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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은 삶도 명작이 된다 - 이주헌 미술 에세이
이주헌 지음 / 쌤앤파커스 / 2025년 8월
평점 :
미술관을 다니다 보면 가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마음에 확 들어오는 작품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작품

<열린 창>, 피에르 보나르, 1921년작
그림을 보는 순간 창을 열고 싶어지다가 아 맞아 우리 집 창에서는 저런 나무가 안 보여하게 되고, 어딘가 시골 가서 저렇게 빛이 들어오는 작은 방에서 오른쪽 귀퉁이의 여인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낮잠을 자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러다 눈이 떠 지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창으로 나와 바깥의 신선한 공기와 바람을 맞는 그런 순간을 꿈꾸게 한다. 그래도 이 그림이 왜 좋아라고 물으면 아마도 나는 "그냥... 따뜻한 햇빛이 느껴져서..."라고만 말할 듯하다.
이 그림에 대해 작가인 이주헌씨는 독자에게 이렇게 설명해준다.
일상의 평범한 공간을 그린 것이지만, 찬란한 색채가 빛을 발하면 평범함이 비범함이 된다. 비범함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특별한 데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우리 주변에도 비범함은 실존한다. 보나르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예술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 291쪽
실내의 나머지는 모두 그림자로 덮여 있다. 그럼에도 방 안은 화사하고 싱그러운 색채로 가득하다. 그것은 햇빛이 워낙 강렬한 탓에 발생한 반사광이 실내의 음영 안에서 미묘하면서도 풍부한 색의 잔치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 293쪽
이렇게 설명을 읽고 나면 아 이 그림이 왜 이렇게 내 맘속으로 들어왔는지가 해명 되는 기분이다. 색채 때문이었구나. 일상의 풍경에서도 이렇게 특별함을 찾을 수 있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다시 창을 열고 우리집 창으로 넘어오는 빛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창밖으로 보이는 시내와 나무들의 냄새를 다시 한 번 맡게 된다.
17세기 생동하는 미소를 그린 프란스 할스의 그림은 언제 봐도 유쾌한데, 사실은 이 시대에 이렇게 웃는 얼굴을 그리는게 쉽지 않다는 설명을 들으면 프란스 할스라는 작가가 더 좋아지게 된다.

<젊은 여인>, 프란스 할스, 1625~1630년 작
사진이 없던 시대에 저렇게 웃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는 남다른 속필이 필요했다고 한다. 증명사진 찍을 때 우리가 얼마나 빨리 표정이 굳어지는 지를 상상하면 이런 미소를 그려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을거 같다. 이 시대의 초상화가 대부분 근엄한 표정인건 사람들이 다 근엄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화가가 속필로 그 웃는 표정을 빨리 그려내는게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보면 미소와 호탕한 웃음과 수줍은 웃음과 같은 모든 웃음이 드러난다. 작가는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프란스 할스의 화법으로 설명해준다.
근대적 감각을 자랑하는 화가답게 할스는 매우 가볍고 빠른, 자유로운 붓놀림을 구사했다. 이전의 화가들은 대상을 핍진하게 재현하기 위해 대체로 붓을 비비듯이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하면 대상의 외양을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지만, 붓을 자유로이 놀릴 때 나타나는 회화적인 맛과 에너지 그리고 유화물감 고유의 질감은 크게 억제된다. -73쪽
이런 설명을 들으면 대상의 표정을 빨리 잡아채기 위해 쉴 새없이 빠른 속도로 작업하는 화가의 모습이 눈앞에 와 닿는 듯한다. 또한 17세기의 화가가 귀족이나 부자의 초상이 아니라 평민인듯한 여성의 얼굴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에 감동하게도 된다.
때로는 카라바조 같은 익숙한 화가의 그림의 디테일을 설명해주며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모 마리아의 죽음>, 카라바조, 1604~1606년 작
강렬한 빛의 대비를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나같은 독자에게는 이 그림에서도 역시 강렬한 어둠과 스포트라이트처럼 밝혀진 인물에 집중하고 그들의 비통한 표정에 집중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작가는 카라바조의 빛과 그림자 뿐만이 아니라 당대의 전통이나 상식을 깨는 카라바조를 소환한다. 그림 속 성모의 몸을 자세히 보면 배가 꽤 부풀어있고, 발목도 부어있다.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일반적인 시체의 부패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으로 그리다니.... 이야말로 신성모독이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성모 마리아의 모델이 창부다.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등...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성모 역시 인간인 이상 인간의 실존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그림에 표현하고야 마는 똘끼! 그래서 그 수많은 화가들 속에서도 그리고 수많은 기행에도 불구하고(기행 중에는 살인까지 있다.) 카라바조는 위대한 화가로 남는 것이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그리고 내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도 다양하다. 유명하지만 마음에 안 차는 그림도 많다. 하지만 좋은 안내자를 만난다면 그림을 지식과 감정과 화가의 마음을 같이 느끼고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주헌씨의 글을 오랫 만에 읽었는데 여전히 마음을 다해 글을 쓰는 분이다.