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아바
키란 데사이 지음, 원재길 옮김 / 이레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직까지 우리에게 인도라는 나라는 '신비'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신들의 나라, 불교의 발상지, 각종 기행자들과 수도자들이 존재하는 곳으로 말이다. 이와는 좀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실은 다를 바가 없는 '미개함', '더러움'으로도 다가온다. '신비'하면서도 '미개'한 나라, 인도는 아직까지 그런 나라로, 제3의 세계로 우리에게는 그다지 가깝지 않은 나라로 남아 있다. 많은 배낭여행객들, 특히 대학생들이 배낭여행의 목적지로 인도를 찾는 경우가 많다. 배낭여행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도전'과 '극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인도는 좋은 도전의 장소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비'스러움을 맛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의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본다. 이전의 서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전략이었던 오리엔탈리즘은 바로 동양에 대한 타자화였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신비'와 '미개'라는 색칠을 하고, 그것에 대한 도전과 개척을 선도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인도, 아니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각들도 이러한 오리엔탈리즘과 그 성격이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시각은 우리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한다. 여기에서 또다른 인종차별과 같은 제국주의적 오만과 폭력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 세계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소설『구아바』는 그런 점에 있어서 인도에 대한 보다 현실적이고 리얼한 인식을 갖을 수 있게 한다. 현대 인도의 사회와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놓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도 사회의 부패와 모순들에 대한 풍자에서 오는 비판을 읽음과 동시에, 우리 안의 인도에 대한 오랜 편견들에 단호한 일침을 맞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줄거리는 다소 간단하다. 삼파드라는 청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사회 속에 융합할 수 없어 답답한 심정에서 삼파드는 그 사회를 떠나 '숲'을 찾고, 거기에 자신만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는다. 그 숲의 한 나무에 올라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소동 등을 그리고 있다. 그 소동들 속에서 바로 현대 인도 사회의 온갖 모순들과 부패와 타락이 그려져 있으며, 이것을 우화적으로, 풍자적으로, 작가는 조소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우화의 중심은 '삼파드'라는 주인공이다. 마치 고전영웅소설의 주인공처럼 삼파드는 기인한 출생의 전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삼파드'라는 말은 우리말로 '행운'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갖게 되는 만큼 그의 출생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명명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즉 반어적 명명이다. '삼파드'는 이 사회에서는 결코 '행운'을 만드어낼 수 없는 인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회의 밖으로 그는 탈출하게 되는 것 아닌가.

사회에 융합하고, 사회속에서 '정상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었고, 결코 그 안에서 그의 이름처럼 '행운'으로 살 수 없었던 삼파드는 그 속에서 탈출하여 밖으로 나왔을 때 편안과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자신들과 다름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자신들과 같을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서 '삼파드'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어서, 그때부터 그의 이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파드가 나무에 올라가자, 사람들은 그를 무슨 도통한 도사처럼 떠받들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면서 소동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게 된다. 삼파드는 결코 다른 사람이, 즉 사회 안에서 '비정상'이었을 때와 결코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가 나무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그의 말은 성인의, 도사의 말처럼 신성성을 부여받게 된다. 이것을 통해 인도의 사회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파드가 마치 그들의 과거를 투시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그들의 편지를 보고, 떠벌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졸지에 도사가 되어 버린다. 여기서 다시 삼파드의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회속에서 사람들은 삼파드를 '비정상'이라는 굴레에 가두었다면, 이제는 나무위의 도사로 그를 가둔다. 사람들이 모이고, 가족들은, 특히 그의 아버지는 그를 통해서 큰 몫을 잡으려고 한다. 인도 사회 내의 이런 어리석음들, 부에대한 욕심과 욕망, 비윤리적 가족관계 등이 이 소설 속에서 풍자되고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여성에 대한 성적차별 등이 인도 사회의 내재되고 내면화된 고질적인 병폐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삼파드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현대의 인도 사회의 문제들은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도 유효한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파드는 숲 속에서의 대소동으로 인해 또 다른 곳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야 했거나, 아니면 "부글부글 끊는 가마솥"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파드의 부재함, 삼파드를 사회 안에 품을 수 없음은, 이 사회에서 결코 '행운'을 찾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사실 역자의 말처럼 이 소설이 20대의 젊은 작가의 작품이란 사실이 다소 믿겨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자신의 모국에 대한 현실인식과 그 사회의 문제점 들을 신날하게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여러 사회에 내재한 보편적 문제들에 대한 예리한 문제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다. 나는 이 책에서 하나의 대안이 제시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사회가 제2, 제3의 삼파드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이 사회 안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사회에 '행운'이 깃들고, 그로인해 '구아바' 나무가 주는 풍요롭고 풍족한 맛있는 과실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와 행복은 바로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족이지만, 이 소설에 다소 아쉬운 점에 하나가 치밀하지 못한 번역이다. 군데군데 비문이 있고, 조사의 사용이 부적절하여 해석에 애를 먹었다. 예를 들면, 216쪽 중간에 보면 "그들은 소년을 헝그리 홉에게 다그쳤다."이 있다. 여기서 문맥상 '소년'의 이름이 바로 '헝그리 홉'이다. 즉 '소년'은 '헝그리 홉'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소년을 헝그리 홉에게 다그"칠 수 있는가? 둘 중 하나가 빠져야 할 것이다. 또 236쪽에 보면 "물론 원숭이들이 시체를 전시하는 문제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을 계획서였다."에서 '원숭이들이'는 '원숭이들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치밀하지 못한 번역으로 인해 책을 읽으면서 눈살을 찌풀이게 되는 것이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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