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시작하는 시점, 그러니까 내게 표시된 시간의 지표는 12시 48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간은 달리 표기하면 0시 48분이다. 그래서 지금은 2008년 12월 20일이다. 좀 전에 나는 얼마전 편의점에서 사온 식빵과 딸기잼을 합체해 분해시켰다.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먹었다는 말씀이 되겠다. 윤도현이 물러나고 어느 여자 연예인이 진행하는 음악 프로에 박정현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출출한 뱃속에 식빵과 딸기잼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 박정현의 노래 덕분에 좀더 맛있었다.

식빵. 설마 이것은 '식은 빵'일까? 역시 설마였다. 빵도 실상은 저 멀리서 들어온 말이지만, 여기에 붙은 '식'도 순수하게 우리말은 아니다. 이 '식'은 '식다'의 그 '식'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먹은 빵은 아무래도 '식은 빵'이 맞다. 내가 이것을 산 것은 며칠 전의 일이다. 12월 19일까지라는 유통기한이 비교적 잘보이는 이 식빵은 10가 가지런히 들어가 있는 상태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때에도 역시 이 식빵은 식은 빵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食빵'이었다. 먹는 빵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먹지 못하는 빵이 있었던가? 먹지 못하는 빵은 감빵 정도가 될 것인데, 이것과 구분키 위해 먹는 빵이라고 친절히 밝혀 놓지는 않았을 성 싶다. '먹을 수 있는 빵'이라는 소리일까? 아무튼 식빵이 어떻게해서 나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참 딱한 이름이다. 빵에는 '먹는 것'이란 의미가 현재로서는 내포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굳이 '食'을 붙일 이유는 없다. '역전 앞'과 같다. '食=빵'이란 등식이 성립되면서, 달리 말하면 식빵은 '빵빵'이 된다. 우리말에서 반복은 흔히 강조의 기능을 한다. '빵빵하다'가 좋은 예다. 정말로 맛있는 빵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식빵이었던 것일까?

그래도 내가 먹은 빵은 '식은 빵'이다. 여기에 역시 차가운 딸기잼을 발라 먹는 것은 출출할 때 나쁘지 않다. 그런데 내가 이 빵을 먹으면서 다시 그 유통기한에 눈이 박혀버렸다. 19일은 몇 십여분 전이었다. 내가 지각하는 시간의 오차를 고려해도 내가 이 식빵을 먹을 시점은 분명 유통기한을 오바해버렸다. 그렇다. 난 분명히 유통기한을 몇 십여분 지난 빵을, 불량한 빵을 먹은 것이다.

이 식빵을 며칠 전에 사면서, 과연 이 유통기한 내에 내가 이 식빵을 적절히 소화시킬 수 있을까? 그럴 듯 싶었다. 늘 언제나 이 야심한 밤에는 출출했으므로.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아무리 출출했었도 그 출출함의 허기짐을 달래줄 맘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기어코 그 식은 빵이 불량해지기를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박정현의 노래에 맞추어 붉은 딸기잼을 정성껏 발라 리듬가득히 실어 입속으로 넣었던 것일까?

혼자서 생활을 감내한 것이 곧 3년을 꽉 채운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는 누군가에게나 있는 생활력이 없다. 이 생활력을 누구들은 아나바다쯤으로 여기니, 내겐 그런 생활력이 없는 것이다. 식은 밥을 버리기 아까워 애써 고추장 간장 김치 한 조가리 얹어 먹는 우리 어머니들의 옛모습은 생활력이다. 그러나 나의 오늘 이 행위가 3년이란 혼자만의 생활에서 터득한, 혹은 자연 발생한 그 생활력의 발동인가? 그렇지 않다, 고 나는 주장하련다. 왜 그랬을까?

유통기한이 몇 십여분이 지난 식은 빵에도 딸기잼은 여실히 고루고루 달라붙어 입속으로 넘어가면 맛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버리기 아까웠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2008년 12월 19일까지라고 이 식빵을 제조한 강양곤씨는 진한 검은색 글씨로 써놓았는데, 도대체 왜? 출출함을 달래줄 내가 가진 유일한 야식거리가 이 식은 빵이기 때문일까? 날은 춥지만 조금만 걸어나가 신선한 먹을거리를 사먹을 수도 있다. 이 식빵을 산 그 편의점이 지척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하기까지 조금은 고생도 마다하는 나이기때문일까? 그런 고생을 할 정도로 출출하지 않았던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겸사겸사 괜찮겠지 안도하면서 이 불량한 식은 빵을 먹어도 될 것이라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다.

이 식은 빵에도 딸기잼은 아주 잘 어울렸고, 나는 박정현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이 좋았고, 야심한 밤에 느끼는 출출함은 내겐 익숙한 낭만이고, 그리고, 어쩌면 내 유통기한이 이렇게 몇 십여분이 지난 것은 아닐까하는 우수와 어느 곳에는 있을만한 식은 빵 같이 되어버린 내게 어울린 어떤 딸기잼이 있을까하는 멋진 상상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식빵과 딸기잼을 꺼내 먹으려할 때 문득, 나는 이 식은 빵이 몇 십여분을 지난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각했고, 어쩜 이것을 먹고는 무엇인가를 써야겠다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그것을 쓰면서, 자꾸자꾸, 난 이 '食빵'이 식은 빵의 식빵이 되어야 옳다고 생각했고, 이것을 먹은 나의 행위를 내겐 어울리지 않은 생활력과 분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나, 이 비루하고 불량한,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어떤 점에서 유통기한이 조금 전에 지난 나, 나라는 존재의 쓸쓸한 우수에 젖어들어, 그래 이것은 내 우울함이야, 잔잔히 이 식은 빵에 딸기잼을 골고루 친절히 발라서 꾸역꾸역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써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식빵과 딸기잼은 우연찮게 내가 좋아하는 여가수를 만났지만, 이것은 자못 좋지 아니한가? 그리고 오렌지주스 생각에 냉장고에서 꺼내 들고는, 지금 책상옆에 놓여 있는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이 오렌지주스가 그 콜드함을 다 제하여지기까지 나는 그것을 마실 여가를 곧잘 만들지 못하도록, 이렇게 잡스럽게 말의 글을 배설해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 2008년 12월 20일 오전 1시 22분에 말이다. 40여분이 지난 오렌지 주스는 아직 차가울까? 차가웁지 않으면 다시 냉장고에 넣어버려야 할까? 나의 생활력은 그것을 마시라고 할 정도로 강하지 아니하다. 식은 빵을, 그것도 유통기한을 몇 십여분 지난 빵을 먹게한 나의 허접한 우수는 이제 끝난지 2분여가 되었으니 말이다. 물이나 마시고, 그것도 찬물, 속을 다스려야하겠다. 오늘은 잠이 안오니, 속까지 쓰리면 고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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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8-12-2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식사 대용 빵'의 줄임말이 아닐까요? ^^ 食자니까.
전에 얼핏 들은건데 '빵'은 원래 불어 '팡'에서 따왔다고 하네요.
저도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것을 굳이 사 놓고 - 그것도 엄청 긴 녀석 -_- -
'유통기한 끝나기 전에 먹어치워야 해' 라는 강박강념으로 미친듯이 먹죠.
단, 제 경우엔 달콤한 딸기잼이 아니라 케찹의 신 맛에 몸부림 치면서. ㅋㅋㅋ

하지만 멜기님의 '식빵은 식은 빵이다' 라는 공식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ㅡ_ㅡb

멜기세덱 2008-12-20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럴 수 있겠네요.
근데, 저는 식빵을 식사대용으로 먹어본 역사가 없어서...ㅎㅎ

아주 오래 전에 외국어가 들어와서 우리말처럼 여겨지는 단어들을 '귀화어'라고 하는데요, 빵을 포함해서 답배, 수수, 탑, 거위 등등이 그러한 예죠.
빵은 포르투갈이던가요?

L.SHIN 2008-12-21 05:57   좋아요 0 | URL
아? 포트투칼인가요?
그럼..그걸 프랑스어라고 가르쳐준 놈은 뭐냐..ㅡ.,ㅡ

멜기세덱 2008-12-21 12:40   좋아요 0 | URL
나쁜 '놈'이죠.ㅎㅎ
전 착한 '놈'이고....ㅋㅋ

L.SHIN 2008-12-22 00:41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
(이거~이거~ 댓글에는 [추천] 기능 없나..ㅋㅋ)

심술 2008-12-2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르투갈 말 맞아요. 프랑스가 아니라.

eppie 2008-12-2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어원은 일본어의 食パン이겠지요, 하고 일본어 위키페디아를 좀 찾아보니...옛날에도 목탄 데생을 지울 때 빵을 사용했는데 그때는 지우개용의 빵(유분이 적은)이 따로 있었고, 이와 구별하기 위해 먹는 빵을 '食パン' 이라고 불렀다는 설, 메이지 초기 외국인들의 '주식(主食)용 빵'에서 왔다는 설, 서양요리의 '本食' 이 빵이라는 데서 왔다는 설 등등이 있는데...어느 것이 확실하다는 정설은 없다네요. :] '주식' 설이 좀 일반적이고, 즉 L.SHIN 님의 짐작이 대략 일반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다 되겠습니다.

멜기세덱 2008-12-22 22:50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ㅎㅎ
지우개용 빵이 있었군요....고건 몰랐넹...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