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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ㅣ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일상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고 나는 다양성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생각은 다양할 수 있어, 다양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거야. 인간은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고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해. 뭐 이런 말들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 책에서 뭐라고 하는지 한번 보자.
범주 설정은 개념을 인식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다'문화 가족의 전제는 문화의 기준은 하나이고, 그 하나는 한국이라는 우리 중심적 인식이다. 특히 농어촌의 다문화 가족에게는 이주 여성을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동화시키려는 일반의 읜식과 공식적인 정책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처럼 다양성은 다양한 가치가 아니라 '하나'를 중심으로 배제된 나머지를 말한다. -158쪽
내가 쓰던 다양성이란 말은 어떤 의미로 쓰던 것이었나를 문득 돌아보게 한다.
이 말을 쓸 때 나는 이 말들이 전제하고 있는 억압과 배제를 신경 썼던가?
솔직히 생각도 못해본 지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공부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는게 바로 이런 지점이다.
나의 언어를 새로 점검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고 배움이 아닐까?
평소에도 내가 하는 말이 나를 규정짓고, 나를 표현하고, 나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결국 질문이다.
왜 공부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
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 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 아니라 가치관이다. -11쪽
공부의 결과가 나와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하고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다면 그 공부는 공부라고 할 수 있을까? 저 인용문에서 융합 글쓰기라는 말을 공부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며, 부문과 부문, 사람과 사람, 존재와 환경을 연결하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가방 끈만 긴 무식하고 무례한 못 배운 인간들을 허다하게 만나는 것이다.
나는 비단 공부에서 가치관의 문제가 학문의 영역에만 머무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므로 일상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공부가 무엇인가를 알고, 나의 언어를 점검하고, 새로운 언어, 더 나은 언어를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삶을 좀 더 괜찮게 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당연히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융합'이라는 단어이다.
융합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어감이 뭔가를 통합한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딱인데 이 글에서 말하는 융합은 그것이 아니다.
융합은 경계를 넘는 것이고, 따라서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가로지른다는 뜻을 가진 '횡단'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때 가로질러야 하는 각각은 분절된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관통하는 더 큰 구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관통의 새 구조를 만날 때 앎은 확장되고,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은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글의 맨 처음에서 말했던 다양성, 배려, 관용이라는 말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새롭게 생각하게 된 개념이다.
너무나도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고, 늘 자주 쓰던 말이었는데, 내가 놓쳤던건 저 말들은 모두 말하는 주체인 '나'의 우위를 전제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배려와 관용은 누가 베푸는가?
바로 저 말을 내뱉고 있는 주체인 '나'다.
다양성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병렬로 두고 똑같은 비중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 말속에는 이미 위계성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A가 옳다고 생각하고 주장하지만, 너의 생각도 고려는 해볼게 정도가 내 다양성개념의 한계일때가 부지기수였고, 그 때 A는 하나의 고정된 기준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는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다문화가정의 아동을 대하는 것 역시, 그 아동을 어떻게 한국사회와 문화에 잘 적응하게 할 것인가가 중심이지, 그 아이의 문화와 한국 아이들의 문화를 똑같이 놓고 같이 또 다른 새 문화를 만들 것을 고민하지는 않는 것.
이것이 결국 다양성이란 말 속에 숨어있는 나의 패권이었던 것이다.
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 미시에서 거시로, 아래에서 위로 - 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융합은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변태의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가는 몸, 그 변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53쪽
어떤 지식도 멈춤에서는 생성되지 않는다.
부단히 나의 현실을 살피고, 내가 발딛고 있는 곳, 내가 만나는 자연과 사람들과의 교류와 교감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지식의 형성과정이고, 공부이며 나의 몸이 현재 서있는 곳 포지션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많은 포지션 중 어떤 포지션을 선택할 것인가는 내가 지금 누구와 대면하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선택되어 질 수 있다.
이 때는 내가 선택한 위치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해야 한다.
그것이 공부다..
그러면 공부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 대부분이 착취하는 자의 언어로 말하고 욕망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 그리고 그 욕망에서 먼저 벗어날 것.그럼으로써 나를 위한 새로운 언어의 첫단계가 준비된다.
그리고 '나는 모른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해력부터 의심하고 내가 무엇을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한다.
문해력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의미를 해석 못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모른다는 것이 진정 나의 가치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려면 내가 모른다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함께 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것이고,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심히 쓰는 것!
쓰는 것 이야말로 최고의 공부이다.
왜냐하면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열심히 함께 읽고, 얘기하고, 쓰는 것 - 그 전제에 여성주의 , 생태주의, 평화주의를 두고 - 그럼으로써 융합을 추구하는 다양한 몸들과 생각이 만나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그곳에 새로운 지식, 공부가 있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힘도 역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