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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째 내린 비는 비가 아니었다. 악마적 테러리즘이라 불러도 좋을 만치, 9.11 테러보다도 사실은 더욱 위협적인 그런 비. 非였다.

  비가 어쩜 그렇게 무서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기독교도라는 특히 잘 알고 있는) 노아의 홍수라는 성경적 사실로써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 재해의 역사에서도 이 물은 아주 큰 자리, 그 역사의 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불보다 물이 더 무서운 법인 것은 또 새삼 느끼게하는 계절이다.

  비에는 우리가 다양한 속성들을 내포시켜 놓았다. 홍수와 폭우 등에서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입혀 놓았으며, 차가운 겨울날의 비에는 인생의 고통을, 촉촉한 봄날의 소나기에는 어렴풋 한 어린날의 추억을, 가을 추적추적거리는 비에는 어느 중년의 쓸쓸함을 달아 놓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사실 인간만이 피하고 막으며 산다. 동물들도 비를 피해 움직이지만 본질적으로 비를 피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극한적으로 비를 피한다. 비를 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대지와 푸른 초장의 풀과 나무들은 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어서일까? 발이 땅 속 깊이 매어있으니 피할길이 없어서인가? 과연 그럴까?

  비 오는 날 비를 맞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이다. 우리는 비가 오면 우산을 챙기고, 문 밖을 나설 때면 우산을 펼쳐들고, 혹여 바람에 우산이 날아나 갈까봐 꼭 꼭 붙들어 잡고, 행여나 비가 우산의 방패를 피하여 내 몸으로 새어들까봐, 우산의 그늘 밑으로 움츠려든다.

  그런데, 나는 가끔 비를 맞고 싶어진다. 특히 따사로운 봄날에는. 비를 맞는 다는 것은 촉촉히 젖을 수 있다는 것. 촉촉히 젖는다는 것은, 내 마음과 몸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감동적인 한편의 시와 소설을 읽어가는 그 기분처럼 말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아 촉촉해 지는 느낌은 산뜻하고 감동 깊은 글을 만나는 느낌과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요즘 연이어 비를 맞으며 집에 오게 되었다. 이것은 순간 짜증스러움이다. 젖은 옷과 신발, 온 몸을 적셔놓은 빗줄기. 이것은 촉촉히 젖는 느낌은 없다. 그러면 왜 비를 맞은 것이냐? 내 우산을 준비하는 준비성이 적은 탓이던지. 우산을 준비할 수 없었을 때에 비가 테러처럼 낙하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에게는 촉촉히 비에 젖는 저 들판의 한 떨기 야생화처럼, 일 년의 어느 한 날에는 자연스러움으로 비를 맞아보자. 마치 감동의 책 한 권 만나는 그 느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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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7-2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산성비를 많이 맞으면 머리가 빠지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무섭죠. --;;

멜기세덱 2006-07-21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산성비!! ㅋㅋ 그걸 몰랐네. 그래도 가끔 한 번 맞아줘도 괜찮지 않을까요...ㅎㅎ
 



서재지수
: 2565점
 
 마이리뷰: 21편
 마이리스트: 5편
 마이페이퍼: 785점
 7분께서 즐겨찾고 있음

  누군가 날 이렇게 '즐겨찾고' 있다. 자그만치 7'분'씩이나. 7분이 나를 즐겨찾고 있는데, 나는 그 귀하신 분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 알라딘 서재에는 좋은 기능이 있어서, 누군가를 '즐겨찾기'에 등록을 해서 단번에 찾아갈 수도 있고(물론 그 사람의 서재를) 또는 누가 나를 자주 찾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여기서 후자의 기능, 곧 누가 나를 즐겨찾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기능은 참으로 정당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왜 정당하지 않은가?

  <즐겨찾기>에 대하여

  '즐겨찾기'라는 것은 아마도 인터넷이라는 허공, 혹은 비공간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를 형성함에 있어, 허공 속을 헤매는 적막함을 벗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기능이라고 본다. 그만큼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결속을 강화시켜주는 기능이겠다. 이런 좋은 기능을 나 또한 사용하고 있다. 좋은 리뷰와 페이퍼를 남기고 있는 멋진 분들의 서재를 나 또한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고, 하루에도 수시로 찾아뵙고 있는 중이다.

  불합리한 기능 추가

  이런 '즐겨찾기'에 나는 다소 불합리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즐겨찾기를 당한 당사자에게 자기가 즐겨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지 말지를 정하는 권한이 즐겨찾기를 하는 본인에게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왜 불합리한가?

  '즐겨찾기' 하는 사람인가? 당하는 사람인가?

  누가 나를 즐겨찾기 하는가를 알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즐겨찾기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기가 누군가를 즐겨찾고 있음을 알리지 않을 권리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가? 나는 이것이 즐겨찾기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함이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누가 내 서재를 방문했는지 크게 알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 방문자 수가 10명이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내 서재를 방문해서 좋은 것을 얻어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즐겨찾기 수준에 이르면, 당연히 지극히 알고 싶어지고, 그러다보니, 알 권리가 나에게 없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고, 그것은 왠지 불합리해 보이고, 나는 나는, "내 귀의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 서재를 도청당하는 기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서재를 즐겨찾기에 등록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그들또한 당당히 누구인지를 밝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투표를 해 보자.

  누군가를 즐겨찾고 있는지 당사자에게 공개해야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투표기간 : 2007-07-30~2007-07-31 (현재 투표인원 : 47명)

1.
42% (20명)

2.
57% (2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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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07-1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하고 싶던 말을 다 해주셨네요. 1번에 투표했습니다.

마법천자문 2006-07-19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기 해주시는 건 물론 고맙지만 정확히 어떤 분들인지 모르니까 꼭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해리포터7 2006-07-1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멜기세댁님! 저두 맨날 이 즐겨찾기 때문에 고민에 빠져듭니다..제가 즐겨찾는걸 공개해? 말어? 하지만 이 알라딘에 서재를 연이유가 저자신에게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맹글어서요..전 뭐 다른님께서 즐겨 찾아주시면 감사합니다. 이러고 기뻐한답니다.ㅎㅎㅎㅎ

마늘빵 2006-07-20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는 접니다.

멜기세덱 2006-07-20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포터7님 > 물론 찾아주니 고맙죠.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왜 나를 비밀리에 찾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 지더라구요. ㅎㅎ 혹시 알아요, 절 좋아하는 데 말하진 못하고...그럴까봐요...ㅎㅎ
달의눈물님 > 전 그 사람들과 좀더 긍정적 관계가 이뤄질 수 있으리라고 봐요. 감시라고까지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당당히 공개하고 즐겨찾으시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아프락사스님 > 그 하나로 무게추가 확 기울어 버렸어요. 감사!!

멜기세덱 2006-07-2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 님>결국 우산을 파는 아들과 나막신을 파는 아들을 둔 어머니와 같은 슬픔을 가진 건가요.^^ 해법도 그곳에 있겠죠. 나를 즐겨찾아 주는 이들이 과연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오히려 행복일 듯 싶어요. 그 궁금증이 이렇게 바람구두님께 찍히는 영광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위의 글이 저를 즐겨찾아 주시는 분들께 괜한 오해 없기만을 바랍니다. 저는 그분들께 고마울 따름이에에요.ㅎㅎ 아웃팅! 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데요.

sayonara 2006-07-2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갠적으론 궁금하기도 하고, 공개된다는 것이 뭐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1번이지만...
뭐,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니까요... ㅎ

부엉이 2006-07-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 늘 궁금해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인듯해요. 넘 변태적인가..^^;;

조선인 2006-07-2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즐겨찾기를 했습니다만, 제가 누굴 즐겨찾고 있는가를 늘 공개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즐겨찾기를 하는 목적은 다양할 수 있으니까요. ^^;;
 

  결혼이란 무엇일까?

  '結婚' 즉 혼인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인다. 혼인이란,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부부의 관계를 맺는 것이 결혼이다. 부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일종의 관계맺기이다. 이 관계맺기는 사회의 주된 유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계맺기가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가능한데, 결혼이라는 관계맺기는 가장 기초적 사회 성립의 단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결혼에는 따라서 사회성이 크게 작용한다. 흔히들 사랑의 결정으로서의 결혼은 근대적 산물에 불과하다. 아니 그것이 사실적 산물, 실체하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근대적 관념에 불과하겠다. 현재까지, 결혼에는 사랑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지금에도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결혼을 결정짓는데 어느 만큼 작용한는지를 조사해 본다면, 머리를 갸웃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결혼이란 것이 사랑의 결론, 결정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니 한국전후 7~80년대까지만을 생각해보더라도,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사랑은 그 성립조건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는 사회적 위상과, 상호 가문의 동급성에 따라, 혹은 경제적 여하에 따라 성립되었고, 그 결정과 판단은 부모라는 가부장의 몫이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결혼은 사랑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 도출이 가능한가? 여기에 불만을 갖는다면, 현대라는 시간을 제쳐놓고, 이전까지의 결론으로만 본다면, 인정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결혼에 관여한 것이 사랑이 아닐진대, 성의 문제는 또한 더욱 크게 소외더었다고 볼 수 있다. 성이라는 것이 자손번창, 즉, 유전자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때에도 결혼은 이 요소와 밀접히 연관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여기에서는 자손번창의 유리성을 가진 여성의 간택이 중요했을 따름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왕비 간택을 생각하며 확실해지는 듯 하나, 왕비 간택에서 이런 자손번창의 요소는 단지 일부분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결혼에서의 결정 요소는 자손번창도 그 큰 요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쉽게 결론을 말하자면 결혼이라는 행위, 사회적 관계 맺기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적 요인만이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성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며, 유전자 번식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성의 측면, 여기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을테지만, 여기서는 크게 논하지 아니한다.

  얼마전에 <<섹스의 진화>>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것은 섹스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다양한 의문점들을 도출하고 해설하고 있다. 나름대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이 왜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결혼을 하며, 일생을 한 명의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키우고 사느냐? 그것은 대부분의 동물(인간의 일부를 제외하고, 일부를 포함한)들과는 다르지 않느냐?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물음 들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섹스나 결혼 등을 크게 작용한 요소가 유전자 번식이라는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유전자 번식을 위한 본능의 작용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역사의 길을 들어선 후부터는 이 유전자 번식의 목적은 큰 폭으로 축소되어 졌다고 본다.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은 사회적 위세를 드러내는 효과적 방법으로 작용했고, 그것은 현재에도 비공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에는 권력과 경제적 부를 드러내는 또다른 측면에서 기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나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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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점 못 받으면 교사자격증 안준다?
 

[한국일보 2006-07-09 18:51]    

관련기사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38&article_id=0000336883§ion_id=110&menu_id=110

나는 현재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인천소재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같은 과 조교를 하면서 2번째 임용고사를 준비중에 있는, 말하자면 임고준비생이다. 그런 사람으로서 현재 교육부가 추진중이고, 각계에서 찬반의 목소리가 일고 있는 <교원자격부여 제한> 논란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현재의 교원양성체계를 살펴보면, 복잡해 보이면서도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선 가장 손쉬운 방법이 목적형 대학이라고 하고 사범대학 및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졸업하면 된다. 또는 중등교원의 경우(나는 초등교원 양성 체계에 대해서는 잘 모름으로 여기서는 언급을 가급적 하지않겠다.) 사범대학이 아니더라도 일반 학부 및 학과에서 교직이수를 통해 교원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또는 사범대학의 학과를 복수, 부전공 할 경우 자격증이 부여된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하는 또하나의 손쉬운 방법이 있다. 정리해보면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 즉 사범대학 졸업, 교육대학원 졸업, 그리고 교직이수 등 기타방법이 있다. 이런 관문아닌 관문을 거쳐 교원자격증이 부여되는데 여기에는 거의 유명무실의 '교원자격 무시험 검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이것은 거의 졸업심사 수준과 비슷해서, 졸업여건에 충족한지, 또는 교원자격증을 부여하는데 최소한의 결격사유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 그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교원자격증을 무제한 적으로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사범대학 졸업자의 경우만을 놓고 보면(다른 경우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사범대학 진학 자체만으로 이미 교원자격증을 따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졸업하는 데 문제가 없으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사범대학을 졸업한다는 것 또한 별반 어려움이 없다. 학점이 어떠하건 졸업학점만 이수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학사경고을 맞을 정도가 아니면 다 졸업이 가능한 실정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고, 그러하기에 교육계 일각에서 교원자격증 부여에 어느정도의 제한을 두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초등학생에게 "오늘 받아쓰기 70점 못맞으면 집에 못간다."식의 방법으로는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감당해야할 교원을 양성하는 대사에 걸맞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교육부의 무책임성 정책이라는 비난이 또 등장해야 옳다.

지금의 교원양성 현실을 보면, 경쟁력 있는 교원 선발이라는 미명아래 지금의 무분별한 교원자격증 남발을 교육당국이 주도적으로 실행해 왔다. 그래놓고 단 한번의 시험으로 서열을 매기고 그 시험의 성적에 따라 교사로 임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발된 교사는 바로 경쟁력이 '뛰어난' 교사들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교원양성의 중심이 '양성'에 있지 않고 '선발'에 있다는 것이다. 경쟁력이라는 것은 키워야 하는 것이지, 여러사람가운데서 그나마 난 X을 가려내는데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순차를 매긴다면 경쟁력을 키워놓고 그 다음에 가려야 하는 것이다. 키울 생각은 안하고 좋은 교사를 뽑겠다는 교육당국의 단순한 생각은 오히려 경쟁력 떨어지는 오늘날의 교육계 현실을 만들어 놓은 주범임에 틀림없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교원자격부여 제한> 논란 또한 이런 측면에서의 교육당국의 무책임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학점이 어느정도는 되어야 교원자격증을 줄 수 있다는 논리는 일반적으로는 매우 타당한 것이지만, 이 결과론적인 방법은 마찬가지 교육당국의 단순무식한 구상이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현재 사범대학의 몇가지 현실을 살펴보면 이것은 왜 무식한 발상인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여기저기서 사범대학이 목적형이니 어쩌니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목적형 대학이라면 그에 부합되는 특성을 가지고 운영되어야 하지만, 이 목적형 대학의 유일한 특수성은 교원자격증을 부여한다는 것일 뿐 운영 및 교육일반이 다른 일반대학과 거반 다르지 않다. 일례로 국어교육과와 국문학과의 차이는 국어교사 자격증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의 차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상에서 외형적으로는 차이가 있어보이지만, 그 속을 보면 또한 별발 다르지 않다. 국어교육과의 과목에는 단순히 '교육론'자가 붙을 분 그 내용이나 성격이 국문학과의 과목과 거의 일치한다. 거기에는 전문적인 교수진의 부족을 큰 이유로 들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교원자격증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한 사범대학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 교육당국의 생각이 아닐까한다.

그런데, 현재 교원양성이라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교원자격증이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놓은 문제도 있다. 교원자격증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룰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임용시험 응시 자격증에 다르지 않다. 교원자격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어디가서 가르칠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하늘의 별따가 만큼이나 어렵다는 얘기다. 무분별한 자격증의 남발로 인해 임용시험은 그만큼 경쟁률이 높아졌고,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교사가 되기 매우 힘들다. 임요시험이 아니라면 사립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사립학교를 들어가는 것도 이래저래 임용고사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당국은 경쟁력 있는 교사를 '선발'하기 위해 '경쟁률'만 기하급수적으로 높여놓은 것이다. 그러니 자격증이 있으면 무엇하리요?

이런 현실에서 교원자격증을 부여를 제한하느니 하는 발상은 있으나 마나한, 결국 쓸데없는 탁상행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며, 단순하고 무식한 방법만을 대안으로 내놓는, 교육당국. 교원자격증을 부여하는데에 제한을 둔다는 것은 또다른 측면에서 전시행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는데, 이 얼마나 교육당국의 얕은 잔머리 굴리기가 아니겠는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교육당국의 정책은 돈 안드는 경쟁률을 높이는 잔머리를 굴렸고, 이제는 또 돈 안들게 경쟁력 있는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겠다고 학점 제대로 따라고 하는 잔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 없다.

학점. 그것은 또한 신뢰할 수 있는가? 나는 신뢰할 수 없다. 현행 대부분의 사범대학에서 전공과목이나 교양선택과목의 경우 상대평가를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 또한 문제가 있다. 교사를 양성하는 데에는 교사로서의 전문성과 자질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상대평가라는 것은 그 전문성과 자질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 다시말하면, 전문성과 자질이 충분한 경우에도 교사가 못될 수 있는 반면, 전문성과 자질이 떨어지더라도 전공공부만 잘하면, 즉 학점만 좋으면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상대평가의 맹점이다. 이런 학적을 가지고 교원자격증을 부여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다.

4년이라는 시간동안 꾸준히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기르게 하고 자질을 함양하며, 좋은 교사를 만들기 위해 교육당국은 전력을 다해야 한다. 우수한 교원양성 교수진을 구성하고, 교육과정도 이에 걸맞게 고쳐야 하며, 우수한 교원을 기르기 위해서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라야 경쟁력이 생기고, 그리고 그들가운데 '선발'해내면 되는 것이다. 이럴때 교사의 경쟁력은 강화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교원자격증을 남발하라는 것은 아니다. 교사로서의 자격이 안된다고 판단될 때는 당연히 자격증을 줘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학점을 가지고 자격이 되느니 안되느니 판단하는 것이 가당키난 한 것인가 말이다. 교육당국은 이런 잔머리 굴리기 이제 벗어버렸으면 한다. 이제라도 교육현실, 교원양성의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많은 예산을 투입할 방법을 구상해야지, 돈안드는 쓸데없는 잔머리만 굴리지 말길 바란다.

결론적으로 교원자격증을 부여하는 데에 그 자격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그 자격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한 후에, 즉 바람직한 교원양성체계의 확립과 대안이 마련된 후에야나 가능한 것이지, 교육당국이 망쳐버린 이 교육현실 안에서는 그것은 어불성설, 말장난, 잔머리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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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과 코스타리카의 개막전. 독일의 막강한 화력과 코스타리카의 끈질긴 추격이 어울려 멋진 경기를 만들어 내며 2006 독일월드컵은 그 장대한 막을 올렸다. 조별예선. 한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하나인 프랑스, 젊은 혈기로 뭉친 스위스, 월드컵 처녀출전의 부푼 꿈 가득한 토고와 함께 G조에 속하게 되었다. 

  조별예선 첫 경기 토고와의 일전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어느 팀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에게는 특히나 중요한 경기였다. 조별예선을 통과하고 결승토너먼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첫 경기부터 잘 풀어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모든 본선진출국도 강조하는 바이다. 그동안의 역대 월드컵에서 첫 경기를 승리한 팀이 16강에 진출할 확률이 무엇보다 높았던 것은 첫 경기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가장 약체로 꼽히는 토고와의 첫 경기를 이기는 것은 중요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역사가 있다. 지금까지 월드컵 출전 역사상 2002년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월드컵을 제외하면 원정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서글픈 역사 말이다. 토고와의 첫 경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표팀의 첫 경기에 대한 부담감은 컸을 것이다. 약체 팀을 상대한다는 이점 그 이상으로 우리나라 대표팀에게는 부담감으로 인한 긴장이 컸을 것이고, 그만큼 아데바요르는 무시무시해 보였다.

 

  문제는 수비불안이었다. 이것이 아데바요르 같은 정상급 스트라이커를 보유한 토고가 우리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커다란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월드컵 첫 출전에 빛나는 토고에게 토고 월드컵 역사상 첫 골을 내주게 된 것이다. 이 골은 토고의 이번 월드컵 유일의 득점으로 기록되었다. 전반전 우리나라 선수들은 첫 경기에 대한 부담감에서 오는 긴장이 컸었던 듯 하다. 특히 월드컵에 첫 출전한 어린 선수들의 잣은 실수가 많았다. 어쩌면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에서 뛴다는 긴장감을 이겨내기는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94 미국월드컵 독일 전에서 전통의 강호 독일을 맞아 필요이상으로 긴장한 가운데 전반 초반 3실점한 또 하나의 서글픈 역사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전반전을 1실점으로 마감한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후반 들어서 우리나라는 공격수를 늘려 파상공세에 들어갔다. 안정환의 투입이 결정적이었으며, 박지성의 활약이 더욱 두드러졌다. 박지성의 페널티에어리어 앞에서의 드리블에 의한 상대팀 파울유도와 퇴장은 우리나라의 역전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이천수의 멋진 프리킥으로 동점, 곧이어 안정환의 더욱 멋진 중거리 슛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역전을 하고 난 10여분 동안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추가득점하지 못한 것이 결과적이지만 뼈아팠다. 공돌리기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추가득점을 노리는 적극적이 플레이가 아쉬웠다고 본다.

 

  결국 첫 경기는 ‘드라마틱’하게 승리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출전 역사상 원정경기 첫 승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충분한 승리였다. 이날 우리나라 ‘태극전사’들은 첫 경기의 중요성과 원정경기 첫 승을 위한 꼭 이겨야만 하는 부담감을 안고도 잘 ‘싸워주었고’ 결국은 이겨낸 것이다. 여기에 ‘투혼(鬪魂)’이라는 수식어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우리나라 대표팀은 “투혼을 불살랐다.”

 

  두 번째 경기는 첫 경기에 대한 승리, 그것도 원정경기 사상 첫 승의 기쁨을 아예 접어두어야 할 정도로 승리는커녕 비기기도 어려운 강팀 프랑스와의 일전이었다. 프랑스는 누가 뭐래도, 지단이 아무리 노쇠했다고 해도, ‘팀가이스트’가 모자란다고 해도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최강의 하나이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일전은 어느 정도 방법이 나와 있는 경기였다. 2002 월드컵의 재현 혹은 그 이상을 꿈꾸며 독일로 날아온 대표팀인 만큼, 2002년의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프랑스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알려주고 있었다. 프랑스의 중심 지단에게 투입되는 공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문전 앞에서의 앙리의 움직임을 이중 삼중으로 봉쇄하는 작전, 그리고 프랑스의 11명의 선수들을 우리나라의 강력한 체력을 앞세워 강한 압박으로 밀어 붙인다면 승산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반전, 강한 압박은 그리 잘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앙리에게 선취점을 허용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프랑스의 파상공세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정말 ‘투혼’을 보여주며 막아내었다.

 

  후반. 승부의 시간이 돌아왔다. 전반전과는 좀 다른 양상이었다. 간간이 프랑스의 날카로운 공격에 위기도 있었지만, 전반전보다는 더 적극적인 압박과 공격으로 한국은 프랑스의 떨어진 체력을 바탕으로 결국 동점골을 터트렸다. 말 그대로 ‘기적’, 여기에는 또한 ‘투혼’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다. “태극전사의 투혼으로 이뤄는 기적.”

 

  1승 1무. 스위스가 토고를 2 : 0으로 격파하며 우리와 승점 4점으로 동률을 이뤘지만, 골 득실에서 1점 앞서 한국은 조 2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G조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프랑스는 첫 경기 스위스와 그리고 두 번째 경기 한국과의 경기에서 졸전 끝에 2무를 기록하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며 조 3위. 우리나라는 16강에 진출하기 위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토고 전에서의 추가득점 실패의 아쉬움은 스위스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2무를 기록한 프랑스의 토고 전 승리는 불을 보듯 뻔하며, 그것도 대량 득점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하더라도 우리는 프랑스에 골 득실에서 뒤져 탈락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우리 ‘태극전사’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각오가 높을수록 부담은 커지는 법.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6월 24일 토요일 새벽 4시. 2006 독일월드컵의 조별예선의 마지막 경기이자 우리나라의 16강 진출이 결정되는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스위스와의 경기는 맞불작전. 한국은 공격수를 평소보다 많이 투입하며, 초반부터 강공으로 밀어붙이는 작전으로 임했다. 작전은 옳았다. 하지만, 수비불안이 과제였다. 조직력이 강하고 빠른 공격과 세트플레이가 장점은 스위스를 막아내는 것은 공격이전에 선결해야하는 문제이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은 결전의 각오만큼이나 ‘투혼’을 펼치며 잘 막아낸 듯 하다.

 

  하지만 한국의 맞불작전에서 결정적 미스가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박주영의 투입이었다. 박주영은 이번 월드컵에서 크게 기대되는 선수였지만, 그 기대를 충족되지 못했다. 박주영은 첫 출전인 만큼 긴장해 보였고, 스위스 선수들은 강한 체구에 여실히 밀렸다. 결국 박주영은 스위스의 장점은 세트피스의 상황을 만들어주는 반칙을 범했고, 우리나라는 뼈아픈 실점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었기에, 전반전 끝날 무렵 한국은 공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전반전 1 : 0.

 

  후반 시작. 박주영이 계속 투입된 가운데, 후반전에 돌입했다. 왜 박주영을 빼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과 불안 속에 경기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박주영은 그 의문과 불안을 가중시키는 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은 후반 들어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그 와중에 프랑스의 선취점, 그리고 추가득점이 이어지면, 토고를 2 : 0으로 이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스위스를 이기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후반 초반 안정환의 투입. 승부를 보겠다는 얘기인데, 나는 이것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맞불작전으로 나서는 것이었다면 안정환을 선발로 내세웠어야 한 것이 아닌가? 그나마 결정력이 있는 안정환은 조재진의 센터플레이를 받쳐줄 가장 적절한 대안이었다. 그래야 박지성의 플레이가 살아난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후반의 시작은 안정환이었어야 했다. 안정환의 투입이 그 시기가 늦었다는데 아쉬움이 있다. 박주영은 아직은 미완성이었기에 박주영으로 띄운 승부수는 스위스와의 결전의 비중에 못 미치는 카드였다. 이것이 우리가 골을 기록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의 결정적 패배 원인은, 심판이었다. 명백한 핸드링이 3번 이상 무시되었고, 반칙 상황은 절대적으로 스위스에게 유리하게 판정되어졌다. 그것을 봐준다고 하더라도, 주심과 선심의 합작으로 이루어낸 아무도 속일 수 없는 ‘사기’는 차마 눈 뜨고 못 봐주는 넌센스였다. 오프사이드 반칙이 명백했고, 선심은 기를 높이 들었지만, 이내 프라이의 골이 선언되고, 선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으쓱대고, 주심은 이래저래 항의하는 우리 선수들에게 경고를 주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 스위스 추가득점 2 : 0.

 

  지금 생각하니, 또 열이 받는다. 결국 한국은 16강 좌절. 2002년을 제외하고 가장 유력했던 16강 진출은 한편의 넌센스로 물 건너갔다.

 

  나는 한국이 스위스 전에서도 나름대로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스위스가 더 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은 골을 넣지 못했다. 심판이 명백한 페널티 장면에서 외면한 것도 이유일 테지만, 골을 넣을 선수를 고르는 데에 명백한 미스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은 심판일 터이다.

 

  하지만 이 패배에도 우리 ‘태극전사’들은 ‘투혼’을 불태웠다. 잘 ‘싸웠다’는 말을 나도 해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온갖 매스컴을 통해 우리나라 대표팀 소식들을 찾아보고 들으면서, 한국의 모든 경기들은 선수들의 ‘투혼(鬪魂)’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투혼(鬪魂)’, 이 한자어는 명사로써 “끝까지 투쟁하려는 기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투혼을 불태우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이 투혼이라는 말은 우리와 매우 친근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우리는 수출의 목표달성을 위해 ‘투혼’을 불살라야 했다. 축구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북한과 일본을 만나면 언제나 ‘투혼’을 불살랐다. 이것은 1980~90년대에도, 그리고 2000년을 넘어선 지금에도 아주 자주 우리에게 나타난다.

 

  가장 불티나게 ‘투혼’이 불살라진 것은 2002년 월드컵 당시가 아닐까 한다. ‘투혼’을 불사른 끝에 한국은 세계 4강 신화를 이루어냈다. 내가 생각해도 이것은 ‘투혼’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왜 아직까지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은 ‘투혼’을 불살라야 하는가? 나는 이것이 조금은 못마땅하다.

 

  축구에 관해서만 이야기 하자면, 1994년 스페인, 독일과의 경기에서, 1998년의 마지막 경기였던 벨기에 전에서, 그리고 2002년 4강 신화를 이룩한 7경기에서 그리고 토고, 프랑스,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모두다 우리 선수들은 ‘투혼’은 불살라졌다. 무엇보다도 나는 왜 우리 선수들이 ‘투혼’을 불사르는 데까지 가야하는 모르겠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꼭 ‘투혼’까지 불살라야 되는 것인가? 아마도 ‘투혼’은 최선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최선(最善)’, “최선을 다하다”같이 쓰이는데, 이것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두 다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투혼’은 그 능력이외에 선수들의 ‘혼’까지 빼내어 불에 살라야 한다. 어쩜 이리 잔인할 수가.

 

  우리가 투혼을 불살라야 했던 예전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서글픈 역사가 고개를 든다. 가깝게만 가도, 한국전 이후에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키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최선’보다도 ‘투혼’이 필요했다. 그럴 수 있다고 보자. 먹고살기의 논리에 의해 공업화가 가속되면서 저 공장의 노동자들은 제임금 못 받고 먹을 거 못 먹으며, 밤잠까지도 설쳐가면서, 자신의 손가락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잘려나가도, 갯값도 못 받고 내버려져도, 수출목표 달성위해 이 ‘투혼’을 불살라야 했다. 결국 그 ‘투혼’이, 이 4강 신화와도 같은 경제성장의 밑거름, 아니 그 본체가 되고도 남는다.

 

  이 ‘투혼’은 우리나라 축구에서 또한 너무도 많이 불살라졌다. 한국의 척박한 축구환경에서 선수들의 ‘최선’으로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목표를 요구했다. 결국 ‘투혼’이어야 했다. 머리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도 그들은 ‘투혼’을 끄집어내야 했다.

 

  어쩌면 이 축구에서 선수들에게 ‘투혼’을 더욱 요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더라도 언론은 선수들의 ‘투혼’을 강조했다. 이것은 축구 자체에 대한 것보다도, 조국을 위한 ‘투혼’이었다. 선수들은 조국을 위해서 싸웠다. 그들도 그래야만 하는 줄로 알고 싸운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축구선수들의 ‘투혼’은 그대로 모든 국민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러한 ‘투혼’의 정신이야 말로 본받아야 마땅할 것이라고 말이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이나, 라디오 등등, 모든 매체들은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 그것도 대표팀 간의 경기, 그것도 북한을 만나거나 일본을 상대하는 경우, 그리고 멀리 외국에서 펼쳐지는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들은 ‘투혼’을 불살랐다고 떠들어댄다.

 

  왜 ‘투혼’이어야 하는가? 나는 이제 ‘투혼’은 집어치우라고 말하고 싶다. 선수들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혼까지 빼서 불태우라는 말인가? 최선만을 다하면 안 되는 것인가? 축구만을 보자면, 열악한 환경을 전혀 개선하지도 않으면서,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미래 유소년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도 안 하면서, ‘투혼’, ‘투혼’, ‘투혼’. 이런 못돼먹은 심보가 어디 있는가?

 

  2006 독일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탈락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어제 입국했다. 이제 이들에게 이 못돼먹은 ‘투혼’이라는 말은 좀 거두어 주었으면 한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그들의 ‘혼’까지 빼지 그랬냐고 말하면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서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면, 최선을 다했을 때 도달할 수 있도록, 그 역량을 높여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 될 것이지, 그러지도 못하면서, 그 알량한 ‘투혼’을 요구하는 구시대적 발상을 이제 접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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