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국이 '우행시'로 울었다고 하면 약간은 과언이고 '상투적'이겠으나, '우행시'는 지금 큰 인기를 얻었있다. 영화 '우행시'로 많은 관객들을 울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 여세가 미약해진 듯한 느낌이지만, 소설 '우행시'만큼은 아직도 베스트셀러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을 울린건 맞는 말인듯 싶다. 몇 만이 울었을까? 아니 몇 십만? 몇 백만이 울었을까? 그 수치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겐 눈물 짖게 하는 '시간'이 되었을까? 이것은 이 소설(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다만 편집된 홍보물만을 보았을 뿐이고, 이나영이 여주인공이란 사실을 알 뿐이고,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진 않지만, 하여간에 그 얼굴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영화는 말할 수 없고 소설을 말할 뿐이다. 하긴 영화 이전에 소설이었으니 소설만을 말하는 것이 그리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듯 싶다. '진짜 이야기'는 소설이었으니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될 듯 싶다.

나는 이상하게도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붙으면 거리낌이 생긴다. 많은 이들이 읽었고, 재밌다고들 야단에 법석을 해도 괜히 손길이 가질 않는다. 이것도 하나의 편견이겠지만, 이런 것들에는 상업적 냄새가 많이 풍기고, 큰 기대에 대한 실망감을 얻는 경우가 많고, 뭐랄까 품격이랄까? 그런 것들이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직' 베스트셀러인 이 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다. 왜일까?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이름때문은 분명 아니다. 나는 아직 그 작가의 어떤 책도 읽지 않았다. 그 이름은 아직까지는 대중적 인기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그의 높은 이름은 언젠가는 나에게 읽혀야 될 그 어떤 책무로 지워질 것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그 책무를 피부로 느끼지 못하기에, 그 공지영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 무엇때문인가?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하는 그런 궁금증 때문도 아니다. 이 책이 그렇게도 재미있나 하는 호기심도 아니다. 나는 그런 궁금증과 호기심의 발생을 차단하는 방어막의 고질적 편견 비슷한 것들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코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다. 그럼 왜일까?

오늘은 10월 31일, 지금은 그 '밤'이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귓가에 맴돌게 하는 '그날의 마지막 밤'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 노래를 틀어 놓고 지냈다. 아니 그건 오늘만이 아니었다. 10월에 들어서 이 노래를 자주 들었던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도 나는 이 계절 가을이 오면서부터 자주 듣느다. 이 가을이라는 계절감은 그냥 나를 울적하게 한다. 흔히들 이것을 두고 가을 탄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가을을 타는 것이 분명하다. 28의 지금의 나에게는 썩 어울리지 못한 감상이라고 하겠으나, 현재의 나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 가을의 노래들이 충분히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울어보았던 때가 언제였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한 번 울었고, 그리고 그걸 드라마로 보면서 또 한 번 울었고, 타이타닉을 보면서도 청승맞게 울었고, 아마겟돈을 보면서 살짝이 울었던 기억이 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꽤나 많이 울지 못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지 않아서, 나는 더욱더 울고 싶었다. 적어도 이 계절 가을에는, 가을을 타는 이 계절에는 더더욱 울고 싶었던 것이다.

분명 '우행시'로 많은 이들이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다만 나도 '울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는, 밤잠을 조금씩 늦춰가면서 이틀에 걸쳐 읽어낸(보통 내가 책 한 권을 읽는데에는 3~4일이 걸린다.) 지금에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왜일까? 이 책이 결코 슬프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의 이야기가 감동이 없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울음이 나지 않는 것은 나만의 탓일까? 하긴 내가 감수성을 많이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봤어야만 했던 것일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울지 못했던 충분한 이유가 이 책에는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분명 한 남자, 그것도 사형수의 이야기이고, 한 여자, 비극적 상흔을 가지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15살의 나이에 근친으로 부터 폐륜적인 상처를 받은 주인공 '유정',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도망가고, 술만 먹고 때리기만 하는 아버지 밑에서 동생과 함께 어렵게 자라다, 아버지도 잃고, 동생도 떠나보내고, 소년원을 전전하고, 감옥을 수차례 다녀오고, 결국엔 사회의 낙오자로, 그리고 자신의 여자를 지켜줄 어떤 능력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죄까지도 떠 맡아야 했던 남자 주인공 '윤수'. 그 둘은 정말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으면서도, 어떤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그 둘이 동일시되기까지도 한다. '유정'은 말한다. "윤수와 나는 거울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분명 '유정'에게는 '윤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윤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두 문제적 인간은 모두다 아픔을 가지고, 그래서 모두다 이 사회에서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이상한 인간으로 분류된다. 즉, '유정'은 정신병원에 다녔어야 했던 것이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갖게 한다. 그리고 '윤수'는 감옥이라는, 사형수라는 아주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그 둘의 '같음'은 그 둘을 만나게 했고, 그럼으로써 그 둘을 변화시켰고, 그리고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기위해서는 중요한 매개가 있었다. 바로 '모니카 수녀'이다. '모니카 수녀'는 유정과 윤수 모두를 껴안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어쩌면 성녀같은 인물이기도 한데, 재밌는 것은 유정은 이 '모니카 고모'와 간혹 동일시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에는 이 세명 모두가 포함되는 것은 아닐까?

유정과 윤수가 만나기 전까지는 그 둘은 분명 '같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유정과 윤수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자신이 같지 않음에 분노하고 괴로워했다. 그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소외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만남으로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리고 그러한 '진짜' 모습을 보면서 '진짜 이야기'를 하게되면서부터 서로가 '같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해준 이유인 듯 싶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고모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리고 유정도 자신의 모습에서 고모의 모습을 찾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은 어머니와 같았음을 깨닫는다. 또한 윤수와의 만남에서 '이주임'도 '진짜 이야기'를 하게되면서 그들과 '같음'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러한 '같음'은 용서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피해자의 어머니의 용서, 주인공 유정의 어머니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유정에게 벗어날 수 없었던 고통을 주었던 사촌오빠에 대한 용서, 그리고 윤수의 자신에게 죄를 모두 뒤집어 씌웠던 선배에 대한 용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용서, '국선변호사'에 대한 용서, 그리고 검사, 판사 등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그들은 모두 '같음'을 공유하게 된다.

이 '같음'은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 결국엔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서의 '같음'이다. 그러하기에 그 '우리'의 범주에는 다만 유정과 윤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울었던 것인가? 윤수의 죽음 앞에서 모든 이들이 그렇게 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울음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나는 내가 울 수 없었던 이유를 다만 내 무감각해진 감수성의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을 것 같다. 유정은 '상투'를 혐오했지만, 결국은 이 소설이 가지는 '상투'를 피해가지는 못했다는 점, 이 소설은 다분히 신파조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극단으로 치달았던 두 남녀 주인공이 만나서 서로의 같음을 인정하게되는 데 까지의 개연성, 그 둘이 변화하여 무슨 성자, 성년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들, 그런 것들이 나는 너무나도 상투에 침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했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그 결말이 어느정도 예상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이(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것은 신파조의 공식은 아주 성실히 따르고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이 '타는' 가을의 '울음'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죽음에 대한 몇 가지의 성찰들을 얻을 수 있었다는 데에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다는 데에 위안을 얻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경구를 얻은 것에 만족할 수는 있었다. "인간의 얼굴은, 그리고 눈은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의 연설문보다 더한 웅변을 담고 있다.",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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