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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땅
김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기차가 달린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이름도 낯선 땅을 한 달여에 걸처 달린다. 기차는 화물차다. 짐을 싣는 화물칸 수십 개를 달고 끝없는 시베리아를 거쳐 바이칼호를 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어떤 열차는 바이칼호에서 궤도를 이탈하고 푸르디 푸른 바이칼호로 추락한다. 화물칸이 부서지고 추락한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화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화물차가 나르고 있는 것은 화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호수에 빠진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는다. 죽었나? 아니 저렇게 생생한데.... 죽었으니 저 찬 물에서 못나오지. 죽은 이들은 조선인들이다. 기차에 탄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인 듯 해 두렵다. 외면하고 싶다. 바이칼호에 담긴 죽음이 사고인지 학살인지도 알 수 없다. 이 길의 끝에 기다리는 것이 죽음일지도.....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더 두렵다. 차라리 달리는 기차에서 저 끝도 없는 벌판으로 뛰어내릴까?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한다.
여기는 3평 남짓의 기차 화물칸. 그나마 천장에 하나 뚫려 있던 작은 환기창마저 막아버려 사방이 꽉 막힌 어두운 곳. 낮인지 밤인지 구분도 안 가는 어둑한 공간에 들리는 것은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 뿐. 화물칸 중간에 가로로 칸막이를 쳐 이 층 공간을 만들어 짐짝처럼 꽉꽉 채워진 30 여 명의 사람들. 이 여정이 언제 끝날지 어디로 가는지 새로 가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불안. 이 이야기는 그 숨 막히는 절망과 눈물에 대한 진혼곡이다.

김숨 작가가 그리는 이 풍경은 1937년 스탈린의 소련 정부에 의해 연해주에 살던 17만여명의 조선인들이 7,500km 떨어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집단 강제 이주를 당했을 때이다. 1937년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고 소련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을 때다. 이를 빌미로 소련은 조선인이 일본인과 외모의 구별이 안되고 일본인 첩자 노릇을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정말로 이 이유였으랴. 당시의 소련은 세계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이를 위해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단결을 강조한 시대이다. 필연적으로 이런 강박은 비판과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독재로 이어지고, 소련 내 수많은 민족의 자치 요구를 구성원의 평등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소련 체제에 대한 저항과 분열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소련 내 수많은 소수 민족들의 분리와 이동이다. 19세기 중반부터 먹고 살기 위해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에 정착했던 조선인들이 이렇게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강제 이송당한 사람 중에는 독립군 홍범도 장군도 있었다.
이 역사적 설명 만으로도 당대 조선인들의 그 아득한 절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역사적 설명은 빈 구멍이 숭숭 뚫린 단순화일 뿐이다. 17만 여명이란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17만이란 숫자에는 17만 개의 고통과 분노와 눈물이 있다. 역사 기록은 그 눈물을 온전히 살리지 못한다. 역사 기록은 그 눈물과 고통을 하나하나 품지 못한다. 그래서 과거의 고통은 뭉뜽거려져 역사 기록에 박제 되고 그리고 잊힌다.
그 뚫린 자리에 문학이 들어선다. 한 명,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17만 개의 이름이 있다. 금실, 따냐, 요셉, 미치카, 소덕, 아나똘리, 허우재.....그리고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엄마 품에서 죽어야 했던 아기..... 이름을 부르고 그 하나 하나의 생의 기쁨과 눈물과 분노의 이야기들을 때 살아있는 한 인간의 서사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김숨 작가의 <떠도는 땅>은 그 열차에 탔던 이들 한 명 한 명을 위한 진혼의 노래다. 먹고 살기 위해 떠났던 한 번의 길 떠남이 내내 부유하는 삶으로 이어질 지 누가 알았을까? 컴컴한 화물칸 속 추위와 굶주림과 숨 막히는 체취와 오물의 냄새 속에서 모두가 그 신산한 삶을 읊조린다. 굳이 누가 들으라는 것도 아니고 답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뿐이다.
"어르신, 고향 떠나온 뒤로 내내 떠돌며 살지 않으셨어요?"
"그야 그랬지.... 땅이 떠도는 것인지, 내가 떠도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떠돌았지....." -183쪽
그래서 어린 미치카의 질문이 가슴을 때린다.
"엄마, 우린 들개가 되는건가요?"
'엄마, 나도 인간이에요?"
내가 우리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 기억할게. 잊지 않을게. 그러니 너는 들개가 되는 게 아니야. 인간이어서 인간의 노래를 부르는거야. 잊히지 않고 박제 되지 않는 인간의 삶이 여기 이 기억에 있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