게 엮어서 책으로 묶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 책의 발상은 순전히 후마니타스 편집부의 것이다. 처음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이 인천까지 나를 찾아와서 쓴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사실 난감한 심정이었다. 자기 글을 사랑하지 않는 글쟁이는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이런 잡다한 글들을 묶어서 칼럼집이다 에세이집이다 하고 엮는 일들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 못 된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학습해 왔던 나로서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저자의 본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은) 칼럼들을 전부 수집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홈페이지에 끄적거려 놓은 낙서들까지 전부 원고화해 놓고, 지금과 같은 이 책의 '컨셉'까지도 이미 그려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랬으니, 이 책을 안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아하! 그래서 나나 저자에게도 의외의 책은 의외의 책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이 책을 서평을 쓰기위해 처음부터 읽기를 시작하였을까? 공으로 받았으니 답례상의 서평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서평을 쓰기에 어느 정도의 주저함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서평을 써야한다는 부추김은 절대 되지 못했다. 괜스레 써 놓은 서평은 스승에게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쓰는가?

  나는 사실 이 책을 나와 저자와의 관계를 어느 선에서 뛰어넘어 보고 싶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뛰어넘어서, 내가 모시는 교수님이라는 관계를 뛰어넘어서, 단지 한 일반 독자로서, 그냥 한낱 인문학도로서,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으로서, 문학평론가 김명인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80년대를 불꽃처럼 살아온 김명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읽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격인 머리글을 읽고서 확실히 굳힌 생각이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성격이 어떤 면에서는 그의 내면까지를 읽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지금은 그 예측이 굉장히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이다. 우리 과에 새로운 교수님으로 저자가 부임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스승과 제자의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졸업을 하고, 한 번의 시험해서 낙방을 하고 있던 차에, 과 조교가 되면서, 교수와 조교의 2차 관계-맺기가 이루어졌다. 사실 그를 처음 보고,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시인인 줄로 알았다. 서점에서 시인 김명인의 시집을 보았고, 거기에 사진 대신 박혀있는 캐리커처를 보았을 때, 저자와 얼핏 비슷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에 지나지 않았다. 시인 김명인 만큼이나 유명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이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민중문학논쟁을 일으키고, 한국민중사사건으로도 유명한 저자 김명인에 대해서는 전에 아는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어느 정도의 유명세를 탔는지도 몰이다. 그가 80년대 중반에 문학평론가로 등단해서 잠시 활동하다가, 90년대 초반 평론을 긴 세월 접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러한 상황이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게 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여간 새로운 교수님을 맞이하여 나는 그의 책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창비, 2004)을 우선 사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그에게 문학평론가로서의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각, 비판적 의식, 그리고 그의 힘 있으면서도 유연한 필치에 일단 합격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의 두 번의 투옥, 80년대 학생운동, 한국민중사사건 등에 연루되었다는 사사(私史)를 알게 되면서, 그리고 한창 평론/비평 활동을 하다가 중도에 갑자기 '불을 찾아' 떠난 일 등을 듣게 되면서, 그의 인간적 이력과 내면이 무척이나 궁금해오던 차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로구나 싶었다. 그것은 충족되었다. 다만 그의 정치적, 문학적 측면에만 국한되었지만, 그것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그의 다른 면은 그와 함께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지간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살짝 그의 일반생활을 보자면, 그의 날카로움과, 예리한 비판적 시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을 좋아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학생들에게 매우 자상하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들을 보면, 그의 필치와는 어쩌면 상극이고, 어찌 보면, 참 좋은 대조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멸의 문학', 즉 현재의 문학이라는 것에 대한 그의 견해와, 비판, 그리고 그것의 대안 등을 보여주고 있으며, '배반의 민주주의'는 그의 정치적 면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두고 있다. 제목의 배치와는 다르게, 책의 전체배치는 정치면을 앞에, 문학에 대한 것을 뒤에 두고 있을 따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선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말한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에게, 90년대를 거쳐 이룩한 민주주의가 2000년대에 들어 '배반'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신식민지화,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 신자유주의 세계화 등, 한때나마 희망을 걸었던 '노무현 정권'의 무책임함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미국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전쟁광적인 부시 정권과, 그에 아무런 자존감 없이 밀약을 거듭하는 현 정권, 아울러 미국을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영원한 우방으로 착각하는 우리의 보수세력들, 그들에 대한 저자의 강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이 장들에서는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넓은 지식, 그리고 인간적 면모,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그의 관심 등, 그의 다양한 인간적 측면들까지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다분히 이 글들은 칼럼이면서, 시론(時論)이면서, 읽기이고, 분노와, 경고와, 고백과, 희망이 곳곳에 녹아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단편들이 하나의 커다란 무엇인가로 통일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마니타스의 편집진들이 책으로 엮은 것이리라.

  문학에 대한 그의 단상들은 이 책의 후반부를 구성한다. 간단히 말하면, 80년대의 역사성의 문학, 그와는 이질적인 90년대의 일상성의 문학, 그러면서 문학권력화하고, 상업주의와 밀교하는 오늘날의 문학에 대해 다분히 반성적 성찰을 보이고 있으면서, 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역사성과, 90년대의 일상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각각의 단상들이 일관되게 유기적으로 펼쳐내고 있다.

  "일상성과 역사성의 결합을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는 순간이 곧 우리 문학이 80년대와 90년대를 제대로 한꺼번에 넘어서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역사와 혁명의 이름 아래 일상성이 소거되거나 연역적으로 재구성되었던 것이 80년대라면 일상성의 발견, 혹은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와의 연결 고리를 놓쳐 버린 것이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 드리워진 역사, 어느 결에 역사의 한 굽이가 되고 마는 일상. 이것을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통일해 내는 일, 그리하여 우리의 이 지리멸렬하고 무상한 것처럼 보이는 삶이 사실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영원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정녕 살아봄 직한 세상의 실현을 향한 간절한 움직임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일은 과연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일까."

  이처럼 저자는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라는 제목처럼, 문학에 대한 환멸감, 정치에 대한 배신감을 격분에 차서 분노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어떻게'를 물어보며, 조심스레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스스로 '잡문집'이라고 폄하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에서 너무 겸손한 것이란 느낌을 받는다. 이 책은 일반 독자대중에게 '잡문집' 그 이상이 가능하게끔 해준다. 오히려 정치와 문학을 비판하고 있는 다른 어떤 책들보다, 쉽게, 그리고 친근히, 그러면서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 글들이 나에게만은 바로 노신의 잡감문이고 리영희의 에세이들이다."

  내심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심중을 읽을 수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에게도 "반가운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볼 때 '노신의 잡감문'과 '리영희의 에세이들'과 더불어 이 책을 또 한 권의 보기로 놓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만약 미래에 이런 책을 내놓게 될 수 있다면 이렇게 서문에 써 넣으리라. "이 글들이 나에게는 노신의 잡감문이고 리영희의 에세이들이며, 김명인의 잡문집이다."라고.

(* 별을 다섯 개 주었다. 계면쩍은 일이긴 하지만, 하나를 빼고 4개를 주어볼까 했지만, 그래도 5개가 마땅해 보인다. 6개에서 하나를 빼어서 5개라고 해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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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6-10-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바람구두님 말씀을 들었어요! 선생님께 괜히 누가 될까봐, 감히 '들이대'질 못 했습니다;; 죄송해요, 맨날 바람구두님 서재 구경만 하고, 인사 한 번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ㅎㅎ. 아참 글고, 서재명은 사실, 선생님 아뒤를 보고 흉내를 낸 거에요...ㅎㅎ;;
 
나의 형, 이창호
이영호 지음 / 해냄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바둑? 하면, 조훈현과 함께 이창호를 떠올린다. 조훈현 9단보다는 이창호 9단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보다 많은 듯 싶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창호라는 이름이 바둑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화 <고스트 바둑왕> 식으로 말하자면 현재 신의 한수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바로 이창호라고나 할까!

  이창호 9단은 75년생이니 현재 32살이다. 아직은 젊은 나이지만, 바둑에서만큼은 중견, 그 중에서도 철옹성의 무너지지 않을 듯한 바둑역사의 거대한 성을 쌓아올린 현재의 바둑황제에 등극한지 이미 오래다. 조훈현 9단과는 사제관계로, 그의 제위를 물려받았다고나 할까? 아직까지는 세계바둑계의 최고수, 1인자, 그는 바로 이창호이다.

  이창호는 이렇듯 바둑에 관한한 유명하다.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이창호란 이름 석자는 알고있다. "이창호? 아! 바둑" 그렇다. 이창호는 바둑이다. 10년을 넘는 세월 세계 바둑의 일인자로 군림해온 그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터, 그가 나가면, 우승은 우리의 것이었다. 우승제조기라고 불러도 좋았다. 국제대회에서 그의 활약은 골프의 타이거 우즈를 뛰어넘고, 농구의 마이클 조던을 앞지르며, 축구의 펠레보다 뛰어나다. 간혹 이런 생각을 해본다. 바둑이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다면 이창호는 세계적인 인기스타가 되었을 것이라고!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바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여건상 바둑을 배울수는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배워보고 싶다는 정도, 그것이 대학에 오면서 시간의 여유가 생겨 배우기 시작해서, 현재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바둑을 둘 줄 안다고는 할 수 있겠다. 모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서 3단의 기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곧 동시대를 살아가는 바둑의 최강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는 바로 이창호였으므로, 이창호에 대한 관심은 그의 활약이나, 그에 관한 기사, 그의 뒷얘기들을 담아놓은 책들로 이어졌다.

  지금 이 책 <나의 형, 이창호>는 지금까지의 이창호에 관한 이야기중 최고라고 할 만하다. 동생 이영호 저자가 이창호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기록한 글이기에 더욱 생생하고, 이창호라는 인간의 진면목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이창호 이야기가 이창호의 뒷얘기였다면, 지금 이 책은 이창호의 현재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이창호가 바둑과 동일한 명사가 되었다는 것은 이창호가 바둑의 신화, 혹은 신격화되었다는 이야기와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의 이 책은 이창호의 인격화, 다시말해 인간적 면모들을 풀어내고 있으면서, 그 신화의 내용을 가일층 두텁게 하기도 한다. 그가 신이었다면 신화는 당연한 것일 터이지만, 인간이 이루어낸 신화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기에 더욱 이 신화의 질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창호가 출전하는 바둑대회에서는 늘 언제나 이창호의 우승을 당연히 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이창호가 우승을 일구어낸 것은 진땀나는 승부와, 그 안에서의 좌절과 인내와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것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즉 이창호가 이룩한 이 신화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창호는 어린 나이에 바둑을 시작해서, 성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창호는 우리 어느 누구보다도 진정한 면에서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된다. 바둑판 위에서 삼라만상의 변화를 읽고, 돌 하나하나의 생과 사를 통해 인생의 의미들을 진정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창호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여러가지 면모들을 체득하고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이창호의 뒷얘기, 단순 에피소드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하나의 인생론이며 철학서이고, 실용서로서 사용이 가능하다. 이창호라는 인간의 면모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둑판과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바둑의 신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많은 사람들이 한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부분들에 대해 재미있는 상상들을 하곤 한다. "바둑의 신이 있다면, 몇 점을 깔고 두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어느 최정상의 고수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3점이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둔다면, 4점에 두겠다." 이외에도 바둑의 신을 설정한 여러가지 상상들은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바둑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은 바둑을 두지 않는다.

  바둑은 하나의 인생이다. 인생의 모든 변화를 그려내는 것이 바둑이다. 그러하기에 신은 이러한 바둑을 두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다. 인생의 의미를 무엇하러 신이 찾으려 하겠는가? 사람만이 바둑을 둔다. 두어야 한다. 둘 수밖에 없다. 그렇하기에 이창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바둑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창호는 바둑의 신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라고. 중국에서는 그를 신의 경지에 올려놓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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